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조갑제의 김대중 연구
(9) 미공개 자료를 중심으로 쓰는 김대중 연구④-1; 김대중 주장; 『교통 사고를
위장한암살 기도였다』; 趙 甲 濟 月刊朝鮮 편집위원
임자도 간첩 사건 1968년 7월20일 金炯旭(김형욱)
중앙정보부장은 전남 목포 앞 荏子島(임자도)를 거점으로 하여 暗躍(암약)해 온 북괴 간첩단을 적발해 118명 중 간첩 27명을 구속, 검찰에
보냈다고 발표했다. 정보부는 발표문을 통해서 「지하당 전남도책인 鄭泰洪(鄭泰默의 이름을 가명으로 발표한 것-편집자 注) 등 간첩단은
1962~1967년 사이 북한을 오가며 1845만원의 공작금을 받아 지하당을 조직, 활동해 왔다」고 밝혔다. 이 간첩단의 주범인 鄭泰默은 당시
45세로서 전남 목포시 출생, 前 남로당원으로서 국가보안법 위반죄로 징역 7년을 선고받고 복역중 6·25 전쟁으로 탈옥, 북한에 4회 왕복,
노동당 입당, 공작금 800만원 수령, 지하당원 포섭 활동을 벌인 것으로 발표되었다. 이 간첩단이 받은 공작
지령 가운데는 「혁신계통 중간 정당에 침투하라」, 「1967년 5월의 대통령 선거 때는 제1야당 후보를 지원하라」, 「국회의원 선거 때는
극렬적인 야당 인사를 지원하라」, 「출판사를 경영하되 반공법에 저촉되지 않는 범위 안에서 反美-反정부 사상을 고취하라」는 내용도 있었다는
것이다. 1980년 7월31일자로 육군 계엄 보통 군법회의 검찰부 검찰관 중령 鄭基用(정기용)이 군법회의
앞으로 보낸 金大中 등 24명의 피고인에 대한 공소장에는 임자도 간첩 사건의 주범 鄭泰默(정태묵)에 대해서 이렇게 썼다.
<(金大中 피고인은)1967년 5일자 미상경 목포시 죽동 소재 한일 여관 등에서 북괴로부터 『제7대
국회의원 선거에 야당인 신민당 입후보자가 다수 당선되도록 김대중 등을 지원하라』는 지령을 받고 남파되어 의도적으로 접근해 온 소위 임자도 거점
간첩 정태묵(1972.12.8 대법원에서 간첩죄로 사형판결을 선고받아 집행된 자)을 2회에 걸쳐 접촉하여 그로부터 「6·8 선거는 관의 금력에
의한 관제 선거가 예상되므로 투표직전까지 선거조직을 노출시키지 말 것」, 「여당이 금력공세를 가하면 효력이 감소될 때까지 방임할 것」,
「선거시에는 관을 자극하는 언동으로 탄압을 유도하여 동정표를 얻도록 할 것」, 「선거운동을 도심지보다 변두리에 집중할 것」, 「여당의 금력 공세
상황을 구체적으로 증거를 포착하여 여론에 호소할 것」, 「지방 발전만을 외치는 여당의 전략에 말려들지 말 것」 등 선거전략을 교도받는 동시에
목포 산정국민학교에서 교사로 종사하던 위 정태묵의 처의 동료 교사인 임자도 출신 성명 미상을 그 운동원으로 소개받고 동 선거 전략에 따라
선거운동을 하여 당선되고(하략)> 이에 대한 金大中씨의 해명은 다음에 소개하는 1954~1967년
사이의 행적에 관한 자필 진술서에 등장한다. 1980년 5월20일자 자필 진술서의 해당 부분을 싣는다.
金大中 해명 〈6. 1967년 임자도 간첩사건이
발생했는데 그 주범 鄭泰默은 본인의 목포상업학교 1년 선배며, 선거기간에도 2∼3차 만나서 본인의 선거에 협력하는 의사를 표시한 바 있음.
