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와 전두환의 화해가 황교안에 어떤 영향을 끼칠 것인가
무궁화장 수여식 사양 후 대권 포기한 반기문
박근혜의 동원력과 황교안의 대운이 만나면…
전두환의 배려, 박근혜의 보복, 전두환의 응전
전두환-노태우와 박근혜-황교안의 차이점은?
이정훈 기자 hoon@donga.com
지난 1월 20일 반기문 전 유엔 사무총장이 국민훈장 중에서는 최고(1등급)인 무궁화장을 받았다. 상훈법은 ‘정치·경제·사회·교육·학술 분야에 공을 세워 국민의 복지 향상과 국가 발전에 이바지한 공적이 뚜렷한 자에게 이 훈장을 수여할 수 있다’고 돼 있다. 국무회의는 그를 그러한 인물로 심의했던 것이다.
이 훈장은 대한민국 최고 훈장인 무궁화대훈장과 종종 헷갈린다. 상훈법은 무궁화대훈장은 대통령과 우방국 원수 및 그 배우자, 대한민국의 안전과 발전에 뚜렷한 기여를 한 전직 우방국 원수와 그 배우자를 수상자로 한정하고 있다. 유엔 사무총장은 국가원수 급이지만 국가원수는 아니기에, 국무회의는 국민훈장 무궁화장 수여를 결정한 것으로 보인다.
훈장은 정장(正章), 부장(副章), 금장(襟章), 약장(略章)으로 구성된다. 핵심은 정장(正章)인데, 이를 걸어주는 띠에 대수(大綬), 중수(中綬), 소수(小綬)가 있다. 봉건시대 임금은 옥쇄를, 관리는 관인을 찍어 명령을 전파했기에 모든 관리들은 관인을 몸에 지니고 다녔다(임금만 대신 관리해주는 이가 있었다). 관리의 옷에 관인을 연결해주는 끈이 ‘인수(印綬)’다. 훈장(특히 정장)은 국가가 준 명예이니 몸에 지니고 다니라는 뜻에서 ‘인끈 수(綬)’자를 쓴 대수, 중수, 소수에 달아서 주는 것이다.
무궁화장 수여식 사양한 반기문
‘대수’는 왼쪽 어깨에서 오른쪽 허리로 돌아가는 띠이다. 대수는 앞에서 보면 웃옷 오른쪽 손주머니 아래쯤에서 매듭을 형성하는데, 그 매듭에 정장이 걸려 있다. 부장(副章)은 정장과 똑 같은데 ‘여분으로 주는 것’이라, 웃옷 오른쪽 가슴 주머니에 ‘그냥’ 단다. ‘옷깃 금(襟)’자를 쓴 금장(襟章)은 배지처럼 웃옷 왼쪽 옷깃에 붙인다. 약장은 군복 등에 붙일 수 있도록 천으로 만든 것이다. 부장, 금장, 약장에는 끈인 ‘수(綬)’가 없다.
2,3등급 훈장(정장)은 목에 걸어서 준다. 그때 정장을 매단 목걸이 띠가 ‘중수’다. 4,5 등급 훈장은 웃옷 주머니가 걸어 주는데, 걸어주는 천을 ‘소수’라고 한다. 정리하면 대한민국이 수여하는 최고의 훈장은 정장을 단 대수를 상체에 걸쳐주고, 두 번째 등급은 정장을 단 중수를 목에 걸어주고, 그 다음은 등급은 정장을 단 소수를 가슴 주머니에게 걸어주는 것이다.
이러한 수여식은 반드시 촬영된다. 받는 이에게는 영광, 대한민국에는 역사가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반 전 총장을 위한 수여식에서는 대수를 걸어주는 의식이 없었다. 때문에 촬영도 없었다. 정장을 달고 있는 대수는 부장, 금장, 약장과 함께 상자에 넣어져 인편으로 전달되고, 수여식은 반 전 총장이 황교안 국무총리 겸 대통령 권한대항(이하 대행)과 환담하는 것으로 ‘가름’했다.
