鶴山의 草幕舍廊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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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人物 들여다 보기] 조정래

鶴山 徐 仁 2006. 7. 9. 08:48
2002년 7월
 
작가 조정래(趙廷來·59)씨가 ‘태백산맥’을 시작으로 ‘아리랑’을 거쳐 ‘한강’에 이르는 20년 간의 글쓰기를 마치고 숨 고르기를 하고 있다. 작가가 장년기의 거의 전부를 바쳐 쓴 세 편의 대하소설은 200자 원고지 5만1500장 분량으로, 쌓아놓은 원고지의 높이가 그의 키 세 배를 넘는다.
 
1983년에 집필을 시작해 6년 만에 완결한 ‘태백산맥’은 이념의 금기지대를 깊숙이 파고들면서 분단문학의 최고봉을 이루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태백산맥’은 지금까지 550만부가 팔리며 작가에게 찬사와 함께 경제적 안정을 가져다주었지만 해방 이후 금기시되던 빨치산들의 삶과 투쟁을 작품화한 데 따른 유형무형의 고통도 겪게 했다.
 
조씨는 ‘태백산맥’을 완간한 후 약 1년 간 국내외 취재활동을 해 1990년 12월 ‘아리랑’의 집필에 착수해 1995년 7월에 탈고했다. ‘아리랑’은 일제의 토지조사로 농토를 잃은 농민들이 하와이 만주 러시아로 흩어져 생존과 항일의 정신을 이어가는 모습을 그렸다. 그리고 1997년 베트남 사우디아라비아 독일 등으로 취재여행을 다녀와 다음해부터 ‘한강’을 쓰기 시작해 2002년 완료했다. 마흔에 ‘태백산맥’을 시작해 ‘아리랑’ ‘한강’을 쓰고 나니 그의 나이 예순이었고, 초등학교에 다니던 아들은 대학을 나와 군대를 마치고 결혼해 손자를 안겨주었다.
 
그는 주색잡기와 담을 쌓고 산다. 둔부 종기, 신경성 위궤양, 오른팔 마비 등 직업병이 생길 정도로 오로지 글쓰기에만 매달려 20년 동안 대하소설 세 편을 완성했다. ‘한강’을 끝내고 쓴 ‘20년 글 감옥에서의 출옥’에는 조씨의 작가 정신을 보여주는 내용이 들어있다.
 
‘진정한 작가란 그 어느 시대, 그 어떤 정권하고도 불화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모든 권력이란 오류를 저지르게 돼있고 진정한 작가는 그 오류들을 파헤치며 진실로 말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작가는 정치성과는 전혀 관계없이 진보적인 존재일 수밖에 없으며, 그러나 진보성을 띤 정치세력이 배태하는 오류까지도 직시하고 밝혀내야 하기 때문에 작가는 끝없는 불화 속에서 외로울 수밖에 없다.’
 
작가는 최근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궁내동 중앙하이츠 빌리지로 이사와 아내 김초혜(金初蕙·59) 시인과 단 둘이 산다. 빌라 앞은 분당구에도 이런 곳이 남아 있을까 싶은 시골 마을이다. 바로 앞산에 덕양군(중종 아들) 묘소가 있다. 아침 일찍 찾아갔을 때 김시인이 차와 과일을 내왔다. 작가는 대학에 강연을 갔다가 선물로 받았다는 철쭉 분재에 스프레이로 물을 뿌리며 “분재는 좁은 공간에 나무를 심어놓고 고문을 하는 취미”라고 말했다.
 
신문사 논설위원도 글을 써서 먹고 사는 직업이지만 사설은 길어봐야 200자 원고지 6장, 칼럼은 10장 정도다. 어쩌다 잡지에 길게 써봐야 150장을 넘지 않는다. 조씨가 쓴 ‘태백산맥’(10권)은 1만6500장, ‘아리랑’(12권)은 2만장, ‘한강’(10권)이 1만5000장이다. 전업작가가 20년 동안 쓴 글이라고 하더라도 장강(長江)과 같은 글의 길이에 숨이 막힌다.
 
키보다 세 배 더 높은 원고량
 
―초인적인 것에 가까운 글쓰기의 에너지는 어디에서 나오는 것입니까.
 
“1959년 서울에 올라와 1960년대 후반까지 수도가 없는 성북동 산동네에서 살았습니다. 고등학교 1학년 때부터 대학 4년 졸업하고 군대 가기 전까지 7년 동안 물지게를 졌습니다. 엄동설한에 눈이 내린 날은 물 길러 가기가 정말 싫습니다. 추운 날 산동네 비탈길을 물지게를 짊어지고 올라오는 일이 보통 지겹고 힘든 게 아니에요. 이불 속에서 꾸물꾸물하다가 한 10분 지나버리면 30∼40명이 줄을 서요. 게으름을 떨치고 빨리 일어나면 가장 먼저 도착해서 금방 물을 담아 돌아올 수 있어요. 인생이 별것 아닙니다. 남들보다 5분 빠르게 움직여 부지런을 떨면 항상 내가 앞에 갈 수 있다는 깨달음을 물지게질을 통해 얻었습니다.”
 
―이 시대에 태어난 작가의 소임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나는 거의 병적일 만큼 실존적인 물음에 대한 책임의식을 지니고 있습니다. 나는 왜 이 땅에 태어났을까? 왜 우리 역사는 이렇게 흘러왔을까? 작가는 무엇을 써야 할 것인가? 내 기질과도 관련이 있을 겁니다. 이런 땅에 태어난 야속함, 원망스러움, 어린 시절 6·25를 겪으면서 상처 받고 핍박 받은 것들이 복합적으로 얽혀있겠죠.
 
우리가 문학을 시작할 때는 순수문학만이 문학의 전부인 것처럼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참여문학은 존재하지 않았지요. 김동리 황순원 같은 분들이 전부 그런 식으로 몰고갈 때입니다. 참여와 역사 같은 주제가 강한 것에 대해 천착을 하다보니 등단하는 데도 불리했어요. 대학시절에 등단을 못하고 겨우 군대를 마치고 와서 했습니다. 내가 알고 있는 것을 쓰지 않는다면 작가가 아니지 않느냐 하는 사명감에 긴 소설을 세 번씩이나 쓰게 됐습니다. 참 복잡한 문제입니다. 단순하게 설명이 안돼요.”
 
1989년 우익단체들이 ‘태백산맥’을 쓴 작가를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고발한 사건은 아직도 종결되지 않아 검찰의 최장기 미제 사건으로 남아있다. 500만권 이상 팔려 전국민이 읽다시피한 소설을 유죄 의견으로 기소하기도 어렵고, 그렇다고 무혐의 처분을 내리면 우익단체들이 또 고발을 할 테니 검찰은 그저 세월에 맡겨놓기로 한 것 같다. 그동안 국가보안법이 개정 또는 폐지돼 자동 종결되기를 바라는 눈치다.
 
1999년 우익단체들은 ‘태백산맥’에 대해 500개 고발 사항이 담긴 고발장을 검찰에 접수했다. 검찰은 이중 120개를 추려 작가에게 사실을 입증할 객관적인 자료를 내놓으라고 요구했다.
 
“빨치산도 인간이었다”
 
―120개 심문 사항은 예를 들면 어떤 것이었나요. 120개 질문에 대해 일일이 증거자료를 갖추어 답변하는 것이 보통일이 아니었을 텐데….
 
“‘태백산맥’에는 여·순반란 사건 때 미국 비행기가 뜨고 미국 함정이 여수 앞바다에 폭격을 한 내용이 나옵니다. 우익단체에서는 이런 허위 사실을 날조한 조정래는 빨갱이라고 고발한 거지요. ‘백두산 호랑이’라고 불리는 토벌대장 김종원이 국민학교 운동장에서 좌익혐의자들을 모아놓고 한 명씩 끌어내 일본도로 목을 치는 내용도 새빨간 거짓말이라는 거지요.
 
