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토를 찾는 관광객은 1년에 6천500만 명이다. 교토의 인구가 150만 명이니까 그 40배가 넘는 관광객이 몰려드는 셈이다.
특히 가모가와 강변의 벚꽃놀이로 유명한 교토의 봄과 삼천원(三千院) 절의 단풍철에는 그야말로 교토는 인산인해이다.
벚꽃놀이나 단풍철에 교토를 찾는 관광객이 꼭 들르는 절이 있다. 바로 청수사(淸水寺)이다.
년간 1700만명이 들른다는 이 절은 한국의 관광객들의 필수코스이자 일본 관광객들도 많이 들른다. 그러다보니 청수사 앞에는 각종 기념품 가게, 떡집, 식당, 반찬 가게 등이 성업 중이다.
바로 이 청수사 입구에 가면 유명한 떡집 세곳이 성업 중이다.
니시오 하츠바시,쇼고인 하츠바시,이즈쯔 하츠바시 가게이다.
이 세 가게는 청수사 앞 뿐 만 아니라 교토역전 상가 앞에도 공동으로 가게를 운영하고 있고, 교토 시내에 지점은 물론 백화점 식품부, 호텔 입구 등, 도처에서 눈에 띈다.
특히 웬만한 호텔의 후론트 데스크 옆의 자그마한 판매대에는 유코(夕子)라는 아리따운 여성이 기모노를 입고있는 그림이 그려진 떡이 있는데, 바로 그 떡도 니시오 하츠바시 떡가게의 상품 중 하나이다.
바로 이 청수사 앞에서 유난히 극성스럽게 접시에 떡을 담아 여행자 누구에게나 떡을 먹어보라고 권하는 떡집이 있다. 니시오 하츠바시 떡 가게이다.
그러나 이 떡 가게가 300년 넘는 역사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이름이 비슷비슷한 세 하츠바시 가게 중 원조는 니시오 하츠바시로 1687년에 창업했고, 두번째가 쇼고인 하츠바시로 1689년,세번째 이즈쯔 하츠바시는 한참 뒤인 1805년에 창업했다.
1687년 교토를 여행하는 여행자들을 위한 흰떡 가게로 출발한 니시오 하츠바시 떡 가게는 지금은 교토의 명물이 되었다.
니시오 하츠바시 떡 가게는 흰떡 반죽을 도깨비 형상의 나무틀에 넣어 눌러 만드는 방식으로 수백 가지의 떡을 생산한다.
지금은 교토 내에 10개의 지점을 가지고 있지만, 본점은 과거 그대로 옛 전통가옥에서 떡을 만들어 내고 있다.
현재는 14대 사장인 여성 니시오 요코(西尾陽子)가 경영 중이다.
1687년 교토의 쇼고인(聖護院)이라는 유서 깊은 절 앞 거리에 니시오 하츠바시라는 떡 가게가 문을 열었다.
쌀가루로 만든 간단한 흰 떡이었다. 이 떡은 도쿄로부터 여행을 온 사람들이 휴대식으로 들고 다니면서 먹을 수 있도록 만든 것이다.
당시 교토에는 유명한 사찰들이 많았으므로 그 사찰이나 신사 등에 참배를 하러 온 관광객들이 많았다. 일본 사람들은 일평생 되도록 많은 절, 신사를 참배하면 자신에게 복이 더 많이 온다고 생각하고 있었으므로 밥 먹는 시간을 아껴 수많은 절과 신사를 돌아다녔다.
특히 나이가 들어 죽을 날이 가까워오면 일본 내의 유명한 절과 신사를 돌아다니며 자신을 수양하고, 집안의 안녕을 비는 수행자가 많아진다.
쇼고인 절 또한 순례코스로 유명한 절이다. 니시오 하츠바시 떡 가게는 바로 그런 순례자들을 겨냥해서 창업했다.
그 2년 후에는 근처에 쇼고인 하츠바시가 문을 열었다.
본래 하츠바시(1614-1685)는 사람이름이다.
그는 쇼고인 근처에 살면서 가야금을 켜고 작곡도 하는 장님 예술가였다.
그는 밤이면 가야금을 켜면서 평생을 보냈는데 한밤중에 울리는 그의 가야금 소리가 하도 절절해서 동네사람들의 심금을 울렸다고 한다.
그가 작곡한 가야금 곡 중 <육단조>,<팔단조><윤설(輪舌)> 등은 지금도 명곡으로 이름이 높고,‘일본의 바하’라고 불리우기 까지 한다.
그는 살아생전에 집안이 가난해서 먹을 것이 없어,우물가에 나와 버려진 쌀알을 주워 밥을 지어먹곤 했는데, 근처의 오차가게 주인이 그 쌀로 꿀과 계피가루를 버무려 떡을 만들어 먹는 방법을 가르쳐주었다.
이 떡이 바로 하츠바시 떡의 원조이다.
그는 그렇게 살다가 세상을 떠났는데 그의 가야금 소리를 그리워하던 사람들 중의 그가 만들어 먹었다는 하츠바시 떡을 가야금 모양으로 만들어 팔기 시작하면서 교토에 대 유행을 불러 일으키게 된다.
바로 그 무렵 탄생한 떡집이 니시오 하츠바시와 쇼고인 하츠바시이다.
