鶴山의 草幕舍廊房

외국작가 畵壇

50년대 남대문 시장의 여인들

鶴山 徐 仁 2008. 2. 25. 20:53





빌리 세일러 <악착같은 장사> 채색동판화 21 x 29 cm 1956 - 1960년 사이


빌리 세일러 <빈틈없는 계산> 채색동판화 21 x 29 cm 1956 - 1960년 사이


    50년대 중반 한국을 방문했던  독일계 미국인 화가의 동판화
    "해방후 남대문 시장의 여인들 모습"
    - 글쓴이 : 명화정

    남대문시장, 중부시장, 동대문시장, 평화시장, 경동시장, 부산 국제시장...
    1950년부터 70년대까지 '명성'을 떨치던 재래시장의 이름입니다.
    이제는 백화점과 대형할인점에 상권을 빼앗기고 겨우 명맥을 이어가는 재래시장이지만,
    6.25전쟁 이후 근 30여년 동안은 모든 국민이 이용할 정도로 우리나라 유통 경제의 중추적
    기능을 담당하였습니다.

    그 당시 재래시장은 많은 서민들에게 장사터를 제공하였고, 그들은 치열한 생존경쟁 속에서
    성공과 좌절을 맛봤으니, 많은 사람들의 꿈과 애환이 서렸던 곳이기도 합니다.
    그런 50년대 말, 60년대 초반의 재래시장 모습을 동판화로 만든 미국인 화가가 있습니다.
    우리나라에는 거의 알려지지 않은 빌리 세일러(Willy Seiler)라는 화가입니다.

    빌리 세일러는 독일계 미국인으로, 1903년 독일 드레스덴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을 그곳에서
    보낸 후 뮌헨에서 미술공부 했습니다. 1928년 독일을 떠나 파리에서 2년을 더 공부한 후
    45개국을 떠돌며 그림도 그리고, 전시회도 하던 역마살 가득했던 화가였기에 그의 정확한
    사망년도는 아직 알려지지 않고 있습니다.

    2차대전 종전 후부터 20여년 일본에 거주하면서 주일미군사령부에 근무하였고,
    1956년부터 1960년 6월까지 한국을 세 번 방문, 약 12점의 한국소재 동판화를 남겼습니다.

    <악착같은 장사>
    위의 작품은 그의 <한국시리즈> 12점 중의 한점으로, 시장에서 치열하게 장사하는
    아낙네들의 모습을 생생하게 표현하였습니다. 오른쪽 아주머니는 아기를 낳은지
    얼마 안되었는지 젖가슴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당시 대부분의 가정이 5-6남매는
    보통이고 많으면 7-8 남매까지 있었으니, 여인네들의 삶이란 얼마나 고달팠습니다.
    더우기 남자들에게 일자리가 많지 않던 시절이라 아낙네들이 시장에서 좌판이라도
    벌여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살아야 했습니다.

    그래서 이 아주머니는 저녁에 집에 돌아가 아기에게 젖을 먹이기 위하여 가슴을
    드러낸채 장사를 하면서도, 머리 속에는 집에 두고온 아기 생각으로 가득한 듯한
    표정이라 보는 사람의 마음을 아프게 합니다.

    오른쪽 아주머니가 파는 생선은, 디포리, 띠포리라고 부르는 멸치 종류입니다.
    멸치는 행어, 정어리, 곤어리, 운어리 4종류의 이름을 공통으로 부르는 것인데,
    디포리는 곤어리의 일종으로 은빛 색깔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림에도 은빛이 보이니 참으로 섬세한 묘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밴댕이 소갈딱지'의 밴댕이가 띠포리의 경상도 방언이니,
    이 아주머니는 밴댕이를 팔아 생계를 꾸려가는 것입니다.

    띠포리는 멸치보다 냄새는 많이 나지만 국물이 진해 김치를 담그거나 김치찌개 국물 내는데
    사용하는데, 그 옆 아주머니 역시 김치 재료를 팔고있습니다.
    같은 손님이 필요로 하는 물건을 서로 옆에서 파니, 상부상조하며 힘들고 거친 세상을 헤쳐나가는
    여인들의 지혜와 훈훈한 정을 느낄 수 있는 풍경입니다.

    이 아주머니의 함지박에 있는 야채는 쪽파로 보이는데, 그냥 밭에서 뽑은채로 파는게 아니라
    쪽파뿌리를 집에서 다듬어서 갖고 나온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깔끔하게 다듬어야 조금이라도 더 팔고, 단골도 생기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다름없고,
    그런 상인일수록 악착같다는 소리를 들으며 돈을 모았겠지요.

    이빨 사이로 꽉 문 돈 ! 정말 악착같이 돈을 벌려는 모습입니다.
    그때는 돈이 없으면 굶어 죽어야 하던 시절이었고, 그래서 서민들은 죽지 않고 살아 남기 위해
    발버둥을 치며 돈을 벌어야만 했습니다.

    미국인 화가의 작품이지만, 매우 일찌기 우리나라 서민들의 모습을 통해 '민중적 리얼리즘'을
    구현한 화가라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당시의 절박하고도 치열한 삶의 모습을 잘 표현했습니다.

