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1월
박경리(朴景利·78)의 ‘토지’는 광복 이후 한국문학이 거둔 최대의 수확이다. 작가는 1969년 집필을 시작해 1994년 8월15일
새벽 2시, 25년 만에 거대한 마침표를 찍었다. 원고지 분량은 3만1200매. ‘토지’가 집필기간, 원고 매수에서 세운 기록은 아직도 깨지지
않고 있다.
박경리 선생은 낯가림을 한다. SBS 드라마 ‘토지’에 출연하는 탤런트 유준상이 원주에 사는 원작자에게 여러 차례 전화통화를 시도해
연결됐던 모양이다. 유준상이 ‘길상’역을 맡았다고 자신을 소개하자 어색한 침묵이 흐른 후 “그래서요?”라는 반문이 되돌아왔다. 작가는 “몸이
불편하다”며 방문도 사절했다.
박 선생은 여간해서 매스컴 인터뷰에 나서지 않는다. ‘신동아’ 편집장에게서 2005년 신년호에 선생을 인터뷰해달라는 요청을 받고
낯가림의 장벽을 뚫기 위해 ‘박경리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힘을 빌렸다. 서울대 환경대학원 김형국(62) 교수와 ‘토지’ 21권을 펴낸 나남출판사
조상호(54) 사장의 도움이 아니었다면 인터뷰는 성사되지 못했을 것이다.
김 교수는 1983년 토지 1∼3부를 세 번 읽고 선생의 팬이 되어 20년 교분을 쌓았다. 토지문화관 건설위원장,
토지완간(完刊)기념사업회장을 지냈다.
김 교수, 조 사장과 함께 원주로 가는 차 속에서 작가와 작품에 대한 공부를 단단히 했다. 두 사람은 다른 사람이 범접하기 어려운
‘토지’ 전문가다. 조 사장은 교정 작업을 하면서 ‘토지’ 21권을 다섯 번이나 읽었다. 그는 “SBS에서 드라마 ‘토지’를 시작한 이후 책
주문이 늘었다”며 표정이 밝았다.
낯가림 심한 老작가
오랜만에 두 사람을 만난 박 선생의 얼굴엔 반가움이 가득했다. 사진기자와 함께 넷이서 큰절을 하고 집 아래 토지문화관으로 내려와
이야기를 시작했다.
“건강이 좋아 보인다”고 인사를 건네자 낯빛이 환해지면서도 “겉보기만 그래요”라는 말로 받았다. 혈압조절약을 먹고 있고, 당(糖)이
조금 나오고, 백내장 수술 날짜를 받아놓았다고 한다. 노인에게 흔한 퇴행성 질환들이다. 인터뷰 3시간 동안 줄담배를 태우면서도 기침 한번 안하는
걸 보면 아직 정정하다.
선생은 “정치와 문학 이야기는 묻지 말라”는 조건을 달았다. 생명·환경 이야기나 하자는 것이었다. 그렇다고 필자가 환경단체 대표도
아니고 대작가를 만났는데 문학 이야기를 건너뛸 수는 없는 노릇이다. 선생은 인터뷰를 기피하는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작가는 얼굴이 필요없습니다. 작품을 내놓으면 그걸로 끝이죠. 문학작품에 모든 것이 들어 있고 독자가 읽어주는 것으로 족합니다.
사람마다 자기 눈으로 평가하면 됩니다. 작가가 이러쿵저러쿵 해명하는 것은 작품이 미진하다는 뜻이죠.
옛날 우리 선비들은 자기 얘기를 늘어놓지 않았습니다. 자랑은 어린애가 꼬까옷 입고 해야 귀엽지요. 지식인의 자기 합리화는 오히려
추해요. 내 작품을 읽고 마음대로 상상하면 됩니다. 굳이 내가 해명할 필요가 있겠어요?”
-SBS 드라마 ‘토지’는 보십니까.
“첫 회는 봤는데 그 뒤론 안 봐요. 내용이 너무 달라서….”
조 사장이 “소설에서는 직접 육성이 나오지 않는 별당아씨와 동학장군 김개주가 나와 이야기를 한다”고 거들었다.
“드라마에 기대를 걸었던 건 아녜요. 작가들이 토지문화관에 와서 집필을 하게 되면 방을 2개 차지해요. 무슨 행사가 있을 때는 불편하고
시끄럽고 창작에 방해가 되지요. 그래서 SBS에서 받은 원작료 2억원으로 창작실이 5개 딸린 별관을 바로 옆에 지었어요.”
-2억원밖에 못 받으셨나요.
“내가 그런 계약에 미숙해 다른 사람에게 맡겼더니 그이도 미숙해 그렇게 됐지요. 지나간 일을 후회해 무슨 소용 있겠어요. 내 손을
떠났으면 그만이죠.”
