鶴山의 草幕舍廊房

다양한 도우미

한국인의 생명, 밥

鶴山 徐 仁 2007. 5. 2. 09:54

하루라도 거를 수 없는 생명유지의 단순한 [수단]에서 복잡한[문화]의 단계로 가치상승 된 우리의 주식 "밥"을 통해서 보는 한국문화의 원형질.
언젠가 국어 교과서에서 읽었던, 지금은 작가나 작품이름을 전혀 알 수 없지만 잊혀지지 않는 구절이 있다.
외출해서 돌아온 아내가  남편이 차려 놓은 밥상의 메모쪽지를 보고 행복해 한다는 가난한 부부 이야기로서 잘 차려진 흰쌀밥 한 그릇과 간장 한 종지를 표현한  "
왕후의 밥, 걸인의 찬" 나는 이 글에서 표현된 밥에 대한 이미지보다 더 잘된 표현을 그 날 이후부터 오늘날까지 결코 본 적이 없다.

밥을 만드는 쌀은 세계 3 대 곡물인 밀, 옥수수와 더불어 오랜 세월 인류의 주식원으로 사랑 받아 왔다.  그  중 우리민족과 뗄래야 뗄 수 없는 것이 바로 밥을 만드는 쌀이다.  

지금은 식량의 자급자족 문제가 해결된 상태이고 먹거리들도 워낙 흔해서 우리가 먹는 음식에서 밥이 차지하는 비율이 그리 높지 않지만 그래도 아직은 밥이 갖는 비중은  결코 간과 할 수가 없다.

불과 20 여 년 전에는 쌀 생산이 절대적으로 모자라 학교에서는 분, 혼식을 장려하였고 "진지 잡수셨습니까?" 하는 말이 인사말일 정도로 우리민족 에게는 밥 먹는 일이 일상에서 중요한 일 중 하나였다.

밥은 문화다

그러나 십 수 년 전부터 밥을 먹는 행위는 단순히 끼니의 해결차원이 아닌 문화의 영역으로 확대 되어 자리 매김을 하게 되었다.

TV 프로그램에도 음식을 주제로 하는 프로그램이 여러 가지생겨 인기를 끌고 있으며  한끼의 먹거리를 위하여 그 음식값의 몇 배의 경비를 들여 이름있는 음식점을 일부러 찾아가기도 한다.  

IMF 의 혹독한 상황 하에서의 노사간의 대립을 일컬어 [밥]그릇 싸움이라 하고 제 위치에서 제 역할을 못하는 사람을 일컬어 [밥]값도 못 한다고 하기도 하고, 언필칭 공공기관에 근무하는 사람을 빗대어 철[밥]통 이라고 야유하기도 한다.

또한 오랜만에 만나자는 약속을 할 때는 언제 한번 만나 밥 (식사 혹은 술)을 먹자는 표현을 쓴다.

이는 오랫동안의 우리의 언어에 녹아 있는 밥이라는 기호가 일상의 커뮤니케이션 방향으로 발전되어 왔음을 나타내는 것으로 밥의 문화적 영역과 의미가 갈수록 확대되어 감을 역시 나타낸다.

이 경우 밥은 [더불어 살아가는 생활의 공동체]를 지향하려는 의식의 표상이었다.
  
우리의 언어에 녹아 있는 밥의 의미

우리의 언어 중에서 밥의 의미가 가장 확실한 것은 가족을 의미 하는
식구(食口)라는 표현일 것이다.  [밥을 먹는 입]이라는 뜻인데 이 보다 더 확실한 상징이 있을 수 있을까?

또한 우리가 군대에서 사용 하는 흔한 말 중에 짬밥 이라는 말을 쓰는데 원래 이 말은 잔반 즉 남은 음식이라는 의미로서  결국 [경력]을 의미할 때 먹은 밥그릇 수를 기준 했다는 의미이다.

더 나가서 속어로 밥 숫갈 놓았다 하면 죽었다는 의미이고  ^^ 이 경우는 [더불어 살아가는 운명의 공동체]를 표지(標識)한다.  

우리 민족은 왜 이렇게 [밥]이라는 단어를 모든 사물과 현상의 기준으로 사용하였던 것일까?  
언어는 의식과 등가물 즉, 값이 같다고 본다면 우리의 삶이 먹어야 할 밥 문제로 그만큼 고달팠던 것이 아니었을까?

음식물로서의 [밥]과 우리언어 속에서 녹아있는 [문화원형질]로서의 밥은 그 의미가 다르다.  [국]과 [반찬]이 아닌 주식으로서의 밥은 우리 일상을 지탱시키는 힘의 에너지다.

그 힘을 어떻게 사용할 것인지의 문제가 화두가 된다.

