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敎育.學事 關係

08. 순결과 성적 자유

鶴山 徐 仁 2005. 12. 15. 00:08
08. 순결과 성적 자유 | 성과♡사랑 ......
출처: http://blog.naver.com/mirror/2734524
▼ 앵그르 : 열쇠구멍으로 대중탕 안을 들여다보는 것처럼 그렸다. 이렇게 화가들이 누드를 많이 그리는 것은 그 자신이 여체를 보고 싶어하는 관음증을 가졌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이 남의 알몸을 보고 싶어 하는 관음증이 있어서 누드 그림이 인기를 얻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가벼운 관음증은 어디에서나 볼 수 있다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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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1년 2학기 때 제 친구(?)가 OCU로 수강했던 [성과 사랑]이란 강의의 텍스트입니다.
▷ 내용은 수정하지 않았으며, 다만 글씨 크기, 색깔 등은 제가 보기 편하게 바꿨습니다.
▷ 이 문서에 대한 모든 권한은 강의를 하신 동덕여자대학교 박홍태 교수님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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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과 사랑 08] - 순결과 성적 자유

 

안녕하세요? 박홍태 교수입니다.

 

이번 주 강의 주제는 순결과 성적 자유입니다. 가부장제의 성격을 단적으로 드러낸 가치로서 순결을 드는 데 이견을 달 사람은 아마 별로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순결이 하나의 미덕으로서 오늘날에도 여전히 그 자리를 지킬 수 있느냐 하는 것은 문제가 아닐 수 없지요. 자유가 인간다운 삶을 위한 핵심적인 조건으로 요구되고 있는 마당에, 성적 자유도 또한 거기서 예외일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말뜻으로만 보면, 순결과 성적 자유는 서로 모순되는 관계에 있어서 어느 것 하나를 취하면 다른 것 하나는 필히 거부될 수밖에 없는 처지입니다. 그런데 만일 선택할 수 있는 귄리가 주어진다면, 여러분들은 이 둘 중 어느 것을 선택하겠습니까? 순결입니까, 아니면 성적 자유입니까?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혹시 그 둘을 다 취할 수 있는 방법은 없는 것일까요? 오늘은 이 문제에 관해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그럼, 강의를 시작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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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순결은 아직도 유효한가?

 