-집사람이 ‘토지’ 21권을 다 읽고 요즘 드라마도 빼놓지 않고 보는데 월선이 역을 맡은 배우가 소설에 나오는 이미지하고 다르다더군요.
“월선이가 소설에선 곱상하게 나오지요. 그림자 같은 여자인데 드라마에선 아주 윤곽이 팍팍 드러나더군요. 얼굴도 크고….”
김형국 교수가 “토지문화관 준공식에 김대중 전 대통령이 참석해 월선이 이야기를 했다”고 전했다. 김 전 대통령이 감옥에서 토지를
읽었는데 월선이가 용이 품에 안겨 죽는 장면이 토지의 백미라고 말하더라는 것이다.
-‘토지’에 나오는 등장인물은 모두 몇 명이나 되나요.
“800명 가량 될 거예요.”
-모든 인물이 작가의 분신이겠지만 그중에도 가장 애착이 가는 인물은 누구입니까. 조상호 사장은 창(唱) 잘하는 주갑이가 제일 좋다고
하는데요.
“주갑이는 그냥 무심히 쓰다 만들어진 인물입니다.”
‘토지’의 등장인물은 대부분 작가의 고향인 서부 경남 사람들이다. 주갑은 800명 중에서 거의 유일하게 등장하는 전라도 사람. 조
사장은 전남 장흥이 고향이다.
드라마 ‘토지’, 원작과 너무 달라
박 선생은 1989년 난생 처음 비행기를 타고 중국여행에 나섰다. 외국여행 기회가 적지 않았지만, ‘토지’의 맥이 끊길까 봐 두려웠고
복잡한 출국수속이 싫었다고 한다. 그러나 중국만은 꼭 가보고 싶은 나라였다. 죽(竹)의 장막이 걷힌 직후 베이징을 거쳐 토지 2부의 무대인
간도(間島)를 찾아갔다.
-한번도 안 가본 용정 거리가 소설에서 묘사한 것과 얼추 맞던가요.
“소설 쓸 때 참고한 책자들이 있었어요. 지리, 기후를 비롯해 모든 게 다 나와 있었죠. 거기에 작가의 상상력이 보태진 거죠. 간도에
살던 사람이 ‘간도에 산 적이 있냐’고 물을 정도였어요. 묘사와 내용에 리얼리티가 있어야 작품이 살거든요. 상상력과 직관력으로 정확하게
때려잡아야 해요.”
-토지 2부를 쓸 때 안수길(安壽吉)의 ‘북간도(北間島)’를 참고하지는 않았습니까.
“사투리를 배우려 ‘북간도’를 읽었어요. ‘토지’ 2부에서는 간도 방언을 사용해야 하니까.”
‘북간도’는 1959∼67년 ‘사상계(思想界)’에 연재된 5부작 대하소설. 1870년 조선 말기부터 1945년 광복까지, 북간도로
이주한 민족의 수난사를 그렸다.
-‘토지’의 무대, 하동 평사리에도 가본 적이 없다죠.
“안 가보고 소설을 썼는데 나도 놀랐어요. 동아일보 문명호 기자가 ‘토지’ 1부가 나온 뒤 평사리에 찾아가 기사를 썼어요. 평사리에
조대호라는 참판집이 있었답니다. 소설 속의 조준구를 실제로 찾으려고 무례하게 ‘족보 내놔라’고 했대요. 곳간 사진도 어쩌면 ‘토지’하고
똑같아요.”
-자료를 살펴보다 흥미로운 대목을 발견했습니다. 6·25전쟁 이전에 외할머니가 들려준 거제도의 누런 벼와 호열자(콜레라) 이야기에서
‘토지’ 이야기가 촉발됐다는 말을 한 적이 있더군요.
“외할머니는 이상하게도 눈알이 파랬어요. 남쪽에서 어떻게 무슨 피가 섞였는지 모르지만…. 깡마른 몸매의 외할머니는 만날 긴 담뱃대를
물고 계셨습니다. 이 양반이 시장에 가서 장을 볼 줄 모르는 거예요. 돈도 모르고…. 그때 풍속이 여자는 농사를 지어도 시장에는 안 갔죠.
외할머니는 거제도에 살다 통영으로 시집을 왔죠. 친정 문중 땅이 아주 넓어 조랑말 타고 돌았대요. 1902년 호열자가 돌아 사람이 너무 많이
죽었어요. 얼마나 죽었던지, 가을에 벼 베어 먹을 사람이 없을 지경이었답니다.
그 이야기가 참 인상적이었습니다. 머릿속에 색채로 다가오더라고. 죽음은 까만 빛 아닙니까. 까만 빛과 황금빛의 대비. 죽음과 삶. 그
이야기가 머릿속에 굴러다니다 작가가 되니까 더 생생해지는 거죠. 그것을 가지고 1부 정도 쓰려던 게 이렇게 확대됐지요. ‘김약국의
딸들’(1962)도 어려서 통영 외가에서 들은 얘기에서 나왔죠.”