그러나 당시 누구나 그가 해방 직후의 좌익활동을 중단하고 家業인 염전업에만 전념하는 줄 알았지 그가 그런 엄청난 일을 하는 줄은 몰랐음. 그는
매일 시내에 나오고 거리를 활보하고 다녀서 일반 시민과 조금도 다를 바 없었음. 이 사건이 나자 하루는 당시
정보부의 金炯旭 부장의 보좌관들이 와서 출두를 요청하므로 시청 앞 뉴코리아 호텔에서 金부장을 만났음. 金부장으로부터 『임자도 사건의 주범
鄭泰默을 조사 중 金선생의 이름이 나왔는데, 사건과는 전혀 관련이 없으나 일단 이름이 거명된 이상 수사절차상 조사를 안 받을 수 없으니
미안하지만 참고인 조사에 응해 달라』는 요청을 받았음. 그리하여 선거기간 중 타인과 동석으로 2∼3차
만났으며 선거 후에도 서울서 1차 만난 것을 사실대로 진술해 주었음. 이것은 후일에 간접적으로 들은 이야기이나 鄭泰默이 조사받던 중 진술하기를
『선거기간 중 金大中의 말을 들으니 반공정신이 투철하여 전혀 다른 말을 꺼낼 여지가 없는 것으로 보고 아예 공작하려는 생각을 갖지 않았었다』고
했다는 말을 들었음.〉 李宅敦 증언:『정태묵에게 당하려다가 만 사람』
1980년 8월29일 육군본부계엄보통군법회의에서는 金大中 피고인과 함께 기소된 李宅敦(이택돈) 前 신민당
국회의원에 대한 신문이 있었다. 그는 서울高法 판사로서 鄭泰默에게 사형선고를 내렸던 사람이기도 했다. 검찰관
金大中 피고인이 해방 전후 좌익활동을 한 사실을 아는가요. 李宅敦 전혀 몰랐습니다. 저는 이 건으로
수사받으며 (장금성의 - 편집자 注) 남로당 당원증 재교부 신청서에 공산주의 활동상황이 적혀 있는 것을 보고 알았는데 저는 그것을 보고 정치를
단념해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한편 과거 공산당인 사람이 대통령이 되었다면 이 나라가 어떻게 될 뻔했느냐 하는 것을 생각할 때 가슴이 아프며
이번에 그러한 자료가 나온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김대중 자기는 충분히 자기를 알고 있었다는 것을 생각할 때 자기 자신을 기만했다고 하는
것을 이 자리에서 말할 수가 있습니다. 검찰관 피고인은 임자도 간첩 정태묵을 아나요.
李宅敦 예, 제가 고등법원 판사로 있을 때 직접 판결한 사실이 있습니다.
검찰관 (前略) 이와 같은 내용이 정태묵의 판결문에도 나오는데 사실인가요.
李宅敦 예, 10여 년 전 일인데 김대중이 정태묵의 포섭대상이었다는 것이 기억납니다.
변호사 김정환 고등법원 판사 때 정태묵을 판결하고 판결문을 썼나요.
李宅敦 예. 변호사 지령 내용을 기억하나요.
李宅敦 상세한 기억은 못하나 정태묵이 다방 등지에서 김대중을 만났다는 것은 기억에 납니다. 그때 왜 좀더
검찰에서 추궁을 안 했나 하는가를 기록을 보면서 느낀 생각이 납니다. 변호사 정태묵 사건 취급과정에서
김대중을 의심해 본 적이 있나요. 李宅敦 정태묵에게 당하려다가 만 사람으로 되어 있다는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李宅敦 변호사는 최근 기자에게 『그때 나는 주심 판사였다. 임자도 간첩사건 기록을 읽어 보니 鄭泰默이
金大中씨를 만난 것은 목적을 갖고 그렇게 한 것 같은데 이 부분에 대한 수사가 제대로 되어 있지 않다는 느낌을 받았다』고 말했다.
