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7월
작가 조정래(趙廷來·59)씨가 ‘태백산맥’을 시작으로 ‘아리랑’을 거쳐 ‘한강’에 이르는 20년 간의 글쓰기를 마치고 숨 고르기를 하고
있다. 작가가 장년기의 거의 전부를 바쳐 쓴 세 편의 대하소설은 200자 원고지 5만1500장 분량으로, 쌓아놓은 원고지의 높이가 그의 키 세
배를 넘는다.
1983년에 집필을 시작해 6년 만에 완결한 ‘태백산맥’은 이념의 금기지대를 깊숙이 파고들면서 분단문학의 최고봉을 이루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태백산맥’은 지금까지 550만부가 팔리며 작가에게 찬사와 함께 경제적 안정을 가져다주었지만 해방 이후 금기시되던 빨치산들의 삶과
투쟁을 작품화한 데 따른 유형무형의 고통도 겪게 했다.
조씨는 ‘태백산맥’을 완간한 후 약 1년 간 국내외 취재활동을 해 1990년 12월 ‘아리랑’의 집필에 착수해 1995년 7월에
탈고했다. ‘아리랑’은 일제의 토지조사로 농토를 잃은 농민들이 하와이 만주 러시아로 흩어져 생존과 항일의 정신을 이어가는 모습을 그렸다. 그리고
1997년 베트남 사우디아라비아 독일 등으로 취재여행을 다녀와 다음해부터 ‘한강’을 쓰기 시작해 2002년 완료했다. 마흔에 ‘태백산맥’을
시작해 ‘아리랑’ ‘한강’을 쓰고 나니 그의 나이 예순이었고, 초등학교에 다니던 아들은 대학을 나와 군대를 마치고 결혼해 손자를 안겨주었다.
그는 주색잡기와 담을 쌓고 산다. 둔부 종기, 신경성 위궤양, 오른팔 마비 등 직업병이 생길 정도로 오로지 글쓰기에만 매달려 20년
동안 대하소설 세 편을 완성했다. ‘한강’을 끝내고 쓴 ‘20년 글 감옥에서의 출옥’에는 조씨의 작가 정신을 보여주는 내용이 들어있다.
‘진정한 작가란 그 어느 시대, 그 어떤 정권하고도 불화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모든 권력이란 오류를 저지르게 돼있고 진정한 작가는
그 오류들을 파헤치며 진실로 말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작가는 정치성과는 전혀 관계없이 진보적인 존재일 수밖에 없으며, 그러나 진보성을 띤
정치세력이 배태하는 오류까지도 직시하고 밝혀내야 하기 때문에 작가는 끝없는 불화 속에서 외로울 수밖에 없다.’
작가는 최근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궁내동 중앙하이츠 빌리지로 이사와 아내 김초혜(金初蕙·59) 시인과 단 둘이 산다. 빌라 앞은
분당구에도 이런 곳이 남아 있을까 싶은 시골 마을이다. 바로 앞산에 덕양군(중종 아들) 묘소가 있다. 아침 일찍 찾아갔을 때 김시인이 차와
과일을 내왔다. 작가는 대학에 강연을 갔다가 선물로 받았다는 철쭉 분재에 스프레이로 물을 뿌리며 “분재는 좁은 공간에 나무를 심어놓고 고문을
하는 취미”라고 말했다.
신문사 논설위원도 글을 써서 먹고 사는 직업이지만 사설은 길어봐야 200자 원고지 6장, 칼럼은 10장 정도다. 어쩌다 잡지에 길게
써봐야 150장을 넘지 않는다. 조씨가 쓴 ‘태백산맥’(10권)은 1만6500장, ‘아리랑’(12권)은 2만장, ‘한강’(10권)이
1만5000장이다. 전업작가가 20년 동안 쓴 글이라고 하더라도 장강(長江)과 같은 글의 길이에 숨이 막힌다.
키보다 세 배 더 높은 원고량
―초인적인 것에 가까운 글쓰기의 에너지는 어디에서 나오는 것입니까.
