鶴山의 草幕舍廊房

유럽 아프리카

스페인 紀行

鶴山 徐 仁 2005. 11. 20. 18:07
스페인 紀行 ① 필립 2세의 功過
趙甲濟   
 스페인 紀行 ① 필립 2세의 功過
 
 서양사에서 16세기는 ‘스페인의 세기’라고 일컬어진다. 17세기는 新해양강국 ‘네델란드의 세기’, 18세기는 ‘英佛의 세기’, 19세기는 ‘英獨의 세기’, 20세기는 ‘미국의 세기’, 21세기는 아마도 ‘美中의 세기’가 될 것이다.
 1492년 스페인 남부의 그라나다가 기독교 軍에 함락됨으로써 770년에 걸친 스페인의 이슬람 시대가 끝났다. 이 해에 스페인 王家에서 후원한 콜럼버스의 아메리카 발견이 이뤄졌다. 스페인은 포르투칼과 함께 ‘대항해 시대-식민지 개척시대’를 열었다. 스페인의 모험가들(피사로, 코르테츠)은 南美의 아즈텍, 마야, 잉카 文明을 파괴-접수했다.
 신대륙에서 채굴된 은이 스페인으로 흘러들면서 거대한 國富가 쌓이기 시작했다. 1556-1598년 사이 42년간 왕위에 있었던 펠리페(영어로는 필립) 2세가 스페인의 전성기를 이끌었다. 1508년에 그는 포르투칼의 王位까지 차지하여 서양의 2대 해양국을 통합했다. 그의 治下에서 스페인은 지금의 포르투칼, 베네룩스 3국, 南美, 中美, 플로리다 지역, 멕시코, 캐러비안 海 주변지역을 차지했다.
 그는 신교도와 터키 군대로부터 카톨릭을 수호하는 챔피언을 자임했다. 1571년 스페인-베니스 연합함대는 지중해의 레판토 해전에서 이슬람의 챔피언 터키 해군을 격퇴하여 지중해 제해권을 지켜내고 이슬람의 東進을 저지했다. 1588년에는 스페인의 무적함대가 영국의 엘리자베스 1세를 징벌하러 갔다가 거의 전멸하여 스페인의 衰亡期(쇠망기)를 열기도 했다. 펠리페 2세는 네델란드 독립전쟁을 진압하는데도 실패했다.
 스페인의 짧은 전성기를 뒤로 하고 유럽의 후진국으로 전락하는 데는 약 400년이 걸렸다.
 스페인의 地主와 귀족들은 전성기 때도 상공업을 기피했다. 아메리카 대륙과의 무역은 외국인에 의해 이뤄졌다. 스페인의 지배층은 아메리카 경영으로 생긴 國富를 주로 전쟁과 건축에 썼다. 펠리페 2세가 지은 궁전 에스코리알은 마드리드에서 차로 한 시간 거리에 있는데 화강암으로 만든 ‘여덟 번째의 불가사의’라고 불린다. 스페인 사람들은 아메리카 대륙에서 들여온 銀(은)을 돌로 바꿨다는 평을 듣는다. 
 