객관적 자료라는 것은 책·신문·보고서 등을 말합니다. 당시 사건을 겪은 사람들에게 취재했다고 해도 안 통합니다. 내가 직접 목격하고 체험한 거라고 해도 안됩니다. 예를 들면 미군 비행기가 폭격을 해 불발탄이 바로 우리집 마당에 떨어졌는데도 그것은 객관적 자료가 아니랍니다. 그리고 미군 LST가 여수 앞바다에서 폭격을 가하는 것을 본 사람들이 수두룩한데도 증인을 부를 필요가 없다는 겁니다. 얼마전에 이를 입증하는 미국 쪽 사진자료가 공개됐습니다.
 
노근리 사건도 미국 기자가 써서 퓰리처상을 받고 기밀문서를 통해 입증이 되니까 믿어주는 거지요. 나같은 사람이 쓰면 거짓말이 되는 거예요. 검찰 조사를 받느라 일주일간 ‘한강’ 쓰기를 중단하고 120개 항목에 대한 자료를 모두 찾아서 100% 제출했어요. 답변서에 인용한 책만 17권에 이릅니다. 김종원이라는 토벌대장 이야기는 국회 속기록에도 나옵니다. 만군(滿軍) 출신으로 거창 양민학살 사건에도 관련됐고 이승만 대통령으로부터 신임을 받아 승승장구했습니다.”
 
조씨는 태백산맥 때문에 1994년 치안본부(경찰청) 남영동 분실에서 조사를 받았다. 김영삼(金泳三) 정부 시절이라 고문을 당하지는 않았지만 모욕적인 언사와 공포 분위기는 여전했다.
 
―1980년대 초까지 분단문학은 국가보안법이 허용하는 범위 내에서만 썼지만 태백산맥은 실정법이 허용하는 한계를 뛰어넘었다는 평가가 있습니다. 우익단체 쪽에서는 심지어 친북(親北) 문학이라고 공격을 하는데요.
 
“감정적인 반공주의자들의 공격입니다. 소설을 제대로 읽어야 합니다. 소설을 오독하는 것도 독자의 자유입니다. 그러나 상대방을 공격하기 위해서 억지 주장을 하는 것은 명예훼손이고 무고입니다.
 
분단 상황에서 반공주의자들은 상대방을 빨갱이라고 몰아붙여 백전백승했습니다. 이들에게 경찰과 군대는 모두 옳고 성역이며 절대로 더럽혀서는 안 되는 조직이 됩니다. 공산주의자와 빨치산은 무조건 때려죽일 놈들이고 악마고 흡혈귀라고 가르쳤습니다.
 
이런 상황이니 빨치산도 아픔을 느끼고 사랑을 하는 인간이며 배움과 인정이 있는 사람들이었다고 말하는 것조차 용납을 못하는 겁니다. 이런 감정적인 반공주의를 벗어나지 못하면 우리는 분단의 문제를 이념적으로 해결할 수 없습니다.
 
남쪽에서 기득권을 행사하는 사람들이 있다고 하면 북쪽 정권을 유지하면서 기득권을 행사하는 세력도 있습니다. 조정래는 북쪽의 기득권 세력에게조차 비판의 대상입니다. 나는 1950년대의 상황에서 공산주의자와 빨치산의 입장을 말하는 것이지 전쟁 이후에 사회주의 독재정권을 꾸려온 김일성 체제를 옹호하는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감정적 반공주의자들이 태백산맥과 나를 친북으로 모는 것은 착각이고 오류입니다. 분명히 말하거니와 나는 친북주의자가 아닙니다.”
 
‘태백산맥’은 통일의 징검다리
 
―김대중(金大中) 정부는 대통령 선거공약으로 국가보안법 개폐를 내걸었지만 한나라당과 자민련의 반대로 지키지 못했습니다. 국가보안법에 대해서 개인적으로 어떤 생각을 갖고 있습니까.
 
“당연히 폐지돼야 합니다. 국가보안법의 뿌리를 캐고 들어가면 일제시대 독립운동가들을 탄압하던 치안유지법이 나옵니다. 국가보안법말고도 얼마든지 간첩을 잡을 수 있고 처벌할 수 있습니다. 박정희(朴正熙) 정권이 독재 강화의 방법으로 써먹은 법을 민주화시대에 그냥 놓아두고 있는 것은 말이 안되죠. 6·15 공동선언에서 남쪽의 대통령이 북쪽의 수뇌와 만나 포옹을 하고 민족 통일의 역사를 열어가기로 합의했지 않습니까. 국가보안법 개정도 못하고 이 정권이 끝난다면 6·15 공동선언의 정신을 스스로 부인한 것이 돼버립니다. 이런 논리의 모순은 국제적 망신입니다. 일거에 없애기 어렵다면 부분 개정이라도 해야 합니다.”
 
―태백산맥 때문에 노태우(盧泰愚) 정권 때 세무조사를 받았다지요.
 
“1983년 ‘현대문학’에 연재를 시작해 1986년에 제1부 3권을 단행본으로 냈습니다. 문예지에 연재할 때는 별 관심이 없다가 단행본으로 나오니까 운동권에서 폭발적으로 읽혔습니다. 그러자 수사기관들이 주목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무렵 방송 프로그램에 나를 출연시킨 KBS 직원들이 한직으로 밀려나기도 했습니다. 참으로 미안했습니다.
 
우익단체가 사법당국에 진정서를 냈지만 검찰이 1991년 문제 삼지 않기로 했습니다. 그러다가 영화로 만드니까 우익단체들이 120페이지가 넘는 고발장을 만들어서 고발하기에 이르렀습니다. 태백산맥은 작가에게 영광을 안겨줬지만 그에 못지않은 고통을 지금까지 주고 있습니다. 태백산맥을 출판한 한길사가 세무조사를 받고 추징을 당했습니다. 내가 탈세를 했더라면 파렴치범으로 몰렸겠지요.”
 
태백산맥을 영화화했던 임권택(林權澤) 감독이 프랑스 칸 영화제에서 ‘취화선’으로 감독상을 받았다. 임감독은 신동아 6월호 인터뷰에서 “원작 태백산맥은 좌편향적인 느낌이 드는 작품이지만 영화는 이데올로기 지향성에서 다르다”는 말을 했다. 물론 임감독이 문학작품에 대해 정밀한 분석 능력을 가진 사람은 아니다.
 
―태백산맥에 국가보안법의 잣대를 들이대는 것에 동의하지 않는 독자들 중에는 이 책이 해방공간 그리고 전쟁의 무대에서 좌익혁명에 가담했던 사람들에 대한 긍정 또는 동정의 시각을 담고 있다고 보는 사람도 있습니다.
 
“모든 가치는 상대적입니다. 가치 이전에 감정도 상대적이죠. 아까 말한 대로 공산주의자들은 무조건 악의 표상이고, 자본주의와 남쪽 대한민국의 군인과 경찰은 무조건 선의 상징으로 설정한 이분법의 가치관을 가진 사람들은 태백산맥을 받아들일 수 없는 거지요. 사실을 사실이라고 하거나 똥은 냄새가 난다고 해서도 안되는 거지요. 그것이 이분법 사회의 슬픔입니다.
 
빨치산들이 가지고 있는 최소한의 진실은 무엇일까? 왜 그렇게 하나밖에 없는 목숨을 바치며 한 시대를 살다갔을까? 그 수수께끼를 풀지 않고서는 그들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들을 이해하지 않고서는 잘잘못을 밝힐 수도 없고 잘잘못을 밝히지 않고서는 화해와 협력의 길로 갈 수도 없고, 통일의 문이 열리지 않습니다. 나는 거기에 징검다리를 놓고 싶은 문학적 욕구 때문에 태백산맥을 쓴 것입니다.”
 
