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조선] 이 악물고 슛, 골!…허정무 전 감독 인터뷰
입력 : 2014.06.02 16:16 | 수정 : 2014.06.04 14:42
허정무 전 감독은 꽤 고지식한 원칙주의자다. 노력한 만큼, 딱 그만큼의 결과가 나온다고 믿는다.
아마도 그 자신이 겪은 선수 시절의 피나는 노력과 그 결과 때문일 터다.
축구가 뭔지 몰랐던 시골 촌놈이 서울로 상경한 1969년 9월, 허정무의 축구 인생은 그때부터 시작됐다.
1970~80년대 스타플레이어로, 존경받는 현역 지도자로 수십 년 축구와 함께한 허정무 전 감독을 만났다. 더불어 오는 6월 브라질에서 열릴 월드컵과 관련해 몇 가지 질문을 던졌다.
1986년 멕시코 월드컵 때 아르헨티나와의 첫 경기에서 세계 최고인 디에고 마라도나를 전담 마크했어요.
사실 경기 전날까지는 내가 (마라도나를) 마크하기로 되어 있었어요. 근데 감독은 공격수였던 내가 내심 못 미더웠던 모양이에요. 결국 다른 선수를 투입시켰는데 20~30분이 지나도 영 시원찮으니까 나더러 다시 마라도나를 마크하라고 했죠. 역시 세계 최고답게 상대하기가 힘들더라고요. 다소 거칠게 수비했던 걸로 기억해요. 그래도 32년 만에 치른 월드컵치고는 선전했죠. 결국 마라도나는 그 경기에서 한 골도 넣지 못했으니까요.
감독님이 선수 시절이었을 때와 지금의 축구 환경을 비교하면 무엇이 가장 달라졌나요?
어유, 엄청나게 달라졌죠. 그때만 해도 우물 안 개구리였어요. 외국 팀과 붙어봐야 아시아 팀과 하는 게 대부분이었고 남미 최고 팀과 붙는 경우는 극히 드물었으니까요. 지금은 국가대표 선수 23명 중 17명이 외국에서 뛰고 있잖아요. 그리고 그땐 잔디 구장에서 연습하는 것도 쉽지 않았어요. 그 외에 음식 등 여러 가지 조건들이 훨씬 좋아졌죠.
선수 시절에 경기 판도를 바꾸어놓는 선수였어요. 이번 월드컵 대표 선수 중에 그런 선수를 꼽는다면 누가 있을까요?
판도를 바꾸어놓는 것, 그게 팀 분위기거든요. 모든 감독들이 그런 선수들을 조커로 활용하기를 좋아하죠. 이번 대표팀 공격진에서는 손흥민 같은 선수가 그런 선수예요. 주전으로도 손색이 없는 선수고요. 그러니 감독이 머리가 아프죠. 주전으로 내보내야 할지, 나중에 분위기 반전용으로 써야 할지요. 그게 다 전략이고 전술이에요.
이번 월드컵 성적은 어떻게 예상하나요?
일단 공격진이 탄탄해요. 손흥민, 이청용, 기성용, 지동원 등 전부 기대해볼 만한 선수들이에요. 특히 이번에 조 편성이 아주 좋아요. 어쩌다 한 번 나올까 말까 할 만큼 좋은 조 편성을 받았어요. 굉장히 희망적입니다.
너, 축구 한번 해볼래?
허정무 전 축구 국가대표 감독의 별명은 진돗개다. 진도 출신이기도 하거니와, 세계적인 스트라이커 요한 크루이프 앞에서도 당황하지 않고 달려들 줄 아는 패기 덕분이다. 뒤늦게 시작한 축구는 그로 하여금 이를 악물고 도전하게 만들었다. 그의 첫 에세이에는 우리가 몰랐던 허 전 감독의 이면이 샅샅이 담겨 있다. “이런 분인지 몰랐다”고 말을 건네는 기자에게 “이건 일부에 불과하다”며 인자한 미소를 지어 보이는 그가 더욱 인간적으로 다가온다.
늦게 축구를 시작했어요.