-‘토지’ 마지막 21권은 광복을 맞아 백성들이 환호하는 장면으로 끝나잖아요. 공교롭게도 박 선생님이 1994년 광복절 새벽 2시에
‘토지’를 탈고했더군요.
“그건 절대 의도한 게 아닌데….”
-광복 이전에 성장한 사람에겐 광복이 강력한 체험이겠죠. ‘토지’가 광복에서 끝을 맺어 묻는 이야깁니다만, 박 선생님은 어디서 어떻게
광복을 맞았습니까.
“인천 남동에서였어요. 지금은 그곳에 공단이 들어섰지만 그때는 염전이었어요. 화약 원료로 쓰이는 나트륨 공장이 있었죠. 소금을 분해하면
나트륨이 나오지요. 남편이 그 공장 기술자로 있었죠. 일본 공업대학에서 응용화학을 전공했거든요. 학생은 모두 학병으로 끌려갔는데 화학분야
기술자라서 나트륨 공장에 취직한 거죠.
공장 직원들은 전부 일본인이고 남편만 한국 사람이었어요. 염부(鹽夫)들은 막사에서, 직원들은 관사에서 살았죠. 우리도 관사에서 살았는데
거기서 조금 가면 조선인 마을이 있었어요. 해방되니까 일본 사람들 사는 관사에서는 통곡하고 야단이 났죠.
조선인 마을에 국민학교가 있는데 거기에 모두 모이라는 거예요. 그때 내가 입고 나간 옷이 생각나요. 모두들 몸뻬입을 때였는데 분홍색
치마에 하얀 모시 적삼 입고 갔어요. 동네 유지들이 동네 생기고 이리 예쁜 새댁이 오기는 처음이라고 했어요. 그때 더웠어요. 모두 만세
부르고…. 진짜 너무너무 기뻤죠. 친일파말고는 전부 한마음이었어요.”
광복절 새벽에 ‘토지’ 탈고
문학에 관한 질문을 던질 때마다 선생이 번번이 ‘문학 이야기는 그만하자’고 막아 ‘마지막으로 하나만 물어보겠다’는 말을 여러 번
써먹었다.
-‘현대문학’ 2003년 4월호에 광복 이후를 다룬 ‘나비야 청산 가자’라는 신작 장편을 시작해놓고 얼마 안 돼 중단했어요. 언제 다시
시작할 계획입니까.
“내가 그거 때문에 병이 났는데요. 광복 이전을 다룬 ‘토지’가 열 가닥이라면 광복 이후는 수백 가닥 수천 가닥이 되는 거예요. 비장한
각오로 보약을 먹으며 몸을 다졌는데 너무 골몰하다 보니까 머리에서 불이 번쩍번쩍 났어요. 나는 처음에 그게 혈압 때문인지 몰랐어요.
육체적으로 힘든 점도 있지만 해방 이후를 건드릴 용기가 안 났어요. 작가가 진실에 도전한다면서 어물쩍 넘어가려면 안 하는 게 낫다고
봅니다.
내가 그 동안 지식인 욕을 많이 했잖아요. 정치가들이 나쁘지만 지식인도 나쁘다고 생각해요. 그야말로 잡아주고 끌어주고 막아주고, 이게
지식인이 해야 할 일이거든요. 그런데 오늘의 현실, 광복 후의 현실을 보세요. 한국의 현실만이 아니고 세계적인 추세예요. 다 편가르기예요. 우익
좌익이 있어서는 안 되는 거예요. 진보 보수가 있어서도 안 돼요. 있을 것은 오로지 생명이 흘러간다는 사실뿐이에요.”
-2004년 가을 50년 만에 고향 통영에 갔더군요. 대작가가 되어 금의환향한 감회가 어땠는지요.
“금의환향은 무슨…. 몇 해 전에도 통영시에서 준비한다는 소리를 듣고 안 가버렸어요. 진의장 시장을 안 지가 30년 됩니다.
하동세무서장으로 있을 때 처음 만났어요. 사람이 관료 같지 않았어요. 소설가 김승옥씨와 함께 1년에 한 번쯤 원주에 찾아왔어요. 그림도 그리고
시도 쓰는데 관료 중에 그런 사람이 드물죠. 고향 사랑이 대단한 분이죠. 통영시가 지금까지 개발 위주로 행정을 폈기 때문에 진 시장은
복원하겠다고 하더군요.”
50년 만의 귀향
김 교수가 “통영이 크게 바뀌었을 텐데 고향맛이 나던가요”라고 물었다.
“내가 살던 동네는 흔적조차 안 남았어요. 학교 다닐 때 세병관 돌 축대에서 무용을 했어요. 그때는 세병관이 초라했어요. 그걸 다
뜯어내고 본래 모습으로 복원했더군요. 크고 웅장했어요. 눈물이 막 쏟아지려 하더군요. 너무너무 아름다웠어요.”