“1959년 서울에 올라와 1960년대 후반까지 수도가 없는 성북동 산동네에서 살았습니다. 고등학교 1학년 때부터 대학 4년 졸업하고
군대 가기 전까지 7년 동안 물지게를 졌습니다. 엄동설한에 눈이 내린 날은 물 길러 가기가 정말 싫습니다. 추운 날 산동네 비탈길을 물지게를
짊어지고 올라오는 일이 보통 지겹고 힘든 게 아니에요. 이불 속에서 꾸물꾸물하다가 한 10분 지나버리면 30∼40명이 줄을 서요. 게으름을
떨치고 빨리 일어나면 가장 먼저 도착해서 금방 물을 담아 돌아올 수 있어요. 인생이 별것 아닙니다. 남들보다 5분 빠르게 움직여 부지런을 떨면
항상 내가 앞에 갈 수 있다는 깨달음을 물지게질을 통해 얻었습니다.”
―이 시대에 태어난 작가의 소임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나는 거의 병적일 만큼 실존적인 물음에 대한 책임의식을 지니고 있습니다. 나는 왜 이 땅에 태어났을까? 왜 우리 역사는 이렇게
흘러왔을까? 작가는 무엇을 써야 할 것인가? 내 기질과도 관련이 있을 겁니다. 이런 땅에 태어난 야속함, 원망스러움, 어린 시절 6·25를
겪으면서 상처 받고 핍박 받은 것들이 복합적으로 얽혀있겠죠.
우리가 문학을 시작할 때는 순수문학만이 문학의 전부인 것처럼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참여문학은 존재하지 않았지요. 김동리 황순원 같은
분들이 전부 그런 식으로 몰고갈 때입니다. 참여와 역사 같은 주제가 강한 것에 대해 천착을 하다보니 등단하는 데도 불리했어요. 대학시절에 등단을
못하고 겨우 군대를 마치고 와서 했습니다. 내가 알고 있는 것을 쓰지 않는다면 작가가 아니지 않느냐 하는 사명감에 긴 소설을 세 번씩이나 쓰게
됐습니다. 참 복잡한 문제입니다. 단순하게 설명이 안돼요.”
1989년 우익단체들이 ‘태백산맥’을 쓴 작가를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고발한 사건은 아직도 종결되지 않아 검찰의 최장기 미제 사건으로
남아있다. 500만권 이상 팔려 전국민이 읽다시피한 소설을 유죄 의견으로 기소하기도 어렵고, 그렇다고 무혐의 처분을 내리면 우익단체들이 또
고발을 할 테니 검찰은 그저 세월에 맡겨놓기로 한 것 같다. 그동안 국가보안법이 개정 또는 폐지돼 자동 종결되기를 바라는 눈치다.
1999년 우익단체들은 ‘태백산맥’에 대해 500개 고발 사항이 담긴 고발장을 검찰에 접수했다. 검찰은 이중 120개를 추려 작가에게
사실을 입증할 객관적인 자료를 내놓으라고 요구했다.
“빨치산도 인간이었다”
―120개 심문 사항은 예를 들면 어떤 것이었나요. 120개 질문에 대해 일일이 증거자료를 갖추어 답변하는 것이 보통일이 아니었을
텐데….
“‘태백산맥’에는 여·순반란 사건 때 미국 비행기가 뜨고 미국 함정이 여수 앞바다에 폭격을 한 내용이 나옵니다. 우익단체에서는 이런
허위 사실을 날조한 조정래는 빨갱이라고 고발한 거지요. ‘백두산 호랑이’라고 불리는 토벌대장 김종원이 국민학교 운동장에서 좌익혐의자들을 모아놓고
한 명씩 끌어내 일본도로 목을 치는 내용도 새빨간 거짓말이라는 거지요.
객관적 자료라는 것은 책·신문·보고서 등을 말합니다. 당시 사건을 겪은 사람들에게 취재했다고 해도 안 통합니다. 내가 직접 목격하고
체험한 거라고 해도 안됩니다. 예를 들면 미군 비행기가 폭격을 해 불발탄이 바로 우리집 마당에 떨어졌는데도 그것은 객관적 자료가 아니랍니다.
그리고 미군 LST가 여수 앞바다에서 폭격을 가하는 것을 본 사람들이 수두룩한데도 증인을 부를 필요가 없다는 겁니다. 얼마전에 이를 입증하는
미국 쪽 사진자료가 공개됐습니다.
노근리 사건도 미국 기자가 써서 퓰리처상을 받고 기밀문서를 통해 입증이 되니까 믿어주는 거지요. 나같은 사람이 쓰면 거짓말이 되는
거예요. 검찰 조사를 받느라 일주일간 ‘한강’ 쓰기를 중단하고 120개 항목에 대한 자료를 모두 찾아서 100% 제출했어요. 답변서에 인용한
책만 17권에 이릅니다. 김종원이라는 토벌대장 이야기는 국회 속기록에도 나옵니다. 만군(滿軍) 출신으로 거창 양민학살 사건에도 관련됐고 이승만
대통령으로부터 신임을 받아 승승장구했습니다.”
