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텍사스대 MD앤더슨 암센터에서 13년째 암내과 총괄 부장을 맡고 있는 홍완기 교수는 “암 예방에는 식습관이 가장 중요하다. 특히 폭탄주는 자살 행위”라고 강조했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1970년 6월 28세의 청년 의학도는 부모·형제와 친구들의 작별인사를 뒤로한 채 아내와 함께 미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1년 전 결혼한 아내의 배 속엔 임신 6개월 된 아기가 자라고 있었다. 지갑 속 현금 451달러와 낡은 옷가지, 의학서적 몇 권을 담은 여행가방이 사실상 그의 전 재산이었다. 이해 한국의 1인당 국민소득은 255달러. 아직 보릿고개란 말이 남아 있었을 정도로 나라 전체가 가난했던 시절이었다.
그로부터 43년의 세월이 흘렀다. 그에게 ‘아메리칸 드림’은 꿈이 아니라 현실이 됐다. 미국 텍사스대 MD앤더슨 암센터의 암내과 총괄 부장을 맡고 있는 홍완기(71) 교수가 그 주인공이다. 홍 교수는 지난 21일 미국 의학자의 최고 영예로 통하는 미국 과학학술원 의학연구소(IOM·Institute of Medicine)의 정회원에 뽑혔다. 미국 최고 권위의 의학 학술단체인 IOM은 매년 엄격한 심사를 거쳐 70명만 신입 회원으로 받아들인다. 전체 회원 1753명 중 한국계 의학자는 김용 세계은행 총재와 김성완 유타대 교수 등 몇 명에 불과하다.
현재 그의 밑에는 17개 학과에 350명의 교수가 연간 1만2000명의 암환자를 돌보고 있다. 그가 성대를 잘라내지 않고 후두암을 치료하는 방법을 개발한 이야기는 미국 암협회(American Cancer Society)의 ‘100대 희망 스토리’ 중 세 번째로 올라가 있다.
연세대 의료원 암병원 건립을 돕기 위해 한국을 찾은 그를 지난 12일 오후 서울 소공동 롯데호텔에서 만났다. 홍 교수는 내년 초 개관 예정인 연세대 암병원에서 외부 전문가들로 구성된 자문위원회 위원장을 맡고 있다. 그는 “만일 미국 프로야구의 전설적인 홈런왕 베이브 루스(1895~1948년)가 나한테 치료를 받았다면 후두암으로 죽지 않았을 것이란 기사가 미국의 암 전문 학술지에 실린 적도 있다”며 “남들이 아직 개척하지 못한 연구 분야에서 내가 앞장서 새로운 지평을 열어가는 것을 보람으로 살아왔다”고 말했다.
지금까지 약 700편의 연구논문(공저 포함)을 썼다는 그는 “요즘도 매일 오전 5시쯤이면 병원에 나간다. 제일 먼저 출근하는 사람으로 병원에서 유명하다”며 “미국이란 나라에 문제가 없다곤 할 수 없지만 열심히 노력하는 사람에게 기회의 문이 열려 있는 것은 미국의 최대 강점”이라고 강조했다.
67년 연세대 의대를 졸업한 홍 교수는 보스턴 재향군인병원 등을 거쳐 84년 MD앤더슨 암센터로 옮겼다. 2001년부터 13년째 MD앤더슨의 핵심 부문인 암내과의 총괄 부장으로 일하고 있다. 2001년엔 외국 출신 학자로는 처음으로 미국 암연구학회(American Association for Cancer Research) 회장을 맡았고 지난해에는 MD앤더슨 연구총괄 부총장을 지냈다(※는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한 설명).
- 젊은 시절 왜 의사가 되려고 결심했나.
