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 글은 순수 민간단체인 '한미우호협회'의 기관지인 '영원한 친구들'의 최근호에 게재되었던 것입니다.
세계사 속에서 하나의 국가가 건국 발전 멸망하는 과정을 양차대전과 세계전쟁사 속에서 살펴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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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 위기와 외교관의 역할
정소성(단국대학교 명예교수, 소설가)
국가의 존재 형태는 전쟁이다. 현재 전쟁을 치르고 있지 않다고 하더라도 언제나 전쟁의 가능성 속에 있는 것이 국가위상다. 그 이유
는 국가를 형성하는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 이 말은 인간은 정치적 존재라는 사실이다. 정치적이라 함은 곧바로 인간은 이합집산을
통해 더 강력한 새로운 집단을 형성한다는 뜻이다. 이 집단들은 평화롭게 사는 것이 나이라, 또 다른 집단을 향해 자체적으로 힘의
변화를 꾀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전쟁이라함은 굳이 총칼은 들고 싸우는 것만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경제전쟁, 문화전쟁도 포함된다. 어느 것이든 상대의 존재
를 없애지 않으면 자기의 존재가 없어지는 전쟁적인 속성을 가지고 있다. 평화롭게 산다는 것은, 아니면 다른 표현으로 평화롭게 공존
한다는 것은 사실상 어렵다. 이것이 인간 삶의 본질이다.
요즈음 대한민국의 전쟁 가능성을 말하는 학자들의 부쩍 늘어난 것같다.
이들의 주장은 다양하지만, 큰 줄거리는 힘의 균형이 무너지고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즉 상대인 북한의 경제력이 절대적으로 열세인
것이 오히려 전쟁을 촉발시킬 수 있는 요인으로 작용한다는 것이다. 위기감을 느끼는 북이 어려운 경제적인 여건속에서도 적극적으로
개발한 우세한 핵무기를 비롯한 각종 무기의 힘을 믿고 전쟁을 촉발할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다는 주장이다.
전쟁의 살상력과 파괴력의 담당자는 군사력이다. 즉 전쟁의 담당자이다.
그러나 전쟁 촉발 여건의 조성과 조정을 담당하는 자는 외교관이다. 즉 전쟁에서 이기고 지는 것은 군인의 몫이지만, 그 전쟁의 발발
과 진행을 담당하는 자는 외교관이다.
꼭 이렇게 구분할 필요가 없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역사 속에서 인간이 수없이 치뤘던 전쟁의 양태를 보면 얼추 이런 말을 할 수 있다
는 생각이다.
인류가 치른 가장 처참한 1차대전을 두고 생각해보면 이런 생각을 하게 된다.
프랑스는 일차대전의 가장 직접적인 당사국이었다. 상대는 물론 독일이다.
일차대전의 뿌리는 독불전쟁(1871)과 프랑크푸르트 조약이다.
독일연방의 맹주인 프로이센의 실권자 비스마르크에게 철저하게 유린당한 나폴레옹3세 치하의 프랑스는 숙원이던 알사스 로렌지방
을 빼앗기고 프로이센 초대황제 빌헤름1세의 대관식을 베르사이유 궁전에서 치르는 등 참담한 패전국의 서러움을 당했다. 제2제정이
라고 불리던 나폴레옹3세가 무너지고 티에르(THIER)의 제 3공화국이 들어서서 적극적으로 국가재건에 나섰다. 티에르의 선정으로
막대한 전쟁보상금을 조기 상환하는 등 국가재건의 기운이 돌았으나, 전 프랑스국민의 반독정서가 너무나 철저하여 독일과의 화해가
어려웠다. 그래서 결국 파리시민들이 스스로 봉기하여 파리코뮌(파리시민연합으로 번역)을 만들어 대독전쟁을 치르고자 했다. 베르
사이유로 물러나 있던 티에르 정권은 파리의 자국 프랑스국민 2만명을 죽이는 피의 자국민 살육전을 치르고서야 진정을 찾을 수 있었
다.
독불전쟁 후와 일차대전 사이의 유럽과 세계정세는 숨가쁘게 돌아갔다. 그 가장 큰 외교적인 흐름은, 프랑크푸르트 체제를 영구화함
으로서 프랑스의 숨통을 아주 끊어놓으려는 비스마르크의 외교전과 이것을 벗어나서 독일에게 설육전을 전개하려는 프랑스의 외교전
이 치열하게 전개된 시대였다.