국보 305호인 세병관은 조선 선조 때 통제영의 객사. 토지 4부에도 나온다. 조 사장은 50년 만의 귀향을 ‘고향과의 화해’라고
표현했다.
“전부 건물이 희더군요. 알록달록한 게 없고 흰색으로 통일돼 있더라고요. 시에서 조례로 그렇게 하도록 한 모양이에요. 주민도 협조하고.
통영은 역시 다르구나 하는 게 있어요.
통영을 세계적인 도시로 만들 수 있어요. 통영 울타리 안에 이순신의 행적이 다 있거든요. 내가 거기서 이렇게 말했어요. 이순신을
무장(武將)이기보다는 위대한 인간으로 보라고. 삼국지에서 이순신과 조금 가깝다고 느껴지는 인물이 제갈량이죠. 모든 영웅 무장이 패권주의자예요.
침략하잖아요. 그러나 이순신은 패권주의자가 아니에요. 오로지 우리의 삶을 지킨 사람이에요. 확대하면 인류도 지킬 수 있는 사람이에요.”
‘한국의 나폴리’라 불리는 통영은 뛰어난 예술가를 다수 배출했다. 음악가 윤이상씨, 시인 유치환 김춘수 김상옥씨가 통영 출신.
‘김약국의 딸들’에 나오는 대로 바닷빛이 고운 탓인가. 아니면 노오란 유자와 붉은 동백꽃이 피는 청명한 기후 탓인가.
“우연이 아니고 필연성이 있어요. 기후도 좋고 풍랑이 잔잔합니다. 통영의 인적 자원이 어떻게 형성됐는지를 알아야 해요. 임진왜란 전까지
고성이 중심이고 통영은 아주 보잘것없는 어촌이었죠. 이순신이 나타나면서 통영이 번성한 거죠. 이순신이 배와 칼과 활을 만들기 위해 모은 사람들,
또 모여든 사람들이 전부 기술자거든요. 그때 기술자는 모두 손으로 뭔가를 만드는 장인이었어요. 그러니 예술가라고 볼 수 있어요. 그런 사람들이
팔도에서 모여든 거죠.
전쟁이 끝나고 고향으로 돌아가기도 했지만 많은 사람이 주저앉았어요. 그 이유는 통영에 먹을거리가 풍부했기 때문이죠. 조류(潮流)와 관계
있는 모양인데 유별나게 통영 것이 맛있어요.
겨울에 외투가 필요없을 정도로 기후가 온화해요. 우리가 학교 다닐 때도 양말 안 신고 한겨울을 보낸 때가 있었어요. 농사 짓는
사람들보다 바닷가 사람들이 진취적이죠. 봉건적인 것에서 빨리 벗어났다고 볼 수 있어요. 여러 가지 조건 때문에 장인이 많이 눌러 살았어요.
선자방, 칠방이 있어서 나라에 진상을 하던 공예의 중심이죠.
소반도 통영 것이라야 알아주고 최고급 갓도 통영에서 만들었죠.”
-통영에서 초등학교 동창을 만나셨나요.
“통영제일국민학교 동창들을 거의 60년 만에 만났죠. 6·25전쟁 때 통영으로 피란 갔었죠. 매번 뭔가를 살짝 놓고 가던 신연이라는
동창이 나왔어요. 그런데 도저히 얼굴을 알아볼 수가 없어요.”
-‘토지’ 4부에서는 일제 강점하에서 지식인들이 지리산에 들어가 저항하는 모습을 그렸지요.
“이모부가 지리산에 들어가 나무를 베어 상다리를 만들어 팔았어요. 지리산 나무가 좋았으니까. 그런데 얼마 안 가 겁나서 못 하겠다고
내려왔죠. 지리산엔 일본 순사도 함부로 못 들어갔어요.
범죄자들도 쫓기다 지리산으로 숨어들고, 양반가의 여자와 천주교인, 동학쟁이도 들어갔죠. 내가 아는 사람도 철학사전 팔아서 쌀자루 사
들고 입산했어요. 현실에 저항하는 사람들이죠.”
연좌제 걸려 미국행 좌절된 딸
-정부여당이 제정하려는 친일진상규명법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세요.
“친일진상 규명을 안 한 것은 이승만 박사의 과오입니다. 그 때문에 일본과 투쟁한 사람들이 그야말로 전부 지하에 묻히게 됐잖아요. 그때
제대로 처리하지 않아 모든 찌꺼기가 남아 있는 거예요. 친일규명은 당대에 끝냈어야 합니다. 자료 수집을 하고 기록을 엄격히 남길 필요는 있지만.
이승만 정부 때 못 했다고 해서 후손에게 묻는 건 잘못입니다. 이미 때가 늦었어요. 하더라도 바람 빠진 풍선이에요. 친일파들은 다 누리고
가버렸잖아요.