말이 환담이지 반 전 총장이 국제정세를 설명하고, 황 대행은 주로 듣기만 했다. 반 전 총장은 1944년생이니 1957년생인 황 대행보다 13살 많다. 모르는 이가 봤으면 수여는 ‘노숙한’ 반 전 총장이 했고, ‘젊은’ 황 대행이 받은 것으로 비쳐졌을 수도 있었다. 반 전 총장은 여러 나라에서 대수에 달린 정장을 받아봤으니, 이 수여식을 대수로 여지지 않았을 수 있다. 그러나 박근혜 대통령이 탄핵을 받지 않아 수여했더라면, 무궁화대훈장이었더라면 과연 환담으로 ‘가름’했을까?
그리고 대권 행보를 펼치던 반 전 총장이 열흘 뒤인 2월 1일 돌연 대통령 출마 포기를 선언했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황 대행의 지지율이 치솟았다. ‘운명의 공’은 반에서 황으로 넘어온 것이다. 이런 점에서 황 대행은 ‘대운(大運)’의 사나이다. 역술가 세계에서는 황 대행의 운세가 대단하다고 평가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용장(勇將) 지장(智將) 덕장(德將)보다도 나은 이를 ‘운장(運將)’ ‘복장(福將)’이라 하는데, 황 대행은 진짜로 운장인가?
‘없다’와 ‘아니다’의 차이
황 대행은 인터뷰를 사절하고 있다. 때문에 행사에 나온 그를 붙잡고 떠보거나 측근에게 물어볼 수밖에 없는데, 대답이 한결 같다. “대통령 선거에 출마할 뜻이 없다.” “국정에 전념하고자 한다,” 주목할 것은 ‘없다’이다. 일반인들은 ‘없다(無)’를 ‘아니다(否)’와 혼용하지만, 사전을 찾아보면 하늘땅만큼의 차이가 있다. ‘없다’는 현재 출마할 뜻이 없다는 것이지, ‘출마하지 않겠다’가 아니기 때문이다.
출마 의시를 내비치는 순간 황 대행은 바로 ‘십자포화’를 받는다. 정부를 이끌고 있으니 그는 재선에 도전하는 미국 대통령과 같은 처지가 돼, 관권선거 시비에도 직면한다. ‘출마하지 않겠다’고 하고 대행 임무에만 수행한다면, 그는 공격을 받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공인인 이상 혼자 모든 것을 결정할 수 없으니, “국정수행에 전념하겠다”와 “없다”만 반복하는 딜레마에 빠져 있는 것이다.
‘국정수행 전념’은 ‘전가(傳家)의 보도(寶刀)’가 될 수 있다. 태극기와 촛불 집회가 맞서고, 조류인플루엔자에 이어 구제역이 돌고, 유엔 안보리의 강력한 대북제재에도 불구하고 북한이 미사일을 쏘는 난국을 잘 풀어간다면, 그는 어떤 경쟁자보다도 국민에게 능력을 잘 보여줄 수 있기 때문이다. 최고의 선거운동을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의 운명은 타인에 의해 바뀔 수도 있다. 탄핵이 기각돼 복귀한 박 대통령이 그의 인기를 의식해 해임한다면, 그는 한 순간에 ‘낙동강 오리알’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에 반기를 들어 출마를 선언한다면, 그는 탄핵을 기정사실로 받아들여 새누리당(현 자유한국당)에서 분당해 나간 보수신당의 대권 후보와 차이가 없어진다.
박 대통령이 복귀한 다음에도 국무총리를 계속하는 것이 꼭 낫다고 할 수도 없다. 박 대통령이 정치를 잘 해버리면 그의 존재감은 사라질 것이고, 박 대통령은 다른 이를 후보로 지명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복귀를 했음에도 국민 저항에 부딛혀 박 대통령이 실권을 잡지 못한다면, 2인자는 그는 박 대통령의 임기 종료와 함께 쓸려나가는 ‘청산 대상’이 될 수도 있다.
탄핵이 인용돼 박 대통령이 파면되어도 그는 위기에 직면한다. 박 대통령의 ‘아바타’란 인식 때문에, 박 대통령을 따라 정부를 떠나거나 대선을 관리하는 역할만 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때 출마를 선언할 수 있지만, 파면된 박 대통령 때문에 점수가 깎일 가능성이 높다. ‘빤짝’ 했다가 사라지는 ‘패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이는 황 대행이 혼자 힘으로는 대통령이 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에게 필요한 것은 여전히 ‘대운’이다.