조씨는 태백산맥 때문에 1994년 치안본부(경찰청) 남영동 분실에서 조사를 받았다. 김영삼(金泳三) 정부 시절이라 고문을 당하지는
않았지만 모욕적인 언사와 공포 분위기는 여전했다.
―1980년대 초까지 분단문학은 국가보안법이 허용하는 범위 내에서만 썼지만 태백산맥은 실정법이 허용하는 한계를 뛰어넘었다는 평가가
있습니다. 우익단체 쪽에서는 심지어 친북(親北) 문학이라고 공격을 하는데요.
“감정적인 반공주의자들의 공격입니다. 소설을 제대로 읽어야 합니다. 소설을 오독하는 것도 독자의 자유입니다. 그러나 상대방을 공격하기
위해서 억지 주장을 하는 것은 명예훼손이고 무고입니다.
분단 상황에서 반공주의자들은 상대방을 빨갱이라고 몰아붙여 백전백승했습니다. 이들에게 경찰과 군대는 모두 옳고 성역이며 절대로 더럽혀서는
안 되는 조직이 됩니다. 공산주의자와 빨치산은 무조건 때려죽일 놈들이고 악마고 흡혈귀라고 가르쳤습니다.
이런 상황이니 빨치산도 아픔을 느끼고 사랑을 하는 인간이며 배움과 인정이 있는 사람들이었다고 말하는 것조차 용납을 못하는 겁니다. 이런
감정적인 반공주의를 벗어나지 못하면 우리는 분단의 문제를 이념적으로 해결할 수 없습니다.
남쪽에서 기득권을 행사하는 사람들이 있다고 하면 북쪽 정권을 유지하면서 기득권을 행사하는 세력도 있습니다. 조정래는 북쪽의 기득권
세력에게조차 비판의 대상입니다. 나는 1950년대의 상황에서 공산주의자와 빨치산의 입장을 말하는 것이지 전쟁 이후에 사회주의 독재정권을 꾸려온
김일성 체제를 옹호하는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감정적 반공주의자들이 태백산맥과 나를 친북으로 모는 것은 착각이고 오류입니다. 분명히 말하거니와
나는 친북주의자가 아닙니다.”
‘태백산맥’은 통일의 징검다리
―김대중(金大中) 정부는 대통령 선거공약으로 국가보안법 개폐를 내걸었지만 한나라당과 자민련의 반대로 지키지 못했습니다. 국가보안법에
대해서 개인적으로 어떤 생각을 갖고 있습니까.
“당연히 폐지돼야 합니다. 국가보안법의 뿌리를 캐고 들어가면 일제시대 독립운동가들을 탄압하던 치안유지법이 나옵니다. 국가보안법말고도
얼마든지 간첩을 잡을 수 있고 처벌할 수 있습니다. 박정희(朴正熙) 정권이 독재 강화의 방법으로 써먹은 법을 민주화시대에 그냥 놓아두고 있는
것은 말이 안되죠. 6·15 공동선언에서 남쪽의 대통령이 북쪽의 수뇌와 만나 포옹을 하고 민족 통일의 역사를 열어가기로 합의했지 않습니까.
국가보안법 개정도 못하고 이 정권이 끝난다면 6·15 공동선언의 정신을 스스로 부인한 것이 돼버립니다. 이런 논리의 모순은 국제적 망신입니다.
일거에 없애기 어렵다면 부분 개정이라도 해야 합니다.”
―태백산맥 때문에 노태우(盧泰愚) 정권 때 세무조사를 받았다지요.
“1983년 ‘현대문학’에 연재를 시작해 1986년에 제1부 3권을 단행본으로 냈습니다. 문예지에 연재할 때는 별 관심이 없다가
단행본으로 나오니까 운동권에서 폭발적으로 읽혔습니다. 그러자 수사기관들이 주목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무렵 방송 프로그램에 나를 출연시킨 KBS
직원들이 한직으로 밀려나기도 했습니다. 참으로 미안했습니다.
우익단체가 사법당국에 진정서를 냈지만 검찰이 1991년 문제 삼지 않기로 했습니다. 그러다가 영화로 만드니까 우익단체들이 120페이지가
넘는 고발장을 만들어서 고발하기에 이르렀습니다. 태백산맥은 작가에게 영광을 안겨줬지만 그에 못지않은 고통을 지금까지 주고 있습니다. 태백산맥을
출판한 한길사가 세무조사를 받고 추징을 당했습니다. 내가 탈세를 했더라면 파렴치범으로 몰렸겠지요.”