그리고 어떤 제도에 의해 어쩔 수 없이 한 것은 스스로 한 것과는 성질이 다르지요. 창씨개명을 했지만 어쩔 수 없이 한 거잖아요.
징병이나 징용도 따지고 보면 친일이지만 총칼 들고 위협하는데 어쩌겠어요. 학자들이 자료를 정리하는 것으로 그쳐야 합니다. 지금 처벌받아야 할
사람이 없잖아요.
위안부에 대해 일본이 배상한다고 해도 너무 억울한 일이에요. 배상받을 사람이 몇이나 됩니까. 대부분 다 죽었지요. 일본은 몇몇 남은
사람에게만 해주고 입 딱 씻을 거 아니에요. 일본한테서 배상을 충분히 받아 위령탑과 자료관을 건립해야 합니다. 일본이 이러이러한 악행을
자행했다는 걸 역사적으로 남겨야 합니다. 국가가 없었기에 보호받지 못하고 위안부로 나간 것은 어쩔 수 없다 하더라도 그 사람들은 정부가 생기고
돌아왔을 때도 사회에 복귀하지 못했어요. 징병·학병에서 돌아온 사람들은 모두 사회로 복귀했지만 위안부였기 때문에 복귀를 못 했단 말이에요. 늘
감추고 살아야 했지요. 정부와 국민이 그 사람들을 떠안아야 했어요.
마찬가지로 오늘날 친일파가 몇 사람 살아 있습니까. 거의 다 죽었죠. 후손에게 죄를 묻는 건 옳지 않은 일입니다. 연좌제죠.
딸(김영주)이 미국 가려고 할 때도 연좌제 때문에 못 갔어요. 그때 내가 참 많이 울었어요.”
딸에게 연좌제의 불이익을 준 선생 남편에 대해서는 나중에 이야기가 더 나온다. 불교미술을 전공하는 김영주씨는 자매라고 생각될 정도로
어머니를 닮았다.
“조선시대에도 삼족(三族)을 멸문한다는 말이 있었지만 부모와 자식은 서로 고발하지 못하게 돼 있었어요. 그런데 여기는 그야말로
불고지죄라는 게 있잖아요. 옛날엔 살인 죄인의 아들이라고 해서 핍박을 받았잖아요. ‘토지’에도 나오지만. 그게 인간의 기본권 침해예요. 아버지의
것과 아들 것은 전혀 다르거든요.”
무한경쟁은 멸망의 길
-2004년 11월 서울대에서 ‘지식인의 착각과 이기’라는 제목으로 특강을 하셨지요. ‘상대방이 있어야 비로소 내가 있을 수 있다’
‘조화와 균형의 원리가 절실히 필요하다’는 요지를 신문에서 읽었습니다. 우리 사회의 편 가르기가 너무 심해져서 그 말씀이 와닿더군요.
“서울대 강의도 요즘 지식인에 대한 비판이 아니고 본질적인 얘기였죠. 구태여 지식인이 아니라 인간이라고 생각해야 되는 거죠. 지구를
하나의 생명체로 보면 인간은 악성 바이러스예요. 석유를 찾아내기 위해 구멍 뻥뻥 뚫고 이라크에서 야단나고….
지식인들은 ‘모순(矛盾)’을 부정적으로 사용하지요. 만질 수 없고 보이지도 않지만 인간에게는 영성, 영혼이 있어요. 그 영혼이 어디
떠다니는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없다고도 하고, 있다고도 합니다. 생명의 능동성이 영혼 아니겠어요. 능동적인 게 어디 보입니까, 안 보이지요.
풀도 능동성이 있기 때문에 자라는 거예요. 쉽게 말해 능동성을 영혼으로 봅니다. 반대로 물질은 보이잖아요. 보이는 건 피동적이죠. 움직이지 않고
만질 수도 있어요.
중간체로는 불과 물이 있어요. 불도 물체처럼 잡을 수는 없어요. 물도 잡을 수 없어요. 물론 얼음은 잡을 수 있지만 이미 물의 기능을
잃은 거지요. 물과 불은 흐르거든요. 끊임없이. 속성이 같아요. 불도 조그마한 불씨가 시발이 돼 번져나가고, 물도 빗방울에서 흘러가잖아요.
말하자면 저절로 움직이는 거지요. 그러니까 물과 불은 영혼과 물질의 중간적인 존재 같아요. 영혼이 능동적이라면 물질은 피동적인데 이게 움직이니까
능동적으로 오해할 수도 있지만 의지로 움직이는 게 아니거든요. 능동과 피동의 중간입니다. 불하고 물은 상극이예요. 불은 물을 끊임없이 말리고
물은 끊임없이 불을 끄고. 불은 위로 올라가려 하고 물은 내려가려 하고. 상극인데 상생하지요.
