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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중국과 일본에서 영웅으로 살아있는 장보고(張保皐)

鶴山 徐 仁 2009. 1. 18. 15:07

 



장보고(張保皐)

장보고 [張保皐] ?~846(문성왕 8). 신라 하대의 호족·대상.

본명은 궁복(弓福)·궁파(弓巴). 일본 승려 엔닌[圓仁]의 〈입당구법순례행기 入唐求法巡禮行記〉에는 장보고(長寶高)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의 생애에 대한 자세한 기록은 전하지 않지만 서남해안 지방의 토호 출신일 가능성이 크며, 장씨 성은 당나라에 있을 때 칭한 것으로 추정된다. 무예에 자질이 있어 당나라로 건너가 서주(徐州)의 무령군(武寧軍) 소장(小將)이 되었다. 당에서 귀국한 뒤 828년(흥덕왕 3) 왕에게 청해(淸海)를 진수(鎭守)할 것을 청했다.

당시 서남해안에서는 당의 해적들이 신라인을 노략질하여 노비로 팔거나 무역선을 약탈하는 경우가 빈번했다. 그는 왕의 허락을 받아 군사 1만 명을 모아 청해진(淸海鎭 : 지금의 완도)을 건설했다. 청해진은 7세기말에서 8세기초에 걸쳐 설치된 군진(軍鎭)의 하나이지만 건설 당초부터 독자적인 성격이 강했다. 그에게 내려진 대사(大使)라는 직명도 다른 군진의 진두(鎭頭)·두상(頭上) 등 신라의 정규 관직과는 다른 것이었다는 점도 이러한 사실을 말해준다.

청해진이 건설된 뒤 그는 해적을 소탕하여 서남해안의 해상권을 장악했고, 당·신라·일본을 잇는 해상무역로를 통한 무역활동을 주도하기 시작했다. 신라 지배체제의 외곽적 존재로서 해상무역을 통해 일종의 해상왕국을 형성한 그는 당나라에 견당매물사(遣唐賣物使)와 함께 교관선(交關船)이라는 무역선을 보내 교역활동을 했다. 840년(문성왕 2)에는 일본에 회역사(廻易使)를 파견하여 서신과 물건을 보냈다. 일본측은 이를 사교(私交)라 하여 받아들이지 않았지만 무역은 허용했고, 그 사자와 이충(李忠)·양원(楊圓) 등에게 식량을 지급하기도 했다.

그의 세력은 국제적으로 극히 번성하여 중국에 유학한 일본 승려 엔닌은 그에게 정중한 편지를 써서 귀국할 때의 뱃길을 부탁하기도 했다. 또한 그는 무역활동을 통해 확보한 경제력을 배경으로 중국의 산둥 성[山東省] 원덩 현[文登縣] 츠산춘[赤山村]에 법화원(法華院)이라는 절을 세웠다. 이곳에는 500석을 수확하는 장전(莊田)이 속해 있었는데, 많은 승려가 머물며 정기적으로 법회를 열었고, 청해진과의 연락기관 구실도 했다.

그는 경제력과 무력을 배경으로 중앙의 권력쟁탈전에도 개입하게 되었다. 836년(흥덕왕 11) 왕위계승분쟁에서 패한 김우징(金祐徵)이 청해진으로 와 그에게 의탁했다. 838년(희강왕 3) 희강왕이 피살되고 민애왕이 즉위하자 김양(金陽)은 군사를 모집하여 청해진으로 와서 먼저 와 있던 김우징을 만나 장보고에게 도움을 청했다. 장보고는 정년(鄭年)으로 하여금 군사 5,000명을 이끌고 김양과 함께 경주로 진격하게 했다. 이들은 중앙군을 물리치고 경주에 침입하여 민애왕을 살해하고 김우징을 신무왕으로 즉위시켰다. 신무왕은 장보고를 감의군사(感義軍使)로 삼고 식읍(食邑) 2,000호를 봉해주었다.

신무왕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문성왕은 즉위와 함께 그를 진해장군(鎭海將軍)으로 삼고 장복(章腹)을 내렸다. 그러나 진골귀족들은 그가 중앙정부에서까지 막대한 영향력을 발휘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845년(문성왕 7)에 왕이 장보고의 딸을 차비(次妃)로 들이려 했으나 진골귀족들은 그가 '해도인'(海島人)이라는 이유로 반대하여 성사되지 못했다. 그러자 그는 이듬해 중앙정부에 반기를 들었다. 중앙정부는 무력으로 그를 토벌할 능력이 없었으므로 한때 장보고의 부하였던 염장(閻長)을 자객으로 보내 그를 살해하게 했다. 청해진의 세력은 그뒤에도 얼마 간 유지되었으며, 851년에야 청해진을 없애고 주민을 벽골군(碧骨郡 : 지금의 김제)으로 옮길 수 있었다.

