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는 곶자왈을 걸으며
봄 꽃향기를 실컷 마신 날이었다.
향기가 천리를 간다는 백서향이
곳자왈 곳곳에 만개하여 길 걷는 내내
우리들을 행복하게 했다.
그 중에 딱 세 번
이 길마가지나무를 만났는데,
마침 꽃이 피어 있어
꽃은 작지만 그 향기는
백서향 못지 않게 향그러웠다.
그럴 때면 은은한 시구가 떠올라
자꾸 되뇌면서 행복해지는데
이를 테면 산을 좋아하시는
권경업 시인의 시처럼
짧고도 향기나는 시편들이다.
집에 돌아와 권 시인이 보내준 시집
‘뜨거운 것은 다 바람이 되었다’에서
봄에 관한 시를
몇 편 골라 꽃과 함께 올린다.
♧ 오래 전, 그대도 꽃다운 누군가의
눈부신 눈물이었습니다
장당골 산벚꽃을, 그저
꽃이라 부르진 마세요
그 겨울, 설움에 북받친 마디마디
울컥이는 눈물이에요
어디 아픔 없이 피운 꽃 있겠습니까
오래 전, 그대도
꽃다운 누군가의 눈부신 눈물이지 않았나요, 아마
지금은 가고 없을
산 같으셨던 오직 한 분의
♧ 우수(雨水)
언제부턴가
엄동의 조개골 비집고
실낱같은 물길 열더니만
보세요, 큰일 났어요
그 물길 콸콸 그리움 되어
밤마다 내 가슴엔
막막한 홍수
♧ 귀향(歸鄕)
막막하긴 해도
밤길 잡아 가신 내 어머니
새벽잠 설치시며 기다리실
고향, 어디냐고 묻지 마라
너무 멀어 흐릿한 기억
어슬렁인 방랑길 지겨우면
뒤뜰에, 후루룩 능금꽃 지는
낯선 주막집 평상
설취한 발걸음 훌훌 접어 돌아갈
그믐밤의 무수한 별자리 중 하나
♧ 산길
길섶, 키 낮은 것들에게도
고개 숙이고
경배의 허리를 굽히는 이여!
꽃향기는 당신을 위한 것입니다.
♧ 아지랑이
신갈숲 들머리
새잎 더 푸르고
꿩의바람꽃 가는 목
꺄룩이며 피는데
사랑은 다시 오지 않고
사랑은 다시 피지 않으며
미친년처럼 허영허영
온 산자락 헤매는
어지럼병 된 이별
♧ 솔꽃 내음
여보게 이 나른한 봄날
솔꽃 내음 같은
그리움 하나
참으로
참으로 희한한
이 어질머리
난들 어떠하라고
♧ 신밭골
등짐 가득 뻐꾸기 소리
왕등재 걸쳐 놓고
밭갈이 한창 때 졸고 있는 산비알 묵정밭
아랫동네 가랑잎 분교
폐교된 교정 아랑곳없이
왁자하니 상춘객 더욱 들끓고
건들건들 만취해 가는 봄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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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랑잎 분교 : 유평리에 있던 초등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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