모순이라는 말을 우리가 받아들여야 해요. 어떤 창도 뚫을 수 없는 방패와 어떤 방패도 뚫을 수 있는 창이 같이 존재하는 겁니다. 창은
어떤 방패도 뚫을 수 있고, 막을 수 있는 방패가 없다면 창만 존재하는 거예요. 또 어떤 창도 막을 수 있는 방패가 있다면 방패만 존재하는
거예요. 창 없는 방패가 무슨 소용이 있느냐, 이거예요. 물과 불은 서로 상극이면서 같이 존재해요.
우주는 모순으로 존재합니다. 지구도 원심력과 구심력, 팽팽한 두 상극 때문에 우주공간에 떠 있는 거 아니겠어요, 그렇지 않나요.
지식인들이 얄팍하지요. 표피적인 거 가지고 모순이라 공격하지요. 이분법으로 갈라놓고 하나로 만들려는 것이 인간의 이기와 착각이거든요. 동양에서는
여백이 있습니다. 여백도 있고 모순을 수용하지요. 서양에서는 뭐든지 2개로 갈라놓고 하나로 만들려고 하고.
요새 흔히들 무한경쟁이라 말합니다. 지식인도 쓰고 대통령도 써요. 무한경쟁이 얼마나 무서운 말입니까. 무한경쟁의 끝이 어디냐 하면
하나만 남는다는 얘기예요. 둘만 있어도 경쟁하는 것이죠. 하나만 남으면 종자가 없어져요. 2개가 있어야 종자가 납니다. 그러니까 무한경쟁은
멸망을 의미하는 거지요.”
박 선생이 발간하던 문학·환경 계간지 ‘숨소리’가 8호를 끝으로 폐간됐다. 계간지 발행에 들어가는 비용을 작가 지원에 쓰기로 했다고
한다.
“토지문화관 하기 전엔 돈을 벌면 환경잡지를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을 했죠. 그런데 ‘녹색평론’(발행인·김종철)이 출간되고 환경연합에서도
잡지를 내죠. ‘숨소리’는 문학과 환경을 같이 다루려 했는데 토지문화관을 꾸리면서 잡지를 내기가 도저히 불가능했어요. 2년간 잡지 만드느라
정확히 6200만원 나갔어요. 책을 만드는 데도 돈이 들지만 공짜로 보내주는 데도 봉투와 우표 사는 돈이 들어요. 돈을 아껴서 창작실 건물을
짓기로 생각을 바꿨죠. 어떤 분이 도와주겠다고 했지만 뜻은 고마운데 너무 부담 주는 일이어서 사양했습니다. 국가에서 해야 할 사업이에요.”
청계천 복원, 토지문화관 세미나서 비롯
-청계천 복원사업에 대해서도 관심이 많으시죠.
“청계천 복원사업은 토지문화관에서 두 번 열린 세미나가 발단이 됐어요. 세미나 할 때는 그게 되리라는 희망도 없이 한 거예요. 이명박
서울시장이 청계천 복원을 선거공약으로 내걸고 당선돼 뜻밖에 실현된 거지요.
그건 수도 서울을 바꾸는 큰 역사(役事)거든요. 프랑스의 센강 하면 세계에서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어요. 꿈같이 생각하잖아요. 실제
가보니까 개천이에요. 청계천을 제대로 복원해놓으면 오히려 더 나을 거예요. 그런데 프랑스 사람은 센강에 대한 애정이 엄청나거든요. 시내 한복판에
있는 청계천은 센강류(類)가 아녜요. 한강은 보물이죠. 보물.”
-환경운동가로서 수도이전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합니까.
“대한민국에 서울만한 데가 어디 있습니까. 북한산 관악산 같은 명산이 둘러싸고 있죠. 세계적으로 이만한 도시가 없어요. 완전하게 갖춰진
거죠. 수도는 대한민국의 얼굴입니다. 수도를 봄으로써 한국이라는 이미지가 오는 거예요. 중심이 중심을 잡고 균형발전이 돼야지 중심이 없는
균형발전이 어디 있습니까. 그렇잖아요. 천도하는 비용 절반만 들여도 서울을 잘 솎아내고 고칠 수 있어요.”
-‘토지’ 2부의 주무대인 간도 일대는 역사적으로 고구려 땅입니다. 지금 중국이 고구려를 중국의 지방정권에 편입시키려 하고 있는데요.
‘토지’의 작가로서 할 말이 많을 것 같아요.
“일본에 합병되기 직전까지 청나라와 조선 간에 간도 문제는 미해결로 남았습니다. 청나라에서 간도는 완전한 완충지대 처녀지였죠. 경작도
안 하고 자연 그대로 두었어요. 청나라 시조인 누루하치가 태어난 곳이기 때문이죠.
