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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에이스] Adolf Galland (1912 - 1996)

鶴山 徐 仁 2006. 2. 4. 16:17

Adolf Galland

 

 

 

아돌프 갈란트만큼 잘 알려진 2차대전의 독일 조종사도 드물 것이다.

그가 명실상부한 역사적 인물이 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104기 격추라는 기록 때문이라기보다는 확고부동한 카리스마와 부러지는 한이 있어도 절대 굽히지 않던 대쪽 같던 그의 의지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는 부하들에게는 따뜻한 지휘관이었고, 상관들에게는 직언을 서슴치 않는 충정 어린 군인이었다.

단 29세라는 나이에 장군의 반열에 들어, 2차대전 연합군, 주축국을 통털어 최연소 장군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공중전 전술가로서도 탁월한 역량을 발휘했다.

 

 

 

아돌프 갈란트는 1912년 3월 19일, 4명의 형제 중 둘째로 태어났다. 그의 두 동생, 빌헬름(Wilhelm)과 파울(Paul) 역시 아돌프 갈란트의 뒤를 이어 루프트바페로 자원입대했다고 전해지는데, 이들은 그의 형 만큼 운을 타고 나지 못했던지, 둘 모두 다 2차대전 기간 중 전사하고 말았다.

먼저 파울은 자신의 17기의 격추를 달성한 직후인 1943년 10월 31일, 적기로 오인한 JG26 전투비행단 소속 파일롯의 공격을 받고 격추되어 전사했고, 빌헬름 역시 그로부터 1년 후에 전사하고 마는데, 이때까지 빌헬름의 격추 스코어는 무려 54기에 달했다고 한다.

역시 전사의 피를 타고난 형제들이었나 보다.

 

 

 

갈란트는 어려서부터 비행과 항공에 광적인 소년이었다고 한다.

12살 때부터 모형 항공기를 만들기 시작했고, 16세에는 글라이더를 이용해 자기 생애의 첫 비행을 경험했다.

1933년 그의 나이 21세 되던 해, 드디어 조종사 면허를 따냄으로써, 하늘에 대한 꿈을 본격적으로 실현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루프트바페 초창기 시절 갈란트는, 조종사 경력이 끝나느냐 마느냐하는 엄청난 시련을 몇번씩 경험해야만 했다.

즉 1935년 비행훈련 도중, 그가 탑승한 Fw-44 복엽기가 지상에 추락하면서, 3일간 정신을 잃고 깨어나지 못했다고 전해지는데, 이 사고로 두개골과 코뼈도 골절되었으며, 캐노피 유리파편이 눈으로 파고 들어, 왼쪽눈이 반실명 상태가 되어 버렸다고 한다.

그러나 그의 직속상관 라이텔(Rheitel) 소령은 갈란트가 상심하지 않고 다시 비행할 수 있게끔 배려해 주었고, 이에 고무받은 갈란트는 불굴의 의지로 조종석으로 다시 돌아수 있었다.

그러나 불행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그로부터 약 1년 후, Ar-68 기에 탑승했다가 다시 추락해, 많은 시간을 군병원에서 보내야 했으니, 대에이스 갈란트의 조종사 초년기는 사고와 불행의 연속 그 자체였다고 하는 것이 옳겠다.

그러나 일련의 사고에서 얻은 값진 교훈이 후에 그가 이루게 될 전설의 밑거름이 되었던 것 만큼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1937년 부상에서 완쾌된 갈란트는 스페인 내전에 파견된 콘도르 군단에 자원하게 되는데, 이 부대에는 훗날 2차대전 전설의 에이스로 명성을 날리게 되는 우수한 조종사들이 상당수 포함되어 있었다.