―혹시 금강산에는 가봤습니까.
 
“안 갔습니다.”
 
빨치산, 지금 북한 보면 통곡할 것
 
―북한의 현체제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유감스럽게도 가장 비인간적인 체제입니다. 봉건주의가 무너진 이유는 비인간성 때문입니다. 봉건주의의 비인간성은 권력의 세습, 양반 상놈 차별하는 계급주의로 나타납니다. 그러한 비인간성 때문에 인간들은 봉건주의를 무너뜨리기 시작한 것 아닙니까? 거기에 대한 반동으로 민주주의와 사회주의가 나온 것인데 사회주의를 표방한 북쪽이 권력세습을 했으니 더 말하여 뭣하겠습니까. 다른 건 말하고 싶지도 않습니다.”
 
―빨치산들은 무엇을 위해 산으로 들어가 승산이 없는 싸움에 목숨을 걸었습니까. 그리고 그들이 살아서 이상으로 그렸던 사회주의 국가가 지금 북한의 모습일까요.
 
“해방 당시에 전국민의 85%가 농민이었습니다. 농사를 지어서 생산물의 7∼8할을 뺏기고 보리죽으로 끼니를 이어가는 고통에서 벗어나고 싶은 대중의 욕구가 거대한 힘으로 존재했습니다. 빨치산의 다수가 농민이었습니다. 그 사람들이 바라는 것은 사람답게 사는 것이었습니다. 지구상의 모든 이데올로기는 결국 사람답게 사는 세상을 만들어보려는 생각에서 나온 것입니다.
 
해방정국에서는 사회주의도 좋고 자본주의도 좋고 무엇이든지 제대로 살게만 해주면 좋다는 것이 대중들의 욕구였죠. 그런데 북한은 1946년에 토지를 무상몰수해서 무상분배 했습니다. 남한은 1950년 6·25가 터지기 직전에 겨우 유상몰수 유상분배를 했습니다. 남쪽의 농민들 사이에 토지문제에 대한 불만이 컸습니다. 토지소유 제도 때문에 사회주의를 편든 소박한 농민들이 많았습니다. 바로 그 때문에 죽어갔어요.
 
북한에서는 식량부족으로 해마다 수많은 사람들이 병들고 죽어가는 고통의 세월이 5∼6년째 계속되고 있습니다. 지리산에서 죽어간 빨치산들이 저세상에서 북한을 바라보면 통곡을 하겠지요.”
 
위고 같은 작가 되고 싶었다
 
‘한국논단’식 사상 검증이 아니다. 독자들이 작가 조정래에 대해 품고 있는 궁금증을 물어 그의 육성을 통해 들어보는 것은 의미가 작지 않다. 무거운 질문들이 이어져 답변하는 작가의 얼굴이 굳어져 있었다. 분위기를 푸는 뜻에서 작가 조정래를 노벨 문학상 후보로 추천하려는 움직임에 대해 질문을 던졌다.
 
“몇몇 시민단체를 중심으로 그런 운동이 일고 있습니다. 나는 그런 일을 하지 말라고 말렸는데 그 분들은 작가가 개입할 일이 아니라며 결단식도 가졌습니다. 노벨문학상을 타려면 운동 갖고는 안되고 우선 작품을 영어 프랑스어로 번역부터 해야지요.
 
노벨상은 수많은 상 가운데 하나일 뿐이고 상금이 좀 많아서 세계적인 권위를 획득한 측면이 있습니다. 최근에 열렸던 21세기 세계문학 세미나에서 한국 기자들이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인 소잉카에게 한국문학은 언제쯤 노벨상을 탈 수 있겠냐고 물었습니다. 우문에 현답이 나왔어요. 그는 좋은 작품은 그 스스로가 중심이라고 말했습니다. 왜 그런 걸 물어 그런 대답을 듣습니까. 자존심이 그렇게도 없습니까? 자연스럽게 노벨상을 준다면 거절하지는 않겠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내 문학 또는 우리 문학의 절대가치처럼 이야기되는 것에 대해서는 모욕을 느낍니다.”
 
―태백산맥 같은 대하소설은 번역작업이 만만치 않겠지요.
 
“일본에서 태백산맥이 완역 출판됐습니다. 10년 전 미국 하와이대 마셜 필 교수가 영어 번역을 준비하다가 심장마비로 갑자기 죽었습니다. 아리랑은 프랑스 아르마탕 출판사에서 7권까지 나오고 금년 내로 완간될 겁니다.”
 
―이문열(李文烈)씨는 우파를 대표하는 작가이고, 조정래씨는 좌파를 대표하는 작가라고 규정한 문학 기사를 읽은 적이 있습니다. 이런 평가에 동의합니까. 이문열씨와 그의 작품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합니까.
 
“정치 이데올로기적인 측면에서 좌파라고 한다면 나는 거부하겠습니다. 그러나 개혁 진보를 지지하는 입장의 좌파라면 동의합니다. 많은 사람들로부터 당신은 무슨 주의자냐는 속물적인 질문을 수없이 받았습니다. 나는 인간사회의 정의와 진실을 문학으로 지키고자 끝없이 노력하는 사람입니다. 스스로 진보주의자라고 말합니다. 우리 민족의 자존심은 물론 다른 민족의 존엄성도 절대로 훼손하거나 침해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민족주의자입니다. 문학 행위도 어떠한 정치체제적인 제약이나 압박을 받아서는 안된다는 신념을 갖고 있으니 자유주의자입니다. 그렇지만 이게 얼마나 부질없는 겁니까. 다 소용없는 것입니다. 나는 그저 예술을 하다가 죽어갈 예술가일 뿐이에요.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이문열씨는 개성 있는 작품을 잘 씁니다. 그런데 지나치게 작품 외적인 것에 관심이 많아요. 그것을 털어버리면 더 큰 작품을 쓸 수 있을 거예요.”
 
―다른 작가들이 쓴 소설도 많이 읽는지요.
 
“이것저것 읽다가 좋은 작품을 만나면 다시 또 읽습니다. 수많은 작품들이 복합돼 영향을 주면서 한 작가의 개성적인 세계를 만드니까 특정 작가에 영향 받았다고 하기는 어렵죠. 내가 훌륭한 작품을 쓴 사표로 인정하는 사람은 톨스토이와 도스토예프스키입니다. 빅토르 위고는 사회성과 정치성, 인간 진실의 문제에 치열하게 접근하면서 예술성을 함께 조화시킨 모범이라고 평가합니다. 위고 같은 작가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등단 초기부터 했습니다.
 
긴 작품을 쓰느라 20년 동안 남의 작품을 많이 못 읽었습니다. 중간중간 준비하는 과정에서 국내 젊은 작가의 작품을 찾아 읽고 있습니다. 최근 한강을 마치고 나서 몇몇 젊은 작가들의 작품을 읽었습니다. 남의 작품을 읽어야 내 작품의 결함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또 남의 좋은 부분을 인정해야 나도 더 잘 써야 한다는 각성이 생길 수 있지요. 남의 작품 읽기를 게을리하는 태도는 작품을 잘 쓰고자 하는 노력을 포기하는 거나 마찬가지입니다.”
 
연좌제는 용서할 수 없다
 
―최근에 읽은 젊은 작가들 작품 중에 인상에 남은 작품을 들어보면….
 
“최인석 이승우 방현석 은희경 씨 등의 작품이 괜찮더군요.”
 
필자는 조씨의 대하소설 중에서 ‘태백산맥’만 읽었다. ‘아리랑’과 ‘한강’은 인터뷰를 앞두고 벼락치기로 읽기에는 너무 방대하다. 인터뷰 질문을 만들기는 아리랑과 한강을 모두 읽은 집사람에게서 도움을 받았다.
 