스페인 紀行 ② 유태인 축출의 부작용
趙甲濟   
 스페인 紀行 ② 유태인 축출의 부작용
 
 스페인의 17세기는 건축과 예술의 세기였다. 국가 소득의 약 5%를 매년 건축(교회, 기념물), 그림, 조각 등에 썼다고 한다. 요사이 보통나라의 국방비 비중보다 더 많은 돈이 문화, 예술에 투자됐다. 이렇게 생긴 문화유산들이 지금 스페인을 세계 1등가는 관광 大國으로 만들고 있다.
 17세기 스페인의 地主, 귀족, 교회는 국가 생산물의 약 10%를 차지하여 부유한 생활을 누렸으나 농민들과 평민들은 그러지 못했다. 이슬람 세력을 추방하고 스페인을 수복한 기독교세력이 잘못한 게 있었다. 유태인과 이슬람 교도를 박해한 것이다. 이 두 세력은 유럽 사람들보다 개화됐고 돈과 기술이 있었다. 스페인은 종교 재판소를 만들어 개종하지 않는 유태인과 이슬람 사람들을 추방했다. 약 100만 명의 알짜배기 인력, 즉 당시의 중산층들이 외국으로 빠져나간 뒤 스페인은 지배층과 피지배층이 착취와 반발의 관계로 대립하게 되었다. 여기에 정치 불안과 內戰(내전)의 씨앗이 뿌려졌다. 스페인 지배층은 귀족층, 군 장교, 교회로 구성되었는데 이들은 상공업보다는 종교, 문화에 탐닉했고, 농민, 평민층은 열심히 일할 동기를 찾을 수 없었다. 16세기에 벌어놓은 국부를 까먹으면서 스페인은 정변, 전쟁, 내란의 소용돌이로 빨려 들어갔고, 그 클라이맥스가 1936년~1939년의 스페인 내전이었다.
 1701년 합스부르크 王家의 카를로스 3세가 스페인 왕위를 프랑스 계통의 부르봉 王家 펠리페 5세에게 넘겨주자 유럽의 열강들이 개입하여 11년간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을 벌였다. 프랑스 대혁명 직후에는 스페인이 나폴레옹의 프랑스 편이 되어 두 나라 연합함대가 영국을 치려다가 트라팔가 해전에서 패배했다. 이로써 300년에 걸친 스페인의 해양강국 시대는 막을 내린다. 
 
스페인 紀行 ③ 內戰의 나라
趙甲濟   
 스페인 紀行 ③ 內戰의 나라
 
 스페인 지배층은, 18~19세기 유럽이 산업혁명과 부르조아 혁명을 거치면서 혼란 속에서도 발전을 계속하고 있을 때 이런 新사조에 눈과 귀를 닫고 中世的 침체 속을 헤맸다.
 나폴레옹이 1807년에 스페인과 함께 포르투칼을 兩分하기 위해 군대를 보내고 스페인 왕을 밀어내고 동생을 앉히자 스페인 민중은 오랜만에 지배층과 손잡고 게릴라전으로 대항했다. 영국의 웰링턴 장군이 이 對프랑스戰을 승리로 이끌어 나폴레옹의 몰락을 재촉했다.
 그 뒤 스페인은 王位 쟁탈전에 휩싸인다. 1830년대와 1840년대 그리고 1870년대 세 차례 12년간의 내전이 일어났다. 두 번째 내전 끝에 스페인은 공화국이 되었으나 지방의 반란으로 1년을 채우지 못하고 군대가 다시 알폰소 1세를 복위시켰다.
 스페인 내전에서는 귀족, 왕가, 지주, 군대가 항상 한 편이 되고, 농민, 지식인, 노동자, 사회주의자, 분리주의자가 반대편에 섰다.
 19세기 말부터 러시아 무정부주의자 미하일 바쿠닌의 사상이 스페인 노동자들 사이에 퍼지기 시작했다. 착취만 하는 정부는 차라리 없는 것이 낫다고 생각한 사람들이 많았다.
 사회주의도 서서히 퍼지기 시작했다. 이들은 러시아 공산당 식 계급혁명을 반대했다. 동시에 바스크와 카탈루니아 지방(바르셀로나가 수도)에서 분리운동이 일어났다. 스페인은 계급적으로, 지역적으로(인종적으로) 갈라지기 시작한 것이다.
 더구나 지금의 모로코 주민들이 독립전쟁을 일으켜 스페인 군대는 고전했다. 1923년 프리모 데 리베라 장군이 친위 쿠데타를 일으켜 집권한 뒤 6년간 온건한 독재를 했다. 알폰소 王은 1931년 지방선거에서 공화파가 압승하자 이탈리아로 망명했다. 제2공화국이 들어섰다.
 정권은 좌파와 우파 사이를 오고갔다. 파시스트 정당이 생기고 노동자들이 경찰과 군대를 공격했다. 카탈루니아는 독립을 선언하고 암살, 테러가 사회를 휩쓸었다. 스페인은 左右로 갈라졌다.
 