이 시대에 프랑스의 영광을 위해 활약한 괄목할만한 업적을 낸 프랑스 외교관을 만나게 된다. 이사람의 노력으로 프랑스가 전적으로
독일에대한 설욕전을 폈다고 할 수 없지만, 프랑스는 승전국의 선두주자로서 알사스 로렌지방을 찾아오고 독일을 재기불능의 상태로
몰아넣을 수 있었다. 일차대전의 비참한 결과를 극복할 수 있는 길은 오직 전쟁뿐이라는 자각을 국민들에게 불어넣어 설욕전을 편
자가 히틀러이고 제2차대전이다.
프랑스와 독일의 앙숙관계는 세계사에 유래가 드문 것으로 너무나도 처절한 전쟁으로 아로새겨졌다. 이 앙숙은 2차대전까지 끌고
가다가 드디어 아데나워가 행한 콜롱베에 위치한 드골의 주택방문으로 풀리기 시작했다. 드골과 아테나워는 실로 백번을 만나고서야
이 질긴 앙숙관계를 풀었다고 한다.
프랑스의 경우, 처절한 앙숙관계는 독일하고만 그런 것이 아니다. 영국과의 관계도 마찬가지다. 영국과 프랑스의 앙숙관계는 주로
고대사회와 중세사회에서 야기되었다. 고대사회에서는 영국의 집권자들이 프랑스 귀족출신들이 많았고, 이들은 영국의 왕통을 차지
했으나 프랑스에 자기의 영토가 남아 있어서 그 땅을 영국에 병합하려 했다. 노르만디 공작이나 부르고뉴공작같은 사람들이 그들이
다. 그런데가가 혼맥이 얽혀있어서 왕위계승에 언제나 문제가 생겼다.
십자군 원정에 나선 프랑스의 루이 7세와 영국의 사자왕 헨리3세는 원정 중에서도 서로 싸웠다. 왕위계승문제로 야기된 백년 전쟁의
히로인 쟌타크를 사로잡은 군대는 영국군이 아니라, 영국계 프랑스군 부르고뉴군이었다. 쟌다크를 사로잡아 영국군에 넘긴 것이다.
두 나라는 근대와 현대에 와서는 주로 대독관계에서 공동전선을 폄으로서 앙숙관계가 풀리는 기미가 있었다. 독일을 혼자서 담당하기
에는 힘이 모자랐기 때문이었다.
도저히 억제할 수 없는 저력으로 프랑스의 숨통을 죄는 바스마르크에게 저항하고자 한 사람이 프랑스의 위대한 외교관 델카세(theop
hile delcasse)였다. 델카세는 7년 동안 외교부장관으로 재직하면서 줄곧 독일과의 대결을 예상하고 영국과의 화해를 추진했다.
그러나 두 나라의 앙숙관계가 워낙 강고하여 영국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일 수가 없었다. 근대로 들어오면서 두 나라는 치열한 식민지
전쟁으로 감정이 상할대로 상해 있었다.
인도와 홍콩지배로 영국에게는 절대적으로 수에즈운하가 필요했다.
그러나 인도네시아 3국의 경영으로 프랑스에게도 절대적으로 수에즈운하가 필요했다.
게다가 영국의 아프리카 종단정책과 프랑스의 아프리카 횡단정책은 충돌이 불가피했다. 영국은 이집트 수단 탄자니아로 뻗어가고
있었고, 프랑스는 이집트 나이제리아 사하라 알제리 모로코로 뻗어가고 있었다. 이 시기에 영국과 프랑스의 군대가 이집트령 수단의
파쇼다에서 조우한 것이다. 일촉즉발의 위기에 처했다. 그러나 델카세는 프랑스군에게 백기를 들라고 명령했다. 그의 머리에는 독일
이 있었다. 별별 짓을 다해서 영국과의 구원을 풀고 자기 편으로 끌여들여야만 했다.이 시점에서 외교관 델카세의 천재성의 발휘되
었다. 그의 머리에는 독일의 흉계가 가장 큰 고뇌였다. 외무부장관 델카세는 1903년 드디어 영국왕 에드워드7세를 파리로 데려왔고,
프랑스대통령 루비에의 답방을 성사시켰다. 영국을 끌어들이지 않으면 제2의 독불전쟁이 일어나고 더큰 수모를 당한다는 사실을
그는 인지하고 있었다. 제2의 파리코민을 막아야만 했다.
