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산 안창호 선생님 동영상 전체화면으로 보세요. 우리반은 이것 보여주고 감상록도 쓰고, 너희들이 모두 귀한 지도자 되라고 그러려면 안창호 선생님처럼 기도해야 한다고 같이 기도도 하고 그랬어요
나라를 사랑하는 애국자 안창호 선생님
나라를 위해서라면 목숨도 마다하지 않는 안창호 선생님 같은신분
들의 활약으로 우리
대한민국이 있고 우리가 존재한다.
여기서 배워야 할점 애국정신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
. 도산 안창호 선생의 일화
일화
안창호는 어린 시절부터 매우 똑똑하여 한 번 공부한 것은 달달 외워 버릴
정도였다. 이런 안창호를 할아버지는 못마땅하게 여기고
있었으나 큰 소리는
하지 않았다. 어느 날 할아버지는 창호를 찾아 강가에 나왔는데 화가 난 안창호의
할아버지는 아이들에게 화를 버럭
냈지만 안창호는 당황하지 않고
"할아버지, 저는 배운 것을 다 외웠습니다."
라고 하며 할아버지에게 실력을 보여 주자 안창호의
할아버지는 화를
풀고 안창호를 풀어 주었다고 합니다.
어느 날 여름 친구들과 놀다가 헤어진 안창호는 참외밭을 보고
참외가 먹고 싶은 생각에서 꾀를 내었다고 한다.
조밭 속으로
들어가 소리나지 않게 살금살금 기어서 원두막 아래까지 온 다음
말로 속여서 참외를 실컷 따 먹었다고 한다.
이런 일화로 안창호의
영리한 머리를 잘 알 수가 있다.
그리고 후에 안창호는 큰 뜻을 품고 머리를 스스로 빡빡 깎았다고 한다.
안창호가 얼마나 의지가 굳셌는지는 잘 알 수 있다.
<독립협회> - 조선 후기의 정치·사회 단체
1896년(고종 33) 7월 설립한 한국 최초의 근대적인 사회정치단체이다. 정부의 외세의존정책에 반대하는 개화 지식층이 한국의 자주독립과 내정개혁을 표방하고 활동하였다. 《독립신문》을 발간하여 민중계몽에 나선 서재필(徐載弼)을 중심으로 이상재(李商在)·이승만(李承晩)·윤치호(尹致昊) 등이 적극 참여하였으며, 협회 발족 당시에는 이완용(李完用)·안경수(安駉壽) 등 정부 요인들도 다수 참가하였다.
초기에는 토론회·연설회 등 민중계몽운동에 힘써서 많은 젊은이들을 모았으며, 나중에는 정치문제에 관심을 표명하고 실천에 옮기게 되었다. 그 해 11월에 모화관(慕華館)을 독립관으로 개칭하여 집회장으로 사용하였으며, 영은문(迎恩門) 자리에 독립문을 세워 독립정신의 상징으로 삼았다.
1897년 2월에는 러시아 영사관에 머물러 있던 고종에게 환궁할 것을 호소하여 이를 결행하게 하였다. 그러나
《독립신문》을 통한 민주·민권 사상의 보급활동이 큰 힘을 발휘하여 지도자의 정부에 대한 비판·비난이 격화되자 당시 회장으로 있던 이완용이
전라북도관찰사로 부임한 것을 계기로 모든 정부관료 회원들이 탈퇴하였다.
따라서 윤치호가 회장이 된 이후로는 이상재·남궁 억·이승만 등 청년층이 중심이 되어 운영되었고, 서재필은 본회원은 아니었으나
뒤에서 지도·후원하였다. 외국인 고문과 교관 초빙을 맹렬히 반대하고, 지하자원 개발권 및 철도부설권을 외국인에게 허용하는 것도 외국 자본주의
밑에 국가경제를 예속시키는 처사라고 규탄하며 고종에게
거부하라는 상소를 올림에 따라 러시아 군사고문관이 본국으로 소환되고 한로은행(韓露銀行)도 개설된 지 얼마 되지 않았음에도 폐쇄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와 같이 활동이 왕성해지고 많은 사회단체 중 지도적 역할을 담당하게 되자, 1898년 종로 광장에서 만민공동회(萬民共同會)를 개최하여 시국에 대한 ‘6개조 개혁안’을 결의하고 그 실행을 고종에게 주청하였다. 고종은 처음에 6개조의 실행을 약속하였으나 정부 대신들이 이권에만 눈이 어두워 약속한 지 며칠이 지나도 아무런 실행을 보이지 않았으므로 협회에서는 정부탄핵의 외침이 점점 드높아 갔고, 정부 수뇌급은 불안을 느끼기에 이르렀다.
이에 정부 수뇌급은 “독립협회가 황제를 폐하고 공화제를 실시하려 한다”고 무고(誣告)함으로써 이상재 이하 17명의 독립협회 간부를 체포하게 하였다. 독립협회는 회원을 총동원하여 석방을 요구하였으나, 정부는 어용단체인 황국협회(皇國協會)를 시켜 부보상(負褓商) 수천 명을 서울에 불러들여 독립협회 회원들에게 테러를 가하게 하여 유혈사태를 빚었다. 이에 흥분한 민중은 고관의 집을 습격하는 등 소란을 일으키게 되었다.
