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저녁 시외삼촌의 부음을 들었다. 남편의 큰형님, 나의 큰아주버님이 전화로 알려 오셨다. 오랫동안 앓아 오신 데다 몇 년 전 간병과
생활을 도맡아 오던 착하고 건강한 아내를 갑자기 잃고 어렵게 살아가시던 분이라 남편 형제들은 잘 돌아가셨다며 담담히 받아들이는 눈치였다.
나로 말하면 결혼 이후 몇 십 년 동안, 그것도 신혼 초에 딱 두 번밖에 뵌 적이 없는 분이기 때문인지 그야말로 별 감회를 느낄 수
없었다. 다만 그 분의 파란만장한 일대기에 대해 평소 잘 알고 있었기에 소식을 듣자마자 잠깐 동안 인간으로서의 연민이 일었을 뿐이었다.
남편은 문상을 가면서 웬일인지 내게 함께 가자는 말을 하지 않았다. 날씨도 푹푹 찌는 데다 원고 마감에 쫓겨 동동대는 모습이 안돼 보였던
모양이다. 나 역시 굳이 따라나설 마음이 생기지 않아 그냥 아무 소리 하지 않았다. 그런데 혼자 컴퓨터 앞에 앉아 있으려니 문득 친척이란
과연 무엇일까라는 새삼스런 의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불과 몇 년 전만 하더라도, 다시 말해서 시어머니나 큰동서가 살아 계실 때만
하더라도 조카며느리인 내가 빈소에 가지 않는다는 일은 상상조차 못했겠지. 시외삼촌이면 촌수로 따져도 엄청 가까우려니와 빈소도 바로 경기도잖아.
고작 네 시간 정도면 왔다 갔다 할 수 있는 거리인데 그걸 마다하다니. 그러면서도 자신이 싸가지 없는 여자라는 생각을 하지 않는 걸 보면 정말
싸가지가 바가지인가. 예전 같으면 무조건 따라야 했을 친척 간의 의례가 이렇듯 변한 것은 세상 탓, 또는 세월 탓이기도 하지만 반드시 그런
것만은 아니다. 사람 탓도 크다. 나의 큰동서는 나보다 불과 여덟 살 연상이었을 뿐이지만 그럴 수 없이 친척들을 꼼꼼히 챙기곤 했다. 시어머니를
모시고 살았으니까 그럴 수밖에 없잖느냐고 넘겨짚지 말기를 바란다. 큰동서 스스로가 친척관계를 매우 소중하게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인간은 뿌리를
잊으면 짐승과 다름없다는 게 그 분의 지론이었다. 따라서 한 집안이 잘 되려면 무엇보다 좋은 여자를 들여야 한다고 늘 강조하곤 했다. 그에
비해 나는 집안 의식이 희박하다 못해 아예 없을 정도다. 물론 자주 만나는 친척에게는 살갑게 대하지만 그건 친척이어서라기보다는 자주 만나다 보니
정이 들었기 때문이라고 하는 게 맞다. 난 워낙 사람을 좋아해서 웬만한 정도의 구제불가능한 인간과도 잘 사귀는 편이다. 대신 평소에 전혀
왕래가 없는, 얼굴도 모르는 친척들에게는 연락 오는 경조사 이외에는 친밀감은커녕 의무감도 잘 느끼지 않는다. 일부러 내 쪽에서 관심과 시간을
내어 관계 맺기를 시도한 적은 거의 없다. 아들들이 결혼할 때도 아들이 평생파트너를 만난 걸 기뻐했지 무슨 집안에 며느리를
맞아들인다는 따위의 생각은 애초부터 없었다. 며느리를 둘씩이나 맞으니 기분이 어떠냐며 묻는 친구에게 이렇게 대답하니까 친구는 대뜸 ‘그래,
잘났다 잘났어’라며 빈정댔는데 솔직히 난 그게 왜 빈정거리가 되는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 아무튼 내가
이렇게 집안의식 내지는 친척의식이 약한 건 세상 탓이 아니라 순전히 내 성향 탓이라 해도 변명할 길이 없다. 그리고 이런 성향은 상당 부분
이북에서 내려와 가까운 친척이 없어도 씩씩하고 명랑하게 살아가셨던 나의 부모로부터 유전된 것이다. 이 나이에도 부모 탓을 하느냐고? 탓이 아니라
살아갈수록 유전자의 힘이 위대하다는 걸 인정하지 않을 수 없으니 어쩌랴. 그런 성향은 나의 오빠도 똑같다. 한번은 내가 이제
부모님도 돌아가셨으니 더 늦기 전에 우리가 나서서 이북에 살아 있을 수십 명에 달할 사촌들과 연락할 방법을 찾아보면 어떨까라고 제안한 적이
있었다. 오빠는 단칼에 잘랐다. 여기 있는 우리 여섯 남매들끼리나 잘 살아 봐! 에구머니, 켕기는 구석을 그렇게 콕 찌르다니. 지금 우리
아이들은 친가 쪽, 외가 쪽 사촌들과 아주 사이좋게 지내고 있다. 물론 오랫동안 멀리 떨어져 사는 사촌들은 예외지만. 하지만 그 다음 대는 또
달라질 것이다. ‘한 구들에 팔촌’이라는 말이 죽은 지 오래인 것처럼 ‘우리 사촌’이란 말도 언젠가는 없어질지 모른다. 친척은 이렇게
사라져가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