「주님이 암살 음모의 위기 속에서 구해 주었다?」 이
金大中 연구는 시간대와 쟁점을 따라 진행되고 있다. 金大中을 연구함에 있어서 1971년 5월24일에 있었던
교통사고를 빼놓을 수 없다. 1980년 全斗煥 집권 후 청주교도소에서 복역중이던 金大中씨는 「민족을 위한 나의 기도」라는 글을 써 가족에게
보냈다. 이런 구절이 있다. <주님은 1971년 국회의원 선거 지원차 전국을 지원 유세하는 제 차를
14t 대형트럭으로 들이받아 교통사고를 빙자해서 죽이려는 음모를 間一髮의 위기 속에서 좌절 시켰습니다>
金大中씨는 자신이 다섯 번의 죽을 고비를 넘었다고 말하곤 한다. 이 트럭 사고는 그 중 하나다. 金大中씨는
1985년 봄 月刊朝鮮 吳交力鎭-趙甲濟 기자와 인터뷰하면서 사고 상황을 구체적으로 설명했다. 『당시 나는
국회의원 선거 때 전라도 지방의 지원 유세를 끝내고 목포에서 비행기로 상경할 계획이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예약이 취소돼버렸어요. 날씨 때문에
비행기가 못 뜬다는 거예요. 이것도 뒤에 알아보니 정부의 음모였어요. 그런데 광주에서는 비행기가 뜬다는 거예요.
광주로 비행기를 타러 가는데 무안 입구의 1차선 도로를 지날 때였어요. 마주 오던 14t 트럭이 거의 90도
각도로 확 꺾으며 중앙선을 넘어 내 차를 덮치는 거예요. 마침 그때 운전사가 살려고 속도를 확 냈어요. 그래서 트럭은 내 차의 뒤트렁크를 살짝
받았는데, 워낙 큰 차가 받아놓으니까 내 차는 붕 떠서 길 옆 논에 처박혔어요. 100미터 앞에는 저수지가 있었는데 거기에 빠졌으면 죽는
거지요. 나는 뒷자리 오른 쪽에 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내 차 뒤에는 결혼식에 다녀오는 손님을 태운 택시가
따라오고 있었는데, 그 사람들이 나를 알아보고 인사를 하려고 택시를 경호차 앞으로 몰았어요. 내 차를 받은 트럭이 잇따라 이 택시를 정면으로
받았어요. 앞에 탔던 3명이 즉사, 뒤의 3명이 중상을 당했습니다. 나는 피를 흘리면서 현장에서 응급처치를 받았는데 택시에서 부상당한 사람이
피투성이가 되어 「金大中 선생은 죽지 않았느냐」고 묻더군요. 그런데 트럭운전사가 없어져 버렸어요. 조수만 있는데 「난 모른다」는 거예요』
―누가 시켰습니까. 『당시 대통령 측근들이에요. 그 트럭의 소유자가 그
당시 공화당 전국구 후보로 등록된 모 변호사예요. 그 운전사 사건을 처음 담당한 검사는 갈려버리고 운전사는 교통사고를 냈다고 1년 징역을
받았는데 다 살지 않고 나왔고 나중에 의문의 죽음을 했어요. 저는 다섯 번의 죽을 위기에서 다 살아나왔는데, 이것은 하느님께서 나를 당신의
도구로써, 당신의 목적에 쓰시려고 그렇게 구해 주신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10편에서
계속>
|
|
|
|
|
조갑제의 김대중
연구(10) 미공개 자료를 중심으로 쓰는 김대중 연구④-2; 김대중 주장; 『교통 사고를
위장한암살 기도였다』; 趙 甲 濟 月刊朝鮮 편집위원
죽었다는 운전사는 살아 있었다 필자가 알아보니 사고
트럭은 범한화물(주) 소속이었다. 사장은 洪國泰(홍국태)씨. 그의 아버지가 사고 당시 공화당 전국구의원 후보였던 洪承萬(홍승만·작고·당시
대한변협회장). 洪사장은 기자에게 『그 사고는 단순 교통사고였다』면서 『신민당원들이 사고 운전사 집에 몰려가 괴롭혔다. 수사와 재판은
공정했다』고 말했다. 기자는 金大中씨로부터 『운전사가 의문의 죽음을 했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에 운전사와 접촉하려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 혹시나
해서 알아보았더니 그는 부산시 동래구 연산 6동에서 살고 있었다. 權重億(권중억·당시 51세)씨는 아직도
회사 출퇴근 버스를 운전하고 있었다. 그와 통화를 해서 15년 전의 사고 이야기를 꺼냈더니 이렇게 반문하는 것이었다.