스페인 紀行 ④ 프랑코 등장
趙甲濟   
 스페인 紀行 ④ 프랑코 등장
 
 1936년 총선에서 공산당이 앞장 선 좌파연합 인민전선이 근소한 차이로 민족전선(우파연대)를 꺾고 승리했다. 폭력 사태는 계속됐다. 무정부주의 회원이 100만 명을 넘었다. 농민들도 반란을 준비했다.
 1936년 7월 17일 봉기한 것은 군대였다. 북아프리카 주둔 스페인 군대가 좌파 정권에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키자 본토 군대도 동조했다. 다섯 장군이 주동한 군사반란의 지도자는 키가 작은 프랑코였다.
 프랑코 세력은 스스로를 ‘국민(민족)세력(Nationalist)’이라고 불렀다. 스페인의 국가적 통합과 존립을 위해 싸운다는 명분 아래서 붙인 이름이었다. 반대편 좌파는 ‘공화파(Republican)’라고 불렸다.
 미국과 서구의 지식인들, 사회주의자들은 의용군을 보내 공화파를 지원했다. 소련도 공화파에 군대와 장비를 보냈다.
 나치 독일과 파시스트 이탈리아는 프랑코 군대를 지원했다. 좌파 편을 민 국제의용군은 약 2만 명, 이탈리아는 약 7만 5000명, 독일은 약 1만 5000명의 병력을 보냈다. 스페인 내전은 국제전쟁으로 변질됐다.
 세계의 좌파 지식인(헤밍웨이 등)이 공화파를 편들었기 때문에 지금까지도 프랑코는 惡, 공화파는 善으로 치부되고 있지만 여기 스페인에서 듣는 여론 사실은 다르다. 공화파는 약 7000명의 성직자(수녀, 신부 등)를 학살했다.
 공화파 내의 암살, 처형은 더욱 참혹했다. 1937년 5월에 공화파의 거점 바르셀로나에서는 소련의 앞잡이들이 좌파 內 무정부주의자들과 트로츠키주의자들을 숙청하기 위한 시가전을 벌여 수많은 동료를 학살했다. 공화파 편에서 참전했던 영국 소설가 조지 오웰이 좌파의 실상을 목격한 뒤 공산주의자들은 파시스트보다 더 악질이라고 판단하여 스탈린주의를 고발한 ‘동물농장’과 ‘1984년’을 썼다.
스페인 紀行 ⑤ 프랑코의 功過
趙甲濟   
 스페인 紀行 ⑤ 프랑코의 功過
 
 스페인 내전에서 공화파가 끝까지 버틴 곳은 2大 도시 바르셀로나와 마드리드였다. 1938년 독일-이탈리아의 지원 하에 프랑코 군대는 10만의 병력, 1000대의 전투기, 150대의 탱크로써 대공세를 폈다. 소련은 1938년 9월에 철수했고 이듬해 1월 바르셀로나가, 3월 28일에 마드리드가 함락되었다. 수십만의 공화파는 프랑스로 달아났다.
 스페인 내전에서 약 35만 명이 죽었다. 프랑코는 승리한 뒤 공화파 사람들을 처형, 투옥하여 약 10만 명을 더 죽였다.
 프랑코의 승리 직후 2차 세계대전이 터졌다. 히틀러의 군대는 6주 만에 프랑스를 정복했다. 프랑코는 자신의 승리를 있게 한 히틀러 편을 들어 참전하는 것이 당연해 보였다. 히틀러는 프랑코와 만나 참전을 요청했다. 프랑코는 도와주겠다는 말만 하고 날짜를 못 박지 않았다. 2차 대전 동안 프랑코는 끝내 스페인의 중립을 지켰다. 이 역사적 결단이 그와 스페인을 구했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스페인은 NATO와 UN에 가입하지 못하고 미국이 주도한 경제봉쇄를 당했다. 1940년대 말부터 東西 냉전이 시작되자 미국은 스페인內에 4개 군사기지를 두고자 했다. 프랑코는 이에 동의했고 미국 원조가 들어오기 시작했다.
 1955년 스페인은 UN에 가입했다. 프랑코 治下에서 스페인은 경제발전을 성공시켰다. 미국의 원조와 관광 붐이 자금源이 되었다. 朴正熙 시대처럼 스페인도 ‘先경제발전 後민주화’의 길을 걷게 된다.
 
 
[ 2005-11-20, 11:4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