鶴山의 草幕舍廊房

유럽 아프리카

[스크랩] 白鳥의 城

鶴山 徐 仁 2006. 6. 10. 22:24



 

 

노이슈반슈타인(Neuschwanstein)

 

바바리아왕국의 4대왕 루드비히 2세가 지은 성들은 남부독일에서 가장 아름다운 경관을 자랑하는 곳이다. 퓌센 근처에 있는 중세 기사의 성 모양을 지닌, 노이슈반슈타인성과 오버아 머가우지역에 로코코양식을 띤 린더호프성, 그리고 침제호수 가운데의 섬에 우뚝 솟아 있는 베르사이유궁을 모델로 본 딴 헤렌침제성이 그것이다. 이들 성들은 매년 전세계의 수만의 방문객들을 불러들인다.

그럼, 이러한 성들은 지은 사람은 어떤 종류의 사람일까?, 정말로 이 왕은 미친왕이며, 그의 이러한 작품들은, 종종 주장되는 것처럼 정말 저속한 것인가? 이러한 질문들에 좀더 객관적으로 대답을 하자면, 우리는 독특한 군주로서 자신의 삶을 살았던 루드비히2세 왕의 일생에 대해 좀 더 가까이 접근해 볼 필요가 있겠다.

 

루드비히2세는 1845년 8월 25일 바바리아왕국의 수도인 뮌헨에서, 막시밀리안2세왕과 프러시아의 공주였던 그의 아내 마리 사이에서 태어났다. 이후 3년후 동생인 오토가 태어나게 된다.

세상에 대해 좀 무지하고 과학에만 흥미를 가지고 몰두해 있던 막시밀리안왕은 자신의 두 왕자를 매우 엄격하게 키웠고, 장차 왕이 되어서 그들이 지게될 직무에 대해서는 전혀 준비를 시키지 않았다. 루드비히는 단지 몇번을 제외하고는 호헨슈반가우성에서 그의 어머니와, 하인들, 농군들과 함께 그의 유년 시절을 보내었다. 그의 교육은 가정교사에의해 이루어졌으나, 그 교육이 루드비히에게 모두가 다 적합하지는 않았다. 호헨슈반가우성에 그려진 독일 전설에 관한 그림들은 루드비히를 매혹시켰고, 삶의 로맨틱한 부분들을 그에게 강조시켜주었다.

소년적부터 그는 호헨슈반가우지역 부근의 계곡과 숲속을 돌아다녔으며, 산들과 자연을 사랑하였고, 그의 일생동안, 그에게 헌신적이었고, 검소하고, 복잡하지 않은 이 지역 사람들을 사랑하였다. 어릴적부터 자신의 마음을 털어놓거나, 그의 심정을 토로할 사람을 갖지 못했던 루드비히왕자는 어려서 이미 실제 삶과는 거리가 있는 자기 자신만의 세상을 만들어가게되었다. 성장함에 따라 그는 문학에 주요관심을 가지게 되며, 특히 프리드릭 폰 쉴러의 희곡과 슬픈 시들을 사랑하게 되었다. 이러한 시의 스타일은 주로 이상주의자나 로맥틱 열광자들에게 딱 맞는 것이었고, 결국, 이러한 문학경향은 그가 세속적인 세계와 스스로를 단절시키고, 모든것들이 숭고하고 아름다운, 정신적 파라다이스로 도피하는 경향을 띠게 되는데 한몫하게 되었다.
그가 16살이 되던 해 그는 처음으로 새로운 형태의 음악을 접하게 되었다. 1861년 2월 2일, 그는 바그너의 오페라인 "로엔그린"을 보게 되고, 바그너에 의해 지어진 이야기의 정교함과, 음악의 작품성을 통해, 그가 꿈꾸었던 모든 로맨틱한 이상들이 실현되어지는 느낌을 받게 된다. 이때부터 그는 그가 구할 수 있는, 리차드 바그너의 작품들을 모두 구하게된다.
1863년 8월, 기념할만한 만남이 뮌헨의 레지덴스에서 이루어지게 되는데, 바로 루드비히 왕자가 비스마르크를 만나게 되며, 이는 이들의 삶에서 유일한 개인적인 만남이 된다. 격렬하고 역동적인 정치가인 비스마르크와 탐미주의자이며, 몽상가였던 루드비히, 이 완전히 다른 두 사람의 만남이었으나, 그들은 서로에게 강한 인상을 남기게 되고, 비스마르크는 장차 바바리아의 왕이 될 루드비히에게 친근감을 느낀다. 루드비히 또한 위대한 정치가인 비스마르크에게 존경심을 느끼면서 또한 그에 대한 우정을 갖게 된다. -루드비히가 죽기 얼마 전 비스마르크에게 필사적으로 도움을 요청하는 마지막 편지를 쓰게 되고, 비스마르크 역시 정치적인 노출에도 불구하고, 이 불쌍한 바바리아의 왕에게 조언의 편지를 보내게 된다.-