『그 사고가 문제가 되어 있습니까』 權씨는 이렇게 사고를 설명했다.
『그때 비가 좀 내리고 있었습니다. 경기 영 7-4755호 트럭을 몰고 목포로 가는데 무안군에서 마주 오던
차량 행렬을 보았습니다. 택시가 맨 앞에 있었고, 그 뒤를 따라 오던 세단차―여기에 金大中씨가 타고 있었다는 것을 사고 뒤에 알았습니다―가
중앙선을 넘어 택시를 앞지르려고 하는 것을 제가 보고 당황했습니다. 급 브레이크를 밟았는데, 비탈길에 비가 내려 그런지 왼쪽으로 미끄러지면서
세단을 약간 스치고 뒤따라오던 택시를 정면으로 들이받아 그 안에 타고 있던 두 명이 죽었습니다. 저는 뛰어내려 택시 승객부터 끌어냈고, 지나가는
차들한테도 구원을 청했습니다. 세단차는 길 아래로 처박혔는데 그 차에 탔던 사람들이 어떻게 나왔는지는 모르겠어요』
―현장에서 달아났습니까. 『아뇨. 거기에 있다가 경찰차가 조사하러 와서
경찰로 끌려가 구속되었지요. 금고 10개월의 형을 받았습니다. 형을 다 살고나와 보니 살림이 엉망이 되고, 결국 아내와 헤어진 뒤 두 딸을
키우며 이렇게 살고 있습니다』 ―세단차에도 사고의 책임이 있다는 말씀 같은데?
『법률적으로는 모르겠지만 사고를 유발시킨 것은 세단차의 중앙선 침범이었어요. 그래도 저의 잘못이 크지요』
―경찰에서 조사받을 때 고의성 있는 사고라는 쪽으로 추궁을 받지 않으셨습니까?
『없었습니다. 지금 선생님한테 처음 듣는 이야기입니다』 1997년
11월15일 도서출판 산하에서 출간된 당시 대통령 후보 金大中씨의 自傳的 에세이 「나의 삶 나의 길」에도 트럭사고의 상황이 자세히 묘사되어
있는데 암살음모설을 유지했다. 金大中 당시 국민회의 총재는 이 에세이에서 「나는 그(사고) 때문에 반년 이상을 병상에 누워 있어야 했고 다리와
허리 통증이 사라지지 않아서 진찰해 보니 股關節(고관절)에 장애가 있는 것으로 나타났던 것이다. 야만적인 독재정권이 선물한 교통사고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이다」고 썼다. 1998년 7월 하순 月刊朝鮮 禹鍾昌 기자는 부산으로 내려가 權重億씨를
찾아갔다. 62세인 그는 여전히 부산시 연산동 달동네에서 재혼한 부인과 어렵게 살고 있었다. 모 회사의 야간 경비 근무로써 생계를 꾸려가고
있었다. 權씨는 트럭 사고의 피해자가 대통령이 되어 상당히 불안한 모습이었다. 그는 『동네에서도 직장에서도 모르고 있는 일』이라면서 『제가 이
사실이 알려져 직장을 그만두게 되면 세 식구가 굶어죽게 된다』는 취지의 말을 했다. 당시
수사 검사:『외압은 없었다』 1992년 대통령 선거 전에 그는 광주 경찰서에 불려가 트럭 사고와 관련하여
조사를 받은 적이 있다고 밝혔다. 權重億씨는 사고 상황에 대해서는 1987년에 趙甲濟 기자에게 이야기했던 것을 되풀이하였다.
