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헨대성당 ( Aachen Cathedral )
1978년에 지정된 세계문화유산이다. A.D, 790~800년 사이 샤를마뉴 대제 시 건설되었으며 중세건축의 장엄미를 대표한다. 785년경에 착공한 궁정 예배당은 그 후 몇 세기 동안 여러 차례 증축을 거쳐 현재의 아헨 대성당이 되었다. 꼭대기에 탑이 있는 바로크 양식의 둥근 지붕은 1664년에 덧붙여졌다
카롤루스 대제 흉상 (프랑스명 샤를마뉴) , 1349년 제작
내부
내부
내부
벽화
벽화
성모상
내부
테레사 수녀상
스테인글라스
스테인 글라스
아헨 대성당
800년에 프랑크 왕 카롤루스 대제는 로마 황제 레오 3세에게서 서로마 제국 황제의 왕관과 지위를 받았다. 대관 후 카롤루스 대제는 아헨의 거대한 궁전에서 지내는 일이 많았고, 이 곳에 유럽 세계의 중심임을 상징하는 궁정 예배당을 건설했다. 이것은 동시에 유럽, 그리스도교 세계에서 자신의 지위를 드러내는 것이기도 했다. 1165년에 카롤루스 대제가 성인의 반열에 오르자, 아헨을 방문하는 순례자의 수가 갈수록 늘어나, 그 인원을 수용하기 위해 궁정 예배당 증축 공사가 이루어져 이윽고 독립된 대성당이 되었다. 963~1531년에 역대 신성로마제국 황제의 대관식은 모두 이 곳에서 치러졌다. 독일의 서쪽 끝, 네덜란드와 벨기에 국경에 가까운 도시 아헨은 유럽에서는 드물게 온천이 솟는 곳이었다. 그래서 로마 시대에는 '그라누스 온천 지대'라고 불렀다. 768년에 즉위한 프랑크 왕 카롤루스 1세는 여름에는 전쟁터를 누비며 영토 확장과 국내 통일을 꾀하고, 겨울에는 궁전에 틀어박혀 시간을 보냈다. 800년에 대관한 뒤, 카롤루스 대제는 이 고대 로마의 온천 유적에 세워진 아헨 궁전에 자주 머물렀다. 카롤루스 대제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자신이 동로마 제국의 황제와 대등하다는 것을 나타내려고 했다. 그리하여 아헨이 제2의 로마이며 유럽 세계의 중심이라는 것을 상징하기 위해 궁정 예배당을 건설했다. 그는 궁정 예배당을 건설하기 전에 로마와 콘스탄티노플 양쪽에서 표본을 구했다. 집중식 평면을 한 궁정 예배당의 구체적인 본보기가 된 것은 라벤나의 산비탈레 성당, 안티오크(현 하타이)의 팔각 성당, 콘스탄티노플의 성세르기오스 카이바코스 성당이었다. 더욱이 로마의 비잔틴 요소와 게르만의 프랑크 요소를 독특하게 융합시킨 아헨의 궁정 예배당은 카롤링거 왕조 르네상스를 대표하는 건물로 일컬어진다. 건축은 메스 출신의 프랑크인 건축가 오도가 맡아 785년경에 착공해 805년에 완공했다. 카롤루스 대제는 이탈리아에서 대리석과 오래된 건물의 호화로운 기둥 등을 건축 재료로 운반해 왔다. 아헨에서 제작한 청동문과 청동 울타리 등은 유일하게 현존하는 카롤링거 왕조 시대의 청동 작품이다. 높이가 32m에 이르는 팔각형의 중앙 공간은 오랫동안 알프스 이북에서 최고의 높이를 자랑했다. '대관의 방'과 접해 있는 서쪽 탑은 1350년경에 완성된 것으로, 여기에는 교회가 소유한 보물 가운데 유럽 최고의 보물이 오랫동안 보관되어 있었다. 현재 그 보물은 대성당 옆에 있는 보물관으로 옮겨져 있다. 보물관에는 로마 말기에서 카롤링거 오아조 시대를 거쳐, 호엔슈타우펜 왕조 시대에 제작된 공예품이 골고루 갖추어져 있다. 특히 눈길을 끄는 것은 1239년에 제작된 '성모 마리아의 성유물 상자'와 카를 4세의 뜻에 따라 1349년에 제작된 '카롤루스 대제의 흉상을 장식한 궤'일 것이다. 814년에 사망한 카롤루스 대제의 유해는 예배당에 안치되어 있다. 1165년에 붉은 수염왕 프리드리히 1세가 대제를 성인 반열에 올려 신성로마제국의 수호 성인으로 삼자, 아헨은 알프스 이북 최고의 순례지가 되었다. 1349년 이후로 아헨에서는 7년에 한 번씩 대제의 공적을 기리는 의식이 거행되며, 순례자들은 대제의 유골이 안치된 '카롤루스 대제의 성유물 상자'가 있는 장소까지 천천히 행진한다. 이 행사에 참가하기 위해 세계 각지에서 모여든 사람들은 예수, 성모, 성요한의 의복 조각이 들어 있다고 전해지는 '성모 마리아의 성유물 상자'를 비롯한 보물들을 하나하나 둘러본다. 현재 아헨 대성당 주위에 빽빽히 솟아 있는 높은 건물들은 카롤루스 대제가 죽고 오랜 시간이 지난 뒤에 건설된 것이다. 예를 들어 고딕 양식의 내진은 15세기 초에 만들어졌다. 해마다 순례자들이 늘어 창건 당시의 궁정 예배당 건물로는 이들을 다 수용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예배당을 증축할 때 내진 벽면에는 파리의 샹트사펠을 모방해 기다란 스테인드 글라스로 장식했기 때문에 내부는 오렌지 빛으로 가득하게 되었다. 현재 내진에는 '카롤루스 대제의 성유물 상자'가 안치되어 있다. 