1864년 3월 10일 막시밀리안2세왕이 세상을 떠나게 되고, 루드비히왕자가 18.5세의 나이로 왕이 된다. 그는 대학공부를 완전히 마치지도 못한 상태였고, 세상과도 거의 접촉이 없이 살아왔으며, 또한 왕위를 계승받기 직전까지도 그의 아버지의 궁에서 일어나는 정치적인 해프닝을 볼 수 있는 기회조차 갖지 못한 상태였다. 그는 한 나라의 왕으로서의 책임감에 대해 아무런 준비도 하지 않은 상태였다. 하지만, 모두 예상했던 것과는 반대로, 그는 그의 임무를 매우 신중하게 맡아서 매일 통치자로써 철처하게 그의 업무에 임했다. 그가 통치한 첫해에는 그는 예술과 문화에 대한 이상적인 개념을 실현시키고자 노력했다. 비텔스바흐의 궁은 정복, 힘, 지배 등에 관한 것 보다는 문화에 대해 더 많이 살펴졌으며, 수상들이나 정부각료들이 그에게 조언을 하더라도, 그는 자신의 의견으로 결정을 내리곤 했다.

루드비히2세의 성격을 보여주는 한 예가 있다. 그가 라이히 의회 각료들과 대화를 하던 중, 그가, 세입기간을 6년에서 2년으로 바꾸는 것이 어떠냐는 의견을 그들에게 제시하였다. 그들은 그러한 변화가 바바리아왕국의 재정에 더 이로울 것이라고 찬성을 하였다. 그러자 루드비히왕은 그들에게 다시 되물었다. "당신들은 내 아버지 대에서는 그러한 변화에 반대하지 않았소?" 그러자, 의회각료들이 답하기를, "그것은 선왕이 6년 세입기간을 더 좋아하셨고, 저희는 거기에 충실한 것입니다." 라고.. 이에 왕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라이히의 의원들이 오늘은 이것이 좋다하고, 내일은 또 다른것이 좋다고 하면 통치자는 진실을 어떻게 배울 수 있겠소?"

루드비히가 통치기간 중 처음으로 한 것 중에 하나는 그의 우상이었던 음악가, 리차드 바그너를 뮌헨으로 초대하는 것이었다. 1864년 5월 초, 바그너도 이 초청을 기쁘게 받아들였고, 같은해 5월 4일 오후, 그 둘은 만나게 되었다. 바로 이 당시에 바그너가 창작에 다시 열정을 쏟게 되고, 그의 불멸의 작품들이 후세에 길이 보존되었으리라는 것은 당연한 결과라 할 수 있다. 이날 저녁 바그너는 그의 친구, Dr. Wille에게 다음과 같이 편지를 썼다. " 자네도 알다시피, 오늘 어린 왕이 나를 초대했었네, 그래서 나는 그를 만났고...하지만, 그는 불행하게도 너무나 고결하고, 총명하더군. 그리고 너무나 멋지고, 또 너무 감정적이어서 난 그의 삶이 이 조악한 세상에서 쏜살같이 지나가는 한줄기 물처럼 사라져버릴까 두렵네. 난 운좋게도 그러한 세상에서 견디고 헤쳐나가지만, 만약 그가 단지 살아있을 수만 있다면, 그는 아마 전대비문의 매우 놀라운 인물이 될걸세."

바그너와 왕의 우정은 이때부터 다져져서, 서로에게 많은 도움을 주게 되었다. 바그너는 모든 재정적인 걱정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그의 계획대로 위대한 독일 영웅에 대한 오페라의 창작에 심혈을 기울일 수 있었고, 바그너에 의해 영감을 얻은 왕은 뮌헨에 독일 음악학교를 만들 계획을 세우고, 또한 바그너의 오페라가 극화되는데에 필요한 모든 기술적인 음향시설을 갖춘 새로운 거대한 오페라하우스를 짓기로 결정하게 되었다. 왕은 뮌헨을 비엔나와 비슷한 음악의 중심지로 만들고 싶어했으나, 이 계획은 정부와, 그의 가족들, 그리고 뮌헨 시민들의 반대에 부딪혀 좌절되었다. 이러한 반대는 물론 재정적인 문제도 있었을 뿐더러, 무엇보다도, 왕이 "혁명적인"음악가인 바그너와 친하기 때문이었다.