무시할 수 없는 박근혜의 대중 동원력
그의 대운은 박 대통령에 의해 결정될 가능성이 높다. 박 대통령은 사람을 동원하는 ‘마력(魔力)’을 가진 사람이기 때문이다. 박근혜까지 11명인 역대 대통령 가운데 국민 동원력을 보여준 이는 이승만·박정희·김대중·노무현·박근혜 다섯이다. 이승만은 4·19로 하야해 하와이로 떠났건만 그의 유해가 돌아왔을 때 많은 국민들이 운집했다. 박정희 정부가 달가워하지 않았는데도 상당한 국민들은 울면서 국립현충원까지 따라 갔다.
박정희의 흡인력은 두 말할 것이 없다. 그 흡인력으로 5·16을 했고 유신을 했다. 그리고 이승만만큼이나 강한 적을 만들어 죽음을 맞았다. 그의 부인도 상당한 흡인력을 가졌기에, 그의 부부는 사후에도 추종자를 만들었다. 그 결과 딸도 대통령이 되었다. 김대중의 동원력은 박정희에 필적한다. 라이벌인 김영삼은 대중 동원력에서 그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노무현도 ‘열 덩어리’였다. 때문에 자살을 했고, 그 결과 강력한 ‘친노’를 만들어냈다.
이 네 사람과 비교할 수 있는 이가 이들 이상으로 강한 카리스마를 갖춘 전두환이다. 그러나 전씨에게는 ‘비장미(悲壯美)’가 없다. 그는 위기를 유연하게 타고 넘었지 부딛쳐 깨지지 않은 것이다. 특이한 이는 박근혜다. 그는 4인처럼 강한 비장미를 보여주지 않았는데도 ‘박사모’를 만들어냈다. 그리고 지금의 태극기 집회처럼 수세에 몰릴수록 대중을 동원해내는 마성을 갖고 있다.
그러한 박 대통령이 탄핵 기각 후 그를 차기 여권 후보로 지정한다면, 뜻밖의 사태가 일어날 수 있다. 최순실 사건으로 흐트러지긴 했지만 30%대인 박근혜 지지표와 ‘샤이’ 보수표가 몰려 순식간에 과반에 근접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모든 일은 손발이 맞아야 성사된다. 황 대행을 19대 대통령으로 만들어 퇴임 이후를 대비하려면 박 대통령은 치밀한 전략을 준비해야 한다.
다시 보는 전두환의 전략
이러한 관점에서 주목할 것이 전두환-노태우 관계이다. 전씨는 권력의지가 강한 사람이었다. 대위로 육사 교관을 하던 1961년 그는 강영훈 육사 교장(중장)의 만류를 뚫고 생도를 끌고 나와 5·16 지지 행진을 했다. 어느 나라에서도 볼 수 없는 사관생도 시위를 만들어 박정희 권력 공고화에 기여한 것이다. 그리고 4년제 육사 졸업생 가운데 ‘드센 이’를 뽑아 만든 하나회를 이끌었다.
그는 하극상(下剋上)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1979년 10·26사건이 일어나 계엄이 선포된 덕에 보안사령관을 하던 그는 합수본부장이 되었다. 그리고 저격범이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인 것을 알자 망설이지 않고 체포해, ‘김재규의 혁명’을 차단해 버렸다. 두 달 뒤에는 김 부장의 요청으로 10·26 현장 인근의 음식점에 와 있었던 정승화 계엄사령관 겸 육군총장을 체포하는 과단성을 보였다(12·12사건). 이듬해 서울의 봄과 광주민주화운동 시위에도 단호히 대처했다.
노태우씨는 전씨만큼 권력의지가 강하지 않았다. 전씨는 1931년 1월생이고 노씨는 32년 12월생이다. 연도로만 보면 한 살 차이이지만, 생일까지 따지면 2년 가까운 차이가 난다. 그래서인지 노씨는 전씨의 자리를 이어 받는 경우가 많았다. 그 마지막이 대통령 주고받기였다. 권력의지가 약한 노씨가 대통령이 된 것은 권력의지가 대권을 잡는 필수조건이 아님을 보여준다. 대운을 쥐고 있으면 권력의지가 약해도 대통령이 될 수 있다.