―한강에서는 연좌제로 고통을 겪는 인물을 다루었는데요. 연좌제가 헌법으로 금지될 때까지 수많은 사람들이 연좌제로 불이익을 당했습니다. 혹시 개인적으로 이런 고통을 겪지는 않았습니까.
 
“나는 그런 고통은 겪지 않았지만 주변 친구들이 사회진출에 제약을 받는 것을 많이 봤습니다. ROTC 임관 1개월을 남겨놓고 마지막 신원조회에 걸려 장교가 못된 친구도 있지요. 당대를 넘어서 다음 세대의 인권까지 제약을 하는 나라가 문명국가 중에 과연 있을까요. ‘한강’에서만 쓴 게 아니고 ‘어떤 전설’이라고 하는 소설에서도 연좌제를 다루었습니다.
 
한강은 두 가지 이야기가 큰 흐름을 이룹니다. 하나는 우리 경제 발전이 어떤 과정을 거쳐서 오늘에까지 이르렀는가 하는 것입니다. 젊은 세대에게는 전설이 돼버린 것을 총체적으로 알리고 싶은 욕구가 있었습니다. 다른 또 하나는 50년 넘게 계속된 분단 상황이 민족에게 어떻게 상처를 입히며 망각돼 왔는지를 쓰고 싶었습니다.
 
연좌제가 법으로 금지된 것은 얼마 안됩니다. 이미 당사자들이 상처 받고 인생이 망가져버린 다음에 뒷북친 식이죠. 이런 비인간적인 정치 횡포가 어떻게 용서받을 수 있겠습니까. 우리 민족사에서 두고두고 이야기돼야 할 것입니다.”
 
조정래는 단지 상상력만으로 소설을 쓰는 작가가 아니다. 우리 민족의 이민사를 다룬 아리랑은 만주를 중심으로 해서 동남아 러시아 일본 하와이가 무대다. 한강은 우리나라의 경제발전을 다루다보니 무대가 세계로 펼쳐진다. 한강을 쓰기 위해 베트남 독일 사우디아라비아 등지로 취재 여행을 다녔다. 그는 이국땅에 눌러앉은 근로자 광부 간호사 등을 만나 이들이 뿌린 피와 눈물의 체험을 채록했다. 조씨는 흩어진 보석들을 주워 닦고 갈아서 소설로 엮고 맞춰내는 작업을 했다고 말한다.
 
박현채 선생 증언 참고
 
―태백산맥에서 번 돈을 아리랑 취재에 상당 부분 투자했다지요.
 
“상상력은 작가가 막연하게 추상적으로 지어내는 것이 아닙니다. 상상은 항상 자극받고 촉발되는 부분이 있어야 생명력을 얻습니다. 사진이나 기록에는 바람 햇볕 땅의 냄새가 없고 사람들의 감각도 죽어있습니다. 나는 현장을 보는 순간 이야기가 엮여져 나옵니다. 수십 가닥의 실타래가 자동으로 풀려나가듯이…. 취재를 갈 땐 뭔가를 얻어와야겠다고 긴장합니다. 일반적인 여행의 낭만이 아니에요. 무언가를 찾으러 가는 일입니다.”
 
그는 독일에서 한국인 광부와 간호사를 수십 명 만나서 취재를 했다. 때문에 독일의 간호사 출신 이민사회에서는 한강이 베스트셀러를 기록하고 있다. 태백산맥을 쓸 때는 한번 나가면 열흘씩 보따리를 싸들고 취재 여행을 다녔다.
 
―태백산맥의 현장은 주로 전남지방과 지리산 일대지요. 이 일대를 모두 답사하고 소설을 쓰기 시작했습니까.
 
“1차 무대는 보성군 벌교읍입니다. 2차가 순천 화순 광주 쪽이고요. 3차가 지리산입니다. 1차 무대는 너무 잘 알기 때문에 취재가 필요없었습니다. 2차 무대부터 취재를 했습니다. 화순 백암산, 장흥 유치 등이 전부 빨치산 지구입니다. 지리산은 아흔아홉 골짜기라고 합니다. 평생 여기서 심마니를 한 사람도 골짜기를 다 모른다고 할 정도로 큰산이에요. 전남 경남 전북도의 가운데 떡 버티고 앉아 있는 산입니다. 전북도당 경남도당 전남도당이 맡았던 골짜기가 모두 다릅니다.”
 
그는 지리산에서 빨치산 투쟁을 했던 생존자들을 증인으로 데리고 다녔다. 빨치산과 반대쪽에서 싸운 토벌대의 증언도 수집했다. 태백산맥 3, 4부는 경제학자 박현채씨(작고)의 기억에 80%를 의존했다고 작가는 술회한다.
 
“태백산맥에 나오는 위대한 전사 ‘조원제’가 바로 박현채 선생입니다. 빨치산 투쟁한 사람들을 찾아다니다가 박선생을 만났습니다. 이 분은 저의 광주 서중학교 선배입니다.”
 
박씨는 광주 서중학교(지금의 광주일고) 3학년 때 남로당 서중학교 총책이었다. 서중학교는 전남지방에서 공부 잘하는 학생들이 들어가는 학교였다. 천재라는 소리를 듣던 박씨는 조숙해 어린 나이에 사회주의 이데올로기에 깊이 빠졌다.
 
“박선생은 종전 직전에 화순에 보급투쟁을 하러 내려왔다가 체포됐습니다. 다행히 학생이라서 징역을 살지 않고 특별사면 조치를 받았습니다. 기억력이 비상해 지리산 빨치산 시절을 샅샅이 기억했습니다. 정말 놀라워요. 대개 빨치산 투쟁을 한 사람들은 자기가 활동한 분야밖에 몰라요. 그러나 박선생은 지리산 빨치산을 총체적으로 다 알아요. 전투부보다 상위인 문화부 중대장을 맡아 그렇습니다. 문화부는 작전부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문화부 중대장이 ‘안된다’고 하면 전투 중대장은 전투를 못하게 돼있습니다. 박선생이 문화부 중대장을 17∼18세 때에 했습니다. 똑똑하고 강인한 체력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찢어버린 ‘남부군’ 메모
 
―태백산맥 쓰기 전에 혹시 이태씨의 ‘남부군’을 읽어보았습니까.
 
“태백산맥은 한꺼번에 나온 게 아니고 4년 동안 4부로 나뉘어 나왔습니다. 문학평론가 중에는 무식을 무기처럼 쓰는 사람들이 있어요. 문학평론가들이 조정래의 태백산맥은 이태의 ‘남부군’에 빚진 바 크다고 마구 써버렸어요. 황당무계한 거짓말이에요. 무식하고 무책임한 결론입니다.
 
태백산맥을 3회분 정도 썼을 무렵에 동료 소설가가 원고지로 된 ‘남부군’ 복사본을 내게 보냈어요. 빨치산 소설을 쓰는 데 도움이 될 테니 참고해보라는 뜻이었지요. 이 원고를 이미 읽어본 작가들 이름까지 적어보냈더군요. 생각이 깊은 분이지요. 내가 참조한 내용을 다른 작가가 쓸 수도 있으니 조심하라는 뜻이었지요.
 
내가 취재한 부분과 겹치는 것도 있고 완전히 새로운 것도 있었습니다. 도움이 많이 됐어요. 읽으면서 중요한 부분은 메모를 해놨습니다. 태백산맥 1부 2부에는 빨치산이 안 나오잖아요. 3부부터 나옵니다. 그런데 2부가 출간되고 나서 ‘남부군’이 책으로 출판돼 40만부가 팔렸습니다. 당황했습니다. 상당히 쓸모가 있다고 판단해 꼼꼼히 메모를 해놓았는데 책이 나와버렸으니 큰일났지요. 이태씨의 ‘남부군’에서 도움 받으려고 했던 부분이 쓸모없게 돼버린 거예요. 난감했습니다. 다시 취재하기로 하고 ‘남부군’ 메모를 찢어버렸습니다.”
 