바그너에 대한 비평은 여러곳에서 나타났고, 그들은 바그너가 왕을 고립시키고, 그에게 혁명당의 반역적인 사상들을 심어주고 있다고 비판하였다. 이러한 비판과 대항들은 왕에게는 무척 힘든 것이었고, 깊이 마음을 상하게 되었다. 처음 일년 반 동안은 그가 이럭저럭 바그너에대한 반대의견들을 저지할 수 있었지만, 그후 1865년 12월에 이르러서, 결국 왕도 이들을 이기지 못하고, 바그너에게 바바리아를 떠나도록 하였다. 이러한 조치로 왕과 바바리아 정부간의 신뢰에 치유할 수 없는 금이 가게 되고, 점점 그 관계는 틈이 벌어지게 되었다.
루드비히 왕은 일생동안 여자친구가 거의 없었다. 1864년 여름 Bad Kissingen에서 4주정도머물렀을 때, 모든 여성들과 초대된 손님들이 그를 사모했고, 그 해 루드비히가 Czar의 한 딸을 바바리아의 왕비로 데리고 가기를 원한다는 소문이 나돌았으나, 결국 헛소문에 지나지 않았다. 일생동안 그는 단지 오스트리아의 왕비이자 그의 사촌인 엘리자베스만을 생각하였다.
뮌헨에서는 점점 바그너에 대한 공격이 증가하였고, 이로인해 왕은 점점 더 뮌헨에 머물고 싶어하지 않게 되었고, 그는 의원들의 싸움과 모든 음모들과는 거리가 먼, 그가 사랑하는 알프스지역에서 더 자주 머무르게 되었다. 뮌헨 시민들에 대한 미움이 쌓이게 되자, 그는 한번은 로얄레지덴스를 뮌헨에서 뉘른베르크로 옮길 궁리까지 하게 된다. 그가 왕에 즉위한 지 1년 반이 지나, 그가 20살이 되었을 때 그는 바그너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쓴다. "오, 이 얼마나 하찮은 세상인가!, 너무나도 비참하고 잔인한 사람들이요! 그들은 좁고 비열한 단절된 세상의 중심에 놓여있다오. 오!, 단지 내가 이 세상을 떠날 수만 있다면!"

1866년 초여름, 정치적인 긴장상태로 인해, 왕은 어려운 결정에 직면하게 되었다. 군사나 전쟁과는 거리가 멀었던 루드비히는 그의 나라를 임박해있는 전쟁의 위험에서 벗어나게 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건 불가능한 일이었고, 그는 처음으로 퇴임을 결심하게된다. 그는 아무도 모르게 뮌헨을 떠나 스위스로 가서 바그너를 만나게된다. 결국 바그너의 설득과 영향으로 루드비히는 2틀만에 뮌헨으로 돌아오게 되고, 퇴임하고자 했던 그의 의도를 포기한채, 의회에서 요구한 대로 프러시아에 대항한 동원령에 서명을 하게된다.
이 전쟁은 단지 3주만에 끝나게 되고, 막대한 재산과, 사람에 대한 손상을 가지고 오게 된다. 8월 22일 평화협정에 서명을 하게되고, 바바리아왕국은 종주권에 대한 임무 이외에, 프러시아에게 배상비로 금화 5천4백만 마르크를 지불하게된다.

1867년 1월 22일, 루드비히 2세는 오스트리아 왕비 엘리자베스의 동생이자, 자신의 사촌이기도 한 소피 공주와 약혼을 하게 되나, 같은 해 10월 10일 그는 파혼을 하게되며, 그 이후에 그는 다시는 결혼에 대한 생각을 하지 않게 된다.

루드비히는 호헨슈반가우성 주변을 말을 타거나, 산책을 할 때 종종 매우 아름다운 한 장소에 대해 매우 매력을 느꼈다. 슈반슈타인이라고 불리기도 하는 Tegelberg의 기슭에 예전의 포르더호헨슈반가우 성의 잔해, 즉 단지 알아볼 수 있을 정도의 흔적만이 남아있었다. 막시밀리안 2세 또한 그의 재임기간 중인 19세기 중반기에 이 낡은 성을 재건축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그러나 어떤 이유에서인지 이 계획은 실현화되지는 않았었다. 1868년 봄에, 결국 재건축이 시작되었고, 남은 성의 잔재들은 말끔히 치워졌다. 이후 수도관이 설치되고, 도로가 건설되었다. 그리고 1869년 9월 5일, 마침내 루드비히2세는 기초석을 놓게 되는데, 이것이 오늘날 노이슈반슈타인 성이라고 불리게 된 유래이다. 이 성은 지어지는데 17년이 걸리게 되며, 물론 완전히 완성된 것은 아니었으며, 이 성에서 루드비히2세는 자신의 일생에서 가장 비참하고 수치스러운 일들을 겪게 된다.

1870년 초기, 정치적인 상황은 더욱더 위험해졌고, 프러시아와 프랑스간의 긴장상태로 인해 전쟁이 불가피해져있었다. 1866년 맺은 평화협정으로 인해 바바리아는 사건의 소용돌이 속에 휘말리게 되었고, 결국 1870년 6월 16일 의회의 요청에 의해 루드비히는 동원령에 서명을 하게되었고, 그가 피하고 싶었던 전쟁은 다시 일어나게 되었다.