전-노 정권 교체기로 돌아가 보자. 1987년의 대한민국은 지금처럼 혁명적인 상황에 직면해 있었다. 전두환 대통령이 내놓은 4·13호헌(護憲)조치가 그해 1월 7일 물고문을 받다 죽은 박종철 서울대생 사건과 결합돼, “호헌철폐, 독재타도”를 외치는 엄청난 시위를 만들어낸 것이다(6월사태). 절체절명의 위기에 직면한 전 대통령은 노씨를 후보로 내세워 국민 요구는 들어주고, 야권은 분열시키는 전략으로 나갔다.
이를 위해 한 가장 큰 시도가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받아들이는 6·29선언이었다. 이 선언은 노태우 후보가 했다. 그러나 청와대에서 통치사료비서관을 했던 김성익씨 등은 하나같이 “6·29선언은 전두환 대통령 작품”이라고 증언한다. 이들은 “전 대통령이 이를 제의했을 때 노 후보는 오히려 거부했었다”고 말한다. 이에 전 대통령이 “이렇게 해야 야권이 분열돼 이길 수 있다”며 대선 자금지원을 포함한 전폭적인 지원을 약속해 노 후보를 설득해냈다.
5공 인사들의 증언에 따르면 전 대통령은 야권의 김영삼 김대중씨는 후보 단일화를 하지 못할 것으로 예상했고, 둘이 단일화를 하지 못하도록 공작할 의지를 갖고 있었다고 한다. 그때 안기부에 있었던 한 관계자의 증언이다.
“천하 3분지계를 썼다. 야권에서 2명 이상의 후보가 나오면, 한 사람만 나온 여당 후보는 당선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그런데 야권에서는 김종필씨까지 나와 1노3김이 경쟁하게 되었다. 4분지계, 꽃놀이패가 행사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래도 전 정권은 방심하지 않았다. 상도동계(김영삼 측)는 정치를 해왔으니 자금이 있었으나, 동교동계(김대중 측)는 적었다. ‘이제는 말할 수 있다’이지만 그때 동교동계가 대중을 동원하는 유세를 할 수 있도록 교묘한 방법으로 자금을 제공해준 것은 안기부였다.
유세가 본격화되자 김영삼씨의 지지율이 김대중씨를 앞서갔다. 김영삼씨는 교회 장로였다. 때문에 우리는 기독교계가 아주 싫어하는 한 종교단체로부터 김영삼씨가 돈을 받았다는 소문을 퍼뜨렸다. 그 결과 둘의 지지율이 다시 백중해져. 노태우 후보가 무난히 12대 대통령에 달성될 수 있었다.
때문에 김영삼씨는 전씨를 두고두고 미워했다. 13대 대통령이 된 다음에는 자신의 임기가 끝나기 직전 사면해주긴 했지만, 5·18 특별법을 만들어 전씨에게 사형을 선고하게 했다. 반면 김대중씨는 전두환씨가 대통령을 한 1981년 내란모의 혐의로 사형을 선고받고 해외로 쫓겨났었지만, 14대 대통령이 된 다음에는 김영삼씨처럼 전씨를 코너에 몰지 않았다.
또 하나 안기부가 펼친 정치공작이 노태우 후보를 향해 ‘군부독재 타도’ 등을 외치며 달걀 등을 던지게 하는 것이었다. 이를 막기 위해 노 후보 측은 방탄유리를 들고 다녔는데, 그러한 모습이 보수층을 결집시킬 것으로 예측했다. 보수는 모으고 야권은 분열시키면 직선제를 해도 정권교체를 막을 수 있다고 전두환 정부는 확신했다.”
5,6공 시절 정치를 한 모 인사는 ‘황 대행을 대통령으로 만들 수 있느냐’는 탄핵 여부에 관계없이 대중 동원력이 있는 박 대통령이 황 대행을 전폭적으로 지지해주느냐에 따라 결정된다고 말했다. 그는 “박 대통령의 지목은 여권 후보를 단일화하는 효과를 발휘한다. 보수신당은 박 대통령의 힘을 막아내지 못할 것이다. 보수 세력은 어떤 경우에도 좌파에는 정권을 줄 수 없다고 보고 당선 가능한 이에게 집중할 것이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이러한 의견을 낸 인사들은 박근혜와 전두환의 화해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박근혜 대통령은 5공 세력이 최태민씨를 탄압했기에 전두환씨를 매우 싫어한다. 그러나 전씨와 5공 세력은 박 대통령을 도왔으면 도왔지 방해한 적이 없다. 최순실 게이트가 터져 나온 뒤 그때 왜 최씨를 영애로부터 잘라내지 못했느냐는 이야기가 나오는 것을 보면 5공의 판단이 옳았음이 증명된다. 그런 점에서 박 대통령은 전 전 대통령과 화해하고 그의 방법을 참고할 필요가 있다.”