1. 가계와 입당경위

어려서부터 무예에 뛰어났고 물에 익숙하였다. 청년기에 친구 정년(鄭年)과 함께 당나라에 건너가 생활하다가, 서주(徐州) 무령군(武寧軍)에 복무하여 장교가 되었다.



▲ 적산 법화원 중앙에 세워진 장보고 동상. - 사진 nate screw...
그 뒤로 보이는 건물에 장우성 화백이 그린 장보고 화상이 모셔져 있다.


2. 해상무역에 대한 견문

◀ 장보고(張保皐) - 서울 용산구 전쟁기념관

당시 당나라는 각지에 절도사(節度使)가 할거하고 있었다. 이 시기에 장보고는 그러한 지방군벌의 속성과 그들의 군대양성 방법에 대한 이해를 얻을 수 있었던 것 같다. 당시 중국의 동해안 지역에는 남으로는 양자강 하구 주변에서 북으로는 산동성(山東省) 등주(登州)에 이르는 지역일대에 많은 신라인들이 거주하고 있었다.

그들 중에는 연안 운송업과 상업에 종사하는 자들도 있었고, 양주(揚州)·소주(蘇州)·명주(明州) 등지에서 아라비아·페르시아 상인과 교역하는 한편, 중국과 신라·일본으로 내왕하며 국제무역에 종사하던 자들도 많았다. 해안지역 출신으로 바다에 익숙하였던 장보고는 이러한 해상무역에 대하여 깊은 인상과 이해를 얻었다.

또한, 그 무렵 당나라나 신라 모두 중앙집권력이 이완되어, 흉년과 기근이 들면서 잇달아 각지에서 도적이 횡행하였다. 바다에서도 그러하여 해적이 신라 해안에 출몰하여 많은 주민들을 포획해가 중국에 노예로 팔았으며, 무역선도 해적의 위협을 받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장보고는 신라인에 대한 해적의 포획에 대하여 분노하였고, 국제무역에 대한 강렬한 욕망을 가졌으며, 스스로 해상권을 통괄하여 독자적인 세력을 키워볼 야망을 불태웠다.

3. 귀국과 청해진 건설

마침내 828년(흥덕왕 3) 중국에서 별로 크게 입신하지 못한 처지를 떨쳐버리고 귀국하였다. 그리고 왕에게 남해의 해상교통의 요지인 완도에 해군기지를 건설하여 황해의 무역로를 보호하고 해적을 근절시킬 것을 주청하였다. 당시 진골귀족간의 대립이 심하였고, 귀족연립정권적인 성격을 띤 중앙정부로서는 거기에까지 적극적인 힘을 뻗칠 여력이 없었다.

왕의 승인을 받아 지방민을 규합하여 일종의 민군(民軍)조직으로 1만여명의 군대를 확보하고 완도에 청해진(淸海鎭)을 건설하였다. 청해진은 건설될 당초부터 장보고를 중심으로 한 독자적인 세력의 성격을 띠었던 것이다. 그에게 내려진 청해진대사(淸海鎭大使)라는 벼슬도 신라국가의 관직체계에는 없는 별도의 직함이었던 점도 이러한 사실을 말해준다.

4. 해상무역과 외교활동

청해진을 건설한 뒤, 곧 해적을 소탕하여 동지나해 일대의 해상권을 장악하였다. 이 해상권을 토대로 당·신라·일본을 잇는 국제무역을 주도해나갔다.

8세기 중엽 이후 신라무역상들이 취급한 물품은 752년 일본이 신라상인으로부터 매입한 물품(목록)에서 그 일면을 찾아볼 수 있다. 이에는 구리거울 등의 금속제품과 화전(花氈) 등의 모직물 같은 신라산 물품과 향료·염료·안료 등을 비롯한 당 및 당을 중계지로 한 동남아시아와 서아시아 방면의 물품이 보인다.