“가족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큰아버지가 한의사였고 일곱 남매 중 맏형이 연세대 의대를 졸업한 의사였다. 나는 여섯째였다. 맏형은 내 인생의 ‘롤 모델’이었다. 내가 의대에 가고 같은 학교 후배가 되자 무척 자랑스러워하셨다. 당시 맏형은 연세대 의대 생리학과 교수였다. 내가 학교를 다닌 60년대에도 의대 학비는 상당히 비쌌는데 맏형이 내 학비를 다 내주셨다. 교수라고 해도 월급이 그다지 많지 않았을 텐데 형제의 정이 그만큼 각별했다. 안타깝게도 일찍 돌아가셨다. 내 평생 은인으로 꼽는 세 사람 중 한 명이다.”
(※홍완기 교수의 맏형은 고(故) 홍석기 뉴욕주립대 교수다. 연세대에 따르면 홍석기 교수는 49년 연세대 의대를 졸업하고 미국 뉴욕주 버펄로 의대 조교수로 있다가 59년 귀국해 연세대 의대 생리학교실에서 제4대 주임교수를 지냈다. 당시 홍 교수는 제주 해녀의 호흡 기능과 체온 조절에 대한 연구로 학계의 주목을 받았다. 68년 미국 하와이 의대 생리학 교수로 임용되면서 한국을 떠났다.)
- 다른 은인은 누군가.
“또 다른 은인은 어윈 크래코프 교수다. 크래코프 교수는 나를 암 전문가의 길로 이끌어준 멘토다. 70년대 중반 미국 뉴욕 메모리얼슬로언케터링 암센터에서 근무했는데 그때 크래코프 교수가 내과 부장이었다. 그를 만나면서 암 연구자로서 내 인생의 방향이 결정됐다. 이후 크래코프 교수가 MD앤더슨 암내과 총괄 부장으로 옮기면서 당시 보스턴에 있던 나를 기억하고 불러줬다. 현재 내가 이 자리에 있을 수 있게 해준 은인이다.”
- 세 명의 은인 중 마지막 한 명은.
“평생을 함께한 아내다. 아내는 다른 두 사람처럼 의사는 아니다. 한국식으로 표현하자면 못난 남편에게 바가지를 긁지 않고 내조자로서 항상 든든한 버팀목이 돼줬다. 아내 덕분에 돈에 욕심부리지 않고 살 수 있었다. 한국도 그렇겠지만 미국에서도 개업의로 성공한 사람은 돈을 많이 번다. 하지만 나는 연구에만 집중했지 돈에는 별로 관심이 없었다. 아내가 도와주지 않았다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지금이야 MD앤더슨에서 월급을 많이 받지만 미국 이민 초기에는 박봉으로 생활이 몹시 어려웠다. 그때 남들처럼 돈 잘 버는 개업의 길을 선택했으면 오늘의 나는 없었다. 실제로 주변에서 그런 사람을 많이 봤다.”
- 부자가 되고 싶은 것은 인지상정이 아닐까. 특히 미국에선 돈을 성공의 척도로 보는 분위기가 있을 텐데.
“돈에 욕심부리지 않으니까 나중에는 돈이 저절로 따라오더라. 보스턴 재향군인병원(Veterans Affair Medical Center)에 근무할 때 가장 힘들었던 것 같다. 물가가 비싼 대도시에 살면서도 월급은 항상 빠듯했다. MD앤더슨으로 오면서 경제적인 여유가 생겼다. 내가 상복이 많은 편인데 때로는 상금으로 받는 돈도 도움이 됐다. 94년 호암재단에서 주는 호암상 의학상을 받았다. 상금이 6만 달러였는데 당시로선 상당히 큰돈이었다.”
- 지금도 그렇지만 70년대 한국 사회에서 의사는 사회적으로 존경받는 직업이었다. 미국 이민을 결심한 이유가 있나.
“무엇보다 넓은 세상을 보고 싶었다. 70년대 한국과 미국의 격차는 굉장히 컸다. 공군 군의관으로 군복무를 마치고 의학 공부를 더 하고 싶은데 미국이란 큰 나라에는 여러 가지 기회가 많을 것으로 생각했다. 마침 미국 이민법이 바뀌면서 의사 같은 전문직은 이민 비자가 쉽게 나왔다. 그렇게 미국에 가긴 갔는데 그때부터가 문제였다. 육체적·정신적으로 고생이 말도 못했다. 외국에서 대학을 나온 의사가 미국에서 자리를 잡는 것은 대단히 힘든 일이었다. 인턴·레지던트 자리를 구하는 것부터가 쉽지 않았다.”