최태민 문제로 틀어져 버린 전두환-박근혜 관계
전씨는 중령인 1967년 수경사 30대대장, 준장인 1976년 경호실 차장보로 청와대에 근무했다. 김재규씨를 변론했던 강신욱 변호사는 한 인터뷰에서 “그때 큰 영애는 전씨를 오빠라고 불렀다.”고 증언한 바 있다. 두 사람 관계는 10·26사건 후 청와대에서 발견된 박정희 자금 전씨 측이 가져가 틀어졌다고 하는 의견이 있다. 전 전 대통령의 비서관을 지낸 민정기씨는 사실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10·26 직후 합수본부는 김계원 전 비서실장의 금고에서 비서관들이 ‘박정희 대통령의 개인 돈’이라고 주장한 9억5천만 원이 발견되자, 권숙정 비서관을 통해 박근혜씨에게 전달했다. 그러자 박씨는 ‘10·26사건의 진상을 철저히 밝혀 달라’는 부탁과 함께 수사비에 보태 쓰라며 3억5천만 원을 되보내 주었다.”
이러한 두 사람 관계는 전씨가 국보위를 만들며 권력을 장악해가다 대통령이 되면서 소원해졌다고 한다. 그러한 전씨 등은 김재규 정보부장이 그랬던 것처럼 박씨와 최태민씨를 갈라놓으려고 했다. 때문에 최씨를 인제로 보냈는데, 박씨가 반발하는 바람에 최씨가 돌아올 수 있게 해줬다. 박근혜씨의 마음을 알아차린 5공은 그리고 서먹해져 더 이상 관여하지 않았는데, 피해의식이 있는 최씨가 불만을 토로해 박씨는 전씨 등에게 적대감을 가졌다는 것이다.
5공 측 한 인사는 “그땐 박근혜씨가 대통령이 되리라고 상상도 하지 못했다. 박정희 대통령의 유족이니 잘 지내기를 바라고 더 이상 관계하지 않았다”라고 말했다. 그리고 세월이 흘러 대통령에서 물러난 전두환씨는 김영삼 정부 시절 사형을 선고받으면서 대통령연금을 비롯한 재산을 추징당했다. 그러한 전씨 부부는 계속 연희동 집에서 살았는데 2011년 연희동을 방문했던 기자는 이순자씨에게 “어떻게 생활하느냐”고 물었었다.
이씨는 “이 집은 내가 헌집을 사서 고친 다음 파는 것을 서너 번 해서 번 돈으로 산 것이라 내 명의로 돼 있어 추징을 당하지 않았다. 그리고 내가 친정아버지로부터 받은 유산(그후 검찰 조사에서 30억원으로 밝혀짐)을 넣은 즉석연금(일시금으로 넣으면 다음 달부터 사망 시까지 매월 나오는 연금)으로 살고 있다. 이 연금 역시 내 명의라 추징당하지 않았다. 이 연금은 매달 1000만원 가량 나오는데 일 하는 아주머니를 쓰고 세금을 내고 근근히 산다.”라고 대답한 바 있다.
그런데 2013년 박근혜 정부는 일명 ‘전두환 추징법’을 만들어 전씨가 미납하고 있는 추징금을 걷어야 한다며 연희동 집과 즉석연금을 압류해버렸다. 고향의 선산과 전씨 자녀들의 재산도 압류했다. 탈탈 털어버린 것이다. 그 후 검찰은 약간의 배려를 해줬다. 두 사람이 돌아가실 때까지는 그 집에 살도록 해주고, 즉석연금은 압류대상에 해제해준 것이다. 이 일로 대범한 듯 한 전씨도 배신감을 느꼈다고 한다.
때문에 최순실 게이트가 한창이던 지난 1월 2일 자택에서 신년 인사회를 한 그는 채널A의 카메라 앞에서 “여자 대통령이 나오니 참 신통치 않다”“박 대통령이 똑똑하고 잘하는데 혼자 사니까 아무리 머리가 좋아도…” “결혼도 한 번 안 해 보고, 애도 (안 낳아 봤다). 역시 그 영향이 있다. 인생 문제라든지…” “인간관계라는 것이 부부간에 살면서, 싸우면서 좋은 것이 많이 나오는 법인데, 자기 혼자서 뭘 어떡하겠는가”라고 말했다.