신라상인은 그 대가로 풀솜〔綿〕과 비단〔絹〕 등을 가져갔다. 당나라와의 교역에서도 통일기 전에는 주로 토산품이 수출되었으나, 통일기 이후에는 고급직물과 비단 및 금은세공품이 수출되었다. 또한, 당시 신라귀족들이 애용하였던 향료 등의 동남아시아 및 서남아시아산 물품들도 신라상인의 중계무역으로 수입된 것이다. 장보고의 무역선도 대체로 이러한 물품들과 피혁제품·문방구류들을 취급하였던 것으로 여겨진다. 장보고는 무역활동과 함께 나아가 외교교섭까지 시도하였다.

840년(문성왕 2)에 무역선과 함께 회역사(廻易使)를 파견하여 일본조정에 서신과 공물을 보내었다. 이러한 시도는 일본측에 의하여 국제관례에 따라 거부되었지만 무역은 계속되었다. 또한 당나라에는 견당매물사(遣唐賣物使)의 인솔하에 교관선(交關船)을 보내어 교역을 활발히 하였다. 회역사와 견당매물사의 칭호가 붙은 교역사절을 파견하였던 사실은 그가 일반 무역상인과는 달리 독자적인 세력집단을 형성하고 있었음을 말해준다.

일본의 지방관과 승려 엔닌(圓仁)이 장보고에게 서신을 보내어 그의 귀국을 보살펴줄 것을 탄원하였다는 것은 일본·신라·당을 잇는 당대의 해상교통로에서 그의 위세가 국제적으로 인정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5. 법화원 건설



▲ 중국 산둥(山東)성 스다오(石島)진 적산에 자리잡은 적산법화원 전경.

그는 산동성 문등현(文登縣) 적산촌(赤山村)에 법화원(法華院)을 건립하고 이를 지원하였다. 이 법화원은 상주하는 승려가 30여명이 되며, 연간 500석을 추수하는 장전(莊田)을 가지고 있었다. 이 지역 신라인의 정신적인 중심지로서 법회 때에는 한꺼번에 250여명이 참석하였던 경우도 있었다. 이처럼 장보고의 세력이 중국 동해안의 신라인 사회에도 큰 영향력을 끼치고 있었다.

또한, 그 자신이 한미한 신분 출신이었으므로 골품제와 같은 기존의 신분제에 구애됨이 없이 유능한 인재들을 널리 받아들였고, 또 환대하여 그들의 능력을 적극 발휘할 수 있게 하였다. 812년(헌덕왕 7) 흉년이 들자 170여명의 굶주린 자들이 바다 건너 중국의 저장(浙江)지역에 먹을 것을 구하러 갔으며, 이 무렵 일본에 300여명이 건너간 것과 같은 사실에서 보이듯, 사회분화의 진전과 중앙정부의 통제력의 이완에 따라 당시 흉년이라도 들게 되면 많은 빈민들이 삶을 찾아 바다로 나가거나 떠돌아다녔다.

이러한 빈민들을 규합하고, 새로운 활동무대를 찾아 모여든 인재들을 포용하여, 8세기 이래 왕성하였던 신라인의 해상활동 능력을 적극 활용, 이것들을 묶어 조직화함으로써 그의 세력이 급속도로 성장하는 토대가 이루어졌던 것이다.

적산 법화원 장보고기념비 [赤山法華院張保皐記念碑]



▲ 장보고 기념비. - 사진 nate screw...


중국 산둥성[山東省] 룽성시[榮成市] 스다오전[石島鎭]의 적산 법화원 터에 장보고의 업적을 기려 세운 기념비.

1990년 4월 1일 건립되었다. 한국해양경영사연구회가 한국선주협희의 후원을 얻어 장보고의 옛 청해진(淸海鎭) 터인 전남 완도군민(莞島郡民) 대표들을 초청하여 제막식을 가졌다. 법화원은 장보고가 820년 신라방(新羅坊)이었던 당시의 원덩현[文登縣] 적산촌에 세운 그의 본원사찰(本願寺刹)로, 845년의 회창법란(會昌法亂) 때 헐려서 황폐화한 것을, 이 절의 도움을 받은 일본 승려 엔닌[圓仁]을 기리는 일본측 관계자들의 협력을 받아 중국 당국이 중건하였으며, 중건과 때를 맞추어 한국학계에서도 기념비를 세우게 된 것이다. 비문의 내용은 장보고가 신라 ·당나라 ·일본 등 3국과의 교역을 주도한 것과, 구법(求法)을 위해 법화원에 온 일본 승려 엔닌이 신라의 도움으로 무사히 귀국했다는 사실, 그리고 한국과 중국의 역사적 유대를 강조하였다.