엄밀한 의미에서 순결이란 결혼하기 전까지 그 누구하고도 성적 관계를 갖지 않고 육체적으로 깨끗한 상태를 유지하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이것은 결혼 후에는 배우자 외에 다른 누구하고도 성적 관계를 갖지 않는다는 의미의 정절로 이어진다. 그러므로 가부장의 순수한 혈통의 유지가 최고의 가치가 되는 가부장제에서 순결이야말로 최고의 덕목이 되는 것은 말할 것도 없는데, 그러나 그것은 언제나 남성이 배제된 채 여성에게만 적용되어 왔다. 권력자인 남성의 입장에서 볼 때 아내의 성만을 철저히 통제한다면 자신의 부를 상속할 자신의 적자(嫡子)를 확실하게 확보할 수 있기 때문에 자신은 굳이 엄청나게 부자유한 그 의무에 속박될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지금까지 온갖 그럴 듯한 말과 방법으로 순결을 도덕적으로 미화하고 이념적으로 채색하였지만 순결이 바로 여기에 기원을 두고 있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순결은 매춘과 마찬가지로 가부장제와 더불어 존재하기 시작하였기 때문에 그 역사가 매우 깊다. 순결에 대한 태도에는 성적 관계를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따라 강온의 입장이 나타날 수 있겠으나 가부장제 하에서 그것은 어느 문화와 시대를 막론하고, 마치 매춘처럼, 중단되지 않고 지속되어온 몇 안 되는 가치 중에 하나였다. 그러나 문제는 그 순결이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한가 하는 점이다. 적어도 남성의 적자 확보라는 측면에서 볼 때, 오늘날에는 순결이 이미 자기의 존재 이유를 상실한 것으로 보일 수도 있다. 옛날에야 적자 여부를 확인할 방법이 없어서 아예 여성들을 성적으로 완전히 차단하는 방법을 채택할 수밖에 없었지만 오늘날에는 그렇게 하지 않더라도 유전자 검사와 같은 방법을 통해 자기 자식이 아닌 남의 자식에게 부를 상속할 위험성은 극히 적어졌다. 뿐만 아니라, 피임법도 발달하여 설사 다른 사람하고 혼전 성관계를 맺는다고 하더라도 임신을 예방할 수 있으며, 또 비록 임신이 된다하더라도 맘만 먹으면 임신중절이라는 수단으로도 출산을 피할 수가 있는 것이다. 요컨대, 오늘날에는 굳이 순결하지 않더라도 순결의 애당초 목적을 충분히 달성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부분 사회에서는 아직도 여성의 순결이 여전히 혼인의 중요한 조건으로 인식되거나 요구되고 있다. 분명한 것은 순결이 남성을 위한 嫡子의 확보라는 애당초 목적과 무관하게 이제는 관습적으로 남성에게는 하나의 권리로서 그리고 여성에게는 하나의 의무로서 작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아마 오랫동안 요구된 나머지 이제는 그 요구의 정당성 여부를 떠나 사람들에게 하나의 도덕과 이념으로서 내면화된 결과라 하겠다. 그러나 순결이 인간다움의 핵심적인 조건이 되는 자유, 그 중에서도 성적 자유에 대한 여성들의 일정한 포기와 희생 위에서 성립한다는 점에서, 더욱이 순결하지 않더라도 순결의 목적을 성취할 수 있는 지금의 상황에서는 순결이 여전히 의미를 갖는 것인지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만일 의미가 없다면 구습으로서 폐기해야 할 것이지만, 의미가 있다면 그 가치를 재인식해야 할 것이다. 이 점에서 "순결은 과연 아직도 유효한가?"라는 물음이 의미가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순결은 아직도 의미 있는 것인가? 이 물음에 대한 답변은 기본적으로 "그렇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남성의 적자 확보를 위한 수단으로서 그렇다는 것은 물론 아니다. 다시 말하면, 가부장의 적자 확보가 결혼의 최대 목적이었고 그것을 위해서 오직 아내의 성실성에만 의존할 수밖에 없었던 과거에는 비록 순결이 남성 중심의 권력 논리로서 여성에게 비인권적 상황을 강요한다 하더라도 그 목적을 위한 확실한, 그렇지만 불가피한 수단으로서 나름대로의 존재 이유와 의미를 지닌다고 하겠지만, 의학 등 다른 방법으로 그것을 대신할 수 있는 상황에서는 단지 그 이유만으로 성적 자유에 대한 여성의 일방적인 양보와 희생을 강요하는 것은 결코 정당화될 수 없게 되었다. 그보다는 오히려, 이미 앞에서 답변된 셈이지만, 순결은 남녀의 성을 매개로 하여 성립하는 결혼과 가정을 위하여 배우자에 대한 하나의 예의로서 성적 성실성을 갖는다는 점에서 윤리적 내지는 심리적 가치를 지닌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은 마치 운동선수가 시합을 앞두고 딴 데 정신을 팔지 않고 오직 그 시합에만 전념하는 것과 같은 의미로 받아들이면 될 것이다. 그러나 이 경우에 바로 제기되는 문제는, 상호성의 입장에서 남성의 성적 순결성에 대한 요구일 것이다. 여성의 순결론에 대해 막강한 반론처럼 보이는 이 동등성의 논리에 대해서는 조금 뒤에 살펴보기로 하자.