―빨치산과 전쟁을 한 토벌대 출신 사람도 만나봤습니까.
 
“토벌대의 증언은 객관성을 확보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하지요. 그 분들은 놀랍게도 ‘그들은 굉장히 용감했다’ ‘도덕적이었다’고 증언했습니다.”
 
―메모를 찢어버렸더라도 지리산 빨치산을 이해하는 데 이태씨의 ‘남부군’으로부터 일정한 도움을 받았겠군요.
 
“그렇습니다. 그러나 ‘남부군’ 메모를 모두 버리고 새롭게 취재를 했습니다. 지리산에서 이태씨가 만든 진중신문의 주필을 만났습니다. 이 분이 ‘남부군’을 다 읽어보고 나서 너무 많은 것이 사실과 다르다고 증언했습니다. 왜 이렇게 썼는지 모르겠다고 말했습니다. 수원에 살았는데 작고했습니다.”
 
그는 지금도 원고지에 글을 쓴다. 태백산맥과 아리랑을 쓸 때는 컴퓨터가 일반화되지 않았다. 출판사에서 컴퓨터를 선물했지만 한강의 취재를 다니느라 자판 연습을 할 시간이 없었다. 한강도 손으로 썼다. 최근에는 아들이 최신기종의 컴퓨터를 선물했지만 인터뷰와 탈장 수술 등으로 쫓기느라 연습을 못하고 있다.
 
“연습을 해서 일기나 잡문은 컴퓨터로 쓰더라도 소설은 계속 손으로 쓰겠습니다.”
 
―컴퓨터를 익히면 글쓰기에 아주 편리합니다. 원고지에 써나가면 파지가 많이 생기잖아요.
 
“압니다. 그런데 그 편리함이 오히려 소설 쓰기에 방해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나는 파지를 별로 안 냅니다.”
 
그는 인터뷰를 하다말고 옆방에 보관하고 있는 아리랑 원고를 보여주었다. 과거 신문사에 원고를 보내는 작가 중에는 전문 해독사가 필요할 만큼 악필이 적지 않았다. 조씨의 원고는 별로 고친 데가 없을 정도로 깔끔했다. 아리랑의 무대인 전북 김제시에서 아리랑문학관을 세운다고 해 그곳에 보내주기로 했다고 말했다.
 
스님이었던 아버지
 
―작가 조정래의 작품세계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는 평론을 소개해주겠습니까.
 
“황광수씨가 ‘조정래의 소설세계-소설과 진실’이라는 평론집에서 단편 중편에서부터 시작해 아리랑까지 총체적으로 조정래를 알 수 있도록 썼습니다. 서울대 권영민 교수의 ‘태백산맥 다시 읽기’도 읽을 만합니다. 권교수는 내가 고발당한 상태에서 이 책을 펴내 고통을 당했습니다. 나를 조사한 경찰 반장이 권교수한테 전화를 걸어 두 시간 이상 공갈 협박을 했습니다. ‘당신 서울대 교수 그만하고 싶으냐. 왜 까부느냐. 빨갱이 편을 드는 당신도 빨갱이지.’ 권 교수가 나 때문에 고생을 해 아주 미안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조정래의 연보는 ‘1943년 전남 승주군 선암사에서 출생’으로 시작한다. 출생부터가 보통사람과 다르다. 어머니의 신심이 지극해서 절에서 태어난 것일까. 아니다.
 
일제는 한일합방의 예비 공작으로 강력한 힘을 지닌 불교를 일사불란하게 통제하기 위해 32개 본산을 만들었다. 선암사도 그중의 하나였다. 조씨의 부친(조종현)은 24세에 법사가 되었다. 일제는 똑똑한 승려들을 골라 일본 승려들처럼 결혼을 하게 했다. 이른바 대처승 제도다. 조씨의 부친은 선암사 대웅전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일제 이전에는 한국에 대처승이 없었다.
 
조종현씨는 선암사 부지주로 사답(寺畓)을 소작인들에게 무상으로 분배해야 한다는 진보적인 의식을 갖고 있어, 절의 재산을 지키려는 주지와 다툼이 벌어졌다. 승려들이 양쪽으로 갈려 싸우는 와중에서 여·순 반란사건이 나자 주지 쪽에서 부주지를 빨갱이로 몰았다. 조종현씨는 체포됐지만 광주고법에서 무죄 판결을 받고 풀려났다. 태백산맥에 나오는 ‘법일’의 모델이 바로 작가의 아버지다.
 
조종현씨는 이후 벌교상고·광주일고·서울 보성고에서 국어 교사를 거쳐 우석고 교장을 지냈다. 시조시인이었다. 작가는 아버지가 학교를 옮길 때마다 따라다녀 광주 서중과 보성고를 졸업했다.
 
대하소설 세 편이 1000만부 넘게 팔린 인기작가의 인세 수입은 얼마나 될까. 대한민국 소설가의 한달 평균 원고료 수입이 10만원이라고 한다. 태백산맥이 550만부, 아리랑이 350만부, 한강이 지금까지 120만부 팔렸다. 창작물로 1000만부 돌파는 한국에서 처음이다. 인세는 책값의 10%다.
 
“오해가 있어요. 지금 정가 8000원의 10%로 계산을 하면 나는 80억원을 번 사람이 돼버려요. 바보 같은 계산이죠. ‘태백산맥’이 처음 나왔을 때 책값이 3200원이었어요. 4000원 4500원 5000원하다가 8000원이 된 것은 금년 1월이에요.”
 
―그래도 어림잡아 50억원 이상은 벌었겠네요.
 
“그 돈이 송두리째 쌓이는 것이 아닙니다. 나는 20년 동안 다른 직업을 갖지 않은 전업작가였습니다. 기초 생활비와 자식을 가르쳐야 하는 돈이 들어갑니다. 그리고 새 작품을 쓰기 위해 지구를 세 바퀴 반 도는 거리를 취재 여행을 다니며 재투자한 비용이 엄청나요. 안내자 통역을 데리고 비행기 타고 호텔 생활을 하다보면 재투자 비용이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많이 들어가요. 세금도 무서워요. 원고료는 연간 2000만원까지는 면세되지만 5000만원을 넘기 시작하면 누진이 붙어요. 나처럼 소득이 높으면 43%를 내야 돼요.”
 
―1억원 벌 때마다 4300만원을 냈으니 나라살림에 크게 기여했군요.
 
“12년 동안 매년 1억원씩 세금으로 냈어요. 태백산맥과 아리랑이 겹쳤을 때는 한해에 거의 2억원을 냈어요. 그러니까 나는 성실 고액납세자입니다. 세무조사를 당했어도 아무 일 없었으니까요. 참여연대 같은 시민단체 또는 불우 장애인 단체 같은 데 조그만 성의를 표시할 수 있는 정도의 여유밖에 없어요. 큰돈은 없습니다.”
 
비디오가게에서는 책도 대여해준다. 도서대여점마다 태백산맥 아리랑 한강은 반드시 비치하고 있다. 요즘은 전업주부들이 소설을 많이 읽는다. 콩나물 값도 깎는 주부들이 10권짜리 대하소설을 8만원 내고 사는 것은 부담스러운 일이다. 대여점에서는 권당 3박4일씩 빌려주고 800원을 받으니 열 번만 대여하면 원금이 회수되는 셈이다. 집 근처에 있는 대여점의 경우 작년 연말에 구입한 태백산맥이 컴퓨터 기록에 40번을 빌려준 것으로 나와 있었다.
 