『사고가 난 날은 비가 왔습니다. 왕복 2차선 도로이고, 커브를 지나자마자 맞은 편에서 중앙선을 침범해
달려오는 차를 보았습니다. 급 브레이크를 밟았지요. 빗길에 차가 밀리는데 아무리 핸들을 틀어도 틀려야 말이지요. 차가 90도 각도로 10m쯤
미끄러졌는데 스키드 마크 자국이 선명히 났습니다. 조사한 사람들이 그것을 다 보았고, 조사 기록에도 다 나와 있습니다』
禹鍾昌 기자는 1998년 月刊朝鮮 9월호에 실린 「대통령님, 오해를 푸십시오」란 題下의 기사를 취재 중
金大中 대통령의 둘째 아들 金弘業씨의 아내 申仙蓮씨의 아버지 申鉉守씨(前 감사위원)가 사고를 낸 트럭회사의 사장이던 洪國泰씨와 인척 간임을
밝혀냈다. 洪國泰씨의 할머니가 申鉉守씨의 고모가 된다는 것이었다. 申씨는 공직에서 물러난 뒤 洪國泰씨가 소유하고 있는 한국 컴퓨터의 상임고문에
취임한 적도 있었다는 것이다. 禹鍾昌 기자는 또 이 트럭 사고를 수사한 검사가 국민회의(현재 민주당) 소속
許京萬(허경만) 전남지사임도 알아냈다. 許지사는 당시 목포 검찰 지청 소속 검사였다. 그는 『상당히 고의적으로 난 사고일 가능성이 있고,
金대통령도 그렇게 주장했었다』면서 『金대통령에게 「그런 의심은 가지만 운전사가 졸았다고 주장하고 있고 본인이 자백해 주지 않으면 살인 예비혐의로
기소하기에는 참 어려운 문제가 있다」고 얘기하고 그렇게 처리했던 사건이다』는 요지로 말했다. 許京萬 지사는
金大中씨의 주장과는 달리 자신이 이 사건을 끝까지 맡아 기소했고 그 뒤에 인사발령에 따라 인천으로 옮겼다고 말했다. 수사할 때 외부로부터의
압력도 받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그는 급제동을 걸 때 생기는 스키드 마크도 있었다고 기억했다. 禹鍾昌 기자는
『그 트럭 운전사가 요즘 뭘하고 있는지 압니까』 하고 물었다. 『미국으로 이민 갔다가 현지에서 무슨 사고로
죽었다는 말을, 그 후 金대통령 측근으로부터 들었습니다』 노벨상 수상 연설에도 등장
2000년 12월10일 밤 金大中 대통령이 노벨 평화상을 받는 장면이 텔레비전으로 중계되었다. 필자는 金大中
대통령이 수상 연설에서 『독재자들에 의해서 일생에 다섯 번에 걸쳐서 죽을 고비를 겪어야 했습니다』라고 말하는 것을 보고서 충격을 받았다.
2001년 1월호 月刊朝鮮 「편집장의 편지」에서 기자는 「金大中 대통령이 오해해서가 아니라 필요에 의해서 (운전사) 權씨를 살인미수범으로 몰고
있다면 노벨평화상의 수상 자격을 의심받을 수도 있다」고 지적했다. 이 기사에 대해서 許京萬 전남지사는
月刊朝鮮 2001년 3월호에 실린 반론문에서 「사고 트럭이 중앙선을 침범해서 승용차를 들이받은 것이지 승용차가 중앙선을 침범하여 사고를 유발한
것은 아니다」고 주장했다. 그는 또 「이 사건은 고의성이 있다고 인정할 만한 중대한 과실이 있는 의문의 사건이 분명했지만, 트럭 운전사의 犯意와
배후를 제대로 입증할 수 있는 자백이나 물증이 없었기 때문에 부득이 트럭 운전사를 업무상 과실치사상 혐의로 기소한 것이지, 그 사건이
살인미수사건은 아니었다고 면죄부를 준 것은 아니다」고 했다. 이 반론에 대한 禹鍾昌 기자의 검증 및 조사는
작년 3월에 이뤄졌다. 다음은 禹 기자의 보고서이다. <11편에
계속>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