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차 6자회담은 '북핵문제의 타결'이 결코 아니었다. 그보다는 "북핵문제를 타결해야 한다는 기본적 원칙에 합의했다"라는 표현이
더 적절할 것이다. 굳이 공동선언의 골자를 살펴보자면 '북한은 핵무기와 핵관련 프로그램을 포기하고 NPT·IAEA에 복귀하며, 경수로 문제에
대해서는 '적절한 시기에 제공문제를 논의키로' 한 것으로 요약할 수 있다.
그것도 매우 취약한 '정치적 합의'였다. 더욱 당혹스러운 것은 북한이 북핵 4차6자회담 타결 공동선언문을 낸 이튿날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선(先) 경수로 제공'을 주장하고 나선 점이다. 핵무기 보유 선언에 대한 제재는커녕 그들이 줄기차게 주장해온 '미국의 불가침
선언'과 '미북(美北) 평화협정' 그리고 '미북관계 정상화' 등에서 실속 있는 진전을 이끌어내고도 북한은 공동선언의 잉크가 마르기도 전에 또
다시 오리발을 내밀고 있다.
공산주의자들의 외교협상은 이처럼 지겨울 정도로 상투적이고 집요하다. 그들은 어떤 경우이든 당초 주장을 바꾸는 법이 없다.
상대방에 대한 '철저한 기만' 역시 그들의 전법(戰法)이다. 불리할 때는 공동선언문에 사인하지만, 그런 경우 역시 합의 이전에 집념을 갖고
반드시 모호한 해석이 가능한 추상적인 용어를 집어넣는다.
하지만 정작 이행단계에 들어가려 하면 그 용어에 대해 정반대의 해석을 내놓고 재협상을 요구하거나 시간 끌기에 들어간다. 그리고
이행작업이 지지부진하기라도 하면 그 책임을 상대방에게 덮어씌운다. 그리고 다시 긴장을 고조시키며 회담을 결렬시킨다.
그러다 형세가 불리해지면 마지못해 또 다시 협상에 응한다. 하지만 그 결과는 하나도 믿을 게 없다. 이번 4차6자회담
결과가 이를 잘 말해준다. 북한의 김일성·김정일뿐만 아니라, 중국의 모택동이나 고르바초프 이전의 소련 지도자들이 모두 그러했다.
북한의 '선(先) 경수로 제공' 주장은 분명 북핵문제를 '타결'로 볼 수 없는 '새로운 불씨'의 시작이다. 6자회담 공동선언을
'훌륭한 진전'이라고 평가했던 미국 행정부도 북한이 제기한 돌출 변수에 애써 표정을 가꾸며 인내하고있는 모습이다. 문제는 미국이 '언제까지
인내할 수 있을 것인가'이다.
매사가 늘 그렇듯이, 북핵 해법(解法)에는 강온(强穩) 양론이 병존한다. 부시 행정부 내에서도 예외가 아니다. 콘돌리자
라이스의 국무부는 6자회담 진전과정에서 북한에 '유연성'을 발휘할 수 있다는 입장을 보였으나, 워싱턴의 매파(네오콘)들이 그들의 목소리를
거두어들인 것이 아니었다. 북한을 회담장으로 불러내기 위해 일시적으로 숨을 죽이고 있었을 뿐이다.
하지만 북한이 이같은 생떼를 쓰면서도 매파들이 계속 침묵할 것으로 기대한다면 오산이다. 오는 11월 중순으로 예정되어있는
5차회담 또는 그 이후 한 두 차례의 추가접촉에서도 이렇다할 결실을 거두지 못할 경우 배턴(baton)은 워싱턴의 매파에게로 넘어갈 것이고,
그들은 'Plan-B' 카드를 들고나올 것이다.
미국의 북핵문제 해법의 두 가지 전개유형인 '점진적 해결형'(Plan-A)과 '긴장고조형'(Plan-B) 가운데 어느 것이
작동될 것인가는 전적으로 북한의 대응 태도에 달려있다고 말할 수 있다. 체니 부통령과 럼스펠드 국방장관 등 네오콘이 주축이 되어 작성한
'Plan-B'는 북한의 외화 수입원을 차단하고 군사적·경제적 봉쇄와 인권 압박 등을 강화하여 북한의 굴복과 붕괴를 유도하는 것이 주된
내용이다.
현 상황을 '돌파구 마련을 위한 문턱을 갓 넘어선 플랜A의 단계'로 표현한다면 향후 2∼3차례의 추가회동(會同)에서도 북핵
포기의 큰 틀에 대한 기본방향이 잡히지 않을 경우 미국의 북핵 로드맵은 자연스럽게 'Plan B'카드로 넘어갈 것이 자명하다.
부시에게는 '북핵에 매달려있어야 할 시간이 충분치가 않다. 집권1기 4년에 이어 집권2기까지 8년간 북핵문제에 아무런 진전 없이
북한에 우롱 당하는 불명예를 자초할 리 만무하다.
그것은 '북핵 대응'에서 일단 이니셔티브를 쥐고있는 콘돌리자 라이스의 'Plan-A'가 속도를 내지 못하고 주춤거릴 경우
언제라도 부시 행정부 '집행 1기' 대외정책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해온 네오콘들에게 'Plan-B'를 동원할 수 있는 명분이 주어질 수 있을
것임을 의미한다.
북핵문제는 미국이 핵 폐기 준비기간을 몇 개월 더 늘리고, 고농축우라늄(HEU) 문제를 일단 뒤로 미루며, 대북 중유(重油)
제공에 다시 참여한다고 해서 풀릴 일이 아니다.
북한 역시 '유연한 자세'를 앞세워온 라이스가 북핵 협상에서 기대했던 결실을 거두지 못할 경우 네오콘의 재등장에 당면하게 될
것임을 자각해야 할 것이다. 네오콘 세력은 북한을 회의석상에 불러내는 과정을 지켜보며 일시 침묵했을 뿐, 그들의 입지(立地)가 좁아진 것이 결코
아니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미국의 전략적 결단이다. 미국은 본질적인 문제에서 '접점(接點) 만들기'(합의 도출)에 실패할
경우 북핵문제는 언제라도 새로운 국면(局面)으로 되돌려 질 것이다. (konas)
정 준(코나스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