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사에서 16세기는 ‘스페인의 세기’라고 일컬어진다. 17세기는 新해양강국 ‘네델란드의 세기’, 18세기는 ‘英佛의 세기’, 19세기는 ‘英獨의 세기’, 20세기는 ‘미국의 세기’, 21세기는 아마도 ‘美中의 세기’가 될 것이다.
1492년 스페인 남부의 그라나다가 기독교 軍에 함락됨으로써 770년에 걸친 스페인의 이슬람 시대가 끝났다. 이 해에 스페인 王家에서 후원한 콜럼버스의 아메리카 발견이 이뤄졌다. 스페인은 포르투칼과 함께 ‘대항해 시대-식민지 개척시대’를 열었다. 스페인의 모험가들(피사로, 코르테츠)은 南美의 아즈텍, 마야, 잉카 文明을 파괴-접수했다.
신대륙에서 채굴된 은이 스페인으로 흘러들면서 거대한 國富가 쌓이기 시작했다. 1556-1598년 사이 42년간 왕위에 있었던 펠리페(영어로는 필립) 2세가 스페인의 전성기를 이끌었다. 1508년에 그는 포르투칼의 王位까지 차지하여 서양의 2대 해양국을 통합했다. 그의 治下에서 스페인은 지금의 포르투칼, 베네룩스 3국, 南美, 中美, 플로리다 지역, 멕시코, 캐러비안 海 주변지역을 차지했다.
그는 신교도와 터키 군대로부터 카톨릭을 수호하는 챔피언을 자임했다. 1571년 스페인-베니스 연합함대는 지중해의 레판토 해전에서 이슬람의 챔피언 터키 해군을 격퇴하여 지중해 제해권을 지켜내고 이슬람의 東進을 저지했다. 1588년에는 스페인의 무적함대가 영국의 엘리자베스 1세를 징벌하러 갔다가 거의 전멸하여 스페인의 衰亡期(쇠망기)를 열기도 했다. 펠리페 2세는 네델란드 독립전쟁을 진압하는데도 실패했다.
스페인의 짧은 전성기를 뒤로 하고 유럽의 후진국으로 전락하는 데는 약 400년이 걸렸다.
스페인의 地主와 귀족들은 전성기 때도 상공업을 기피했다. 아메리카 대륙과의 무역은 외국인에 의해 이뤄졌다. 스페인의 지배층은 아메리카 경영으로 생긴 國富를 주로 전쟁과 건축에 썼다. 펠리페 2세가 지은 궁전 에스코리알은 마드리드에서 차로 한 시간 거리에 있는데 화강암으로 만든 ‘여덟 번째의 불가사의’라고 불린다. 스페인 사람들은 아메리카 대륙에서 들여온 銀(은)을 돌로 바꿨다는 평을 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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趙甲濟 |
스페인 紀行 ② 유태인
축출의 부작용
스페인의 17세기는 건축과 예술의 세기였다. 국가 소득의 약 5%를 매년 건축(교회, 기념물), 그림, 조각 등에 썼다고 한다. 요사이 보통나라의 국방비 비중보다 더 많은 돈이 문화, 예술에 투자됐다. 이렇게 생긴 문화유산들이 지금 스페인을 세계 1등가는 관광 大國으로 만들고 있다. 17세기 스페인의 地主, 귀족, 교회는 국가 생산물의 약 10%를 차지하여 부유한 생활을 누렸으나 농민들과 평민들은 그러지 못했다. 이슬람 세력을 추방하고 스페인을 수복한 기독교세력이 잘못한 게 있었다. 유태인과 이슬람 교도를 박해한 것이다. 이 두 세력은 유럽 사람들보다 개화됐고 돈과 기술이 있었다. 스페인은 종교 재판소를 만들어 개종하지 않는 유태인과 이슬람 사람들을 추방했다. 약 100만 명의 알짜배기 인력, 즉 당시의 중산층들이 외국으로 빠져나간 뒤 스페인은 지배층과 피지배층이 착취와 반발의 관계로 대립하게 되었다. 여기에 정치 불안과 內戰(내전)의 씨앗이 뿌려졌다. 스페인 지배층은 귀족층, 군 장교, 교회로 구성되었는데 이들은 상공업보다는 종교, 문화에 탐닉했고, 농민, 평민층은 열심히 일할 동기를 찾을 수 없었다. 16세기에 벌어놓은 국부를 까먹으면서 스페인은 정변, 전쟁, 내란의 소용돌이로 빨려 들어갔고, 그 클라이맥스가 1936년~1939년의 스페인 내전이었다. 1701년 합스부르크 王家의 카를로스 3세가 스페인 왕위를 프랑스 계통의 부르봉 王家 펠리페 5세에게 넘겨주자 유럽의 열강들이 개입하여 11년간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을 벌였다. 프랑스 대혁명 직후에는 스페인이 나폴레옹의 프랑스 편이 되어 두 나라 연합함대가 영국을 치려다가 트라팔가 해전에서 패배했다. 이로써 300년에 걸친 스페인의 해양강국 시대는 막을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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