鶴山의 草幕舍廊房

文學산책 마당

[스크랩] 길마가지꽃과 권경업 시편

鶴山 徐 仁 2014. 3. 11. 22:16

 

어제는 곶자왈을 걸으며

봄 꽃향기를 실컷 마신 날이었다.

 

향기가 천리를 간다는 백서향이

곳자왈 곳곳에 만개하여 길 걷는 내내

우리들을 행복하게 했다.

 

그 중에 딱 세 번

이 길마가지나무를 만났는데,

마침 꽃이 피어 있어

꽃은 작지만 그 향기는

백서향 못지 않게 향그러웠다.

 

그럴 때면 은은한 시구가 떠올라

자꾸 되뇌면서 행복해지는데

이를 테면 산을 좋아하시는

권경업 시인의 시처럼

짧고도 향기나는 시편들이다.

 

집에 돌아와 권 시인이 보내준 시집

‘뜨거운 것은 다 바람이 되었다’에서

봄에 관한 시를

몇 편 골라 꽃과 함께 올린다.  

 

 

♧ 오래 전, 그대도 꽃다운 누군가의

                            눈부신 눈물이었습니다

 

장당골 산벚꽃을, 그저

꽃이라 부르진 마세요

그 겨울, 설움에 북받친 마디마디

울컥이는 눈물이에요

 

어디 아픔 없이 피운 꽃 있겠습니까

 

오래 전, 그대도

꽃다운 누군가의 눈부신 눈물이지 않았나요, 아마

지금은 가고 없을

산 같으셨던 오직 한 분의   

 

 

♧ 우수(雨水)

 

언제부턴가

엄동의 조개골 비집고

실낱같은 물길 열더니만

 

보세요, 큰일 났어요

 

그 물길 콸콸 그리움 되어

밤마다 내 가슴엔

막막한 홍수  

 

 

♧ 귀향(歸鄕)

 

막막하긴 해도

밤길 잡아 가신 내 어머니

새벽잠 설치시며 기다리실

 

고향, 어디냐고 묻지 마라

 

너무 멀어 흐릿한 기억

어슬렁인 방랑길 지겨우면

뒤뜰에, 후루룩 능금꽃 지는

낯선 주막집 평상

설취한 발걸음 훌훌 접어 돌아갈

그믐밤의 무수한 별자리 중 하나  

 

 

♧ 산길

 

길섶, 키 낮은 것들에게도

고개 숙이고

경배의 허리를 굽히는 이여!

 

꽃향기는 당신을 위한 것입니다.  

 

 

♧ 아지랑이

 

신갈숲 들머리

새잎 더 푸르고

꿩의바람꽃 가는 목

꺄룩이며 피는데

사랑은 다시 오지 않고

사랑은 다시 피지 않으며

미친년처럼 허영허영

온 산자락 헤매는

어지럼병 된 이별  

 

 

♧ 솔꽃 내음

 

여보게 이 나른한 봄날

솔꽃 내음 같은

그리움 하나

 

참으로

참으로 희한한

이 어질머리

난들 어떠하라고  

 

 

♧ 신밭골

 

등짐 가득 뻐꾸기 소리

왕등재 걸쳐 놓고

밭갈이 한창 때 졸고 있는 산비알 묵정밭

아랫동네 가랑잎 분교

폐교된 교정 아랑곳없이

왁자하니 상춘객 더욱 들끓고

건들건들 만취해 가는 봄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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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랑잎 분교 : 유평리에 있던 초등학교

 

 

 

출처 : 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글쓴이 : 김창집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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