돌고 도는 세상
돌고 도는 것이 세상이다. 1981년 김대중씨에게 사형을 선고하게 했던 전씨가 1996년 김영삼 정부에 의해 사형을 선고받았다. 그때 전두환씨는 박근혜씨가 대통령이 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때문에 박정희 대통령에 대한 충성심에서 최태민씨를 박씨로부터 떼어내려고 했는데, 그것이 박근혜씨의 분노를 사, 박근혜씨가 대통령이 된 후 재산을 탈탈 털리는 처지를 당했다. 그리고 3년 뒤 박대통령은 최씨의 딸인 최순실씨 사건으로 탄핵을 당하게 되었다.
박근혜와 전두환 세력의 불화는 보수 세력의 분리를 보는 것 같다. 다음 대선에서 정권이 교체된다면 가장 큰 타격을 받은 것은 박 대통령이 될 수밖에 없다. 이를 피하고자 한다면 박 대통령은 탄핵 여부와 관계없이 보수세력이 인정할 수 있는 인물을 대권 후보로 내세워야 한다. 그리고 다양한 보수를 결집시켜야 한다. 이는 전두환씨가 노태우씨를 당선시킨 방법을 참고하는 것이고, 5공 세력과 화해해야 하는 문제가 된다.
그러나 큰 차이는 있다. 전두환-노태우는 생도 시절부터 수십년 간 관계를 맺어온 사이이지만 박 대통령이 밀 수 있는 후보로 주목받는 황 대행은 ‘보수’를 제외하고는 이렇다 할 교집합이 없다. 그런데 황 대행은 좋은 운수를 갖고 있는 듯 하다. 운(運)도 세상처럼 돌고 도는 존재다. 지금의 대운이 잠시 뒤에는 큰 악운으로 바뀔 수도 있다. 대운을 유지하려면 기반부터 다지는 치밀함이 필요하다.
탄핵을 만난 박 대통령과 대운을 만난 듯한 황 대행이 손을 잡으려면 박 대통령은 전두환 전 대통령 측과 얽히고설킨 인연부터 정리해야 할 지 모른다. 그것이 박 대통령과 황 대행을 비난받게 하는 요소가 될 수 있지만, 그것은 반대파의 목소리는 커지나 반대파는 늘어나지 않는 것일 수 있다. 대신 보수는 조용히 결집한다. 헌재 판결과 별도로 박 대통령도 그만의 결정을 해야 하는 시기로 몰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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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교안 그는 누구인가
‘기독교의 순종’으로 대운을 열어간 사내
황교안 대행은 황해도 연안에서 살다 6·25 때 월남해 서울 만리동에 터 잡은 집의 3남3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그는 사정이 있는지 아버지를 비롯한 집안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 그는 자신의 집안에 대해 “나는 흙수저 중 무수저”라고 말한 적이 있다. 단편적으로 확인된 것은 한 형이 돌아가셔서 5남매가 성장했고, 대학을 나온 이는 황 대행뿐이며, 3남매는 미국, 그와 막내누나(황연옥, 65)는 한국에 살고 있다는 것 정도다.
황 대행의 평생을 관류한 것은 ‘기독교의 순종’이다. 그는 서울 목동에 있는 성일교회(침례교)를 50년 이상 다니고 있다. 이 교회는 그의 큰 누나 방에서 개척교회로 시작됐다는데, 그는 야간인 수도침례신학교를 나와 이 교회 전도사를 할 정도로 열심이다. 전도사는 공직 퇴임 후 그가 갖고자 하는 새로운 일이다. 그는 지금도 새벽 2시쯤 일어나 새벽 기도를 한 후 하루를 시작한다고 한다.
형수의 중매로 만난 연세대 영문과 출신(80학번)의 부인 최지영 나사렛대 상담센터 교수(55) 또한 ‘위대한 유산’이라는 복음성가 앨범을 낸 철저한 기독교인이다. 그는 어미니(전칠례)를 끔찍이 모셨다. 1995년 아버지와 달리 교인이었던 모친이 돌아가시자 조의금을 토대로 성일교회에 ‘전칠례 장학금’을 만들어 어려운 학생들을 지원해오고 있다.