누루하치가 통일한 여진족에도 우리 한인의 피가 흘러들어가 있어요. 삼국시대에 고구려 유민이 많이 넘어갔거든요. 백두산
정계비(定界碑)에는 토문강(土門江)이라고 돼있어요. 토문강은 북류(北流)해서 송화강에 이르죠. 두만강은 도문강(圖門江)이죠. 그러니까 우리
영토가 역사적으로 하얼빈까지 가는 거죠.
중국과의 국경협상 때 이중하가 ‘내 목을 쳤으면 쳤지, 국경을 좁힐 수는 없다’고 강경히 맞섰지요. 이 이야기를 ‘토지’에 썼더니
후손들이 고맙다고 찾아왔습니다. 그 국경이 바로 송화강이죠. 한일합방이 됐을 때 일본인들이 청국과 간도협약을 맺어 간도를 내줬어요. 영사관
설치와 철도 부설권을 얻어내려 국경을 양보한 것이죠. 한일합방이 무효라면 간도협약도 무효예요. 고구려 영토 정도가 아니고 송화강까지 올라갈 수
있는 거죠. 그런데 김일성이 마오쩌둥과 회담해 다시 백두산 천지 반을 떼줬어요. 이것이 걸림돌이죠.”
박 선생은 원주 단구동 집에서 토지 4, 5부 집필을 마쳤다. 이곳에 택지를 개발하던 한국토지공사가 그 집을 사들여 토지문학공원으로
조성했다. 박 선생은 보상받은 돈으로 원주시 흥업면 매지리에 대지를 마련했고 이 땅에 토지공사가 토지문화관을 지어 기증했다. 박 선생은
‘토지’의 작가이고 토지공사는 ‘토지’를 매개로 사업을 하니까 동업자라고 할 만도 하다.
-토지문화관 운영에 어려움은 없습니까.
“나는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잘되는 문화관이 별로 없는데 여기는 흑자는 안 나도 적자도 안 나니까. 크게 할 생각도 없어요. 욕심
부리면 오히려 일만 복잡해져 사람이 지쳐요. 분수에 맞게 자그마하게 솔솔하게 이렇게 차근차근 가는 게 오히려 좋습니다.”
김 교수가 “박 선생님의 문학성에다 엄격성이 더해져 이만한 문화관이 만들어진 것만 해도 우리 사회에서는 고마운 일”이라고 거들었다.
“고마워요. 어떤 면에서 가족적인 거죠. 밭이 500평 되거든요.”
-직접 농사도 지으세요?
“이제는 사람 사서 하지요. 칠순 노인네가 이 큰 것을 어떻게 다 하겠어요. 나는 거들죠. 쌀과 생선, 고기만 사먹고 고추 채소 같은
부식의 절반 정도는 공급합니다.”
-농약을 안 주나요.
“고추농사만 20년 지어 내가 도사예요. 지력(地力)을 돋우면 식물에 저항력이 생겨요. 고추도 처음에 농약을 안 주면 3분의 1도
수확이 안 돼요. 5, 6년쯤 되면 수확이 같아져요. 7, 8년 지나면 더 많아져요. 고추 나무가 돼요. 나무가 돼 무진장으로 열리는 거예요.
화학비료를 주면 그리 안 돼요.
사람의 병도 먹을거리 때문에 생깁니다. 아토피성 피부염도 유기농 채소를 먹어야 고쳐지거든. 그런데 유기농도 사기 치는 게 많아졌어요.”
자그마하게, 솔솔하게, 차근차근…
낮 12시 조금 지나 시작한 인터뷰가 오후 2시를 넘겼다. 조 사장이 배가 고픈지 원주 시내 일식집 ‘미락’으로 장소를 옮기자고 했다.
원주에 갈 때 22년 전 최일남씨가 선생을 인터뷰했던 ‘신동아’(1982년 10월호) 기사를 복사해 들고 갔다. 선생은 “어떻게 이런
자료를 찾았느냐”고 놀라면서 “갖고 있지 않은 자료이니 놓고 가라”고 부탁했다.
“남자들은 부인이 신문 잡지에 난 글을 챙겨주는데 나는 혼자 다 챙기려니까 많이 잃어버렸어요. 심지어 소설도 없어진 게 있어요.”
오봉산(五峰山) 자락 아래 토지문화관 옆에는 장독 50여개, 다듬잇돌 10여개와 맷돌이 놓여 있다. 70∼100년 된 투박한
항아리들이었다. 쇼와(昭和) 연호가 새겨진 것도 있었다.
“어떤 분이 이곳에 보존하면 100년은 갈 거라면서 더 가져다놓겠다고 했습니다. 그분이 ‘항아리는 눈 올 때 보기 좋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내가 ‘당신이 시인’이라고 했습니다.”
일행은 박 선생과 항아리 앞에서 사진을 여러 장 찍었다. 항아리 기증자의 말대로 눈 내리는 날 찍었더라면 더 아름다웠을 것이다.