(※홍 교수는 70년 6월 미국에 도착한 뒤 뉴욕 브롱크스레바논 병원 인턴을 거쳐 보스턴 재향군인병원에서 레지던트로 일했다. 73년부터 75년까지는 뉴욕의 암 전문 병원인 메모리얼슬로언케터링 암센터에서 전문의로 근무했다. 이후 보스턴 재향군인병원으로 돌아가 9년간 종양내과 과장을 맡았다.)
홍완기 교수가 미국 MD앤더슨 암센터에서 환자의 상태를 점검하고 있다. 암내과 총괄 부장인 홍 교수의 밑에는 350명의 교수가 있다. [사진 MD앤더슨 암센터]
- 이민자들이 처음에 가장 힘들어 하는 부분이 언어 문제다. 영어는 잘하는 편이었나.
“아니다. 영어에 서툰 것이 너무나 고통스러웠다. 환자가 증상을 말해도 잘 알아듣지 못했으니까. 이를 악물고 열정과 끈기로 버티고 버텼다. 돌이켜 보면 영어를 잘하고 못하고는 미국 사회에서 성공하는 데 결정적 요소가 아니다. 내가 미국 사람들보다 영어를 잘해 이 자리에 올라왔겠나. 내가 누구보다 열심히 살아서 가능했다고 생각한다. 미국을 ‘기회의 땅’이라고 부르는 것은 실력이 있고 열심히 하는 사람에겐 성공의 문이 열려 있기 때문이다.”
- 의학 분야 중 암을 전공으로 선택한 이유는.
“70년대 초반 보스턴 재향군인병원에서 레지던트로 일할 때 암 환자가 많이 찾아왔다. 900명의 환자가 있다면 그중 100명은 암 환자였던 것 같다. 제2차 세계대전과 6·25전쟁이 끝난 지 아직 오래되지 않았고 베트남전쟁이 한창이었던 시기다. 제대하고 고향에 돌아온 군인들은 정신적인 충격으로 술·담배를 굉장히 많이 했다. 그러다 보니 암에 잘 걸렸던 것 같다. 대부분 경제적으로 어렵게 살다 보니 다른 병원엔 가기 어렵고 제대 군인을 공짜로 치료해 주는 재향군인병원으로 찾아왔다. 이런 환자들을 돌보면서 자연스럽게 암 연구에 깊은 관심을 갖게 됐다.”
홍 교수의 남다른 성실함과 재능은 29년 동안 세계 최고의 암 전문 병원으로 꼽히는 MD앤더슨 암센터에서 환자들을 돌보면서 꽃을 피웠다. 그는 ‘암 연구계의 타이거 우즈’라고도 불린다. 미국에서 암 연구와 관련한 상을 거의 다 휩쓸어서다. 93년 암연구학회 로젠탈상, 2000년 임상종양학회 카노프스키상과 암연구학회 조셉 버처넬상, 2012년 암협회 임상연구상 등을 받았다. 미국의 암 전문 학술지 ‘캔서테라퓨릭스’는 98년 6월호 표지인물로 홍 교수를 소개하면서 ‘베이브 루스가 그에게 치료를 받았다면’이란 기사를 싣기도 했다. 현재 그는 미국 국립암센터의 임상조사 분과위원장도 맡고 있다.
- 성대를 잘라내지 않고 후두암을 치료하는 방법을 개발한 것으로 유명하다.