경기고 학도호국단장 지내
그는 서울 중구 만리동 꼭대기에 있는 봉래초를 나왔다. 봉래초는 1895년 고종 황제 칙령 149호인 ‘소학교령’에 따라 그해 ‘관립정동소학교’로 개교한 유서 깊은 학교다. 그러나 ‘달동네’로 이전했기에 그렇지 않았던 미동·덕수·수송 등과 달리 명문 소리를 듣지 못했다. 그는 중학교 입시가 폐지된 다음 광성중에 들어갔는데, 그때는 문학에 관심이 있었는지 3학년 때 16회 학원문학상 시 부문 ‘우수작 2석’을 받았다.
마지막으로 고교 입시가 치러진 1973년 경기고(72회)에 합격하면서 그는 더 두각을 드러냈다. 최상위권 성적자이면서 노래를 잘 해 학교 행사에서 4중창단원으로 활동하기도 했기 때문이다. 그때 고등학교에는 학생 군사조직으로 볼 수도 있는 학도호국단이 학생회를 대신했다. 리더십을 인정받은 그는 3학년 때 그는 총학생회장격인 학도호국단 연대장이 돼 교련 등 학교 행사를 주도했다.
그러나 서울 법대 입학에는 연거푸 실패해, 후기인 성균관대 법대에 수석으로 입학했다(77학번). 그리고 사시에 도전했으나 졸업할 때까지 합격하지 못했다. 그때 스트레스로 악성 두드러기인 ‘담마진’에 걸렸는데, 담마진 때문에 졸업 직전 치른 신체검사(1980)에서 면제 판정을 받았다. 그리고 운이 풀렸는지 이듬해 전 해보다 합격자를 3배로 늘인 사시(23회)에 합격하고, 법무연수원 교관이던 1994년께 담마진도 사라졌다고 한다.
그는 공안검사가 된 것을 자랑스러워했다. ‘국가보안법(박영사, 2011)’ ‘집회 시위법 해설(박영사, 2009)’ ‘국가보안법 해설(집영출판사, 1998)’ 등의 저서를 내 ‘미스터 보안법’으로 불렸다. 기독교에 대한 열정 때문에 ‘교회와 법이야기(요단출판사, 2012)’ ‘종교 활동과 분쟁의 법률지식(청림출판, 1998)’ ‘검사님 이럴 땐 어떻게 해야 되나요(만나, 1994)’ 등 도합 8권의 책을 냈다. 그러나 이념성 때문에 노무현 정부 시절엔 서울고검 검사를 두 번 하였다.
검사로서의 그의 운은 부산고검장에서 끝났다. 법무법인 태평양이 고문을 하던 그는 박근혜 대통령과 인연이 없었는데도 공안검사의 대부인 김기춘 전 비서실장 등의 천거로 박 정부의 첫 법무장관이 되는 운을 만났다. 철저한 자기 관리를 해온 탓인지 청문회에서는 군 면제와 변호사 시절 많은 수임료를 받은 것을 제외하고는 이렇다 할 흠이 드러나지 않았다. 황 장관은 혼외자식 문제가 드러난 채동욱 검찰총장 사건과 남재준 국정원장이 주도한 통진당 수사를 마무리하는 과단성을 보였다.
2015년 5월 성완종 사건으로 이완구 총리가 낙마하자 박 대통령은 이미 청문회를 통과해 검증된 그를 총리로 지명했다. 최순실 사건이 불거지기 시작한 2016년 11월 12일 박 대통령은 그를 김병준 국민대 교수로 교체하려고 했는데, 탄핵 사태로 무산되면서 그는 대통령 권한 대행이 되었다. 그리고 반기문 전 유엔 사무총장이 포기해 여권의 강력한 대권후보로 거론되기에 이르렀다.
애써 권력의지를 내세우지 않았는데도, 안 되면 운명에 순종하는 듯 포기하거나 돌아갔는데도, 그는 ‘절로 절로’ 대권에 근접하게 된 것이다. 때문에 박 대통령이 설득하고 기독계가 포함된 보수세력이 응원한다면 그는 이를 ‘하나님의 뜻’으로 받아들여 강한 도전을 할 수 있다는 의견이 많다. 제2의 노태우 대통령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