소비자로서는 편리하지만 작가와 출판사에서 보면 책이 덜 팔려 불이익을 당하는 게 된다. 하지만 방송국에서는 음반을 틀 때마다 저작권료를 지불하지 않는가.
 
김근태 의원 후원 멤버
 
―출판협회 같은 데서 대여점 문제를 정식으로 제기한 적이 있습니까.
 
“도서대여점 문제가 한 4∼5년 전 출판사들에 의해 제기됐습니다. 그런데 전면적으로 규제할 법이 없습니다. 대여점들도 법을 만들면 인세를 내겠다고 주장하지요. 예를 들면 800원 받고 빌려줄 때마다 80원씩 인세로 내겠으니 국회에서 법을 만들어오라는 식이지요. 어느 대여점에서 내 책을 보니 비닐 껍질이 다 찢어져서 새로 커버를 했더군요. 대학 도서관에 있는 책들도 하드보드로 다시 표지를 입혔어요.
 
10권 한 질을 모두 사려면 8만원이니 책값이 싼 편은 아니지요. 그 돈을 내고 10권을 다 사 읽는 독자들이 고맙습니다. 돈이 모자라면 빌려봐야지요. 주부들로부터 자식에게 조선생님 책을 읽히고 싶은데 책값이 비싸니 출판사에 부탁해서 싸게 살 방법이 없겠냐고 묻는 전화를 서너 차례 받았어요. 그 전화를 하기까지 그 엄마가 얼마나 망설였겠어요. 아버지들은 그런 전화를 절대 안해요. 어머니의 사랑이 용기를 내게 하는 거예요.
 
책방에서 알면 항의가 들어오니 소문내지 말라고 하면서 출판사를 소개해줬지요. 그 모정이 얼마나 눈물겨워요. 그게 소설이죠. 소설이 별거예요? 그런 절절한 이야기가 소설이지….”
 
―얼마전 신문에 김근태씨(민주당 국회의원)의 양심선언을 헛되게 하지 말라고 칼럼을 썼더군요. 김의원후원회 회원이라지요.
 
“내가 전두환(全斗煥) 정권 때 우익의 협박을 받고 위태로운 상태에서 태백산맥을 써나가고 있을 때, 두 사람이 정신적인 위안을 주었습니다. 바로 문익환(文益煥) 목사와 김근태 의원입니다. 태백산맥을 쓰다가 잡혀 들어가 수난을 당하게 되면 두 사람처럼 의연하게 대처하리라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김근태씨가 정치를 시작하기에 솔선해서 그를 돕기 시작했어요.
 
국민의 대표로 뽑힌 사람이 국민 앞에 잘못을 고백하는 것이 얼마나 부끄럽고 힘든 일입니까. 양심 없이는 할 수 없는 일이고 커다란 용기입니다. 잘못을 시인하지 않는 것이 우리 사회의 전통처럼 돼버려 역사가 계속 왜곡됐습니다. 왜 그만 처벌받아야 합니까. 그의 용기와 양심은 보호되어야 마땅합니다. 만약에 다른 정치인들이 철통 같은 침묵을 지켜 법 밖에서 안주하고, 김의원만 처벌당하는 사태가 오면 시민단체의 이름으로 정치인 전부를 고발할 작정이에요. 나는 참여연대가 만들어진 시점부터 이사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동국대 국문과 하면 미당 서정주가 떠오른다. 조씨와 아내 김시인은 모두 동국대 국문과를 졸업한 미당의 제자들이다. 김시인은 미당의 추천을 통해 등단했다. 결혼할 때 미당이 주례를 섰다.
 
未堂과 조정래, 그리고 조영남
 
―미당은 ‘시의 정부’라는 평을 들을 만큼 뛰어난 시인이었지만 친일 및 독재정권과의 유착 행적으로 비판을 받고 있습니다. 스승에 대해 말하기가 조심스럽겠습니다만 미당에 대해 어떤 평가를 하고 있습니까.
 
“실천문학 여름호에 모두 써놓았습니다. 그것으로 대신하죠.”
 
그는 1985년 ‘한국문학’ 주간을 하면서 해방 40년 특집으로 친일문인들의 문제를 특집으로 다루려고 했다. 그는 미당을 찾아가 글의 마지막에 ‘잘못했다’는 한마디만 하면 선생님은 자유로워진다며 글쓰기를 권유했다. 미당은 안색이 변하며 “뭐라고! 넌 대학생 때부터 반골 기질이 강하더니만…. 그래 들어봐라”며 두 시간 동안 여러 말을 했으나 글쓰기는 거부했다. 조주간은 결국 친일 선배문인들의 반성하는 글쓰기 대신에, 젊은 문인들이 반성 없는 선배 친일 문인들을 비판하는 특집으로 바꾸었다.
 
‘미당은 그야말로 미당인 채로 이 세상을 떠나갔다. 그리고 미당 비판을 놓고 문단과 세상이 한바탕 시끌시끌해졌다. 미당이 마지막으로 잘못했다는 한마디를 남겼어도 그렇게 시끄러웠을 것인가. 미당은 그의 빼어난 시들처럼 생애도 깔끔하게 정리했어야 했다. 그 일을 끝내 하지 않음으로써 미당은 후진들이 서로 얼굴을 붉혀야 하는 업보를 남겨놓았다.’(실천문학 2002년 여름호 조정래 ‘용서는 반성의 선물’ 중에서)
 
―조금 막연하고 조금 거창한 질문 같기도 한데 문학이 지향해야 할 가치는 어떤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인간의, 인간을 위한, 인간다운 세상을 만드는 데 기여하는 문학을 해야 합니다. 궁극적으로 이것이 나의 문학하는 자세이고 가치관입니다. 그러니까 문학이 이데올로기의 무엇이다 하는 것은 소용없는 소리입니다. 모든 이데올로기는 인간을 구제하기 위해서 만든 제도거든요. 그러므로 모순이 있을 수밖에 없고 그 모순 속에서 사멸하거나 침몰합니다. 사회주의가 바로 인간적인 것을 확보하지 못해 소멸하고 있습니다. 사회주의가 다시 오리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지만 내가 보기에는 안 올 거예요. 오더라도 다른 방법으로 오겠죠. 문학은 인간을 위해 기여해야 돼요.”
 
그의 친구 중에는 그와 전혀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사람도 있다. 가수 조영남(趙英男)씨가 그 가운데 한 명이다. 조영남씨는 탤런트 윤여정씨와 헤어질 무렵에 조정래씨의 집에 와서 피란 생활을 했다.
 
미국은 한국을 인정하라
 
―조영남씨의 바람기는 널리 알려져 모르는 사람이 드뭅니다. 사적으로 그분의 여성관이나 부부관에 관해 논의해본 적이 있습니까.
 
“조영남은 음악적 재능이 탁월한 사람입니다. 선험적으로 광대끼를 갖추고 있는 좋은 연예인이죠. 그런 만큼 자유주의적인 데가 많아요. 내가 만날 때마다 심각하게 역사 사회의식이 빈약하다고 지적하니까, 그는 ‘조선생님은 입만 열면 애국애족을 말한다’고 비아냥거리기도 합니다. 그가 윤여정씨하고 이혼할 때 우리집에 와있으면서 윤씨와 전화로 재산에 관한 논의를 하길래, 내가 ‘당신은 또 벌 수 있으니 다 주라’고 조언했지요. 자식을 그쪽에서 키우니 아무 말 말고 다 주라고 했습니다. 그가 차도 줘야 하냐고 물어서 차는 너의 발이니까 차만 빼놓고 다 주라고 했습니다. 그때 이후로는 충고한 적이 없습니다. 인생은 각자 알아서 살아가는 것 아닙니까. 말로 하기보다 내가 집사람 하고 사이좋게 사는 것이 그에게 교훈이 되기를 바랍니다.”
 