일식집 ‘미락’에 들어서자 여사장이 뛰쳐나와 박 선생을 반갑게 맞았다. 우리는 초밥에 매실주를 시켜놓고 다시 이야기 보따리를 풀었다.
박 선생이 드라마 ‘토지’에서 결정적으로 잘못된 것을 집어냈다.
“‘의관(衣冠)집 자손’을 위관(尉官)집으로 바꾸어놓았어요. 옛날에 위관이라는 벼슬은 없어요. 그러니까 의관집은 옷과 갓을 갖춘
양반집이라는 뜻이에요. 벼슬이 아니거든. 위관이라고 자막 설명이 틀리게 나왔어요. 아연했어요. 그런 망신이 어디 있어요.”
‘의관집 자손’ 김평산은 몰락한 양반의 후예로 앞가림도 못 하며 공연히 어깨에 힘을 넣는 위인. 최치수의 하녀 귀녀와 칠성이를 끌어들여
살인모의를 주동한다.
조 사장이 “귀녀는 하녀인데 너무 섹시하게 보이더라”고 하자 박 선생은 “옛날에 하녀가 루즈를 어떻게 칠해요”라며 웃었다.
-셰익스피어 작품은 가극 영화 드라마 발레 등 여러 장르로 만들어지지 않았습니까. 명실공히 국민문학이 된 것이죠. 어떻게 보면 ‘One
source. multi-use’라고 할 수 있죠. 드라마 가극 창극으로 만들어지고 ‘청소년 토지’가 나오는 걸 보면 ‘토지’가 국민문학이
돼가는 조짐이 아니겠습니까.
“통영에서 어시장에 들렀는데 장사하는 분들이 전부 악수를 청해요. 너무 신기해 작가인 나를 어떻게 아느냐고 물었더니 ‘책을 읽었다’는
거예요. 상인들이 ‘토지’를 많이 읽어요. 일산 백화점이나 휴게소 같은 데 가서도 인사를 받아요. 어떤 상인은 나를 불러 세워놓고 ‘토지’를
너무 좋아한다며 시계를 싸주더라고요. 음식점 구석에 들어가 밥을 먹고 있으면 뭐 한 가지라도 더 나와요.”
제임스 조이스의 작가정신 존경
필자가 “음식맛 떨어질까 봐 질문 드리기가 조심스럽지만 기왕 인터뷰를 시작했으니 알찬 인터뷰가 돼야 하지 않겠습니까”라며 또 문학
이야기를 꺼냈다. 선생은 “문학 얘기는 좀 안 했으면 좋겠어요”라고 말했다.
-정말 마지막으로 하나만 묻겠습니다. 문학의 길에서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작품은 무엇입니까.
“제임스 조이스의 작가정신을 존경했습니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사악한 데가 있어요. 나쁜 뜻이 아니라 어떤 면에서는 정직하다고 볼 수 있는
거죠. 불행한 생애죠. 아픔, 고난의 생애랄까.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은 훌륭한 작품이죠. 토머스 울프, 윌리엄 포크너도 좋아해요.
토마슨 만의 ‘마의 산’도 감명 깊게 읽었어요.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와 헤르만 헤세의 ‘유리알 유희’도 읽었지만
별로 안 좋아해요. 너무 인간의 의식 속에서 감정적 유희를 한다고 할까요. 특별히 한 사람한테 영향을 받은 건 없어요.”
박경리 선생에 관해 쓴 글에는 외손자 ‘원보’ 이야기가 자주 나온다. 원보가 태어난 지 일주일 후에 아버지(김지하)는 민청학련 사건으로
구속돼 교도소에 들어갔다.
솔 출판사가 펴낸 ‘수정의 메아리’에는 한국일보 기자이던 김훈이 쓴 ‘1975년 2월15일의 박경리’라는 글이 실려 있다. 김씨의
글솜씨를 유감없이 드러낸 명문이다. 이날 밤 9시경 석방된 김지하는 장모가 10개월 된 아들을 업고 마중 나와 추위에 떠는 줄도 모르고
지지자들의 무등을 타고 ‘우린 승리하리라’를 부르다 명동성당으로 향한다. 박 선생은 벌금을 미납해 밤 11시경까지 출감하지 못하던 백기완씨에게
건네주라며 학생들에게 몰래 돈을 주고 원보를 업고 홀로 영등포교도소 앞을 떠난다.
김지하는 ‘동아일보’에 쓴 글이 정권에 밉보여 한 달 만에 재수감됐다가 전두환 정권이 들어선 1980년 12월 석방됐다. 원보는 일곱
살이 될 때까지 아버지 얼굴을 제대로 못 보고 컸다. 할머니는 이런 손자를 업어 키우며 애틋한 정을 쏟았다.
-손자 원보 놈도 할머니 자주 찾아와요?
조 사장이 “그 사람도 이제 서른이 넘었어요. 원보씨라고 해야지”라고 말했다. 필자는 “할머니한테는 놈이죠”라고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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