예를 들어 갈란트의 친구이며, 전투기 총감직을 맡게 되는 베르너 뮐더스(Werner Molders), 갈란트가 종전을 단 몇달 앞두고 결성하는 최후의 엘리트 비행대 JV44에 함께 참여하게 되며, 반괴링파 에이스 중 하나였던 군터 뤼초우(Gunther Lutzow), 또 JG27에서 대에이스 한스 요하임 마르세이유(Hans Joachim Marselli)의 진가를 누구보다 먼저 알아차렸던 에듀아르트 노이만(Eduard Neumann), 그외에 빌헬름 발트하사(Wilhelm Balthasar), 하조 헤르만 (Hajo Herrmann) 등등...

 

 

 

한마디로 스페인 내전은 부활하는 독일 공군의 파일롯들이 자신의 기량을 시험해 볼 수 있는 데뷰 무대가 되었다고 할 수 있겠다.

어쨌든, 갈란트의 비행대는 He-51 복엽전투기를 주력기로 삼아, 1937년 7월부터 본격적인 임무에 들어가게 된다.

 

 

 

여기서 갈란트는 비록 격추기록은 달성하지 못하지만, 300회가 넘는 임무를 훌륭히 수행했고, 황금 다이아몬드 스페인십자훈장까지 수여받는 영예를 안게 되었다.

참고로 스페인 역사상 당시까지 이 훈장 수여자는 단 12명이었다고  전해지고 있어, 갈란트의 지휘력이 얼마나 대단했는지 미루어 짐작할 수 있겠다.

2차대전 개전 직후, 갈란트는 자신의 Hs(Henschel)-123기 비행대를 이끌고 폴란드 지상군 공격에 전념했으며, 이 전공이 인정되어 다시 철십자훈장을 수여받는 영예를 안게 된다.

그 얼마 후에 JG27 전투비행단으로 옮긴 갈란트는 대프랑스 항공전에도 참전했고, 1940년 5월 12일, 드디어 첫 격추의 감격을 맛보게 된다.

희생제물은 프랑스에 파견 중이던 영국 제 87 전투비행대 소속 허리케인 전투기로, 두번의 임무비행을 통해 2기의 격추를 이루어냈는데, 이것이 그의 100기 대격추행진의 첫 포문이라 할 수 있겠다.

 

[JG26 전투비행단 마크]

 

 

영국의 본토 항공전이 시작할 무렵, 갈란트는 쉴라게터비행단으로 유명한 JG26 전투비행단의 제 3 그루페를 맡게 되었고, JG26 부대원으로써 멋진 데뷰전을 치르게 된다.

즉 첫 임무에서 2대의 적기를 격추시켰는데, 그 공로가 인정되어 1940년 7월 18일에는 소령으로 진급했으며, 얼마 후 통산 17기 격추를 달성해 기사십자훈장까지 수여받았다.

영국의 항공전 동안 조종사로서의 역량은 최고조에 이르렀는데, 9월 25일에는 통산 40기 격추를 달성해 히틀러가 직접 그의 기사십자장에 오크잎을 추가로 수여했다고 전해진다.

또 거칠 것 없던 그의 격추행진에 고무된 지휘부는 갈란트에게 JG26 전투비행단 전체 지휘권을 맡겼으며, 1940년 11월 1일에는 대망의 격추 50기대를 돌파하고야 만다.

 

[갈란트의 비행기에 새겨진 nose-mark]

 

 

영국의 본토 항공전이 끝난 후, 대령으로 진급한 갈란트는 JG26 전투비행단을 지휘하며, 북프랑스의 제공권을 거머 쥐었고, 이제 해협의 에이스들 중 선두 대열에 나서게 되었다.

그러나 영국 에이스들의 반격도 만만치 않아, 당시 갈란트 역시 몇번 격추당하는 고배를 마시기도 했다.

즉 1941년 6월 21일, 자신의 비행대를 이끌고 영불 해협 상공에서 영국의 블렌하임 폭격기들을 요격해, 2기의 폭격기를 잡았지만, 연이은 호위 스피트화이어의 공격을 받고, 동체착륙을 해야만 했다.