 

2. 육체적 순결에서 정신적 순결

 

남성의 적자 확보를 위한 수단으로서 순결은 본질적으로 육체적인 것이다. 그래서 그 순결관에 따르면 정신의 상태는 어찌 되었든지 간에 육체적인 성관계만 없다면 순결이란 조건은 충족되는 것이다. 오늘날 결혼을 앞두고 뭔가 켕기는 여성들이 '처녀막 재생수술'이란 서로를 기만하는 해괴한 짓을 하는 것이나 '과거'는 결코 발설하지 말고 무덤에까지 가지고 가야 된다는 신조를 되새기는 것 등은 다 그런 이유에서 나온 것일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그러한 육체적 순결관이 오늘날에도 유효해야 하는가 하는 점이다.

 

곰곰이 생각하면, 오늘날의 사회 환경은 여성들이 순결하는 데 매우 불리한 조건을 지니고 있다. 과거에는 우선 어느 사회나 대체로 여성들의 사회적 활동을 아예 금지하였기 때문에 남녀가 교류할 수 있는 기회가 매우 적었고, 따라서 혼전 성관계가 이루어질 수 있는 기회 자체도 그만큼 희박하였다. 또 교육을 받지 못한 여성들의 성적 자유에 대한 인식이 부족하였고 임신에 대한 의학적 방비책도 거의 없었을 뿐만 아니라 혼전 성관계에 대한 엄청난 대가를 지불해야할 상황 속에서 어쩌다 그런 기회가 주어진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감행할 가능성은 그리 높지 않았을 것으로 여겨진다. 그런데 예전 같으면 순결하지 않기 위해서는 일부러 크게 결심하고 겹겹이 쳐진 여러 장벽들을 뚫고 지나가야 하는 대단한 모험을 감행하고 나서야 비로소 가능했을 일이 오늘날에는 모든 면에서 과거의 그것과는 정반대의 상황들이 연출되고 있다. 모든 영역에서 남녀의 교류가 활발하고 그만큼 관계의 기회가 증대됨은 물론, 성적 자유에 대한 여성들의 인식도 높아졌고 임신에 대한 방비책도 계속 향상되고 있으며 또한 지불해야 할 대가라는 것도 예전에 비할 바가 아닌 것이다. 더군다나 사람들이 얼마나 끊임없이 성적으로 유혹받고 있으며 또 사회 전체가 얼마나 그것을 부추기는지 TV나 잡지, 광고 등 대중매체를 보면 쉽게 알 수 있을 것이다. 상황이 이러한데도 과거와 다름없이 육체적 순결만이 주장되다 보니 처녀막 재생수술과 같이 허구로 상대를 속이는 기만과 들키지 않아야 한다는 불안 심리가 그것의 비시대성을 보전(補塡)하고 있는 것이다. 순결이 육체적 문제로 국한되는 한, 도덕적이기 위해서 기만적으로 될 수밖에 없는 길은 항상 열려 있는 것이다.

 

이러한 논의를 통해 말하고자 하는 것은, 도덕(특히 성에 관한 도덕)은 그것이 적용되는 사회 및 시대적 조건을 반영해야 한다는 점이다. 이것은 곧 순결이 육체적인 것으로 수용될 수 있는 사회 및 인식의 제반 조건 하에서는 그렇게 수용되는 것이 가능한 일이었지만 그것들이 바뀐 상황에서는 순결의 내포도 또한 마땅히 바뀌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혹자는 이런 주장에 대해, 아무리 시대 상황이 변한다 하더라고 여성들이 순결을 지키면 될 것이 아니냐고 반론을 제기할 수도 있을 것이다. 사실은 그렇다. 그렇게 하면 간단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주장하기 위해서는 논리적으로 먼저 모든 변화에도 불구하고 여성들은 언제나 순결해야 한다는 타당한 이유가 제시되어야 할 것이다. 이것은 여성이 수용한다고 끝나고 남성이 강제한다고 되는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원리의 문제요 정당성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원리의 문제는 원리로 풀어야지 권력으로 해결하려고 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이미 순결의 본래적 존재 이유가 의문시되는 시대적 상황에서, 더욱이 남성들의 비순결적 성의 행태는 자꾸만 증가하고 있는 현실에서 그러한 주장이 힘을 갖기 위해서는 남성들이 여성의 순결처럼 성적 성실성을 보임으로써 동등성의 논리를 확보하는 것일 것이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그것에 대한 전망은 현재로는 그리 밝아 보이지 않는다. 여기서 우리가 다시 한번 생각해 봐야 할 점은 도덕의 존재 이유이다. 도덕은 결코 도덕 그 자체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을 보다 인간답게 하기 위해 존재한다는 점이다.