독일군대는 승리에 승리를 거두었고, 무엇보다도 프러시아 군대에 비해 무장상태가 좋지 못했던 바바리아군대 또한 영리하게 잘 싸웠다. 1870년 9월 바바리아의 수상인 Bray-Steinberg는 왕에게, 독일황제왕관을 프러시아 왕조에게 제공함으로써, 독일의 모든 주들이 하나의 거대한 라이히연합임을 알려, 그로써 바바리아가 이득을 얻을 수 있다고 제안을 하게된다. 결국 이러한 생각을 담은 편지가 프러시아의 왕 윌리엄에게 전해지고, 루드비히왕은 프러시아의 수상 비스마르크에게 다음과 같은 내용을 전달한다. "진심으로 말하건대, 당신은 이 세기의 위대한 사람들 중에 가장 뛰어난 자리를 차지하였소." 결국 베르사이유궁의 거울의 방에서 프러시아의 왕 윌리암은 독일제국을 선포하게되고, 거의 모든 독일 귀족들이 이 의식에 참여하였으나, 바바리아의 루드비히 2세는 참석하지 않았다.

수년간에 걸쳐 루드비히와 바그너와의 우정과, 성들의 축조로 야기되어지는 많은 개인적인 공격들과 정치적인 음모들로 인해 루드비히는 점점더 상처를 받게 되었고, 그는 사람들에게 많은 오해를 받았으며, 그는 더욱더 사람들을 피하게 되어, 그가 사랑하는 알프스지역도 밤에만 산책을 나가게 되었고, 공공장소에 좀처럼 나타나지 않았다. 이로 인해 이때부터 이 외로운 왕에 대한 소문들이 생겨나기 시작했고, 그는 바로 동화속왕이 되기 시작했다.
이전보다 더 왕은 성을 짓는 것에 열중하기 시작해서, 1874년에는 오버아머가우 근처 Graswang계곡에 린더호프성을 짓기 시작했고, 1878년 부터는 침제호수에 있는 헤렌섬에 헤렌침제성을 건설하기 시작했다. 이외에도 더 많은 성들이 계획되었다.

루드비히에 대한 정치적인 반대 세력들은 점점더 격렬해져 갔고, 성들의 축조로 인한 빚들도 늘어가서 결국 상황은 점점 더 긴장감이 감돌게 되었다.
1886년 6월 초 바바리아에서의 위기는 매우 격렬해졌고, House of Wittelsbach의 멤버들과 왕족들이 모여서 어떻게 하면 루드비히를 다시 국정에 참가하게 할 수 있을지, 그리고 그가 거대한 성들을 축조하는데 드는 비용을 줄일 수 있을지를 의논하였다. 왜냐면, 그들은 800년 동안 축적되어 내려온 그들의 막대한 재산이 단지 한 세대에서 모두 탕진될 위험을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러는 사이, Lutz수상을 선두로 한 한무리의 정치인들은 Holnstein의원을 만나 정부의 명령을 받은 의사로 하여금 왕이 미쳤다는 의학보고서를 제출하게 하여 당당하게 왕의 자격을 박탈하려는 음모를 꾸미고 있었다. 루드비히의 삼촌인 Luitpold왕자가 다음 통치자로써 지목되고 있었다.
이 음모의 선두는 의심할 여지 없이 바로 Lutz였다. 정치인들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관심사는 그들의 위치를 안전하게 고수하는 것이었고, 왕의 막대한 지출로 인한 격렬한 비평에 의해 그들의 정치적인 위치가 심각하게 불안해지고 있는 터였다. 비스마르크가 바바리아의 이러한 사정들에 대해 알게 되었을 때 그는 Lerchenfeld백작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왕을 제거하려고 하는 정신병의사에 대해 나는 의혹이 생긴다. 아마도 모종의 음모가 있는 것 같다. 나는 바바리아의 수상들이 그들이 더이상 그들의 지위를 유지할 수 없을 것 같기 때문에 왕을 죽이고 싶어하는 것 같은 인상을 받았다."
1886년 6월 8일, 왕의 정신병을 증명하는 많은 보고서들이 여러 의사들에 의해서 보고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보고서들은 바로 왕을 한번도 검진해 본 적이 없이, 그들편인 주변 목격자들의 신뢰할 수 없는 말들과 관찰에 기반을 둔 것이었다. 그러나 의학적으로 부정적인, 정신병임을 증명하는 문서들만이 감독관들에게 전달되어졌고, 동일한 양의 긍정적인 문서들은 취급조차되지 못하였다. Schneider장관의 경우는, 루드비히 재임 마지막 몇년간 어떠한 정신병적인 증후도 보이지 않는다는 검진과 진찰기록 300개 이상을 모아 감독관들에게 평가를 위해서 제출하였으나, 그는 어떠한 답변도 듣지 못했고, 그가 모은 기록들은 조사조차되지 않았다.