▲ 장보고기념탑 비 - 사진 dreamwiz.siansarang...



▲ 장보고기념탑 비명


장보고와 법화사[경향신문]

장보고가 중국 산둥지방에 법화원이라는 사찰을 지었다는 것은 널리 알려져 있지만 자신의 근거지였던 청해진(완도)은 물론 제주에도 법화사를 세웠다는 사실을 아는 이들은 많지 않다.

제주 법화사 주지 시몽스님은 “1980년 제주에 처음 왔을 때 법화사터는 폐사지였고 사찰도 장보고 때가 아닌 고려말 원나라가 패망하면서 피란궁으로 세워진 것이라고 알려져 있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발굴 작업이 시작되면서 원나라 초기에 사찰을 중창했다는 명문이 새겨진 와당이 출토되고, 또 당시 발견된 ‘완도군지’에 장보고가 한라산 서쪽에 법화사를 세웠다는 기록이 나오면서 이 폐사지는 장보고의 사찰터로 인정받게 됐다.

김문경 장보고연구회장은 “장보고가 세운 절 이름이 모두 ‘법화’인 것은 당시 ‘법화경’이라는 경전이 크게 유행했기 때문”이라며 “법화경은 해상무역을 하는 선원들이 바다의 안녕을 비는 데 많이 활용했고, 장보고가 이를 절 이름으로 옮겼다”고 설명했다.

법화사터는 60여평의 목조건물 터와 3,000여평의 연못터 등 어마어마한 규모를 자랑하고 있다. 발굴 작업만 1980년부터 96년까지 17년 간 진행됐고 지금까지 대웅전과 누각, 연못 등이 복원됐다. 발굴작업에서는 주로 고려 전기 유물들이 많이 나왔지만 신라 말기 화폐와 기와로 보이는 유물도 일부 출토돼 장보고와의 인연을 이어주고 있다. 장보고가 세운 사찰들은 당시 국제무역사무소의 역할도 겸했다. 완도와 제주의 법화사, 산둥의 법화원은 신라와 일본, 중국의 삼각 해상무역선을 구축하는 근거지 역할을 했던 것이다



▲ 장보고가 창건한 것으로 전해지는 제주 서귀포시 법화사 전경.


6. 김우징 지원

이제 강력한 군대와 많은 선박을 보유하고 부를 축적하여 하나의 큰 지방세력으로 성장함에 따라 중앙정부의 정치적 분쟁에도 자연 관여하게 되어졌다.

836년(흥덕왕 11) 수도에서 왕위계승분쟁에 패배한 김우징(金祐徵:뒤의 신무왕) 일파가 청해진으로 피난해와 그에게 의탁하였다. 이어 838년(희강왕 3)수도에서 재차 왕위를 둘러싼 분쟁이 터져 희강왕이 피살되고, 민애왕이 즉위하였다.

이 정변을 틈타 장보고는 김우징일파를 강력히 지원하여 군대를 보내어 경주로 반격하게 하여, 김우징이 왕으로 즉위하는 데 큰 공을 세웠다. 신무왕은 그를 감의군사(感義軍使)로 삼는 동시에 식실봉 이천호(食實封二千戶)를 봉하였고, 그의 세력은 중앙정부를 위협할 정도가 되었다. 이에 두려움을 느낀 중앙귀족들은 그의 딸을 문성왕의 왕비로 맞아들이는 것을 반대하였다.

7. 암살

그뒤 청해진과 중앙정부 사이에는 대립과 반목이 심화되어갔다. 그러자 중앙정부에서 한때 장보고의 부하였던 염장(閻長)을 보내어, 짐짓 그의 막하에 투항한 척하다가 그를 암살하게 하였다. 그의 암살 뒤 그의 아들과 부장 이창진(李昌珍)에 의하여 청해진 세력은 얼마간 유지되어, 일본에 무역선과 회역사를 보내어 교역을 계속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곧이어 염장을 비롯한 중앙군의 토벌을 받아 청해진은 완전 궤멸되었다. 851년(문성왕 13) 청해진의 주민을 벽골군(碧骨郡:전라북도 김제)에 이주시키고, 청해진을 없애버렸다. 장보고는 불의에 피살되었으나, 그는 8세기 후반 이래의 신라인의 해상활동의 한 정점이었으며, 신라 말기 각지에서 등장하는 호족세력의 선구적 존재이기도 하였다.