 

순결의 내포가 바뀌어야 한다는 것은 강간의 경우를 보면 보다 분명해질 것이다. 자신의 의지에 반하여 남성의 폭력에 저항하지 못하고 강간당한 여성을 상정하자. 분명한 것은 강간당한 여성이 피해자임에도 불구하고 사회가 그녀에게 보이는 태도는, 그녀에게 결코 우호적이지 않고 동정하지도 않으며 오히려 비난하거나 마치 씻을 수 없는 범죄를 범한 것인 양 따돌리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리고 그 당사자마저도 결국 스스로 그 흐름에 떠밀려 동참하게 된다. 그러나 은행원이 총을 가진 강도의 위협 때문에 고객의 돈을 강탈당했다고 가정해 보자. 그 은행원이 비록 고객의 돈을 강탈당했다고 하더라도 사회는 그를 도덕적으로나 법률적으로 비난하거나 책임을 묻지 않는다. 그것은 그것이 그의 의지에 반하여 폭력적인 방법으로 어쩔 수 없이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그보다는 오히려 그의 편에 서서 그를 위로하거나 동정하면서 용기를 잃지 말라고 격려하기도 한다. 그런데 똑같이 자기의 의지에 반해 폭력을 당했어도 왜 강간당한 여성의 경우에는 강탈당한 자하고 엄청나게 다른 대우를 받아야 하고, 그녀 스스로도 그것을 자신의 잘못으로 받아들여야만 하는가? 성에 관한 한 가부장제의 이중성이 여기서도 드러나지만, 이러한 태도는 윤리의 보편적인 운용을 파괴한다는 점에서 더욱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만일 우리가 윤리의 보편성과 그 합리적 원리에 충실하고자 한다면, 강탈당한 은행원을 비난하지 않는 한 강간당한 여성도 결코 비난하지 말아야 하는 것이다.

 

