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암 박종홍(1903~76)은 한국 철학계 1세대의 대부였다. 서양 사상에 개방적이면서도 주체적으로
학문하고자 했던 그의 열정은 한국 사상사 연구에 대한 선구적 업적으로 이어졌다. 일생을 학문에 바친 경건에 가까운 그의 삶의 방식과 독실한
인품을 수많은 제자가 존경했다. 이런 열암이 박정희 군사독재 시대의 이념지표였던 국민교육헌장을 기초하고 70년에 대통령 교육문화특보 자리를
받아들였을 때 후학들은 경악했다. 열암은 박정희의 지도력을 찬양하고 유신을 긍정함으로써, 히틀러를 게르만 중흥의 상징으로 간주해 나치 정권에
부역한 독일 사상가 하이데거와 비교되곤 한다.
불구덩이 같은 권력에 접근하는 이유가 지식인이라고 해서 보통사람과 크게 다르지는 않을 것이다. 사람들은 누구나 권력 의지를 갖기 때문이다.
타인들을 제어할 수 있고 명예와 특권을 동반하며 공공정책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권력의 유혹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열암은 출세나 치부, 명예를 위해 권력에 투신하지는 않았다. 그의 경우는 이론과 실천을 결합해 국가 대계에 봉사하려 했다는 점에서 유교적
지식인의 한 실패한 모델로 간주될 수 있다.
정치적 판단 자체는 치명적 오류였지만 자신의 명예보다 국가 공동체의 비전을 앞세운 겸허하고 온후한 선비였던 박종홍 같은 경우는 매우
드물었다. 교수나 언론인 출신의 수많은 지식인이 권력 획득을 위해 온몸 바쳐 뛰고, 권력도 지식인을 일회용 반창고로 사용해온 풍토가 훨씬 많았기
때문이다. 곡학아세하여 개인의 영달을 노리는 행태가 압도적이었던 것이다.
권력에 자진 흡수되기 전에는 똑똑하고 바른말 하던 지식인들이 사회의 모든 것을 빨아들이는 '소용돌이의 정치' 속에서 형편없이 망가지는 것을
우리는 수도 없이 보아 왔다. 여기에는 지식 자체가 정치 권력으로 가는 첩경이고 관직을 한 자리 해야 알아주는 우리 사회의 유교 정치적 전통도
한몫했다.
그러나 지식인의 권력 참여에 대해 도덕주의적이고 명분론적인 입장에서 냉소하거나 홀로 고상한 척하는 것은 현실 이해에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 분화된 현대사회에서 지식인이 과거처럼 상아탑 속에 고립돼 특별한 대접을 받아야 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자신의 권력 의지를 달성하기
위해 지식인으로서의 성가를 이용하는 것을 변형된 상거래 행위로 봐줄 여지가 전혀 없는 것도 아니다. 사리사욕적 권력 획득을 위해 자신의 전문성을
기꺼이 매매하는 해바라기 지식인의 존재나 그에 대한 비판은 당연하지만 그만큼 진부한 것이다.
지식인과 권력의 관계에서 새롭게 조명돼야 하는 현상은 국가 정책이나 공적 사안에 영향을 미친다는 의미에서의 권력 의지에 불타는 지사적 참여
지식인의 경우다. 이들은 강력한 전문가적 자부심과 도덕적 우월감을 가지고서 한갓된 지식 상인임을 단호히 거부한다. 이들은 새로운 역사에 대한
선지자적 비전과 열정을 갖추고 있으며 자신의 개인적인 삶에 대해서도 자신만만하다. 자신이 아이디어를 제공한 정책에 파당적 책략이 개입해 있지
않으냐라는 질문을 받을 때 "나는 그렇게 살지 않았다"고 이들이 항변하는 이유는 이 때문이다.
이런 지식인의 치명적 문제는 극도로 자기중심적이라는 것이다. 원래 지식인은 이론으로 세계를 재단하면서 자기 잘난 맛에 사는 사람이
대부분이다. 그러나 지사적 권력 참여 지식인들의 경우 그 증상이 너무 심해 자신을 세계의 중심으로 보는 극단적 권력 중독 현상을 드러내기도
한다. 고언을 참지 못하며 비판을 악의와 음모의 소산으로 보는 것이다.
우리 사회의 민주화가 진행되면서 속속 권력에 합류한 지사적 참여 지식인들이 이런 행태를 보인다면 이는 성찰과 비판이라는 지식인의 존재
이유를 거역하고 있다는 점에서 자기 배반적이다. 원래 비판과 성찰을 싫어하는 권력과, 권력 참여 지식인들의 권력 중독 현상이 서로 상승작용을
일으켜 국가 대계를 크게 그르칠 수 있다는 점에서 이는 중대한 공적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예리한 정치 현실 진단으로 성가를 날리던 정치학
교수에서 지사적 권력 참여 지식인으로 변신하더니 좌충우돌하는 청와대 홍보수석의 행보를 보면서 드는 단상이다.
윤평중 한신대 교수사회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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