태백산맥을 영화화했던 임권택(林權澤) 감독이 프랑스 칸 영화제에서 ‘취화선’으로 감독상을 받았다. 임감독은 신동아 6월호 인터뷰에서
“원작 태백산맥은 좌편향적인 느낌이 드는 작품이지만 영화는 이데올로기 지향성에서 다르다”는 말을 했다. 물론 임감독이 문학작품에 대해 정밀한
분석 능력을 가진 사람은 아니다.
―태백산맥에 국가보안법의 잣대를 들이대는 것에 동의하지 않는 독자들 중에는 이 책이 해방공간 그리고 전쟁의 무대에서 좌익혁명에 가담했던
사람들에 대한 긍정 또는 동정의 시각을 담고 있다고 보는 사람도 있습니다.
“모든 가치는 상대적입니다. 가치 이전에 감정도 상대적이죠. 아까 말한 대로 공산주의자들은 무조건 악의 표상이고, 자본주의와 남쪽
대한민국의 군인과 경찰은 무조건 선의 상징으로 설정한 이분법의 가치관을 가진 사람들은 태백산맥을 받아들일 수 없는 거지요. 사실을 사실이라고
하거나 똥은 냄새가 난다고 해서도 안되는 거지요. 그것이 이분법 사회의 슬픔입니다.
빨치산들이 가지고 있는 최소한의 진실은 무엇일까? 왜 그렇게 하나밖에 없는 목숨을 바치며 한 시대를 살다갔을까? 그 수수께끼를 풀지
않고서는 그들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들을 이해하지 않고서는 잘잘못을 밝힐 수도 없고 잘잘못을 밝히지 않고서는 화해와 협력의 길로 갈 수도
없고, 통일의 문이 열리지 않습니다. 나는 거기에 징검다리를 놓고 싶은 문학적 욕구 때문에 태백산맥을 쓴 것입니다.”
―혹시 금강산에는 가봤습니까.
“안 갔습니다.”
빨치산, 지금 북한 보면 통곡할 것
―북한의 현체제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유감스럽게도 가장 비인간적인 체제입니다. 봉건주의가 무너진 이유는 비인간성 때문입니다. 봉건주의의 비인간성은 권력의 세습, 양반 상놈
차별하는 계급주의로 나타납니다. 그러한 비인간성 때문에 인간들은 봉건주의를 무너뜨리기 시작한 것 아닙니까? 거기에 대한 반동으로 민주주의와
사회주의가 나온 것인데 사회주의를 표방한 북쪽이 권력세습을 했으니 더 말하여 뭣하겠습니까. 다른 건 말하고 싶지도 않습니다.”
―빨치산들은 무엇을 위해 산으로 들어가 승산이 없는 싸움에 목숨을 걸었습니까. 그리고 그들이 살아서 이상으로 그렸던 사회주의 국가가
지금 북한의 모습일까요.
“해방 당시에 전국민의 85%가 농민이었습니다. 농사를 지어서 생산물의 7∼8할을 뺏기고 보리죽으로 끼니를 이어가는 고통에서 벗어나고
싶은 대중의 욕구가 거대한 힘으로 존재했습니다. 빨치산의 다수가 농민이었습니다. 그 사람들이 바라는 것은 사람답게 사는 것이었습니다. 지구상의
모든 이데올로기는 결국 사람답게 사는 세상을 만들어보려는 생각에서 나온 것입니다.
해방정국에서는 사회주의도 좋고 자본주의도 좋고 무엇이든지 제대로 살게만 해주면 좋다는 것이 대중들의 욕구였죠. 그런데 북한은
1946년에 토지를 무상몰수해서 무상분배 했습니다. 남한은 1950년 6·25가 터지기 직전에 겨우 유상몰수 유상분배를 했습니다. 남쪽의 농민들
사이에 토지문제에 대한 불만이 컸습니다. 토지소유 제도 때문에 사회주의를 편든 소박한 농민들이 많았습니다. 바로 그 때문에 죽어갔어요.
북한에서는 식량부족으로 해마다 수많은 사람들이 병들고 죽어가는 고통의 세월이 5∼6년째 계속되고 있습니다. 지리산에서 죽어간 빨치산들이
저세상에서 북한을 바라보면 통곡을 하겠지요.”