현란한 금빛 장식이 어우러진 이 성유물 상자는 호엔슈타우펜 왕조의 황제 프리드리히 2세가 1215년 대관할 때 이 예배당에 바친 것이다. 이 밖에 카롤링거 왕조 시대의 창건 당시에는 소박했던 예배당 지붕이 1662년에는 꼭대기에 탑이 있는 바로크 양식의 둥근 지붕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서쪽 첨탑은 1884년에 건설된 것이다. 사자 머리 손잡이로 잘 알려진 카롤링거 왕조 시대의 청동문이 있는 서쪽 입구로 들어가 작은 홀을 가로지르면, 유명한 팔각형 중앙부가 나타난다. 중세에는 8이라는 숫자가 조화와 완벽함을 상징했다. 중앙부는 지름이 14.4m이며, 바깥쪽은 십육각형의 2층으로 구성된 주랑에 둘러싸여 있다. 튼튼한 각주에 붉고 화려한 대리석 원주와 색깔이 다른 석재를 쓴 아름다운 아치에 둘러싸인 이 중앙 공간은 보는 이에게 강한 인상을 준다. 둥근 천장의 높이는 십육각형으로 된 주랑의 평면 지름과 일치한다. 이것은 [요한묵시록] 제21장에 나와 있는, 길이와 넓이와 높이가 동일하다는 천상의 예루살렘을 연상하게 한다. 둥근 천장은 화려한 금빛 모자이크로 장식되어 있고, 지붕 아래로 길게 드리워진 쇠사슬 끝에는 작은 탑 16기와 촛대 48개가 달린 청동 샹들리에가 매달려 있다. 이 샹들리에는 1165년 카롤루스 대제가 성인 반열에 오른 것을 기념해 프리드리히 1세가 헌납한 것이다. 주랑의 윗층 회랑은 황제와 그 수행원의 전용 공간으로, 서쪽에는 '카롤루스 대제의 왕좌'가 동쪽을 바라보며 놓여 있다. 왕좌는 대리석으로 만든 대좌와 그 위의 나무 의자로 되어 있으며, 나무 의자는 솔로몬 왕좌를 모방해 6단의 계단 위에 놓여 있다. 정면의 제단과 대칭을 이루는 형태로 놓여진 왕좌는 황제의 권위가 신이 부여한 것임을 나타내고 있다. 카롤루스 대제는 신성로마제국 황제가 교권과 속권이라는 이중 권력을 손에 넣을 수 있도록 기초를 닦은 인물이다. 중세 신성로마제국의 황제가 되는 사람은 제단 앞에 놓여 있는 이 '카롤루스 대제의 왕좌'에 앉는 순간 비로소 진정한 즉위가 이루어졌다고 여겼다. 원래 이 왕좌를 만든 사람은 오토 1세로 카롤루스 대제는 앉아 본 적도 없었다는 말도 있다. 제2차 세계대전 후 심하게 파손된 대성당은 대규모 복원 공사가 이루어져, 스테인드 글라스 따위가 교체되었다. 그러나 내진의 팔각형 중앙부와 연결된 곳은 여전히 파손된 채로 남아 있으며, 천장의 치목 상태도 나빠 하루 빨리 복원해야만 한다. 2000년은 카롤루스 대제의 대관 1,200주년이 된 해이다. 그에 맞추어 대대적인 공사가 이루어졌는데, 그 공사 비용은 약 2,500만 마르크에 이르렀다.
카롤루스 대제(프랑스명 샤를마뉴)는 768년에 아버지인 프랑크의 단신왕 피핀이 죽은 뒤, 동생 카를로만과 함께 프랑크 왕국을 분할 상속받아 왕위에 올랐다. 771년에 카를로만이 죽자, 왕국의 통치자가 되었다. 그는 로마 교황 하드리아누스 1세의 요구에 따라 773~774년에 이탈리아에서 세력을 확장하던 랑고바르드 왕국을 정복했다. 그 후, 그는 동로마제국(비잔틴제국)령을 제외한 이탈리아 땅 전체를 지배하게 되었다. 한편, 그는 772~804년에 작센인을 복종시키는 동시에 그들을 그리스도교화했다. 또 이베리아 반도 원정에 착수해 이슬람 교도와 전투를 벌여 그들의 영토를 빼앗았으며, 778년에는 당시 독립국이었던 바이에른을 합병했다. 그는 오보트리어트인과 동맹을 맺어 북쪽과 동쪽 국경의 안전을 확보했다. 그리고 810년에는 덴마크와 평화조약을 체결했다. 또한 세르비아인, 보헤미아인을 복속시켰다. 한편, 799~804년에 아바르인을 토벌하고, 다뉴브 강 중류 지역까지 지배 영토를 확장했다. 800년에 로마 교황 레오 3세는 그에게 서로마 황제의 대관을 수여했고, 교회를 서로마 황제의 보호하에 두었다. 대관을 받은 그는 자신이 신에게 선택받은 사람이며, 모든 그리스도교 세계를 통일해야 하는 사명을 짊어진 사람이라는 확신을 더욱 공고히 다졌다. 이리하여 그는 동쪽으로 엘베 강 우역, 서쪽으로 피레네 산맥 남쪽, 북쪽으로는 북해 연안, 그리고 남쪽으로는 지중해 연안에 이르는 광대한 영토를 확보했다. 한편, 그는 로마 제국의 전통과 그리스도교의 가치관, 그리고 게르만적 요소의 융합을 꾀해 이후 유럽의 발전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오늘날 그는 최초의 '유럽인'이라고 일컬어진다. '카롤루스 대제 상'은 그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며, 수상식은 아헨에서 이루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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