루드비히의 정신적인 상태에 대한 광범위한 보고들은 많은 불합리한 점을 담고 있어서 오늘날에까지도 그것의 신빙성이 논의되어지고 있다.
루드비히2세는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삶이라는 것이, 단지 한가지 유형을 가진 사람을 위해 존재하는 것 처럼 보인다. 의미있는 사람이 되려면 반드시 거칠고, 조악하고, 냉정해져야할 필요가 있다. 만약 그렇지 못하다면, 그는 친구나 적들에 의해 괴상한 사람으로 불리게 된다." 1886년 사건이 일어나기 바로 전, 루드비히2세는 미국인 작가인 Lew Vanderpoole에게 다음과 같은 말을 한다. ".....나는 모욕으로 깊은 상처를 받았소. 그들은 나를 무력하게하여 땅끝으로 몰고 있소. 그들은 언제가는 반드시 나를 파멸시킬것이오. 그동안 내가 읽어오고, 보아온 모든 것들이 나를 기만한 것이 아니라면, 그들이 나를 미쳤다고 간주하는 대부분의 모든 것들이 내가 지나치게 민감하기 때문에 기인하는 것일 것이오. 나에게 적의를 가진 사람들에게는 이것으로 내가 종종 어리석게 보일 것이오. 아마도 내가 바보인지도..하지만 난 정말 묻고 싶소.....진짜로 미친사람은 대체로 자신이 미쳤다는 걸 깨닫지 못하는 바로 그사람이라는 것을.....내가 만약 시인이라면, 이러한 사실들을 싯구에 담을 수 있을 텐데, 아쉽게도 나에게는 그런 재주가 없소. 그래서 난 그저 비웃음 당하고, 경멸당하는 굴욕감을 참아야한다오. 그래서 나는 바보인 것이오. 내가 신앞에서 회계할 때, 신도 나를 바보라고 부를까?"

1886년 6월 1일, 루드비히는 성신강림절을 노이슈반슈타인성에서 보내고 싶어 호헨슈반가우에 왔다. 그는 그의 시종무관이었던 Hesselschwerdt를 뮌헨에 남겨두고 왔고, 루드비히에 대한 어떤 음모가 있다면, 그가 왕에게 알려줄꺼라고 믿고 있었다. 그는 Hesselschwerdt가 감독관들 앞에서 근거 없는 비난으로 그에게 죄를 씌우고 있으리라고는 의심조차할 수 없었다. 결국 루드비히는 성신강림절을 앞두고 춥고 비오는 날들을 그의 동화속 성에서 그가 가장 좋아하는 작가인 쉴러의 책을 읽으면서 보냈고, 그의 자유와 그의 왕관을 빼앗으려고 하는 뮌헨으로 부터는 아무런 소식도 듣지 못하고 있었다.
바로 한해 전의 정치적인 사건으로 인해 바바리아 정부는 왕을 퇴위시키는 일을 수행할 수 있는 충분한 권한을 가지고 있지 못했다. 바로 독일황제의 동의를 받아야만 했다. Graf Lerchenfeld가 이 협상을 수행하기 위해 베를린으로 급파되었고, 비스마르크 수상과 논의하던 중 그가 이러한 결정에 합의할 것 같지 않은 인상을 받자, 그는 곧 이 결정을 바바리아인들에게 맡기고, 그 결정에 따른 책임도 바바리아인들에게 넘겨버리게 된다. 그는 바바리아정치인들에게, 이것은 순전히 바바리아인의 문제이므로, 더이상 관여하고 싶지 않음을 밝힌다. 아마도 그건, 비스마르크 수상이 증거 불충분으로 당연시 반대의사를 표시할 것이라고 생각했고, 그로인해 바바리아 정부가 근시안적이고, 이기적인 정치적 처사를 할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1886년 6월 9일 저녁, 루드비히는 말을 타고자, 마부인 Osterholzer를 불러 호헨슈반가우에서 노이슈반슈타인성으로 새벽 1시경쯤 말을 가지고 오도록 하였고, 마부는 이 명령을 수행하려고 하자, 갑자기 Holnstein백작이 나타나, "더이상 왕은 어떠한 명령도 내릴 수 없다. 이제부터는 Luitpold왕자만이 명령을 내릴 수 있다."라고 말하면서 그를 저지하였다. 어쩔수 없이 마부는 말을 준비시키지 못했고, 조용히 호헨슈반가우를 벗어나서 노이슈반슈타인성으로 찾아가 이 사실을 루드비히 왕에게 전달하였다. 하지만 루드비히는 그가 과장을 한다고 생각하고 이 사실을 믿으려하지 않았으나, Osterholzer가 재촉한 뒤에야 그는 어떤 일이 일어날지에 대비하기 위해 그 지역의 경찰력과 소방관들을 부르기도 결심하였고, 또한 그가 믿고 의지하는 Duerckheim백작을 부르러 전보를 치게된다.