강간당한 여성을 비난하지 않기 위해서는 먼저 강간에 대한 우리의 의식 변화와 함께 도덕적 개념으로서의 순결의 내포가 바뀌어야 할 것이다. 의식의 변화 이후에 태도의 변화를 기대할 수 있다는 점에서 그것은 의식의 문제이다. 의식은 한 순간에 바뀌는 것이 아니지만, 그 방향은 법적이든 도덕적이든 모든 책임은 행위를 일으킨 주체에게 지워진다는 것을 의식화하는 것이 될 것이다. 그리고 순결이라는 개념을 버리지 않는 한 그 개념이 바뀔 수밖에 없는데, 여기서 필연적으로 육체를 넘어선 정신적 순결이란 개념이 요청되게 된다. 육체는 폭력에 손상된다 하더라도 정신은 결코 손상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신적 순결이 성립하기 위해서는 육체적 순결하고는 다른 독자적인 영역을 구축해야 되겠지만 그것이 육체적 순결의 시대적 한계성을 보완하고 그것의 비인간성을 극복하기 위해 요구되었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육체적 순결이 비인간적이라는 것은 그것이 기본적으로 여성을 출산도구로 간주한다는 점에서 그렇고 또한 그렇기 때문에 (설사 실수로 이루어진 행위라 하더라도) 단 한번의 선행적인 섹스도 용납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그렇다. 그리고 그런 관념은 다른 사람이 아닌 바로 내가 그녀 성의 첫 번째 대상이 되어야겠다는 집념을 일으켰는데, 첫만남·첫사랑·첫경험 등에서 보듯이 "첫"자에 특별한 의미와 가치를 부여한 이러한 표현들은 다름 아니라 순결 관념이 변형되어 투영된 결과이다. 모든 첫 번째보다는 모든 두 번째가, 그리고 모든 두 번째보다는 모든 세 번째가 더 낫다는 신념 하에 인류는 거듭 거듭 도전하여 결과적으로 오늘날의 문명을 이룩하였는데 "첫" 자에 집착해 온 순결은 그 발전의 법칙을 거역하면서 지금까지 존재해왔던 것이다. 거기에 얼마나 많은 무리와 억지가 있었겠는가는 가히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순결을 정신적인 의미로 받아들이고, 어떤 의미에서 그것을 순결의 주된 의미로 간주하려는 위의 논의는 휴머니즘의 관점에서 자기 의사와 무관하게 성을 강제당한 여성을 구제하기 위해 모색된 것이지만, 사실 그것은 그 문제에만 국한되지 않고 여성과 남성 모두에게 그 이상의 의미와 효과를 갖는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여기서 그에 대한 더 이상의 논의는 불필요할 것이다. 단, 정신적 순결을 주장하기 위해 두 가지 긴요한 사항을 말한다면, 하나는 정신적 순결에 대한 이해이고 다른 하나는 정신적 순결이 가능하기 위한 정신의 존재에 대한 이해이다. 정신적 순결을 주장하면서 그것이 무엇인지도 모른다면 애당초 말이 되지 않겠지만, 그것을 일단 정신적 측면에서의 상대에 대한 성적 성실성 내지 충실성으로 규정하고 나가도 무리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핵심적인 사항은 정신의 존재에 대한 이해이다. 그것은 마치 육체가 있음으로 해서 육체적 순결을 말할 수 있듯이 정신이 있어야 그 순결성도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문제는 정신이 있다는 것이 어떠한 상태이고, 또 있더라도, 육체의 경우처럼, 유치하지도 않고 미숙하지도 않은 그것의 상태를 어떻게 확인할 수 있느냐 하는 점이다. 정신이란 그 성격상 없는 듯이 있고 있는 듯이 없는 양상을 나타내는데, 이 강의를 수강하는 여러분들은 여러분들에게 과연 정신이 있는지 없는지, 또 있다면 그것이 어떤 상태인지 한번 확인해보기 바란다. 덧붙인다면, 우리가 아무리 정신적 순결을 추구한다고 하더라도 정신이 없는 상태였다면 우리는 결국 육체에 의존하게 되고 급기야 거기에 갇힐 수밖에 없게 되는 것이다. 앞서 말한 강간도 이론적으로 볼 때 육체만 있고 정신이 없을 때 일어날 수 현상인 것이다.

 

정신적 순결과 관련하여 살펴볼 마지막 사항은 그 기능과 관련된 것이다. 순결은 성이 결혼과 관계될 때 발생한다. 그래서 육체적 순결이 결혼에 의한 성을 보호하기 위한 장치라고 한다면 정신적 순결은 성의 그것의 어떤 측면을 보호하기 위한 장치인가 하는 점이다. 육체적 순결의 한계를 보완하기 위해 정신적 순결이 요구되었다는 것은 이미 앞에서 보았다. 그런데 구체적으로 무엇을 보완한다는 것인가 하는 문제이다. 육체는 육체적인 것과 정신은 정신적인 것과 결합한다는 원칙을 바탕으로 단적으로 말하면, 그것은 정신적 가치로서 사랑이 될 것이다. 여기서 성과 사랑과 결혼의 상호 관계가 무엇인지, 그것이 다시 문제된다. 성을 매개로 한 사랑과 결혼에 대해서 간단히 말하면, 결혼은 성을 필수적인 조건으로서 요구하지만 사랑은 반드시 성을 전제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범주가 다른 사랑과 성이 관계를 맺기 위해서는 또 다른 결단이 요구되는데, 언젠가 말했듯이 사랑하기 때문에 섹스하자는 요구가 터무니없는 것은 이 때문이다. 결혼은 가시적이고 분명한 사실이기 때문에 성 관계에 주저나 혼란이 개입할 여지가 없지만, 사랑은 자의적인 반면에 과연 현재의 사랑이 진짜 사랑인지 아니면 착각인지 확신이 유동적이기 때문에 성적 관계로 진행되기 위해서는 우선 사랑에 대한 이해가 선행되어야 하는 것이다. 이 점에 대해서는 차후에 이야기할 기회가 있을 것이다.