땀은 거짓말을 안 한다는 말, 진리 같아요. 느닷없이 축구로 (진로를) 바꿨어요. 중학교 마치고 쉬다가 시작했는데, 시작해놓고 보니까 (실력이) 너무 차이가 나더란 말이죠. 기초도 없고 아무것도 모르는 촌놈이 말이에요. 그때 마침 TV에서 1970년 멕시코 월드컵이 방영됐어요. 보고 몸동작을 따라 하면서 개인 훈련을 했죠. 지기 싫어서요.
어릴 때 운동선수가 될 만한 기질이 보였나요?
제가 1960년대에 초등학교를 다녔어요. 지금은 운동선수가 사회적으로 인정받고 스타로서 많은 각광을 받지만 그땐 지금처럼 운동선수에 대한 개념이 전혀 없었어요. 전쟁 끝난 지 얼마 안 된 데다 5·16 군사정변 일어나고 정말 살기 힘든 때였거든요. 그러니까 운동해서 먹고산다는 건 특히 시골에서는 감히 생각지도 못할 일이었죠. 오로지 공부였어요. 공부해서 취직이라도 하고 혹시라도 은행원이라든가 하는 직업을 가지면 최고라고 할 때죠.
어떤 계기로 축구를 하게 된 건가요?
허윤정이라는 아저씨뻘 되는 분 덕분에 데뷔를 했어요. 그 양반도 이력이 독특한 분이죠. 공군사관학교에 들어가서 공군 장교로 복무하다가 대표 선수가 됐으니까요. 그분이 홍콩 세미프로 팀 진출하기 직전에 진도에 내려왔어요. 당시 진도군에서 체육대회를 했는데 제가 부전 선수로 뛰게 됐죠. 그때 눈에 띄었는지 나중에 불러서 어디 사는 누구냐고 물었어요. 그리고는 ‘운동 한번 해보지 않겠느냐’고 하시더라고요.
아버지는 반대 없으셨고요?
아버지는 잘하면 장학생으로 학비 면제 받고 학교에 다닐 수 있다는 얘기를 듣고서 좋아하셨죠. 그렇게 아버지, 허윤정 선생님과 서울 남대문 근처의 한 불고기집에서 중동중학교 축구 감독인 유판순 선생님을 처음 만났어요. 근데 절 보고 처음엔 좀 실망하셨죠.
왜요?
그땐 키가 조그마했거든요. 중학교 졸업하고 나서도 153㎝밖에 안 됐으니까요.
나중에 20㎝ 넘게 자란 건가요?
우리 집안 유전인자가 그래요. 고등학교 1학년 때 17㎝인가 컸어요. 24세까지 키가 자란 기억이 나요.(웃음) 몸도 더 튼튼해지고요. 하여튼 처음 절 보고는 너무 작아서 안 되겠다며 정 하고 싶으면 중학교로 다시 돌아가서 해야 된대요. 학비 면제도 주전으로 뛸 수 있어야 되지, 그렇지 않으면 안 된다는 거예요. 황당했죠. 아버지는 뭐라 말씀도 못하시고요. 그때 제가 6개월만 해보겠다고 했어요. 해보고 안 되면 다시 진도로 내려갈 테니 6개월만 도와주십시오, 하고요.
서울 시내 중학교 축구부로 전학 온 첫 소감이 어땠나요?
1969년 9월 17일, 중동중 축구부 숙소에 들어갔어요. 미아리 송천동 뒷산에 숙소가 있었는데, 첫날부터 연습을 시작해서 그다음 해 3월에 처음 시합에 나갔어요. 그해에 눈이 참 많이 왔어요. 겨울에 눈밭에서 운동하고 눈 치우고 빨래하고 ‘빠따(야구방망이)’ 맞으면서 진도로 내려가고 싶은 마음이 많이 들었죠. 돌산에 올라가서 많이 울었어요.
그만두고 싶을 때마다 마음을 다잡게 한 건 무엇이었나요.
그럴 때마다 문득문득 드는 생각이, 패배자가 되기 싫었어요. 그런 생각이 저를 오히려 노력하게 했다고 봐야죠. 그런 얘기가 있잖아요. ‘눈물 젖은 빵을 먹어보지 않은 사람은 인생을 논할 자격이 없다’고요. 똑같은 논리가 아닌가 싶어요.