그러나 큰 부상을 입지 않아, 이날 오후 다시 재출격에 나서, 자신의 통산 70기째 격추를 달성했지만, 다시 스피트화이어에게 격추당하고 말았다.

갈란트는 추락하는 Bf-109 칵크핏 속에서 낙하산 탈출을 시도하려 했으나, 캐노피가 걸려 열리지 않았다.

극한 상황에 처하게 되면 초인적인 힘이 생겨나는 것일까?

마지막 순간, 갈란트는 있는 힘을 쏟아부은 후, 겨우 캐노피를 열어, 탈출에 성공했다고 하는데, 그의 낙하산이 펴진 것은  지상 충돌 불과 몇 미터 남겨 둔 시점이었다고 하니, 순식간에 지옥과 천당을 왔다갔다 했다고 할 수 있겠다.

그리고 이날 스피트화이어의 사격은 갈란트의 후방에서 이루어 진 것이라, 명중탄들이 주로 갈란트의 조종석 뒷 장갑판에 꽂혔었다고 한다.

그런데 재밌는 사실은, 이날 출격 바로 직전에 지상요원이 갈란트의 후방 장갑판을 보강했었다고 하니, 그가 갈란트의 생명을 구한 셈이었다.

병원에서 이 사실을 알게 된 갈란트는 그 지상정비병에게 100 마르크의 돈을 포상금으로 보냈는데, 이때 갈란트는 이렇게 이야기했다고 한다.

"고맙네, 이건 내 머리 값이네."

 

 

 

[갈란트의 비행기와 같은 모양으로 만든 Bf-109]

 

 

해협을 사이에 두고 독영 양 진영의 공중전이 치열해 질수록, 많은 전설같은 일화들이 생겨났는데, 그 중 갈란트와 영국 에이스 더글라스 베이더의 일화는 매우 유명하며 감동적이다.

대전 초반 독일 루프트바페의 격추왕 3명, 즉 베르너 뮐더스, 헬무트 뷔크, 아돌프 갈란트 중 2명이 전사했고, 이제 유일하게 갈란트만이 남게 되었다.

사실 전투력으로 따지면, 3명 중 갈란트가 가장 약세로 보이지만, 그의 신중함이 자신을 구한 것인지도 모른다.

 

[베르너 뮐더 & 갈란트]

 

 

여하튼 1941년 말, 갈란트는 비행기 사고로 전사한 베르너 뮐더스의 뒤를 이어 전투기총감(General der Jagdflieger, commander of fighter forces)에 임명되었고, 그가 아끼던 JG26 비행단은 게하르트 쇼펠(Gerhard Schoepfel)이 지휘하게 되었다.

1942년 1월 28일, 갈란트의 기사십자훈장에는 다이아몬드 장식이 더 추가되었으나, 이때까지만 해도 계급은 계속 대령이었다고 한다.

 

 

 

그 얼마 후, 갈란트는 2차대전 최연소 장군에 임명되었고, 다시 준장에서 소장으로 진급하게 되는데, 이것만 봐도 제3제국이 공군에 얼마나 많은 기대를 걸고 있었나 미루어 짐작할 수 있겠다.

전투기 총감으로서 갈란트가 가장 역점을 둔 것 중 하나가, 바로 Me-262 제트 전투기의 개발이었다.

 

 

 

그러나 갈란트의 계획과는 상반되게 히틀러와 괴링은 이 신예기를 폭격기로 개조하도록 명했고 ,재설계를 위해 다시 상당한 시간을 허비하게 된다.

사실 당시 독일 공군은 공격 개념의 폭격기보다는 방어 개념의 요격기가 더 절실했는데, 아직까지도 공격이라는 꿈에 사로 잡혀 있던 히틀러에 의해 훌륭한 요격기 Me-262는 쓸모 없는 폭격기로 중간 선회하게 된 것이다.

이것을 2차대전 히틀러의 결정적인 실수 중 하나로 지적하는 사람들이 많다.