8. 장보고의 죽음에 대한 두 가지 기록

장보고가 언제 죽었는지에 관해서는 우리나라와 일본의 문헌에 각기 다르게 기록되어 있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문성왕 8년(846) 봄에 신라 조정에서 자신의 딸을 왕비로 받아들이지 않은 것을 원망하여 장보고가 청해진을 근거지로 하여 반란을 일으키려 하자 염장(閻長)을 보내 장보고를 암살하도록 했다고 한다. 다시 말하면 <삼국사기>에서는 846년 봄에 장보고가 죽었다고 하였다.

반면 <속일본후기> 승화 9년(842)조에, 염장의 부하 이소정(李少貞)이 일본에 가서 '장보고는 이미 죽었다'고 하였다. 그리고 완도의 백성 어려계(於呂系) 등이 일본에 귀화하여 말하기를 '장보고가 작년(841) 11월에 죽었으므로 그곳에서 편안히 살 수가 없어 일본으로 왔다'고 하였다. 이처럼 일본 문헌에는 841년 11월에 장보고가 죽은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장보고가 죽은 시기에 관한 서로 다른 두 기록 가운데 어느 쪽이 진실을 말하는 것일까? 결론부터 말하면, 841년 11월에 장보고가 죽었다는 <속일본후기>의 기록이 정확하다고 생각한다. 838년부터 약 10년간 당나라에 머물며 당시의 사정을 생생히 기록해 놓은 일본 승려 엔닌(圓仁)의 일기에 의하면, 845년 7월에 중국 연수현에 있는 신라방에서 '국난'을 당하여 망명생활을 하고 있던 전 청해진 병마사 최훈(崔暈)을 만났다고 한다.

최훈은 청해진의 전성기에 당나라와의 무역을 총괄하던 장보고의 부하로, 장차 엔닌이 일본으로 돌아갈 때 자신의 배로 귀국시켜주겠다고 호언장담했던 사람이다. 그러나 연수현 신라방에서 만난 그는 귀국선을 구하지 못해 애태우던 엔닌에게 아무 것도 해줄 수 없는 처지였다. 이처럼 최훈이 초라한 망명자의 신세가 된 것은 이른바 '국난(國難)' 때문인데, 그것은 장보고의 암살 사건을 가리키는 것임에 틀림없다. 그렇다면 장보고는 845년 7월 이전에 죽은 셈이 된다. 따라서 846년 봄에 장보고가 죽었다는 <삼국사기>의 기록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궁정 음모가들에 의한 장보고의 죽음>

그러면 장보고는 왜 죽었을까? 잘 알려져 있는 바와 같이 장보고는 신라 하대 왕실의 왕위쟁탈전에 관여하여, 신무왕의 쿠데타에 자신의 군사를 제공하였다. 그 대가로 그는 감의군사와 진해장군의 관작과 2천호의 식읍을 받았으며, 아울러 자신의 딸을 왕비로 들이기로 약속하였다. 그런데 골품체제하에서 종래 온갖 특권을 누리던 경주 귀족들은 막강한 군사력과 경제적 배경을 가지고 있는 장보고의 중앙진출에 대하여 일종의 위기감을 느꼈을 것이다.

이에 그들은 장보고의 신분이 미천하다는 이유를 들어, 그의 딸을 왕비로 맞아들이는 것을 극력 반대하였다. 왕실과의 약속이 무산되자 장보고는 마침내 반란을 꾀하게 되었다. 장보고와 신무왕 혹은 그의 아들 문성왕과의 혼인 약속은 애당초 실현 가능성이 없었다. 9세기 중반에 이르러 신라는 비록 정치적으로 혼란하였으나, 신라사회의 운영원리인 골품제는 엄연히 그 기능을 발휘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낱 섬사람에 불과한 장보고의 딸을 왕비로 삼는다는 것은 왕실의 권위와 신라의 체제를 부정하는 것이나 다름없는 행위였다. 그런데도 신무왕은 장보고의 딸을 왕비로 맞아들이기로 약속하였다. 그 이면에는 장보고의 군사력을 이용하여 왕권을 차지하려는 노련한 정치가의 계산이 숨어 있었다.