11월 고종은 부득이 내각을 개편하고 양 협회 대표자에게 그들의 요구를 모두 수용할 것을 약속하고 해산을 명하였다. 이로써 협회는 해산되었으나, 그 후 만민공동회라는 이름으로 존속하다가 1899년 초 해산하였고, 그 후 대한자강회(大韓自强會)와 대한협회(大韓協會)로 그 정신이 이어졌다.
<만민공동회>-독립협회 주최로 열린 민중대회
1898년 3월 서울 종로 네거리에서 러시아인(人) 탁지부(度支部) 고문과 군부 교련사관의 해고를 요구하고 이승만(李承晩) ·홍정하(洪正夏) 등 청년 연사가 열렬한 연설을 하여 대중의 여론을 일으켰다. 이 대회는 계속 개최되어 그 해 10월에는 윤치호(尹致昊)를 회장으로 선출, 정부의 매국적 행위를 공격하고 시국에 대한 개혁안 6개조를 결의하였다.
즉, ① 일본인에게 의부(依附)하지 말며, ② 외국과의 이권계약을 대신(大臣)이 단독으로 하지 말며, ③ 재정을 공정히 하고 예산을 공표하며, ④ 중대 범인의 공판과 언론 ·집회의 자유를 보장하며, ⑤ 칙임관(勅任官)의 임명은 중의에 좇으며, ⑥ 기타 별항의 규칙을 실천할 것 등이다.
이 개혁안은 국왕에게 제출되어 왕도 처음에는 그 정당성을 인정하고 그 실시를 확약하였으나 보수적 관료들의 반대로 이에 관계한 대신들만 파면되고 실현을 보지 못하였다. 독립협회는 해산된 후 얼마 동안은 만민공동회라는 이름으로 활약하였다
<신민회>-1907년에 국내에서 결성된 항일 비밀결사
1907년을 전후하여 일제가 보안법·신문지법 등의 악법을 만들어 반일적 색채를 띤 계몽운동을 탄압함에 따라, 사회계몽운동가들이 국권회복운동을 위해 비밀리에 조직한
단체이다. 안창호(安昌浩)의 발기로 창립된 이 단체의 회원들은 대부분 1896년도에 결성되어 2년 동안
활동하다 와해된 독립협회(獨立協會)의 청년회원들이었다.
중심인물로는 회장 윤치호(尹致昊), 부회장 안창호, 유학자 출신의 장지연(張志淵)·신채호(申采浩)·박은식(朴殷植), 청년장교 출신의 이동휘(李東輝)·이갑(李甲), 평양지방의 자산가인 이종호(李鍾浩)·이승훈(李昇薰), 그리고 안태국(安泰國)·이동녕(李東寧)·이회영(李會榮) 등이었다.
신민회의 목표는 국권을 회복하여 자유독립국을 세우고 그
정체(政體)를 공화정체로 한다고 하여, 이전의 주장인 입헌군주제를 탈피했다는 점에 큰 특징이 있었다. 또한 국권회복을 위한 실력의 양성을
주장했고, 실력의 양성을 위해 국민이 새로워져야 한다는 신민(新民),
신민은 자기 스스로의 힘으로 이루어야 한다는 자신(自新), 자신을 위한 신사상, 신윤리, 신학술, 신모범, 신개혁을 주창했다.
비밀결사인 만큼 엄격한 심사를 거쳐 회원을 받아들였으며, 조직은 총본부 산하에 감독부(1도에 1개소), 총감소(總監所:5군 이상을 합함), 군감소(郡監所:1군에 1개소), 반(班)의 종적인 형태로 구성했으며, 당사자 2명 이상은 서로 알지 못하게 했다. 회원은 전국에 걸쳐 800여 명에
이르렀는데, 서북지방의 그리스도교인이 압도적 다수를 차지했고 신흥시민층과 신지식층이 중심을 이루었다. 이러한 조직을 바탕으로 다음과 같은 폭넓은
활동을 전개했다.
① 교육구국운동 : 신민회 회원들에 의해서 설립된 학교는 수십 개에서 100여 개에 이르는 것으로 추정되는데, 그
중에서도 정주의 오산학교(五山學校), 평양의 대성학교(大成學校)는 완전한 시설을 갖춘 중학교였으며, 강화에 중학교 본교를 둔 보창학교(普昌學校)는 강화군에만 21개 소학교 분교를 열었으며, 북부와 중부 각 지역에도 보창학교가 설립되었다. 신민회의
학교설립은 교육을 통한 구국운동에 실질적인 기여를 했다.