마부의 두려움은 결코 헛된 것이 아니었다. 6월 10일 이른 아침, 새벽 4시경, 여러개의 마차가 노이슈반슈타인성 앞에 멈추게되고, 여러 수상들과, 정신병의사들, 내과의, 그리고 정신병수용소의 관리인들이 나타나게 된다. 왕의 명령에 따라 궁의 대문은 경비원들에 의해 단단히 잠기었고, 의원들과 경비사이에 다툼이 벌어지는 사이에, 슈반가우와 퓌센지역의 주민들이 점점더 성 앞에 몰려들어 뮌헨에서 온 사람들에 대해 위협적인 태도를 보여주게 된다.이로인해 의원들은 아무런 성과도 거두지 못하고 호헨슈반가우성으로 돌아가게 된다.

아침 7시, 루드비히2세는, 성으로 들어오고자 시도하는 소리와, 그를 체포하려는 의도에 화가나서, 지역경찰로 하여금, 의원들을 체포하게 하여, 노이슈반슈타인성의 정문 옆의 하인들의 방에 그들을 감금시키게 된다. 그날 정오쯤 되어 상황이 다소 진정이 되자, 왕은 그를 도와주었던 주민들을 해산하게 되고, 의원들 또한 뮌헨으로 되돌아가게 된다.

이후 곧 Duerckheim백작이 도착하고, 왕은 그에게 이 사건에 대해 자세히 이야기하게 된다. 이 백작은 그에게 비스마르크에게 의지할 것과 오스트리아 황제에게 도움을 요청할 것을 권한다. 동시에 그들은 바바리아 국민들과 모든 독일 국가들에게 다음과 같은 성명을 하게 된다. " Luitpold왕자가 나를 제거하고 나의 동의도 없이 이 나라의 통치자가 되고자 한다. 현재 나의 내각은 나의 건강상태에 대한 거짓말로써 나의 사랑하는 국민들을 속이고 있으며, 아주 비열한 행동을 자행하고 있다. 나는 어떤 군주보다도 신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매우 건강함을 느끼고 있다. 하지만, 계획된 음모는 너무도 놀라워 나는 내각들에 의해 자행되어진 범죄에 대해 추정할 시간이 없다. 만일 이 계획된 폭력이 자행되어지면 Luitpold왕자가 나의 동의없이 권력을 잡게된다. 나는 모든 수단과 방법을 사용하여 나의 권한을 방어하고자 나의 헌신적인 동지들에게 이를 고발한다....."
뮌헨의 루드비히 반대파들은 이러한 선언문에 대해 듣고 그것이 공표되지 못하도록 하였다.단지 Bamberg Journal에서만 이 성명이 출판되었으나 즉시 정부에 의해 소각되었다. 전보또한 그 주소에 전달되어지지 못했으나, 비스마르크만은 그의 전보를 받았고, 루드비히에게 즉시 뮌헨으로 돌아가서 그 자신을 사람들 앞에 내 보이라고, 그래서 그의 권한을 세우게 되면 모든 음모가 저절로 좌절될 것이라고 그를 재촉하는 답장을 보냈다.
그러나 이미 루드비히는 그의 에너지의 한계에 도달해 있었다. 그 자신을 세워 일으켜 힘있게 앞으로 나갈 힘을 더이상 가지지 못했고, 그는 좌절했다. 그의 하인 Weber에게 그는 이렇게 말했다. " 그들이 나로부터 나의 왕관을 빼앗아가고자 하는 것은 오히려 최악이 아니다. 그러나, 나를 정신병자로 몰고 산 채로 매장하려고 하는 것은 바로 나에게는 죽음인 것이다." 그는 그의 추종자들이 오스트리아국경을 넘어 도망을 가라고 하는 것도 회피하였다. 그는 그로 인해 야기되어질 수 있는 유혈사태를 두려워했고,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기를 원했다. 루드비히는 거의 무감각하게 다음에 어떤 일이 벌어질지를 앉아서 지켜볼 수 밖에 없었다. 1886년 6월 1일 자정에서 2일에 이르는 시간에, 믿을 수 없는 교활한 아첨꾼이었던 하인 Mair가 왕에게 성의 남쪽탑의 잃어버렸던 열쇠를 찾았다고 알려주었고, 왕은, 식당을 통과해서 남쪽 탑으로 가기 시작했다. 하인들의 방을 지나던 중 갑자기 그는 한무리의 사람들에게 둘러싸였고, 그들은 그를 잡아 꼼짝못하게 했다. 그의 침실로 다시 옮겨진 후 Dr. von Gudden이 나타나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 폐하, 이것은 제 일생중 가장 불행한 임무입니다. 여기 정신병 전문의 4명이 폐하의 건강상태에 대해 의견을 제시한 것이 있고, 이 발표후 Luitpold왕자가 섭정을 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오늘 저녁 폐하를 Berg성으로 모시도록 명령을 받았습니다."
루드비히는 어처구니 없어 물었다. "어떻게 나를 정신적으로 병들었다고 말할수 있는가? 나를 전혀 진찰도 해보지도 않았으면서.." "폐하, 그건 반드시 필요한건 아닙니다. 우리 기록에는 많은 정보와 넘치는 증거들이 있으니깐요." 루드비히가 얼마나 오랫동안 그 기록들이 이루어졌냐고 묻자, Dr. von Gudden은 적어도 1년에 걸쳐서 기록해왔다고 대답했다. 왕의 마지막 말은 다음과 같았다. "아, 한 사람을 미친사람으로 만든다는 것이 얼마나 쉬운 일인가!!"