그러나 장보고는 훗날 자신의 딸을 왕비로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하여 반란을 일으키려 했던 점에서 알 수 있듯이, 신무왕과의 약속을 철석같이 믿었다. 자신의 능력에 따라 얼마든지 왕후장상이 될 수 있던 당나라에서 젊은 시절을 보낸 장보고로서는 신무왕과의 약속을 의심할 필요가 없었다. 또 그는 왕실과의 혼인을 통하여 중앙정계로 진출하려는 야망도 가졌음직하다. 그러나 장보고의 그러한 생각은 신라에서 통하지 않았다. 몇 달 전에 매스컴을 떠들썩하게 했던 어느 여성 로비스트가 '군인은 일반인에 비하여 순수해서 좋아한다'고 하였다. 영악한 경주 귀족들에 비하여 장보고는 순진한 군인이었던 셈이다.

<자신의 심복에게 암살당한 장보고>

장보고의 모반을 눈치 챈 신라왕실은 막강한 군사력을 보유하고 있던 장보고를 토벌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그냥 둘 수도 없었다. 이에 경주 귀족들은 장보고의 심복인 염장을 이용하여 장보고를 암살하였다. 염장은 무주(武州) 사람으로, 일찍이 장보고의 군사를 나누어 이끌고 신무왕의 쿠데타에 참여한 인물이다. 그의 출신지가 청해진과 가까운 무주였고 장보고가 그에게 군사를 맡길 정도였으므로, 그는 장보고에게 상당한 신임을 받고 있던 청해진의 장수였을 것이다. 그러한 염장이 경주 귀족들의 사주를 받고 장보고를 죽인 후 일시적으로 자신이 청해진을 장악하였다. 장보고는 믿었던 브루투스(Brutus)에게 암살당한 케사르(Caesar)의 신세가 되고 말았다.

어쨌든 신라왕실과의 혼인을 통하여 자신의 세력을 확장하려던 장보고의 야망은 기득권을 고수하려는 노련한 경주 귀족들, 이기동 교수의 표현을 빌자면 '궁정의 음모가들'에 의하여 좌절되었다. 그리고는 마침내 그의 심복의 손에 의하여 죽고 말았다. 그 때가 신라 문성왕 3년(841) 11월이었다. 장보고가 죽은 후 청해진은 급속히 무너져, 해상왕국의 영화는 우리역사에서 다시 재현되지 않았다.



'해상왕 장보고' 일본에서는 살아 있다.

일본 내 유적지 엔랴쿠지·미이데라 답사 …
‘신라명신’ 모신 신사 국보로 지정 관리


◀ 신라선신당 안에 보존돼 있는 신라명신의 좌상(일본 국보).

한민족이 역사상 가장 숨가쁘게 질주했던 20세기 후반, 정치계와 경제계에서 가장 걸출했던 인물을 꼽으라면 역시 박정희와 이병철일 것이다. 김영삼과 김대중이 기대에 못 미치고, 정주영과 김우중이 무너지면서 그 누구도 두 사람을 넘어설 수 없게 되었다.

그러나 둘은 서로를 싫어했다. ‘없는 집안’ 출신인 박정희와 부르주아 태생의 이병철은 일치하는 코드가 적었으리라. 이러한 ‘다름’은 역사를 바라보는 시각에서도 여실히 드러났다. 군인이었던 박정희는 이순신을 좋아해 서울 세종로에 세종대왕이 아닌 이순신의 동상을 세우게 했다.

이순신과 장보고는 ‘바다의 사나이’라는 공통점이 있지만 각각 군인과 무역상이라는 차이점도 있다. 사업가인 이병철은 장보고를 영웅으로 만들자고 했다고 한다. 장보고냐 이순신이냐, ‘칼자루’를 쥔 박정희는 이순신을 선택했다. 교사에서 군인으로, 관동군에서 국군으로 적(籍)을 바꾸고, 남로당 영남 총책으로 사형선고까지 받았던 박정희로서는 이순신에게서 동병상련을 느꼈을 것이다.

장보고는 전남 완도 태생으로 추정되는데, 김대중 정부 때인 1999년 해상왕 장보고기념사업회(이하 사업회)가 설립됨으로써 비로소 영웅으로 재평가를 받게 되었다. 이때 이건희 삼성 회장이 선친의 유지를 받들어 10억원을 쾌척했다. 대북사업에 혼신의 힘을 쏟았던 정주영 현대 명예회장이 대북 루트를 뚫어준 국제옥수수재단에 지원한 돈이 5억원인 것을 고려한다면 10억원은 결코 적은 돈이 아니다.