게다가 마침 독일의 대대적인 해군력증강이 감지되어 영국은 결정적으로 숙적 프랑스를 옭아메는 비스마르크체제에서 이탈하여
프랑스편으로 붙은 것이다.
다음은 비스마르크가 가장 공을 들여 만들어놓은 독러동맹이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러시아를 프랑스편으로 끌어와야만 했다. 여기
에서 두 가지 틈바구니를 델카세는 간파했다. 당시 독일과 민족적으로 정치적으로 가까웠던 오스트리아.항가리 제국이 러시아와 틀어
진 것이다. 그것은 당시 기우는 강국이던 오스만터키와의 전쟁에서 승리한 러시아와 발칸반도 문제로 영향력확대를 꾀하던 오스트리
아.항기리 왕국과 러시아가 틀어졌는데 독일이 오스트리아.항가리 편을 들어준 것이다. 다른 사안은 독일로부터 개발자금을 차관으로
쓰고 있던 러시아가 기한이 되어 연장을 요청했으나 독일이 거절한 것이다. 이 빈틈을 델카세는 파고 들었다., 더 많은 차관을 더 유리
한 조건으로 러시아에 제공한 것이다. 삼국동맹의 주축국의 하나이던 러시아를 비밀협상으로 친불적인 삼국협상국으로 빼돌린 것이
다.
다음은 역시 삼국동맹국이던 이탈리아를 빼오는 문제인데,여기에도 델카세의 탁월한 외교적인 수완이 발휘되었다. 그는 비스마르크
체제를 무너뜨려야만 프랑스가 살 수 있다고 믿고 있었다. 델카세는 이탈리아가 거절할 수 없는 미끼를 던졌다. 그것은 이탈리아가
호시탐탐히 노리고 있던 멸망한 오스만제국령 북아프리아의 트리폴리타니아의 이탈리아 지배권을 인정했다. 이탈리아도 프랑스의
모로코 지배를 약속했다. 전쟁이 발발했을 때, 이탈리아는 비밀협상대로 중립을 지켰고, 결국 프랑스 편에서 독일에 항전했다.
프랑스에서는 일차대전을 프왱카레 전쟁이라고 부르는데, 전쟁중 프랑스의 대통령이었기 때문이다. 프왱카레는 델카세가 남긴 외교
적 체제를 가장 잘 이용한 사람이다. 일차대전은 결과적으로 미국의 참전으로 프랑스 영국 이탈리아등 협상국의 승리로 끝이 났다.
대전은 마른전투, 베르당전투, 솜전투, 두오몽 전투 등 숱한 대접전을 통해 한번 대결이 있을 때마다 양측에서 백만명 이상의 젊은이
들의 도살당하는 무참한 전쟁이었다. 전쟁 초기의 프랑스군 총사령관 조프르장군을 비롯해 모누리장군 갈리에니장군 등 숱한 명장들
이 지휘했으나 결국 프랑스군에게 승리를 안겨준 장군은 페텡원수였다. 페텡은 이차대전에서 패배한 후 독일에 항복한 조건으로 비시
자유 프랑스정권(전국토의 5분의 2) 세워 프랑스의 명맥을 유지한 사람으로 이름을 남겼다. 드골에게 쫓겨 비참하게 죽었다.
일차대전에서 승리한 프랑스가 이차대전에서 무참하게 패배한 이유는, 프랑스 내 좌파정권의 확립과 전쟁배상금을 무한정 미루는
독일에의 응징을 제대로 하지 않고 엉거주춤한 상태에서 방관했다는 점과 세계주도권을 미국에게 빼앗겨 독일응징에서 미온적인
미국 영국세에 밀렸기 때문이다. 군사력이 완전히 회복되지 않은 히틀러는 프랑스의 반응을 떠보려 라인강 유역으로 진군했으나
국내 반전여론에 밀린 프랑스는 국제연명의 입을 빌려 비난성명을 발표하는 것으로 끝이고 말았다. 상황을 파악한 히틀러는 그때
부터 대 프랑스증오심을 부추키며 마음놓고 군비경쟁에 나선 것이다. 민주적인 질서를 가지고 있는 나라는 전쟁을 통해 죽자사자식
으로 덤비는 나라를 당하지 못한다는 교훈을 볼 수 있다.