조정래 김초혜 부부는 문단에서 소문난 잉꼬부부다.
 
―딱딱한 인터뷰를 너무 오래 끌면 독자들이 지루할 것 같아서 조영남씨 이야기를 한 것입니다(웃음).
 
“좋아요. 이런 거 좋아요. 조영남씨도 이번 신동아 인터뷰 읽어봐야 돼요. 그에게 말을 안하고 있었지만 하고 싶었던 이야기입니다.”
 
―조영남씨는 작가 조정래씨가 자기의 잔치를 망쳐놓은 적이 있다고 썼더군요. 초대한 손님 중에 농구선수 박신자씨의 미국인 남편이 있었는데 그이는 CIA 한국 부지부장이었어요. 조선생께서 미국을 비판하며 박씨의 남편과 심하게 언쟁을 벌였다는 것입니다. 작품에서도 미국을 비판하는 내용이 더러 발견됩니다. 6·25와 미국, 세계 질서를 주도하는 지금의 미국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조지 W. 부시 정권이 들어선 이후 횡포도 많지만 약소국가로서 미국이 세계 질서를 주도하는 현실을 부인할 수만도 없는 것 아니냐는 생각이 들어요.
 
“한미관계야말로 애증이 얽혀있는 관계 아니겠습니까? 6·25 때도 도움을 받았지만 한국이 경제발전을 이룬 데는 미국 시장의 덕을 크게 보았음을 부인할 수 없지요. 그러나 우리에게도 역사와 전통이 있고 독립성과 주체성이 있어요. 강대국의 횡포를 언제까지고 받아주기만 해서는 안됩니다. 대등한 국가 대 국가의 관계가 정립돼야 합니다.
 
우리 스스로 태도를 분명히 하고 미국이 알아듣도록 설명해야 합니다. 미국도 한국이 변했다는 것을 인식하지 않으면 두 나라 관계는 좋아지기 어렵습니다. 우리는 1인당 GNP 80달러에서 경제건설을 시작해 지금은 1만달러에 이르렀습니다. 문맹률이 세계에서 가장 낮은 나라가 한국입니다. 미국이 이러한 나라를 과거 원조물자 주던 80달러 수준의 국가로 다루어서는 곤란합니다.
 
부시 대통령이 ‘악의 축’ 발언을 하고 방한하니, 무슨 사태가 벌어졌습니까. 시민단체들이 연합해 반미시위를 벌였습니다. 한국은 1990년대 이후 10년 동안에 2만개의 시민단체가 만들어진 나라입니다. 미국이 한국사람에 대한 존엄성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한미관계는 계속 악화될 것입니다. 21세기에 사이좋은 동반자로 가려면 미국은 좀더 겸손해질 필요가 있고, 한국은 더욱 당당하게 미국을 향해 우리의 입장을 확실히 해줄 필요가 있습니다.”
 
―태백산맥이 처음에는 한길사(대표 김언호)에서 나왔는데 나중에 해냄으로 출판사를 옮겼죠. 어떤 연유로 헤어졌습니까.
 
“말하고 싶지 않아요. 인세 인지 문제였습니다. 마땅치 않은 상태에서 계약기간이 만료돼 다른 곳으로 옮겼습니다.”
 
월남전 돈 벌려고 참전
 
―‘한강’에 월남 파병도 다루었던데 월남 파병에 대해서도 논란이 있었지요. 고엽제 후유증으로 고통 받는 분들도 있고, 용병론을 펴는 학자들도 있습니다. 월남 참전 용사들은 용병론으로 우리를 모욕하지 말라고 흥분합니다. 월남 파병에 대해서 총체적으로 어떻게 판단합니까.
 
“한강에서 베트남에 간 군인과 근로자의 문제를 모두 다루었습니다. 베트남 전쟁 소설이 서너 편 나와있지만 근로자 문제는 전혀 언급을 안했어요. 라이 따이한이라고 하는 튀기는 전부 근로자들이 뿌려놓고 온 씨거든요. 근로자들이 동거생활을 한 결과입니다. 군인들은 전쟁하느라고 바빴고 어쩌다가 매춘녀들을 상대했지요. 그런데 라이 따이한을 군인들이 만들어놓은 것처럼 잘못 알고 있어요.
 
혈맹인 미국과 함께 공산주의 침략을 막는다는 명분으로 베트남 전쟁에 참여했다고 말하지만 당시 지원 군인들은 ‘월남에 돈 벌러 간다’고 했습니다. 중요한 건 그 대목이에요. 월남 참전 용사들은 자존심이 상하겠지만 명분은 명분이고 내용은 돈벌이였다고 인정할 수밖에 없는 거예요.
 
‘도대체 우리가 베트남에 뭐 하러 왔는가. 돈 많은 나라 미국이 퍼붓는 달러는 먼저 먹는 게 임자다. 일본 놈이 제일 많이 먹는다. 필리핀 대만도 와 있는데 우리도 많이 먹는 수밖에 없다.’ 소설에 나오는 PX병이 그런 말을 합니다. 당시 병사들이 월 40달러를 받았습니다. 요즘 돈으로 치면 거의 1000달러는 되는 가치입니다. 근로자들은 그것보다도 7∼8배를 더 벌었습니다. 용병이라는 말이 자존심을 상하게 하더라도 내용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미국에서는 월남전 참전에 대해 잘못이었다는 반성이 폭넓게 이루어졌습니다.
 
“잘못된 전쟁이었지요.”
 
―한강에서는 박태준(朴泰俊) 전 포항제철 회장을 높게 평가했지요.
 
“두 가지 측면에서 그 분을 높게 평가했습니다. 첫째 기업인으로서 가장 양심적이고 모범적으로 일관했습니다. 둘째 포항제철로 우리 경제의 체질을 바꿔놓았습니다. 포철이 생기면서 중화학공업으로 우리 경제의 방향이 바뀌었습니다. 1972년까지 매해 1억달러 가까이 철강을 수입했습니다. 그런데 포철이 3고로 4고로를 가동하면서 국산 철강으로 자급자족할 수 있게 됐습니다. 가격은 수입철강에 비해 3분의 1이나 쌌습니다. 박정희 대통령이 죽었을 때 1인당 GNP가 1000달러이던 것이 1만 달러까지 왔잖아요. 그렇게 된 데는 중화학공업의 힘이 절대적이었습니다. 그 분의 남다른 헌신성과 애국심이 이룩한 결과라고 생각합니다.”
 
―역사를 배경으로 해서 소설을 쓰다보면 신문을 많이 참조하게 되지 않습니까.
 
“소설을 쓰기 전에 관련 서적을 최대한 구해서 읽습니다. 동국대학 도서관에서 3∼4개월 동안 1959년 이후의 동아일보 조선일보를 뒤져 노트에 메모했습니다. 노인네가 몇 달씩 도서관에서 신문을 뒤지니까 소문이 났지요. 소설쓰기가 그렇게 원시 노동입니다. 남이 대신 해줄 수가 없습니다.”
 
세 편 소설에 등장인물 1200명
 
―대하소설 세 편에 등장하는 인물이 1200명이 넘는다지요. 작명소를 차려도 되겠어요. 같은 이름을 쓰는 실수를 한 적은 없습니까.
 
“이름에도 유식한 사람과 무식한 사람의 분위기가 다릅니다. 우스운 이름도 있고 우습지 않은 이름도 있어요. 못사는 사람일수록 천금 만금 식으로 이름을 지어요. 얼마나 촌스러워요. 부모의 염원이 거기에 담겨있는 거예요. 양반들은 항렬을 따집니다. 이름이 절대로 겹치면 안되지요.
 