위고 같은 작가 되고 싶었다
‘한국논단’식 사상 검증이 아니다. 독자들이 작가 조정래에 대해 품고 있는 궁금증을 물어 그의 육성을 통해 들어보는 것은 의미가 작지
않다. 무거운 질문들이 이어져 답변하는 작가의 얼굴이 굳어져 있었다. 분위기를 푸는 뜻에서 작가 조정래를 노벨 문학상 후보로 추천하려는 움직임에
대해 질문을 던졌다.
“몇몇 시민단체를 중심으로 그런 운동이 일고 있습니다. 나는 그런 일을 하지 말라고 말렸는데 그 분들은 작가가 개입할 일이 아니라며
결단식도 가졌습니다. 노벨문학상을 타려면 운동 갖고는 안되고 우선 작품을 영어 프랑스어로 번역부터 해야지요.
노벨상은 수많은 상 가운데 하나일 뿐이고 상금이 좀 많아서 세계적인 권위를 획득한 측면이 있습니다. 최근에 열렸던 21세기 세계문학
세미나에서 한국 기자들이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인 소잉카에게 한국문학은 언제쯤 노벨상을 탈 수 있겠냐고 물었습니다. 우문에 현답이 나왔어요. 그는
좋은 작품은 그 스스로가 중심이라고 말했습니다. 왜 그런 걸 물어 그런 대답을 듣습니까. 자존심이 그렇게도 없습니까? 자연스럽게 노벨상을 준다면
거절하지는 않겠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내 문학 또는 우리 문학의 절대가치처럼 이야기되는 것에 대해서는 모욕을 느낍니다.”
―태백산맥 같은 대하소설은 번역작업이 만만치 않겠지요.
“일본에서 태백산맥이 완역 출판됐습니다. 10년 전 미국 하와이대 마셜 필 교수가 영어 번역을 준비하다가 심장마비로 갑자기 죽었습니다.
아리랑은 프랑스 아르마탕 출판사에서 7권까지 나오고 금년 내로 완간될 겁니다.”
―이문열(李文烈)씨는 우파를 대표하는 작가이고, 조정래씨는 좌파를 대표하는 작가라고 규정한 문학 기사를 읽은 적이 있습니다. 이런
평가에 동의합니까. 이문열씨와 그의 작품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합니까.
“정치 이데올로기적인 측면에서 좌파라고 한다면 나는 거부하겠습니다. 그러나 개혁 진보를 지지하는 입장의 좌파라면 동의합니다. 많은
사람들로부터 당신은 무슨 주의자냐는 속물적인 질문을 수없이 받았습니다. 나는 인간사회의 정의와 진실을 문학으로 지키고자 끝없이 노력하는
사람입니다. 스스로 진보주의자라고 말합니다. 우리 민족의 자존심은 물론 다른 민족의 존엄성도 절대로 훼손하거나 침해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민족주의자입니다. 문학 행위도 어떠한 정치체제적인 제약이나 압박을 받아서는 안된다는 신념을 갖고 있으니 자유주의자입니다. 그렇지만 이게
얼마나 부질없는 겁니까. 다 소용없는 것입니다. 나는 그저 예술을 하다가 죽어갈 예술가일 뿐이에요.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이문열씨는 개성 있는 작품을 잘 씁니다. 그런데 지나치게 작품 외적인 것에 관심이 많아요. 그것을 털어버리면 더 큰 작품을 쓸 수 있을
거예요.”
―다른 작가들이 쓴 소설도 많이 읽는지요.
“이것저것 읽다가 좋은 작품을 만나면 다시 또 읽습니다. 수많은 작품들이 복합돼 영향을 주면서 한 작가의 개성적인 세계를 만드니까 특정
작가에 영향 받았다고 하기는 어렵죠. 내가 훌륭한 작품을 쓴 사표로 인정하는 사람은 톨스토이와 도스토예프스키입니다. 빅토르 위고는 사회성과
정치성, 인간 진실의 문제에 치열하게 접근하면서 예술성을 함께 조화시킨 모범이라고 평가합니다. 위고 같은 작가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등단
초기부터 했습니다.
긴 작품을 쓰느라 20년 동안 남의 작품을 많이 못 읽었습니다. 중간중간 준비하는 과정에서 국내 젊은 작가의 작품을 찾아 읽고
있습니다. 최근 한강을 마치고 나서 몇몇 젊은 작가들의 작품을 읽었습니다. 남의 작품을 읽어야 내 작품의 결함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또 남의
좋은 부분을 인정해야 나도 더 잘 써야 한다는 각성이 생길 수 있지요. 남의 작품 읽기를 게을리하는 태도는 작품을 잘 쓰고자 하는 노력을
포기하는 거나 마찬가지입니다.”