1886년 6월 12일 아침 4시경, 의사들과 정신병수용소 관리인들과 함께 왕은 노이슈반슈타인성을 떠났다. 그리고 8시간 동안 달려 Starnberg호수 근처의 Berg성으로 갔다. 이 성은 한때 이 불행한 왕이 가장 좋아하던 성 중에 하나였고, 지금은 감옥으로 재건축되어 있었다. 모든 창문들은 강한 격자로 이루어져있었고, 모든 문들은 밖에서만 열 수 있도록 되었고, 들여다볼 수 있는 자그마한 구멍이 설치되어 있었다.
루드비히2세는 매우 고요히, 차분하게 행동하였고, 곧 1886년의 성신강림절이 다가왔다.

1886년 6월 13일 성신강림절 아침, 왕은 Dr. von Gudden과 함께 성의 공원을 따라 산책을 나갔다. 약 30 걸음 뒤로 두명의 관리인이 이들 뒤를 따라다녔다. 점심식사 도중에 Dr. von Gudden은 다른 의사들과, 왕이 매우 순종적이며, 이는 루드비히 자신이 아프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고, 치유되기를 희망하는 증거라고 믿는다고 이야기하였다. Dr. Grashley가 왕의 상태가 결코 치유될수 없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고 말하자 Dr. von Gudden은 그 이야기는 나중에 다시 하자고 하며 잘라버렸다.

그러는 동안, 왕은 혼자서 식사를 하고 있었고, 식사후 그는 오랫동안 창문에 서서 망원경으로 Starnberg호수를 조망하였다. 오후 늦게 그는 산책을 하기를 희망했고, Dr. von Gudden은 이에 동의하였고, 저녁 6시경 두명의 관리인이 늘 그렇듯이 그들의 산책에 합류하였다. 그러나 Dr. von Gudden은 그들에게 손으로 따라오지 말라는 신호를 보내었다. 왜 Dr. von Gudden이 이러한 조치를 취했는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우리들에게는 결코 밝혀지지 않을 비밀인 것이다. 곧 왕과 Dr. von Gudden은 호수쪽으로 나 있는 길을 따라 사라졌다.
이 둘이 저녁 7시까지 되돌아 오지 않자 의사들과 하인들은 어쩔줄 몰라했고, 여러명의 경찰들이 공원을 뒤졌으나 아무것도 찾지 못하고 되돌아와야했다. 결국 밤 11시가 조금 넘은 시간에 이 사라졌던 두사람이 발견되었다. 그들은 물위에 죽은 채로 떠 있었다.

이날 밤 공식기관들에서는 다음과 같은 성명을 내놓았다. 그들을 발견했을 때 그들은 맥박이 뛰고 있었고, 뮐러의사가 인공호흡까지 했다고 보고가 되었고, 그 다음날 6월 14일 국립경찰국의 공식 보고에도, Dr. von Gudden뿐만 아니라 루드비히도 아직은 맥박이 뛴다고 보고를 하였으나, 그 다음날은 공식적으로 다음과 같이 발표되었다. 왕과 의사 그 둘다 그들이 발견되었을 때 이미 죽어 있었고, 그들의 시체는 적어도 3시간 동안 물위에 떠 있었다라고.
그들은 이러한 모순된 발표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하려고 했다. "소생시키고자하는 시도로 인해서 물리적으로 시체의 자세에 변화가 오게 되는데, 아마츄어들에게는 이것이 생명의 신호로 여겨지기도 하기 때문에 잘못된 보고가 생기게 되었다.(아우구스부르크 석간, 1886년 6월 15일자)"
왕이 죽은 후 그의 반대세력들은 모든일들을 행동으로 옮길 기회를 가지게 되었다. 단지 사람들을 진정시키고, 그들의 왕이 정신적인 병자였다는 증거만 제시해 준다면 아무것도 신경쓸 것이 없었다. 왕의 정신병을 확인하기 위해, 신문들은 그 "증거들"로 가득 메워졌다.