전쟁은 군인이 하지만, 전쟁의 조종은 외교관이 한다는 사실을 델카세의 경우를 통해 음미할 수 있었다. 델카세의 탁월한 외교감각은
조국 프랑스를 비스마르크체제에 포위된 프랑스를 고립에서 구하고 결국 일차대전을 승리로 이끄는 원인이 되었다. 이차대전 직전에
는 일차대전 직전의 델카세 정도의 특출한 외교관이 프랑스에 없었다. 두각을 나타내던 달라디에 수상은 뮨헨협상을 체결하여 영국총
리 체임벌린, 독일총리 히틀러, 이탈리아수상 무솔리니 함께 뮨헨조약을 체결하고 타협정책으로 일관했다. 그러나 달라디에는 위대한
애국자로 추앙받았다. 전쟁발발을 피했다는 것이다. 이차대전의 싹은 이런 분위기 속에서 맹아가 텄다. 브리앙내각은 가장 인정받는
집권기구지만 열한번의 집권 기회를 가졌으면서도 전체적인 국면을 세계전쟁외교적인 차원에서 읽고 대처하는 인재가 없었다.
프랑스는 유럽사와 세계사의 중심적인 역할을 하는 국가로 존재해왔다. 프랑스의 팽창을 저지하기 위해 영국 독일 오스트리아 러시아
를 중심으로 대불저지연맹이 만들어진 것만도 7차례였으나 프랑스는 굳건히 그것을 극복하고 존재했다. 그러나 이차대전이 끝나고
카이로회담이나 얄타회담 그리고 포츠담회담에 초대받지 못했다. 세계 일류국가의 대열에서 탈락한 것이다. 끈질기게 전쟁을 치러서
결국 승리를 쟁취한 영국에 비해 프랑스의 페탱은 국토의 5분의 3을 점령지로 내주고 겨우 5분의 2로 비시자유지구를 유지했기 때문
이다. 패전국이 어찌 승전국의 회담에 참여할 수 있나.
그러나 프랑스 군은 전쟁에서 졌지만 프랑스외교는 전쟁에서 이기는 사건이 발생했다. 국제연합에 5개 상임이사국으로 선정된 것이
다. 프랑스어는 세계 외교어이다. 영어로 조약문을 쓰더라도 꼭 불어문장으로 번역하여 덧붙이게 되어 있다. 델카세의 조국 프랑스를
위해 구사한 화려한 외교공세를 이 시각에 가만히 생각해 본다. 프랑스는 곧이어 핵무기 개발에 성공하여 세계 강대국의 반열에 다시
올랐다.
대한민국의 전쟁 위기론을 말로만 할 것이 아니라, 집권자와 온 국민은 위기론에 대처할 준비를 하여야 한다. 왜 멀리 있는 중국에
손을 뻗어 일종의 타협정책을 시도하나. 문화적으로 가까움을 느낄 수 있지만 중국은 정치적으로 멀리 있는 나라이다. 좀더 강력한
대미외교와 군비가 요구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미국은 지구상에서 상대가 없는 유일 초강국입니다.g2라 하여 중국을 미국에 견주려는 견해가 있지만, 군사력에서는 어림없습니다.
일 예로 해군력의 상징인 항공 모함의 경우, 중국이 구 러시아 것을 리모델링한 라이닝호는 3만 5천톤급이며, 최근 자체개발한 산둥
호는 5만톤급입니다. 두 개 다 핵추진이 아닙니다. 그러나 미국의 경우는 10만톤 이상의 핵 항 모가 10 척이 넘습니다. 인해전술을
앞세운 육전에 중국이 강하다고 하지만, 오늘날의 전쟁은 전선이 없으며, 군인의 전진이 승패를 좌우하던 시절이 아닙니다. 무기의
발달로 적의 군인을 살상함으로서 전진하던 전쟁의 유형은 무너졌습니다. 핵과 미사일로 적국의 국민들을 한두 차례의 공격으로
수십만 수백만을 살상함으로써 항복을 받아내는 양상으로 바뀐 것입니다.
미군의 한반도 주둔은 북의 남침야욕을 저해하는 가장 확실한 이유입니다. 역사속에서 국 가는 전쟁을 통해 건국되고 멸망했습니다.
북의 핵을 머리맡에 두고 살고 있는 우리, 정 말 불안합니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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