② 계몽강연 및 서적·잡지 출판운동 : 계몽강연 운동을 활발하게
전개함으로써 일반 국민들에게 애국주의, 국권회복, 민권사상, 구습타파, 자발적 의무교육실시, 민족단합의식 등을 고취했다. 《대한매일신보》를 기관지로 이용했고, 최남선을 중심으로 1908년 11월에 창간한 잡지 《소년》 역시 신민회의 입장을
대변했다. 또한 출판물 보급과 사업연락을 위해서는 평양·서울·대구에
각각 태극서관(太極書館)을 두고 합법적인 활동을 했으며, 민족문화와 국사학에 관심있는 인사들이 주축이 되어
조직한 조선광문회(朝鮮光文會)는 외곽단체로서 출판사업을 이끌었다.
③ 민족산업진흥운동 : 민족산업 자본의
발흥을 위한 실업장려 운동을 전개했는데, 그 일환으로 평양 마산동에 자기제조주식회사(瓷器製造株式會社)를 세운 것을 비롯하여 협성동사(協成同事)·상무동사(商務同事)·조선실업회사 등의 회사를 세웠으며, 사리원의 모범농촌 등을 주도했다. 이 사업은 신민회 재원의 확보에 도움을 주었지만,
취약한 자본으로 인해 일제의 대자본에 밀려 큰 성과를 낼 수 없었다.
④ 독립군 양성운동 : 국권회복을 위하여 의병운동을 지원했으며, 의병운동의 현대화를 위해
국외에 무관학교를 설립하고 독립군기지를 창설하여 독립전쟁을
일으킬 것을 계획했다. 이 계획의 구체적인 실현을 위해 1910년 가을에 만주 일대에 후보지를 선정하고, 1911년 봄에는 만주 봉천성
유하현(柳河縣)에 신한민촌(新韓民村)을
건설해 단체 이주를 시작했으며, 신흥무관학교를 설립했다. 신흥무관학교는 4년제 본과 외에 3개월·6개월의 속성과정을
두어 애국청년과 의병들에게 현대적 군사교육을 실시했다.
신민회의 활동은 1909년을 전후하여 일제가 한일합병을 마무리지으려고 애국적 인사들에 대한 감시와 탄압을 강화하면서 벽에 부딪치기
시작했다. 일제의 주된 감시대상이던 안창호를 비롯한 이갑·이동휘·신채호·조성환(曺成煥) 등은 1909년에 이미 미국과 러시아령 연해주, 서북간도 등지로 망명했으며, 이회영·이시영(李始榮) 등 6형제와 회원 일부가 만주 독립군 기지로 이주했다.
1910년 8월
29일 한일합병이 선언된 후, 신민회의 운동방향을 새로이 모색하려는 회의가 나라 안팎에서 열렸다. 양기탁·이동녕·안태국·김구(金九) 등 나라 안에 있던 신민회원은 서울의 양기탁 집에서, 나라 밖의 망명자들인
안창호·신채호·이갑 등은 중국 산둥성[山東省] 청도에서 모임을 가졌다. 두 회의에서 안창호의 준비론이 소수로 밀리고 독립전쟁론이
결정되었고, 이에 따라 신민회는 ‘독립전쟁에 대비하는 만주 이민계획과 무관양성’을 위해 청년들을 모아 만주로 이주시키고 이를 지원할 자금조달 책임을 지역별로 분담하여 비밀리에
활동했다.
그러나 1911년 일제가 조작한 105인사건을 계기로 신민회 조직이 드러나고 국내에 남아 있던 세력이 탄압을 받으면서
조직이 무너졌다. 신민회는 신채호가 비판하였듯이 비밀결사이면서도 스스로 비합법적인 반일활동을 회칙으로 부정함으로써 한말 계몽운동의 일반적
한계였던 합법주의와 문화주의를 벗어나지 못했다는 맹점이 있지만, 국권피탈을 전후하여 독립군기지 건설과 무장독립전쟁으로 운동노선을 전환함으로써 이후
만주와 중국에서 일어난 독립군전쟁의 실질적인 밑거름이 되었다.
안창호의 4대 정신
1.무실
실(實)은 진실, 성실의 '실'이요, 실질 , 실력의 '실'이다 . '실'은 참이며 알맹이다.
거짓이 없는 것이 '실' 이다. 무(務)는 힘쓴다는 뜻이다. 그러무로 '무실'이란, '참되기를 힘쓰자.','진실을 실천하자 '는 뜻이다.
2.역행
힘써 행하라는 것.
나 자신부터 몸소 행하고 실천하는 것이다 . 그는 백가지의 논설 보다는 하나의 본보기가 더 힘있고 효과가 크다고 생각하였다.
그는 자기 스스로 실천의 본보기를 보였다. 행함으로써 배우고, 배움으로써 행하자는 학생 일치 의 사상을 그는 강조 하였다.
3.충의
사람은 어떤 일을 하든 다른 사람에 대해서 언제나 참되고 신용이 있고, 충성심이 있어야 하며 , 옳은 일이면 어떤 것이든지 일단 작정을 하면 내게 이롭건 불리하건 끝까지 성실성을 다하고 신의를 지켜야 한다.
4.용감
사람은 무슨 일에나 용기가 있어야 한다.
참과 거짓, 의와 불의 를 준엄하게 가르고, 참의 편에서 움직이고 살아가려면 언제나 용기가 필요하다. 우리는 용기가 있는 인간, 용감한 국민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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