“예전엔 후두암이 생기면 대부분 성대를 잘라내는 수술을 했다. 암은 치료하더라도 환자가 수술 후 말을 하지 못하는 문제가 있었다. 그게 가슴이 아팠다. 다른 방법이 없을까 고민했다. 그래서 수술 대신 항암제 투여와 방사선 요법을 결합해 봤다. 성대를 보전하면서도 후두암을 치료할 수 있었다. 수술과 비교할 때 후두암 환자의 생존율은 거의 같은 것으로 나타났다. 환자들이 무척 고마워했다. 현재 전 세계 병원에선 이 방법으로 후두암 환자를 치료한다.”
(※미국 암협회는 ‘100대 희망 스토리’에서 “홍 교수의 연구는 후두암 치료의 랜드마크가 됐다”며 그의 업적을 높이 평가했다.)
- 이 방법이 일찍 개발됐다면 베이브 루스도 살 수 있었을까.
“가능성은 있다. 하지만 약이 문제였을 것이다. 옛날엔 좋은 약이 없었으니까. 내가 후두암 환자들을 치료하던 70년대 후반에 이미 좋은 약이 나와 있었다. 나에겐 행운이었다.”
(※루스는 46년 후두암 진단을 받고 병석에 누워 2년간 투병 끝에 53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 지금까지 쓴 연구 논문이 약 700편(공저 포함)이라고 들었다. 솔직히 잘 믿기지 않는 숫자다.
“평생 동안 쓴 것을 다 합친 거니까 그렇다. 이번 기회에 후배 의사들에게 꼭 하고 싶은 말이 있다. 학문에는 지름길이 없다. 인내심과 열정을 갖고 꾸준히 열심히 하는 방법뿐이다. 때로는 힘들고 고통스럽더라도 참고 견뎌야 한다. 그리고 의사는 장사꾼이 아니다. 의료계는 월가의 금융계와 전혀 다른 세계다. 혹시라도 돈벌이를 추구하려면 빨리 다른 곳으로 가야 한다.”
- 워낙 상을 많이 받아서 ‘암 연구계의 타이거 우즈’라는 별명이 붙었다. 비결이 뭔가.
“운이 좋았다. 다만 연구 주제를 정할 때 남들이 아직 연구하지 못한 분야에서 새로운 장을 열어가는 것에 중점을 뒀다. 이미 남들이 많이 연구한 분야에서 뭔가를 추가하는 것보다 미개척 분야에서 새로운 사실을 밝혀내는 것이 보람 있었다. 그러다 보니 세계 최초라고 할 만한 연구 성과도 나올 수 있었다.”
- 아직도 직접 환자들을 보나. 기억에 남는 환자가 있다면.
“현재는 특별한 환자만 예외적으로 보고 대부분 시간은 후배들의 연구를 도와주는 데 쓴다. 밑에 있는 350명의 교수진 중엔 인종이나 출신 배경에서 별의별 사람이 다 있다. 이런 사람들이 서로 부딪치지 않고 일을 잘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 예전 환자 중엔 영화배우 존 웨인의 손녀딸이 생각난다. 구강암으로 LA에서 텍사스 휴스턴으로 나를 찾아왔는데 항암 화학요법을 받고 완치가 됐다.”
-언제까지 일할 계획인가.
“MD앤더슨에 따로 정년은 없다. 더 이상 전임으로 일하기 어려워지면 파트타임이라도 좋으니 계속 일하고 싶다. 내가 직접 연구 프로젝트를 하지 않더라도 후배 의사들의 연구를 도와주는 것만으로도 즐겁다.”
세계적 암 권위자가 권하는 암 예방법은 의외로 단순했다. 담배는 절대 피우지 말고 술은 되도록 적게 마시며 고기보다 채소·과일을 많이 먹고 규칙적인 운동을 하라는 것이다. 특히 “폭탄주는 자살행위”라며 폭음에 대해 강하게 경고했다. 그러면서 “암 예방법은 간단해 보여도 암 치료는 얼마나 어려운 일이냐”며 “건강할 때 건강 관리를 잘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홍 교수는 “머지않아 암에 걸려도 당뇨병이나 고혈압처럼 적절한 약을 쓰고 잘 관리하기만 하면 삶의 질을 유지하면서 오래 살 수 있는 시대가 열릴 것”이라고 내다봤다.