하찮은 인물로 묘사한 국내 사서

▶ 완도군이 엔랴쿠지 안에 세운 장보고비. 비문에는 ‘義憤’이 ‘義墳’(의로운 무덤) 으로 잘못 새겨져 있었다.

이러한 생각을 하며 사업회와 함께 일본 내 장보고 유적지 답사여행을 위해 부산항을 떠난 것은 10월7일이었다. 배가 부산 내항을 벗어날 무렵 태풍 ‘매미’로 부서져 내린 신감만부두의 갠트리 크레인 잔해가 강렬한 석양빛을 받아 두 눈에 들어왔다.

장보고(張保皐)란 이름은 당나라 문인인 두목(杜牧)이 쓴 ‘번천문집(樊川文集)’이란 책에 처음 나오고, 이어 이 책을 인용한 ‘신당서(新唐書)’에 나온다. 답사단을 이끈 김문경 숭실대 명예교수는 “요즘 식으로 말하면 두목은 술을 좋아해 술집에 자주 갔는데 그곳에서 해상무역에 성공한 장보고 이야기를 많이 듣고 그에게 매료돼 기록으로 남긴 것 같다”고 말했다.

두목은 적수공권으로 당나라에 건너와 대상(大商)이 된 신라인을 칭송했으나 정작 우리 기록은 시니컬하기 그지없다. 김부식은 ‘삼국사기’에서 “중국 기록에 장보고로 돼 있는 사람의 이름은 궁복(弓福·활 잘 쏘는 아이라는 뜻)이다. 그는 평민이므로 성(姓)이 없으며 미천한 섬 출신이다”라는 기록을 남겼다. ‘삼국유사’는 그의 이름을 궁파(弓巴)로 적어놓았다.



▲ 신라명신의 좌상을 모시고 있는 신라선신당과 안내판.


국내 사서에는 왜 장보고가 ‘같잖은’ 인물로 묘사돼 있을까. 중국 산둥반도에서 손꼽히는 대상으로 활동한 장보고가 완도로 돌아와 청해진을 설치한 것은 신라 흥덕왕 3년(828년)인데 흥덕왕이 불러들인 것인지, 아니면 장보고가 자발적으로 들어온 것인지는 확인되지 않는다. 당시 한·중·일 사이의 최고 무역품은 도기(陶器)와 자기(瓷器)였다. 도기와 자기는 음식을 따뜻하게 먹을 수 있게 해주는 사치품으로 귀족층 사이에서 인기가 좋아, 이른바 도자(陶瓷) 무역이 성행했다.

이때의 무역선은 규모가 작았을 뿐만 아니라 항해술이 발달하지 않아 주로 연안을 따라 항해했다. 즉 완도에서 출항해 중국 저장성의 닝보(寧波)로 가서 도기와 자기를 실은 뒤 흑산도를 거쳐 한반도 남해안을 따라 항해하다 일본 규슈 북쪽의 하카다에 도착한 것이다. 이러한 환상(環狀) 항로의 한복판에 완도가 있으니, 완도를 장악하면 무역을 독점하는 해상왕이 될 수 있었다.

청해진을 건설한 장보고는 이 항로에 출몰하는 해적을 소탕하고 무역권을 독점했다. 흥덕왕은 장보고에게 ‘대사(大使)’ 라는 직함을 내리고 우대했다. 당시 권력투쟁을 거듭했던 신라 왕실의 제 세력은 ‘해상왕’의 힘을 빌리고자 했다. 이를 기화로 장보고 또한 파워게임에 참여했으나 김양(金陽)을 우두머리로 한 세력이 장보고의 부하인 염장(閻長)을 매수해 장보고를 암살했다(841년). 이로써 장보고는 하루아침에 반역을 꾀한 자가 되었으니 우리의 사서는 그를 성도 없는 섬 출신의 미천한 궁복으로 기록했을 것이다.



▲ 요카와 선원에서 신라명신을 모시고 있는 적산궁이라는 작은 신사와 안내판.


장보고가 청해진을 세우기 전 이미 신라는 상당한 수준의 조선술과 항해술을 보유하고 있었다. 따라서 장보고를 죽이더라도 이러한 기술은 살려나갔어야 했는데 후환을 두려워한 세력들은 장보고 암살 10년 후인 851년 청해진을 폐쇄하고 청해진 주민을 벽골군(전북 김제)으로 강제이주시켜 버렸다. 이로써 신라 해상무역의 뿌리가 뽑혀버렸다.