[밥않먹고 사는 사람 없듯 밥만 먹고 사는 사람 역시 없다]는 말이 있지만 아직까지도 알게 모르게 우리의식 속에는 [밥]먹고 사는 행위가 사람다운 일상이라는 의식이 녹아있음을 부정할 수가 없다.

에구,시장허다. 서녕아~ 우리도 밥먹고 하자 ^.^


[쌀이야기 첫번째 - 브랜드쌀 시대]

봉지쌀을 아시는지.  모든 게 부족했던 70 년대,  자취대학생이나 여공들은 한되 남짓한 봉지쌀로 끼니를 이어가곤 했다.  연탄 수백장과 함께 쌀가마를 들여놓으면  ‘올 겨울은 넘겼구나’  하고 마음마저 푸근해지던 그런 시절이었다. 쌀의 좋고 나쁨을 따질 때가 아니었다.

쌀의 질을 가리기 시작한 것은 70 년대 후반 통일벼가 나오면서부터였다.  다수확이기는 하지만 밥맛이 없었던 통일벼를 정부가 우선 수매하면서  ‘정부미’는 안 좋은 쌀,  ‘일반미’는 맛있는 쌀이라는 등식이 성립됐다.  값도 일반미가 약간 비쌌다.  하지만 차이는 거기서 끝났다.  싸전(쌀가게)에서 쌀을 사먹는 예전의 관행도 80 년대까지 변하지 않았다.

90 년대초를 지나면서 쌀의 유통에는 혁명적 변화가 일어난다.  요즘 슈퍼마켓에 가보면 10㎏, 20㎏들이의 소포장에 수백가지의 상표를 단 쌀을 볼 수 있다. 대표적인 브랜드는  ‘철원 오대미’  ‘이천 임금님표 쌀’  ‘여주 대왕님표 쌀’  ‘안성 안성맞춤 쌀’  ‘오천년전통 김포 쌀’  ‘생거 진천 쌀’  ‘예산 황금쌀’  ‘한눈에 반한 쌀’  ‘아침햇쌀’ 등이지만 그 종류는 1,000 종이 넘는다고 한다.  심지어 주유소에서도  ‘강화쌀 팝니다’  ‘김포쌀 있음’ 등의 현수막을 볼 수 있다.

이름난 브랜드쌀의 경우 보통 쌀보다 10∼30 % 비싸다.  아직 소량이고 대부분 주문생산이기는 하지만 무농약으로 짓는 유기농쌀은 2 배쯤의 가격에 거래된다.  부유층이 몰려 사는 서울 강남에서는 일본 쌀을 수입해 먹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소비자의 경제력과 기호에 맞게 온갖 종류의 쌀이 어디에서나 거래되는  ‘브랜드쌀’의 시대가 시작된 것이다.

쌀의 종류와 가격이 다양해졌다는 것은  ‘쌀의 상품화’ 가 진전됐음을 의미한다.  쌀의 상품화가 진전되면서 쌀 유통만을 전담하는 민간기업들도 속속 생겨나고 있다.  양질의 쌀만을 엄선해 전국에 공급하겠다는 업체가 있는가 하면 당뇨병 쌀,  고혈압 쌀 등 이른바 기능성 쌀을 생산하겠다는 업체도 있다.  지난 연말 한 조사에 따르면 쌀 유통을 취급하는 인터넷 사이트만 55 개에 이르고 있다.

[쌀이야기 두번째 - 쌀을 보살이라 불렀다]
풍성한 수확기 가을을 허균은 이렇게 노래했다.갈바람에 곡식이 혀를 빼물고 자란다는 속담처럼,갈밭에 가면 가난한 친정에 가는 것보다 낫다고 한다. 이곳 이천의 ‘설성서당’에 갑자기 손님이 찾아오면 밥상 위에 올릴 찬이 마땅히 없어 대접에 신경이 쓰인다.그 때마다 반찬이 없어도 손님들은 밥맛이 좋다고 이구동성으로 말한다.하긴 이름있는 쌀 생산지 가운데 하나로 꼽히는 이천이고 보면 이에 비길만한 것도 없겠지만….

이천 들녘의 평균 높이가 해발 200 m라고 하는데,특히 내가 기거하는 설성면은 다른 지역보다 높은 곳에 위치해 있다.한서의 차이가 심해서인지는 몰라도 더욱 쌀 맛이 좋은 것 같다.이곳 쌀은 정부수매 때에도 외부로 유출될 기회가 적다.찾아온 손님이 돌아갈 때쯤이면 설성 쌀 한 포를 선물한다.

“이천 쌀 가운데서도 설성 쌀을 제일로 칩니다.맛이나 보시지요” 라고 말하면서….

지난 92 년 경기도 일산의 나지막한 언덕에서 구석기 시대 유물들이 발굴됐다는 기사가 난 적이 있다.그때 그곳 갈색 토탄 층에서는 상당량의 볍씨가 함께 출토됐다.