 

3. 남성도 순결해야 하는가?

 

남성도 순결해야 한다는 주장은 여성의 순결성에 대한 의무가 새삼 강조될 때 흔히 그에 대한 일종의 대항논리로서 최근 들어 여성들 사이에 대두되고 있는 입장이다. 그런데 과연 남성도 순결해야 하는가? 이 주장에 대해서는 세 가지 관점에서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먼저 하나는, 그것의 윤리적 정당성에 관한 것으로서 의무의 상호주의 입장에 서 있는 이 주장은 윤리적으로 볼 때 지극히 정당한 주장이라는 것이다. 이 논리에 따르면, 결혼이 성을 매개로 이루어지고 그 성과 관련하여 모종의 의무가 부과된다면 그 의무가 결혼에 참여하는 남녀 모두에게 부과되어야 한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고, 따라서 지금까지 그것이 일방적으로 여성에게만 지워져왔고 남성은 그로부터 자유로웠다는 것은 지극히 잘못된 것이다. 그러나 여자가 순결해야 하니까 남자도 순결하라거나, 또는 남자가 매춘하면 여자도 매춘하겠다는 식의 이 논리는 사실 단순하고 명쾌하면서도 평등성에 대한 단호한 입장을 나타낸다는 점에서 매우 의미 있는 가치를 지니고 있지만, 그렇다고 아무것에나, 특히 역사의 상황적 가치나 생물학적 의의를 지니고 있는 문제와 관련될 때, 그 특수성을 무시하고 무조건 적용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여기서 다른 하나를 말할 수 있는데, 그것은 현실적 가능성에 관한 것으로서 이 주장은 성의 역사적 요인과 생리적 가치를 그다지 고려하지 않기 때문에 그 선언적 의미에 비하여 그 실현 가능성은 그리 높지 않다는 것이다. 순결에 관한 태도야말로 가부장제의 성 기준의 이중성을 뚜렷이 보여주는 것으로 그것은 지금까지 사실상 도덕적 힘 때문에 존속되어 왔다기보다는 현실적인 권력의 힘 때문에 유지될 수 있었던 것이다. 이 말에는 여러 의미가 들어있지만, 하나 분명한 것은 적어도 윤리나 논리를 가지고 남성의 순결이 쉽게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 점을 감안한다면 가장 확실한 방법은 아마 여성이 권력으로써 남성에게 그것을 강제하는 방법이라고 하겠으나 그럴 날도 아직은 요원하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앞에서 이미 언급했듯이, 생리적으로 볼 때 성에 대해 더욱 신중하고 방어적이어야 한다는 의미에서 남성보다 여성이 순결해야 할 충분한 생물학적 이유가 있는 것이고, 또한 성적으로 쉽게 흥분하는 남성이 순결하라는 요구에도 불구하고 자제할 수 없는 충분한 생리학적 이유도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런 차이가 고려되지 않고 무조건 "내가 안 하니까 너도 하지말고, 네가 하니까 나도 하겠다"는 식의 논리를 펴는 것은 결과적으로 개개의 특성을 무시하고 차이와 차별을 혼동하여, 결국 진실을 놓치게 되는 맹목주의의 오류에 빠지게 되는데, 우리가 이런 사고를 경계해야 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이제 마지막 하나에 대해 말하자면, 그것의 유효성에 관한 것으로서 과연 남성이 순결해야 한다는 주장이 의미 있는 주장인가 하는 점이다. 남성이 순결해야 하는 것이 윤리적으로 보면 타당하지만 역사와 생리적 사실들은 그것을 지지하기보다는 오히려 역행하는 방향으로 작용하여왔는데, 그러한 괴리 현상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가 문제인 것이다. 결론적으로 말해, 그 모순은 남녀에게 상호주의적 의무가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이 성적 관계로 국한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리고 만일 그렇다면 여성의 성적 순결과 대등하게 남성에게 주어진 의무가 무엇인가를 발견해야 할 것이다. 