보도 매체에 별로 우호적이지 않던 뮌헨 정부는, Dr. Kerschensteiner을 시켜 루드비히 왕의 시체를 부검한 전체의 결과를 1886년 6월 20일 발표하게 된다. 그러나 이 시체부검 결과에 대한 기록 또한 논쟁 거리가 되었는데, Dr. Kerschensteiner은 부검 후, 뇌가 오그라져있고, 만성감염이 있다고 언급했고, 또한 그의 정신병의 증거로써는 그의 뇌의 무게가 1349g밖에 나가지 않아, 평균 보통 사람보다 36g보다 적다는 것이었다. 또한 더 나아가 Dr. Kerschensteiner은 루드비히의 일생 중 마지막 기간 동안, 그가 매우 침착하고 조용하게 행동함으로써 그가 미쳤음에도 불구하고 그 주변에 있는 모든 사람들을 여전히 속일수 있었다고 지적했다.
루드비히의 어떤 행동들은 정신분열적인 유전 인자 때문이고, 이러한 유전인자는 바로 다름아닌 1592년에 죽은 루드비히의 조상인 William von Braunschweig-Wolfenbuettel백작에게로 거슬로 올라간다는 현대과학의 주장에 동의한다는 것은 믿을 수 없는 일이다.
몇달 동안 왕을 개인적으로 모셨던 군인 Alfons Weber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나는 왕에게 있어서 어떠한 의심스러운 정신적인 병증세를 본 적이 없다. 또한 어떠한 비정상적인 변화도 감지하지 못하였다. 나는 항상 왕 가까이에 머물면서 그에게 옷을 입혀주고, 그를 모셨다. 그는 종종 나와 함께 이야기도 하였고, 그는 결코 정신병적인 어떠한 증상도 보이지 않았다."
1886년 6월 21일 정부각료들의 총회가 열린 동안, Neumayer의원은 루드비히왕이 정신병자였다는 특별한 증거를 가지고 있다고 말했고, 그것은 다름아닌, 루드비히가 발명가들에게 비행기를 만들어보라고 의뢰했고, 그가 그 비행기를 타고 그가 사랑하는 산들 위를 날아보고 싶다고 말했다는 것이었다. 더 이상의 논평은 불필요했다. 기술의 발달 수준이 왕의 이러한 생각이 정말로 얼마나 미친 짓인가를 보여주었다. 그러나 단지 10년 후에 최초의 비행기가 만들어지게 되었다.
오늘날 우리들에게 있어서, 그당시에 어떤 말들이 진실이고, 어떤 말들이 반만 믿을 수 있으며, 그리고 왕이 죽은 후 정부의 우익에 서기 위해 또 얼마나 많은 말들이 만들어졌는지 구별한다는 것은 어려울 뿐더러 거의 불가능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한가지 명확한 것은, 근대의 통치자로써 루드비히2세가 그의 통치기간 초기에, 그를 따르는 사람들의 교육수준을 향상시키기 위해 애썼다는 것이다. 그는 학교와 대학들을 세웠으며, 뮌헨에 Institute of Technology와 fine Art를 위한 아카데미를 세웠고, "Wittelsbach재단"을 설립하여 바바리아의 예술인들과 장인들을 후원하였다. 그는 또한 Henry Dunant의 탁월한 생각, 즉 "적십자 구호활동"을 지지한 최초의 인물중에 한 사람이었다. 그리고 이 적십자 구호활동은 곧 전체 게르만 라이히에 전해진다. 음악 애호가들은 그 덕분에 작곡과 그 보존을 할 수 있었고, 특히 리차드 바그너의 작품들을 알 수 있었다. 또한 음악의 새로운 길을 여는 예술가들을 왕족들이 지원해주는 재단이 생겨나게 되었고, 결국 Bayreuth에 Festival House를 건설하게 되었다.


역사는 시간의 경과가 길어질수록 이 왕에 대한 마지막 판단을 지나쳐버릴 것이다. 심지어 오늘날에도 바바리아의 루드비히2세는 선함과 아름다움을 추구하였던, 그리고 이세상의 죄악도 알게되었던 사람으로써 많은 사람들에의해 추앙받고 있다.

단지 바바리아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만이 아니고 모든 사람들의 마음속에 그는 "동화속 왕"으로 살아 남아 있으나, 결코 그는 "동화속의 인물"은 아니었다. 이 왕의 인생만큼이나 찬란하게 시작하여, 이 왕의 인생만큼이나 쓰라리게, 그리고 불확실하게 , 후세에게 미스테리로 남겨져서 끝나는.........

 

출처
글: http://busankises.co.kr/cogi/rud.php3
영상: http://www.ozi.co.kr/html/gi_neuschwanstein.htm

 

출처 : 경대사대 부중고1215회 재경동기회
글쓴이 : 이종운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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