방사성 동위원소 측정 결과 그 볍씨들은 지금으로부터 4 천 300 년에서 5 천년 전쯤의 것으로 밝혀졌다. 그때까지 벼농사가 시작된 것으로 추정했던 것보다 2천년이나 앞서,단군 이래로 쌀 농사가 한민족을 먹여 살려왔다는 것이 밝혀진 것이다.도시를 탈출해 고향과 자연을 찾아 나서는 것은 바로 그 ‘혼’을 그리워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한민족을 수 천년 유지시켜온 것은 단위 면적 당 칼로리의 생산량이 밀보다 3 배나 높은 쌀이 아니었으면 불가능했을 것이다.이 땅에 새로운 문화를 형성한 한국인의 정신구조도 쌀과 쌀을 낳은 토지와,쌀을 생산해온 사람들을 주축으로 형성되어 왔다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쌀이 곡식 가운데에서 가장 대표적인 것이고 보면,한 해의 풍년 여부는 이 쌀의 생산량으로 평가를 한다.쌀은 씨를 뿌리고 여든여덟 번의 손이 가야 수확할 수 있는 작물인 만큼 매우 귀하게 여겨왔다.

북한의 김일성이 “이밥에 고깃국을 실컷 먹게 해준다”는 구호로 북쪽의 사람들을 현혹시켰을 만큼 쌀밥은 풍요의 상징이었다. 이밥이라는 말은 조선의 왕족인 이씨만 먹을 수 있다고 해서 붙여졌다는 말도 있다.

조상에 대한 제사나 종묘제와 사직,부락제의 제물도 반드시 쌀이 올라갔다.일반적인 조상신에게는 밥을 올리지만,보다 높은 신에게는 쌀을 올린다.부처에게도 깨끗한 쌀이 공양된다.북송(北宋)의 손목(孫穆)이 쓴 ‘계림유사’에는 “고려에서는 쌀을 보살로 부른다”고 기록하고 있는데,조선 중기까지도 쌀이 보살로 불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 우리는 자연 사물들을 평할 때 흔히 기(氣)의 중요성을 강조한다.그런데 그 기(氣)란 쌀을 찧을 때 나오는 김에서 유래되었다고 하는 것을 보면, 더 이상 쌀의 존귀성에 대해서 논할 필요가 없을 것같다.그래서 농가에서는 흔히 ‘성주단지’라 하여 대청 한 구석에 쌀 항아리를 모셔두었다.쌀에 조상의 영혼이 깃들여 있다고까지 인식한 것이다.

성주신은 집을 지키는 가신(家神)으로서,가신 가운데 으뜸으로 쳤다.집안의 태평과 농사의 풍년을 기원하며 이 성주신에게 상을 차리고 빌어왔다.그 쌀로 지은 밥은 곧 복(福)이었다.심지어 쌀을 고르는 조리도 복조리라 하여 설날 새벽에 팔기도 했다.농민들은 집집마다 항아리에 쌀을 넣어 보관했는데,가을에 햅쌀로 교체할 때,교체된 묵은 쌀은 집안식구끼리만 밥을 지어먹었다.조상이 준 복을 받기 위해서였다.

쌀 문화권을 형성한 중국이나 일본에서도 쌀은 단순한 곡물이 아니라,영혼을 지닌 인격체로 여겨졌다.쌀 재배는 초자연적인 것과 관계가 깊은 종교 행위로까지 승화되었고,쌀에 깃든 영혼이 달아날 때에는 기근이 든다고 믿었다 .일본‘고사기’나 ‘일본서기’에 의하면 쌀은 신의 뱃속에서 자라났다고하여 신성시했다고 기록돼 있다.

쌀농사를 신성시하는 것은 오늘날에도 마찬가지다.경제적인 측면에서 볼때도 그렇다고 한다.농경제학자 김성훈 교수는 “농업은 하늘과 땅과 물이 조화를 이뤄내는 예술이자 신앙이며,정성과 혼이 깃든 생명의 창조과정”이라고 말했다.

전국 120만 정보의 논에 6∼8월에 걸쳐 쏟아지는 집중호우를 담아내는 자연 저수량이 36억t에 이르며,논에서 땅 속으로 스며들어 지하수를 이루는 물의 양이 연 158억t에 이른다고 한다.또 벼는 1에이커 당 186만 갤런의 탄산 가스를 흡수하고 185만 갤런의 산소를 공급하며 논에 녹아든 유기물질은 벼에 영양분으로 흡수돼 하천의 부영양화를 막아준다고 한다.

쌀은 사람을 살리는 곡물이다.그러므로 예부터 쌀에 대해서 만큼은 신성시 해왔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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