이 두 가게의 떡은 참배객들의 휴대용 대용식이 되어 나날이 번창했다.
이후 1805년 이츠즈 하츠바시가 창업하면서 하츠바시라는 이름을 가진 떡집이 세곳이 된다.
이 가게는 서로 치열한 경영을 하면서 발전해나갔다.
니시오 하츠바시는 12대째인 1889년 니시오 다메오사무가 파리 만국 박람회에 자신들이 만든 떡을 출품하여 은상을 수상함으로써 해외에서 까지 그의 이름을 날리기 시작한다.
덕분에 1905년경이 되면 교토를 대표하는 명물 떡으로 자리 잡게 되어 전국에 이름을 알리게 되었다.
1920년경에는 일본 천황이 교토를 방문했을 때 니시오 떡을 시식함으로써 그 이름을 확고히 하게 됐다.
니시오 떡은 떡 안에 녹차가루를 넣은 것이 특징이다.
1947년 경,하츠바시 떡은 꿀과 계피가 아니라 팥소를 넣은 떡으로 변형된다.
그 떡의 이름은 <유기리(夕霧)>.그 떡을 만들어 판 가게는 후발주자인 이츠즈 하츠바시였다.
이츠즈 하츠바시는 이때 이미 이른바 스토리 텔링으로 승부를 걸었다.
유기리는 교토에서 이름을 날리던 21세의 아리따운 기생.
그녀는 부유한 기모노가게 주인인 23세의 유부남 이츠즈와 사랑에 빠진다.
그러나 두 사람은 불륜. 결국 두 사람은 만나면 늘 먹던 하츠바시 떡을 나누어 먹고 강에 함께 투신자살해서 생을 마감한다.
이 이야기는 소설가 긴마쓰몬 사에몬(近松門左衛門)이 쓴 <곽문장:廓文章>이라는 소설이고, 그 소설은 1734년에 이츠즈 가문에 있었던 실화를 바탕으로 쓴 것이다.
후발주자인 이츠즈 하츠바시는 자신의 집안의 과거 이야기이자 소설에 나오는 기생 여주인공인 <유기리>라는 제품으로 승부를 건다.
이때 아예 제품의 내용물도 바꿔 꿀과 계피 대신 단팥을 넣었다.
결과는 폭발적이었다.
여주인공 유기리가 즐겨먹었던 바로 그 떡의 이야기를 알고 있는 여성소비자들의 마음을 붙잡았던 것이다.
그러자 선발주자인 니시오 하츠바시도 <유기리>의 애칭인 <유코(夕子)>라는 상품명으로 비슷한 상품을 출시,시장에 뛰어들었다.
현재도 두 제품은 치열한 각축전을 벌이고 있는데 거래선이 더 많은 니시오 하츠바시가 마켓팅 면에서 앞장서 가고 있다는 중평이다.
아무튼 이 세 가게가 만드는 하츠바시 떡은 교토에서 판매되는 떡 중에서 가장 판매가 많은 떡으로 자리잡았다.
현재 선발주자인 니시오 하츠바시 떡은 교토 내에 총 12개의 지점과 수백개의 떡가게거래선을 가지고 있으며, 최근에는 떡 카페를 도쿄 역사 안에 개설하여 젊은이들의 미각을 사로잡고 있다.
기존의 떡이 아닌 프랑스의 크레페와 같은 스타일로 떡을 만듦으로써 젊은이들에게 신선하게 다가가고 있는 것이다.
니시오 하츠바시의 소비자 공략 아이디어 중에 <오차의 시간>이라는 것이 있다.
‘바쁜 일상 속에서라도 차 한 잔과 떡 한 개를 먹을 수 있는 시간을 갖자’라는 의미에서 벌이는 일종의 캠페인이다.
이 캠페인은 바쁜 현대인들에게 자신을 돌아보게 하는 의미가 담긴 신선한 충격이었다.
차 한 잔과 떡 한 개를 마실 수 있는 잠깐 동안의 여유가 현대인들에게 필요하다고 느껴졌기 때문이다.
전통적인 떡 가게이지만, 그들은 현대와의 조화를 끊임없이 추구하고 있는 것이다.
니시오 하츠바시는 1년에 약 16 종류의 떡을 새로 만들어 팔면서, 끊임없이 떡의 현대화를 추구하고 있다.
하루에 3천명이나 관광객이 들어오는 니시오 하츠바시 청수사 지점 안에 들어서면 현액이 하나 걸려있다.
이른바 니시오 하츠바시의 가훈이다.
이 가훈에는 이렇게 쓰여있다.
< 니시오 하츠바시 가훈>
친절을 팔고 만족을 사라 확실하게 행동하고, 말은 둥글게 하라.
허리는 낮추고 목표는 높게 마음가짐은 길게 도량은 넓게 생각은 깊게 일은 빠르게 원칙에는 지고, 승부에는 이겨라 70%에 만족하고 10%를 바라라 자손을 위하여 덕을 쌓아라
3백 년전 선조가 후손들에게 당부한 말이다.
여기엔 교토의 상인들이 지켜야할 모든 덕목이 다 포함되어 있다. 지난 400년간 니시오 하츠바시는 바로 위의 당부를 마음에 새기면서 지금까지 열심히 떡을 만들어 팔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