4년 만에 U―20, 2년 뒤 국가대표 선수로
어린 허정무가 서울로 상경하며 아버지에게 약속한 것이 있다. ‘6개월 안에 주전 선수가 되어 학비를 면제받겠다는 것.’ 연습을 생활화한 것도 이 때문이다. 등하굣길 버스에서는 손잡이를 잡는 대신 두 발로 무게중심을 잡았고, 엄지발가락 힘을 키우기 위해 걸을 때는 뒤꿈치를 들고 걸었다. “기술 하나가 몸에 익는 데 1만 시간이 필요하다”는 그의 말처럼, 수만 시간의 투자가 지금의 그를 만든 셈이다. 시골 촌놈이 축구를 안 지 4년 만에 청소년대표 타이틀을 따고, 또다시 2년 만에 국가대표 선수로 발탁된 이유다.
입단한 지 6개월 만에 주전 선수 타이틀을 따냈어요.
운도 좋았죠. 당시 중동중학교에 선수가 14명밖에 없었어요. 전술훈련을 하는데 내보낼 후보가 2~3명밖에 없는 거예요. 오른쪽 윙이 자꾸 실수를 하니까 유판순 선생님이 모 아니면 도 격으로 저더러 ‘들어가봐라’ 하신 거예요. 믿음은 안 가지만 (기존의 오른쪽 윙이) 못하니까 내보낸 거죠. 그게 첫 경기였는데 수비가 실수로 놓친 공을 끌고 들어가 골을 넣었어요. 그러니까 이 양반이 그다음부터는 자꾸 내보내더니 정식 시합하는 첫날, 저를 주전으로 내보내더라고요. 그날도 주워 넣었어요. 코너킥할 때 당연히 골키퍼가 잡을 줄 알았는데 어찌어찌하다가 놓쳐버린 거야. 그래서 내가 찔러 넣었죠. 운이 좋았어요.
중동중 축구부에 있다가 영도중으로 옮겼던데요.
중동중에 있다가 1년 뒤에 이 양반(유판순)이 축구부를 재창단한 영도중학교에 저를 데리고 갔어요. 식비까지 모든 걸 면제해준다더라고요. 이후 영등포공고에 들어갔어요.
어딜 가나 경력이나 나이로 텃세 많이 겪었을 것 같아요. 실제로는 어땠나요?
한번은 유판순 선생님이 저를 크게 혼낸 적이 있어요. 잘못한 게 없었지만 본인이 데려온 선수인 만큼 일부러 더 그러신 거였죠. 그땐 너무 화가 나서 홧김에 짐을 싸들고 나왔어요. 나중에 불러서 못 이기는 척 들어갔는데, 그때 이후로는 한 번도 안 맞았어요. 그 양반이 선수들 많이 혼내고 그랬는데도요. 오히려 제가 개인 훈련을 하다가 코피 흘리고 그러면 ‘좀 살살 하라’고 하셨죠.
누가 봐도 지독한 연습벌레였나 봐요.
안 그럴 수가 없어요. 안 그러면 따라갈 수도 없고 맨 뒷전에 있을 텐데요. 어느 정도 궤도에 오르니까 그때부터는 재미도 생길뿐더러, 더 높은 곳을 향해서 도전하고 싶은 생각도 들더라고요.
축구한 지 4년 만에 청소년대표로 선발된 건 이례적인 경우 아닌가요?
우리나라에 전무후무할 거예요. 3년을 꿇고 중학교 2학년을 다시 들어가서 고등학교 2학년에 청소년대표로 선발이 됐단 말이에요. 우리나라에 유례가 없는 일이죠.
그때 기억나세요? 어안이 벙벙했을 것 같은데.
처음엔 100명을 뽑았어요. 저는 추가로 선발된 25명 중 한 명이었죠. 태릉선수촌에서 연습을 하는데, 그때 느낌이라는 건 멍한 상태. 그 멍한 상태에서 너무 힘들기만 했어요. 개인 훈련은 정말 열심히 했지만 그렇게 힘든 (단체) 훈련은 처음이었거든요. 특히 웨이트 트레이닝 같은 기초체력 운동은 (다른 선수들처럼) 어려서부터 쭉 해온 게 아니니 너무 힘들었죠. 나중엔 청소년대표고 뭐고 운동장에 나가는 것에 질렸어요. 당시 감독님이 ‘저게 선수냐’ 했을 정도니까요. 그래서 크게 기대를 안 했는데 마지막 최종 선발 때 뽑혔어요. 그리고 2년 뒤 1974년 가을에 국가대표 선수가 됐어요.
