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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이 일어난 1592년 4월, 서울을 떠난 임금의 피란행차가 임진강 건너편에 이르렀다. 도승지 이항복이 근심스런 표정으로 “형편이 부득이하다면 명나라로 망명해야 하지 않겠느냐”는 의견을 냈다. 그 말을 들은 좌의정은 강경한 어조로 이렇게 말했다. “한 걸음이라도 나라를 벗어나게 되면 조선은 우리 땅이 될 수 없다. 만약 그런 소문이 퍼지게 된다면 민심은 한꺼번에 무너지게 될 것이다.” 이항복은 뒤에 가서야 그 말이 옳았음을 깨달았다고 문집인 ‘백사집’에 기록했다. 그 좌의정이란 다름아닌 서애(西厓) 류성룡(柳成龍·1542~1607)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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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전란 극복의 한가운데에 서 있었다. 전쟁 발발 직전 전라도 정읍현감이었던 이순신의 존재를 알아보고 전라좌수사로 천거한 사람도, 전쟁 중에는 영의정의 자리에 올라 정치와 외교, 군사작전을 총괄해 국난을 성공적으로 수습했던 사람도 바로 서애였다.
올해는 그가 세상을 떠난 지 400년이 되는 해다. 오는 10일부터 20일까지 경북 안동을 중심으로 열리는 ‘서애 류성룡 선생 서세(逝世) 400주년 추모제전’은 서애의 정신을 되살리려는 행사다. 국가의 위기상황을 타개한 지도력과 정파를 뛰어넘은 화합의 메시지는 21세기 한국에도 여전히 절실한 덕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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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일 서울 국립중앙박물관 대강당에서 열리는 학술대회의 주제발표를 맡은 정만조 국민대 국사학과 교수는, 원래부터 서애의 경세론에 실용적인 특징이 있었음을 주목한다. 그래서 조정을 들끓게 했던 붕당(朋黨)의 폐해를 비판하며 “권력이 분산돼 아무 것도 하지 못하는 것보다는 확실한 권력 주체가 있는 권신(權臣) 체제가 낫다”는,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주장까지 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서애는 ▲임금이 5일마다 조회를 열어 정사를 집무하는 조종시사법(祖宗視事法) ▲의정부의 대신이 정무를 의논해 품처(稟處·윗사람의 명령을 받아 일을 처리함)하는 대신서사법(大臣署事法)을 건의했다. 이는 군주가 국정운영의 주체가 되고 관료제가 뒷받침하는 정치형태를 추구한 것으로, 사림(士林)의 공론을 앞세워 붕당을 옹호했던 주류 정치관과는 상반되는 것이었다고 정 교수는 설명한다. 서애는 특히 “초야에서 공론을 빙자한 무뢰배들의 사악한 주장이 쏟아지면 국정에 커다란 혼란을 가져올 수 있다”며 우려했다.
학술대회는 11일 육군사관학교 홍무관과 15일 안동 시민회관 대강당에서도 열린다. 노영구 국방대 교수가 ‘서애 선생의 국방사상과 국방정책’(11일)을, 이태진 서울대 문과대학장이 ‘재상 류성룡의 구국전략 재조명’(15일)을 발표한다. 12일 개막행사에는 이순신 장군과 명나라 이여송(李如松), 일본 장수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의 후손들도 참가, 화해의 손을 맞잡을 예정이다. 이 밖에도 개막행사와 서화전, 유물전시회, 무용·국악 공연 등 다채로운 행사들이 열린다. 〈표 참조〉 (02)3413-7474~5, (054)857-176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