 

 

 

1945년 1월, 괴링과 갈란트 사이의 불화는 최고조에 이르렀다.

광분한 괴링은, 갈란트를 전투기 총감직에서 해임함과 동시에, 집안에 감금시켜 버렸다.

충격을 받은 갈란트는 이때 자살까지 생각했었다고 한다.

그러나 다행히도 군터 뤼초우를 위시한 많은 일선 비행대 부대장과 에이스들이 갈란트 구명운동에 나서게 되면서, 사건이 점점 시끄러워지기 시작했다.

급기야 히틀러가 갈란트와 괴링 사이에 중재에 나섰고, 이것으로 둘 사이의 불화는 외형상 일단락을 맺게 된다.

이제 괴링의 간섭에서 완전히 벗어난 갈란트는 꿈에도 염원하던 제트 전투기 비행대를 새로이 창설하게 되는데, 이것이 2차대전 최고의 엘리트 비행대로 알려진 JV44 전투비행대였다.

동부전선의 에이스 요하네스 슈타인호프가 각지의 에이스 섭외에 나섰고, 얼마 후에 게하르트 바르크호른, 발터 크루핀스키, 하인쯔 베어, 군터 루초우 등 당대 최고의 에이스들이 속속 JV44의 기치 아래 모여들기 시작했다.

 

 

 

종전 단  두 달 전, 갈란트 써커스 JV44 비행대는 열악한 여건에서도 분전을 계속했지만, 전쟁은 거의 끝난 상태였다.

그리고 얼마 후 갈란트에게도 마지막 비행의 순간이 다가오게 된다.

종전을 단 10 여일 남겨둔 1945년 4월 26일, 갈란트는 자신의 Me-262 기에 올라, 연합군 폭격기를 공격하던 중, 후방사수의 총탄에 명중당하고 만 것이다.

겨우 급강하로 적의 방어사격에서 이탈할 수는 있었지만, 미국 조종사 제임스 피네건(James Finnegan)이 탑승한 P-47 전투기의 연이은 공격을 받게 되었다.

강력한 8정의 12.7 mm 기관총이 Me-262 조종석에 줄줄이 꽂혔고, 갈란트는 오른쪽 무릎에 관통상까지 당하고 만다.

다행히 동체착륙으로 목숨을 구할 수는 있었지만, 대에이스의 마지막 비행은 참담한 격추로서 끝나고 만 것이다.

 

[오른쪽은 352대를 격추시킨 에이스 Erich Hartmann]

 

 

2차대전 후 갈란트는 아르헨티나 공군의 자문관으로 영입되어 활동했다고 전해지며, 1995년 다시 독일로 돌아와 1996년 84세 나이로 파란만장한 생을 마쳤다고 한다.

그리고 여담이지만, 갈란트와 적이지만 친구였던 영국의 에이스 더글라스 베이더의 아들이 마지막 가는 갈란트의 관을 들었다고 전해진다.

또 한가지 갈란트를 격추시켰던 제임스 피네건은 1979년 미국에서 열린 2차대전 기념행사에서 갈란트를 처음 만났다고 한다.

그들은 곧 절친한 친구가 되었고, 부부동반으로 서로의 집으로 초대하는 등, 잦은 왕래를 했다고 전해진다.

2차대전 항공전사를 말하려면, 언제나 누구보다도 먼저 입에 오르게 되는 갈란트...

그는 공중에선 뛰어난 전사였고, 막사에선 탁월한 지휘관이었다.

또 그만큼 짧은 기간 내에 많은 풍파를 격은 이도 드물 것이다.

그러나 그 속에서도 쓰러지지 않고 버틸 수 있었던 것은 아마도 상부에 보여주는 가식이 아니라, 자신의 소신을 굽히지 않고 밀고 나가던 진실함 때문이 아니었나 생각된다.

 

 

[출처 : http://user.chollian.net/~hartmannshim/dogframe.htm ]


 
출처 : 블로그 > impressionistically | 글쓴이 : Impressed [원문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