일사천리로 청소년대표와 국가대표 두 개 타이틀을 모두 달았네요.
너무 앞만 보고 달려갔어요. 세상 물정을 잘 몰랐어요. 게다가 촌에서 올라와서 사회를 느껴볼 새도 없었고요. 그저 축구라는 틀 안에만 있었던 거예요.
아쉬움도 있었을 것 같네요.
그렇죠. 내가 좀 더 빨리 시작했으면 좋았을걸, 하는 아쉬움. 좀 더 어렸을 때부터 체계적으로 훈련받았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요. 그게 절실하다는 걸 느꼈고, 그래서 지금 유소년축구에 많이 신경을 쓰고 있어요.
선수로서 위기는 없었나요?
많았죠. 대표팀 도중에 다치기도 하고, 벤치에 앉아보기도 하고, 여러 가지 갈등이 있었어요. 근데 언젠가 한 주간지에서 그런 표현을 썼어요. (허정무는) ‘오뚜기’라고요. 넘어져도 다시 일어서는 오뚜기래요.
지금 박지성 선수가 있는 PSV 에인트호번에 허 감독님이 우리나라 최초로 진출했어요. 유럽에서 뛰면서 얻은 점이 많을 텐데요.
많죠. 그전까지는 세계 축구를 접할 기회가 별로 없었거든요. 당시만 해도 우리나라에 오는 외국 팀은 주로 아마추어 팀들이었고, 좋은 팀이 온다고 할지라고 여기서 제 기량을 발휘하진 못했어요. 대부분 시즌 끝나고 쉬다가 오니까 정상적인 컨디션이 아닌 거죠. 그러다가 네덜란드에서 3년 동안 보고 느끼고 겪으면서 축구에 대해 제대로 눈떴다고 봐야죠. 기술적인 면에서도 여유가 생기고요. 그렇게 한 단계 한 단계 올라갈 수 있는 계기가 됐어요.
- 1. 우리나라 축구 국가대표팀은 한 때 화랑(1진)과 충무(2진)라는 호칭을 붙여 2원 체제로 운용됐다. 당시 화랑에는 전 전 감독을 비롯해 차범근, 김호곤, 조광래 등 멤버가 쟁쟁했다. 맨 윗줄 왼쪽에서 네 번째가 허정무 전 감독. 2. 맨 왼쪽이 초등학교 1학년 시절의 허 전 감독. 3. 1973년 테헤란 청소년 대회 4강 주역들. 맨 왼쪽에서 세 번째가 허 전 감독이다. 테헤란 멤버는 훗날 화랑팀의 모체가 돼 한국 축구의 전성기를 이끌었다.
1980년에 가셨죠? 그때만 해도 외국에서 뛰는 선수가 거의 없었잖아요. 신기해하기도 하고 무시도 많이 당했을 것 같아요.
차범근 감독이 있었고 그다음 제가 갔어요. 우리끼리 말로 표현하면 ‘맨땅에 헤딩’이에요. 그땐 에이전트도 통역도 없었으니까요. 고생도 많이 했지만 굉장히 귀중한 시간이기도 했어요.
그때 낳은 딸이 정말 힘이 되었겠어요.
그렇죠.(웃음) 얼마나 위안이 되는지 몰라요.
지도자 허정무, 남편 허정무
1980년대에 태어난 기자에게 허정무는 선수이기보다 감독으로 더 익숙하다. 1986년 서울 아시안게임 후 은퇴를 선언한 그는 처남을 도와 잠깐 사업에 발을 담갔다가 이내 축구계로 돌아왔다. 이번엔 ‘감독’으로 말이다. 말도 많고 탈도 많았지만 그래도 우리나라 대표팀 감독 중엔 가장 익숙하게 남는 이름이 허정무 전 축구 국가대표 감독이다.