이 점에 대해 언급하기 위해서는 결혼의 성립에 대해 잠시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흔히 결혼이 성을 매개로 한 남녀의 특정한 형식의 사회적 결합관계로 이해되고 있다. 그건 사실이다. 그러나 비록 성이라는 게 결혼에서 핵심적인 기능을 한다고 하더라도, 말하자면, 그것은 결혼의 필요조건은 될지언정 충분조건까지 되는 것은 아니다. 즉, 성만으로 결혼이 이해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결혼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간단히 말해, 결혼이란 불완전한 두 남녀가 상호 보완함으로써 그 불완전성을 극복하는 과정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남녀가 서로 무엇을 가지고 상대를 보완하는가 하는 점이다. 남녀를 비교할 때, 여성의 위대함은 자연적 생산성에 있다. 자연 상태에서 남성이 열등한 존재일 수밖에 없는 것은 그 자연적 생산력을 결여하고 있기 때문이요, 인류가 처음에 모계사회로 출발할 수밖에 없었던 것도 여성의 그 생산력 때문이었다. 이에 대항하여 남성이 만들어낸 것이 사회적 생산성이다. 자연적 생산성에 대립된 것으로서 사회적 생산성에 가치를 부여하기 위해 남성들은 우선 관념(정신)을 조작할 필요가 있었고 그 (사회적) 관념을 지배함으로써 부권사회를 형성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여성에게는 자연적 생산력이 있고 남성에게는 사회적 생산력이 있음으로써 각자 상대를 보완해주고 있는데, 결론적으로 결혼이란 여성의 자연적 생산성과 남성의 사회적 생산성의 결합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남성이 여성에게 성적 순결을 요구하는 것은 그 자연적 생산성의 순수함을 요구하는 것으로, 그 점에서 충분한 의미를 갖는다고 할 수 있다. 반면에 그에 대응하여 상호주의 입장에서 여성들이 남성들에게 요구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남성의 사회적 생산성의 순수함이 아니겠는가. 그것을 한마디로 규정한다면 '지조(志操)'라고 말할 수 있고, 사회적 관계가 언어적 관계 위에 성립한다는 점을 감안할 때 그것은 '신의(信義)'로 대치될 수도 있을 것이다. 이것은 곧 여성에게 순결을 요구하는 사회가 되기 위해서는 남성들이 지조를 지키는 사회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말한다. 달리 말하면, 출세와 돈과 명예 때문에 남성들이 지조와 신의를 팽개치는 사회에서는 여성들이 순결하기를 기대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우리에게는 이것에 관한 좋은 교본이 있는데, 그것은 다름 아닌 {춘향전}이다. 성춘향은 우리에게 여성의 정절(성적 순수성)이 어떠해야 함을 보여주고 있지만 그것은 이몽룡의 지조가 뒷받침됨으로써 비로소 가능할 수 있다는 점을 놓쳐서는 안 될 것이다. 역사적 상황과 생리적 조건 등을 감안할 때, 여성의 경우 자연적 생산성의 순수함이 확보됨으로써 사회적인 그것도 확보될 수 있었다면 남성의 경우엔 그 역으로 사회적 생산성의 순수함이 확보됨으로써 자연적인 그것도 확보될 수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점을 감안하면, 남성의 성적 순결을 기대하는 여성들은 전략적으로 남성들에게 성적 순결을 직접적으로 요구하기보다는 자기의 말에 책임을 지고 약속을 지키는 신뢰와 지조를 갖춘 사회적 인간이 되기를 요구하는 것이 훨씬 현명한 방법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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