연좌제는 용서할 수 없다
―최근에 읽은 젊은 작가들 작품 중에 인상에 남은 작품을 들어보면….
“최인석 이승우 방현석 은희경 씨 등의 작품이 괜찮더군요.”
필자는 조씨의 대하소설 중에서 ‘태백산맥’만 읽었다. ‘아리랑’과 ‘한강’은 인터뷰를 앞두고 벼락치기로 읽기에는 너무 방대하다. 인터뷰
질문을 만들기는 아리랑과 한강을 모두 읽은 집사람에게서 도움을 받았다.
―한강에서는 연좌제로 고통을 겪는 인물을 다루었는데요. 연좌제가 헌법으로 금지될 때까지 수많은 사람들이 연좌제로 불이익을 당했습니다.
혹시 개인적으로 이런 고통을 겪지는 않았습니까.
“나는 그런 고통은 겪지 않았지만 주변 친구들이 사회진출에 제약을 받는 것을 많이 봤습니다. ROTC 임관 1개월을 남겨놓고 마지막
신원조회에 걸려 장교가 못된 친구도 있지요. 당대를 넘어서 다음 세대의 인권까지 제약을 하는 나라가 문명국가 중에 과연 있을까요. ‘한강’에서만
쓴 게 아니고 ‘어떤 전설’이라고 하는 소설에서도 연좌제를 다루었습니다.
한강은 두 가지 이야기가 큰 흐름을 이룹니다. 하나는 우리 경제 발전이 어떤 과정을 거쳐서 오늘에까지 이르렀는가 하는 것입니다. 젊은
세대에게는 전설이 돼버린 것을 총체적으로 알리고 싶은 욕구가 있었습니다. 다른 또 하나는 50년 넘게 계속된 분단 상황이 민족에게 어떻게 상처를
입히며 망각돼 왔는지를 쓰고 싶었습니다.
연좌제가 법으로 금지된 것은 얼마 안됩니다. 이미 당사자들이 상처 받고 인생이 망가져버린 다음에 뒷북친 식이죠. 이런 비인간적인 정치
횡포가 어떻게 용서받을 수 있겠습니까. 우리 민족사에서 두고두고 이야기돼야 할 것입니다.”
조정래는 단지 상상력만으로 소설을 쓰는 작가가 아니다. 우리 민족의 이민사를 다룬 아리랑은 만주를 중심으로 해서 동남아 러시아 일본
하와이가 무대다. 한강은 우리나라의 경제발전을 다루다보니 무대가 세계로 펼쳐진다. 한강을 쓰기 위해 베트남 독일 사우디아라비아 등지로 취재
여행을 다녔다. 그는 이국땅에 눌러앉은 근로자 광부 간호사 등을 만나 이들이 뿌린 피와 눈물의 체험을 채록했다. 조씨는 흩어진 보석들을 주워
닦고 갈아서 소설로 엮고 맞춰내는 작업을 했다고 말한다.
박현채 선생 증언 참고
―태백산맥에서 번 돈을 아리랑 취재에 상당 부분 투자했다지요.
“상상력은 작가가 막연하게 추상적으로 지어내는 것이 아닙니다. 상상은 항상 자극받고 촉발되는 부분이 있어야 생명력을 얻습니다. 사진이나
기록에는 바람 햇볕 땅의 냄새가 없고 사람들의 감각도 죽어있습니다. 나는 현장을 보는 순간 이야기가 엮여져 나옵니다. 수십 가닥의 실타래가
자동으로 풀려나가듯이…. 취재를 갈 땐 뭔가를 얻어와야겠다고 긴장합니다. 일반적인 여행의 낭만이 아니에요. 무언가를 찾으러 가는 일입니다.”
그는 독일에서 한국인 광부와 간호사를 수십 명 만나서 취재를 했다. 때문에 독일의 간호사 출신 이민사회에서는 한강이 베스트셀러를
기록하고 있다. 태백산맥을 쓸 때는 한번 나가면 열흘씩 보따리를 싸들고 취재 여행을 다녔다.
―태백산맥의 현장은 주로 전남지방과 지리산 일대지요. 이 일대를 모두 답사하고 소설을 쓰기 시작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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