신라의 권력투쟁과 무관한 중국과 일본에서는 장보고를 묵살할 이유가 없었다. 일본 시가현 히에이 산에는 엔랴쿠지(延曆寺) 라는 고찰이 있는데 이 절은 일본 천태종의 총본산이다. 일본의 혁신불교는 천태종에서 갈라져 나왔으니 이곳을 일본 불교의 총본산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영웅으로 부활할 때 민족 웅비”

신라인들은 장보고가 오기 전부터 한·중·일 항로를 장악했던 것 같다. 이는 일본 천태종 개조(開祖)인 사이초(最澄, 767~823)가 불법을 배우러 당나라에 가기 전 ‘신라국신’에게 뱃길의 안전을 기원하고, 당에서 돌아온 뒤에는 신라국신에게 감사하기 위해 ‘신궁원(神宮院)’을 만들었다는 기록에서 확인된다. 3대 교조인 엔닌(圓仁) 또한 당나라를 다녀온 후 신라명신 (新羅明神)의 가호로 안전하게 귀국했다며 신라명신을 절의 수호신으로 삼고 신라명신을 위해 적산선원(赤山禪院)을 세우게 했다.

적산선원은 엔닌이 입적한 지 24년 후 제자들에 의해 건립되었다. 이러한 적산선원과 별도로 엔랴쿠지 본 절에서 차로 10분 정도 떨어진 요카와 선원에는 적산궁(赤山宮)이라는 작은 사당이 있는데 이곳에는 ‘적산궁은 신라명신을 모신다’는 안내판이 붙어 있다. 엔닌 등이 언급한 신라명신은 장보고이거나 아니면 장보고를 중심으로 한 신라 해상세력이 모셨던 해상신일 가능성이 높다.

일본의 사서는 특이하게도 장보고를 ‘張寶高’로 적고 있는데 이는 장보고가 일본의 무역에 큰 영향을 주었기 때문인 것으로 추정된다. 장보고의 영이 서려 있는 엔랴쿠지에는 2001년 완도군이 세운 장보고비가 있는데 오자가 각인돼 있어 아쉬움을 주었다.

엔랴쿠지에서 자동차로 30분쯤 떨어진 시가현 오쓰 시에는 미이데라(三井寺, 또는 園城寺)가 있는데 이곳에는 당나라로 유학 간 엔친(圓珍) 스님이 귀국하는 배 안에서 만난 신라명신의 좌상을 모신 신라선신당(新羅善神堂)이 있다. 신라명신 좌상과 신라선신당은 모두 일본의 국보로 지정돼 있다. 이 신라선신당은 일본 사무라이 세계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구로사와 아키라(黑澤明) 감독의 영화 ‘가게무샤’는 다케다 신겐(武田信玄)을 주인공으로 한다. 다케다 신겐의 조상은 ‘미나모토(源)’라는 성을 썼는데, 미나모토 요시미쓰(源義光)는 신라명신의 위명에 감동해 신라선신당 앞에서 성인식을 치르고 성을 신라사부로(新羅三郞)로 바꿔 ‘신라사부로 요시미쓰’가 되었다. 신라사부로 가문은 그후 영지(領地)의 이름인 다케다로 다시 성을 바꿨는데, 그 후예가 바로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와 쟁패한 일본 전국시대의 영웅인 다케다 신겐이다.

장보고는 한국에서는 죽었지만, 일본과 중국에서는 영웅과 신으로 살아 있었다. 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는 반역에 개입한 장보고를 굳이 영웅으로 만들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한 박정희로부터 적잖은 공격을 받았던 이병철 가문이 오히려 장보고를 우뚝 세우고자 했으니 역사의 아이러니다. E. H. 카는 ‘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라고 정의했는데, 장보고와의 대화는 이어질 수 없는가.

답사단의 한 관계자는 “노무현 정부는 어떻게 국민소득 2만 달러 시대를 열 것인가. 제조업만으로는 한계가 있으므로 무역을 비롯한 서비스업을 일으켜야 할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갈라섰던 세력들을 합세시켜야 한다. 박정희와 이병철이 화해하고, 이순신과 장보고가 똑같은 영웅으로 일어나 쓰러진 신감만부두의 크레인을 일으켜 세울 때 국민소득 2만 달러 시대는 열리게 될 것이다”라고 말했다.

by 늘푸른솔 | 2009/01/17 06:2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