- 암은 치료보다 예방이 우선이라고 했다. 뭘 조심해야 하나.
“식습관이 가장 중요하다. 붉은색 고기는 적게 먹고 채소·과일 위주로 식사하는 것이 좋다. 담배는 건강을 망치는 최대의 적이다. 암 발생 원인이 흡연인 경우가 암 환자의 세 명 중 한 명꼴이다. 특히 담배와 술이 겹치면 그야말로 최악이다. 술은 식사할 때 붉은 포도주로 한두 잔 정도가 적당하다. 또 중요한 점이 규칙적인 운동이다. 나는 골프는 배우지 못했고 테니스를 즐겨 친다.”
- 한국에선 폭탄주를 즐겨 먹는 사람이 많은데.
“내가 보기에 폭탄주는 자살행위다. 정말 멍청한 짓이다.”
- 일단 암에 걸리면 어떻게 해야 하나.
“암에 걸렸다고 통곡하고 절망할 필요는 없다. 얼른 의사에게 찾아가 치료를 받는 것이 중요하다. 암 치료법이 갈수록 좋아지면서 암 환자의 생존율도 높아지고 있다. 대략 암 환자의 50%가 암으로 죽지 않고 살아남는다. 희망을 가져야 한다.”
- 한국의 암 환자 중엔 병원 치료보다 무슨 약초 같은 것을 먹는 대체요법에 관심을 갖는 사람도 많다.
“의사에게 정식 치료를 받으면서 다른 것을 병행하는 것은 몰라도 대체요법에만 의존하는 것은 중대한 실수다. 암에 걸렸다고 실망한 나머지 귀가 얇아지면 안 된다. 성분이 확실치 않은 약초 같은 것을 잘못 쓰면 오히려 부작용이 생길 수 있다. 다른 요법을 병행하더라도 의사에게 물어보고 해야 한다. 한국의 암 치료도 대단히 높은 수준까지 올라와 있다. 환자들이 의사를 좀 믿어야 한다. 그게 암 치료에서 가장 중요하다.”
- 아직도 암 치료 분야에서 한국과 미국의 격차는 크지 않나.
“그렇지도 않다. 공동 연구도 많이 하고 좋은 신약도 나오고 해서 한국 병원의 진료 수준도 매우 높아졌다. 다만 한국과 미국의 결정적 차이가 있긴 하다. 바로 암 연구비의 규모다. 미국 정부가 암 연구에 쓰는 돈은 한 해에 약 50억 달러(약 5조3000억원)에 달한다. 그래도 미국에선 연구비가 적다는 불만이 터져 나온다. 한국에선 암 연구에 얼마를 쓰는지 잘 모르겠지만 아마 미국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것이다. 얼마 전 중국을 갔더니 거기서도 암 연구에 굉장히 많은 돈을 쓰고 있더라. 한국 정부가 가장 중점을 둬야 할 부분은 암 연구비 확충이다.”
- 암 정복은 인류의 오랜 꿈이다. 언젠가 그날이 올 수 있을까.
“암이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암으로 죽는 환자는 크게 줄어들 것이다. 암도 당뇨병·고혈압·심장병처럼 관리 가능한 질병이 될 날이 머지 않았다. 당뇨병이나 고혈압은 완치가 어려워도 꾸준히 약을 먹으며 관리하면 큰 문제가 없다. 암도 초기 단계에선 완치가 가능하지만 후기 단계에선 그게 어렵다. 이럴 땐 약으로 암 세포의 증식을 억제하면서 관리를 잘하면 일상생활에 큰 지장 없이 살아갈 수 있다. 예컨대 암 환자가 90세까지 생존한 뒤 암이 아닌 치매나 다른 질병으로 사망하는 경우가 드물지 않게 될 것이다.”
글=주정완 기자
사진=권혁재 사진전문기자
< 출처 : 중앙일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