    이 아주머니는 장사가 안되는지 얼굴에 수심이 가득합니다.
    당시의 사진이나 그림들을 보면 이렇게 수심이 가득한 표정이 많은데, 그것은 삶이 피곤하고
    힘들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더우기 당시 이승만 정권의 정치라는게 국민에게 희망을 주기보다는 권력자들의 치부에 급급하고
    정적을 제거하는데 골몰하였으니, 서민들의 얼굴에서 웃음을 보기가 쉽지 않았겠지요.

    그런 시대였습니다.
    희망보다는 절망이, 기쁨보다는 슬픔이 많던 시대였기에, 여인네들의 삶은 더욱 고달플 수 밖에
    없었습니다.

    <빈틈없는 계산>
    빌리 세일러는 그런 우리나라를 3번 다녀가며 서민들의 삶을 생생하게 표현한 작품을 남겼는데,
    아래의 작품 역시 재래시장의 풍경을 동판화로 제작한 작품입니다.

    아주머니가 파는 것은 소금입니다.
    TV 연속극 <주몽>에도 나오듯이 고대국가에서 소금은 전략물자의 하나로 취급되었고,
    인구가 많던 중국에서는 제나라 때부터 소금으로 거상이 된 사람들의 이야기가 전해옵니다.
    이렇듯 소금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인류의 식탁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 품목입니다.

    우리나라 역사책에서도 소금장수 이야기는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부터 나올 정도로
    오래되었고, 조선시대에는 소금이 국가의 전매물이었을 정도로 중요하게 취급되었습니다.
    그러나 일제강점기 때 소금섬을 지고 다니며 소금을 팔던 소금장수는 1930년경에 대부분
    사라지고, 5일장을 통해서 거래가 활발하게 이뤄지기 시작했습니다.

    소금은 생필품이라 할 수 있을 정도로 식탁에서 절대적 위치를 차지하기 때문에,
    5일장이나 재래시장에서 소금가게를 하던 사람들은 많은 부를 축적하는 부류에 속했습니다.
    자본을 갖고 소금을 사들여 박리다매로 팔았기 때문에 영세상인들이 감히 경쟁을 하기 힘든
    품목이었고, 소금장사들은 이런 독점적 위치를 이용해 폭리를 취하기도 하여
    '소금값이 금값이다' 라는 말이 생겨나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소금가게 주인인듯 보이는 이 아주머니는 장사는 일군들에게 맡기고, 느긋하게 담배를
    피며 돈주머니에 손을 넣어 돈을 세고 있는것 같습니다.

    재래시장 경기가 활발했던 50년대와 60년대에는 사장통에서 번 돈으로 사업을 시작해
    큰부자가 된 사람들이 많은데, 그 대표적인 예가 '전설의 백할머니'입니다.

    평양출신으로 60년대부터 80년대 초반까지 증권가와 사채업계에서 '큰손'으로 이름을 날려
    TV 연속극에도 심심치 않게 등장한 '백할머니' 백희엽(95년 작고)씨는 1·4후퇴 때 맨몸으로
    월남했습니다.
    그리고는 부산 국제시장에서 억척스럽게 장사해서 종자돈을 모아 훗날 '큰손'이 되었으니,
    당시 재래시장은 서민들이 돈을 벌 수 있는 유일한 장소였다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러나 당시 상점 주인들이 부자가 되는데는 일꾼들의 저임금도 큰 역할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저임금 구조가 결국에는 6,70년대의 노동자 저임금으로 이어졌고,
    결국에는 '부익부 빈익빈' 현상이 가속화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60년대 가게 일꾼들의 대부분은, 먹여주고 재워주는 것이 '월급'이었습니다.
    그러나 특별한 기술이 없던 사람들은, 오직 굶지 않아야 살아 남는다는 생각으로
    그런 일자리 조차 감사히 생각하며 새벽부터 밤 늦도록 일을 했습니다.

    여자들의 경우도 남자들의 열악한 노동환경과 별반 다르지 않았는데,
    숙식을 하지 않고 집에서 출퇴근을 하는 경우 받는 월급이란 매우 미약하였습니다.
    더우기 월급의 액수와 돈을 지급하는 시기가 주인 마음대로인 경우가 많아,
    밀린 돈을 받기 위해 어쩔 수 없이 계속 일을 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전차비나 버스비를 아끼기 위하여 일을 하러 가거나, 일이 끝난 후 집으로
    돌아올 때도 웬만한 거리는 걸어 다녔으니, 참으로 고달픈 삶이었습니다.

    빌리 세일러의 한국 소재 작품은 위의 두 작품 외에도, 어린 아기, 고아원 어린이들,
    초등학생들, 할머니, 할아버지 등 주로 인물 모습입니다.
    그의 한국 소재 작품 몇 점은 아이젠하워 당시 미대통령이 소장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그러나 정작 우리나라에서는 미술사가가 몇명만 알고 있는 화가일 뿐 아니라,
    대중매체에 소개된 적이 없어, 우선 위의 두 작품을 소개하며 이번 글을 마칩니다.

    글 쓴 이: 명화정 (Blue Bird) :
    30년 정보기관에서 근무(아프리카, 유럽 등지에서 수년간 활동)후 2000년 12월 퇴직,
    중개무역 일을 하다가 2005년 2월 북한의 핵보유 선언과 우리 정국에 울분을 느껴
    소설을 쓰기 시작, 9월에 "작전명 블루버드" 출간. 용산고, 서울대 졸업



    "굳세어라 금순아" /현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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