본인이 선수 시절 치열하게 노력했기 때문에 지도자가 되고 나서 그만큼 선수들을 힘들게 했을 것 같은데요?
초반에는 ‘내가 너한테 좋은 얘기를 하는데 왜 너는 내 말을 안 듣니’ 하는 식이었어요.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너를 위해서 하는 얘기니까 그냥 따라와라’였죠. 근데 지도자로서 경험이 쌓이고 보니까, 막무가내로 따라오라고 하는 것보다 길을 가르쳐주는 게 옳더라고요. 스스로 필요성을 느끼게 하는 게 더 효과적이에요. 내가 아무리 좋은 말을 해도 받아들이는 입장에서 ‘또 잔소리야?’ 하고 부정적으로 받아들이면 아무것도 안 된단 말이죠. 선수가 긍정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게끔 해주는 게 성공한 지도죠. 그게 곧 소통이고요. 근데 그게 쉽지 않아요.
소통을 많이 한 지도자라고 자평하세요?
(처음 감독을 맡았을 땐 미진했지만) 그래도 2010년에는 그런 게 효과를 봤다고 보죠. 2000년 초반에 대표팀 감독 맡았을 때, 올림픽엔 떨어졌지만 결과적으로 좋은 선수들을 많이 발굴했어요. 그 열매를 2010년에 얻었다고 봐요.
지도자로서 선수의 기술적인 면보다 열정과 동기를 자극하는 게 중요하겠네요.
같은 훈련이라도 아무 생각 없이 하는 것과 연구하고 생각하면서 하는 것과는 어마어마한 차이가 있습니다. 공부도 스스로 하는 것과 시키니까 어쩔 수 없이 하는 것은 다르잖아요. 모든 분야든 다 마찬가지예요.
선수 시절부터 지금까지 곁을 지킨 아내가 한때 톱 MC였던 최미나 전 아나운서예요. 두 분의 결혼이 한때 장안의 화제였어요.
에인트호번행을 앞두고 1980년 6월 24일에 약혼을 했어요. 원래 약혼만 하고 네덜란드에 가려고 했는데 한 달도 안 돼서 결혼식을 올렸어요. 왜냐면 약혼 당일에 (둘이 약혼했다는 소문이) 터졌거든요. 한 스포츠지 기자가 낌새를 채는 바람에 우리가 먼저 보도자료를 내버렸어요. 그래서 그날 정오 뉴스에 나왔어요.
어떻게 만난 거예요?
지금은 스포츠 평론가로 활동하고 있는 최동철 선배 소개로 만났어요. 자기 집으로 저녁 초대를 했거든요.
어떤 점을 보고 결혼을 결심했어요?
첫인상도 나쁘지 않았고요. 부엌에서 선배 형수랑 일하는 모습이 괜찮았어요. 그리고 상당히 가정적이에요. 제가 프러포즈하면서 ‘배추 장사를 하더라도 당신을 굶기지 않겠다’ 했더니 하는 소리가 ‘왜 내 남편이 배추 장사를 해야 되냐, 더 잘돼야 하지 않느냐’ 하더라고요. 생활력도 강해요.
운동선수의 아내 하면 내조가 먼저 떠오르는데요. 내조는 잘해주시나요?
참 고맙게 생각해요. 제가 선수 생활, 지도자 생활 해온 지 35년이 되어가요. 이 직업이 심적인 고생이 참 크거든요? 특히 대표팀 맡았을 때는 이루 말할 수 없고요. 악플도 심해요. 그래서 지금도 댓글을 안 봐요. 그런 상황에서도 꿋꿋이 내조를 해준 게 참 고맙죠.
맛있는 음식은 많이 해주세요?
그럼요. 음식 솜씨도 괜찮아요. 저희 집에 오면 밥은 다들 잘 먹더라고요.(웃음) 지금은 둘이 사니까 외식도 자주 하는 편이지만요.
딸만 둘인데 아들 있었으면 축구 선수 시켰겠어요.
손자들이 있으니까요. 한 명은 (축구 선수) 나올 것 같은데요?(웃음)
- 더 많은 기사는 여성조선 6월호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출처] 본 기사는 조선닷컴에서 작성된 기사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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