태백산맥을 쓸 때는 그나마 편했어요. 아리랑에는 태백산맥에 나온 이름은 쓸 수 없게 됐지요. 태백산맥에서 독자들에게 명확하게 인상이 찍혀버린 성씨, 하대치 염상진 등은 이름뿐만 아니라 성도 못 쓰게 돼요.
 
유심히 보면 태백산맥에서 주인공으로 등장한 사람들의 성은 아리랑에 안나옵니다. 아리랑에 나온 주인공 성은 한강에 안 나오고…. 또 조가는 안 씁니다. 쓰더라도 잠깐 지나가는 것으로 쓰지요. 왜냐하면 내가 조가이기 때문에 나쁜 사람으로 쓰자니 기분이 나쁘고, 좋은 사람으로 쓰자니 흉볼 것 같아서요. 소설을 쓰기 전에 이름을 미리 준비하지요. 무식한 이름, 지성적인 이름, 촌스러운 이름을 지어 분류를 해놓고 하나하나 사용합니다.
 
소설 세 편에 등장인물이 1200명 정도 되지만 겹치는 이름이 하나도 없다고 장담을 했어요. 그런데 어떤 여성 독자가 ‘허진’이라는 이름이 아리랑에도 나오고 한강에도 나오는 것을 찾아냈어요. 그걸로 끝난 줄 알았더니 두 사람이 또 한 사람씩 지적했습니다. 세 사람이 겹칩니다. 물론 잠깐 스쳐 지나가는 인물이지만. 무의식이라는 게 무서워요. 깨끗이 씻어내고 새로 시작하려고 하는데도 그게 잘 안되는가 봐요. 그래서 이 사람들한테 사과하는 의미로 책에다가 사인을 해서 한 권씩 보내줄까 생각하고 있어요.
 
하루 세 번씩 맨손체조
 
―글쓰기 외에 어떤 취미를 가지고 있습니까.
 
“취미라는 게 없습니다. 주색잡기를 안하는 것이 제 삶의 자세입니다. 나는 글을 쓸 때는 술을 일절 안 마십니다. 나는 에피소드가 없는 것이 에피소드인 작가라는 말을 듣습니다. 아리랑을 한국일보에 4년 연재했고, 한강을 한겨레신문에 3년 연재했는데 원고 때문에 신문사 담당기자가 저한테 전화한 일이 한번도 없습니다. 미리미리 보내니까요. 자존심 때문에 내가 맡은 일은 최선을 다해 책임지려고 합니다. 주색잡기는 하지 않지만 운동은 건강을 위해서 열심히 합니다. 맨손체조를 하루에 세 번 합니다. 그리고 아침저녁으로 산책하고 일요일에는 꼭 등산합니다. 이 세 가지를 하루도 안 빼고 해서 20년 동안 건강을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맨손체조 효과는 대단히 큽니다. 많은 사람들이 했으면 좋겠어요.”
 
―등산은 어디로 다닙니까.
 
“내가 분당으로 이사온 이유가 두 가지입니다. 공기가 좋고 아무데서나 올라가면 바로 산입니다. 등산로를 따라가면 남한산성에 다다릅니다.”
 
동갑인 아내 김초혜 시인과는 동국대 국문과에서 만나 연애하다 결혼해 35년째 함께 살고 있다. 김초혜 시인이 영문과에서 국문과로 옮기자 국문과 선배들 사이에 구애 경쟁이 벌어졌다. 문학서클 합평회를 할 때 조씨가 김시인의 만년필을 빌려 돌려주지 않았다. 김시인이 만년필을 돌려받으러 찾아왔을 때 “공짜로는 줄 수 없고 빵을 사달라”고 한 것을 계기로 가까워졌다. 1960년대에 연애 걸던 수법이다.
 
부부는 결혼할 때 서로의 작품 세계에 대해서 존중하고 일절 간섭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세웠다. 김시인은 조씨가 쓰는 작품의 첫 독자이고 교정자다. 원고 상태에서 읽고 오류를 발견해 고쳐주는 일을 끊임없이 계속하고 있다. 조씨는 아리랑에 붙인 작가의 말에서 작품의 절반은 아내가 써준 것이라고 공을 나누었다.
 
“세상이 얼어붙었던 전두환 정권 초기에 소설 태백산맥을 쓰려고 할 때 다가올 위협이 두려웠어요. 집사람에게 이런 고민을 털어놓았죠. 분명히 소설로 인해 불이익을 당하고 피해를 보게 될 터인데 그때 견딜 수 있겠냐고 물었지요. 그랬더니 아내가 ‘당연히 작가가 써야 할 것은 써야지, 정치적 사회적으로 압박을 받는다고 해서 피해버린다면 말이 되느냐’고 격려를 해줬어요. 그리고 20년 글쓰기를 계속하도록 뒷바라지를 해주었습니다.”
 
김초혜 시인은 시집을 9권이나 냈다. 이중 ‘사랑굿’은 시집으로서는 전무후무하게 100만부 이상 팔려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사진기자가 왔을 때 같이 사진을 찍으라고 권유하자 조씨는 “저 사람은 평생 매스컴에 얼굴을 안 내밀어요. 그게 저 사람이 살아가는 방법입니다”라고 말했다.
 
―김초혜 시인의 시 중에서 가장 좋아하는 작품을 하나 소개해주시죠.
 
“‘어머니’입니다.”
 
‘어머니’의 전문은 이렇다.
 
<한 몸이었다/ 서로 갈려/ 다른 몸 되었는데
주고 아프게/ 받고 모자라게/ 나뉘일 줄/ 어이 알았으리
쓴 것만 알아/ 쓴 줄 모르는 어머니/단 것만 익혀/ 단 줄 모르는 자식
처음대로/ 한 몸으로 돌아가/ 서로 바꾸어/ 태어나면 어떠하리>
 
―출판사도 경영했다지요.
 
“교사 생활을 그만두고 원고료 가지고는 못 사니까 글만 전문적으로 쓰기 위해서는 경제력 확보가 필요하다는 생각을 했지요. 1978년부터 출판사를 제가 직접 경영하다가 1980년에 그만뒀어요. 세끼 밥만 먹고 한 20년 먹고 살 돈을 그때 벌었어요. 내놓는 것마다 1만 부 이상 3만∼4만부씩 팔렸어요. 집사람 1년 후배인 방송작가 김수현씨 소설도 냈고…. 출판사를 하기 전에는 소설문예라는 포켓북 잡지를 해봤는데 잘 안돼서 1년 만에 경영권을 넘겨버렸죠.”
 
“애비의 고통을 느껴라”
 
조씨에게는 외아들(조도현)이 있다. 자식을 많이 두면 글장이 해서 먹여 살리기 힘들 것 같아 딱 하나만 두었다고 했다.
 
“지금처럼 성공한 작가가 될 줄 미리 알았더라면 서넛 둘 걸 그랬어요”
 
아들이 대학생이 됐을 때 태백산맥 전문(全文)을 원고지에 베끼라는 숙제를 내줬다. 3년 전 시집온 며느리(이민경)한테도 같은 숙제를 내 태백산맥을 6권 째 원고지에 정서하고 있다.
 
“소설을 통독하고 나서 한 문장 한 문장 옮겨 베끼면 역사 인물 세상에 대한 이해, 문장 공부 등 얻어지는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며느리도 자식입니다. 애비가 쓴 작품이 어떤 고통 속에서 이루어졌는가를 1000분의 1이라도 알려면 한번은 베껴봐야 합니다. 저작권은 작가의 사후에도 50년 동안 보장됩니다. 값진 노동의 대가를 한 푼이 됐든 두 푼이 됐든 간에 받으려면 애비가 바친 순수한 고통의 질감을 느껴봐야 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황호택 <동아일보 논설위원> hthwang@donga.com
 
자료출처 : 신동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