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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장진호 동쪽

鶴山 徐 仁 2013. 7. 2. 09:51

소설가 허빈의 번역서, <장진호 동쪽>을 읽고    2013/06/19 17:12 추천 0    스크랩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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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자 허빈은 본명이 허광웅이고, 제 219연대 연대장을 지내고 전역한 육군대령 출신이다.

잔역 후 소설공부를 하여, 계간문예지 (문학과 의식)지의 신인상모집에 당선되어 문단에 데뷰한 소설가이다.

이 분이 군대와의 인연을 살려 (장진호 동쪽)이라는 방대한 번역서를 냈다.

저자는 로이 애플맨이라는 사람인데, 장진호전투에 직접 참전한 미 육군의 예비역 중령 출신이고, 7년간의 자료수집 끝에 이 책을 썼다고 한다.

6.25가 발발한지 올래로 63년째이다. 그러니 당시 스무살에 입대해도 올해 83세가 된다. 대부분의 참전용사들이 여든살이 넘는다는 계산이 나온다.

6.25 전쟁시 장진호전투는 모스크바전투와 레린그라드전투와 더부러 세계전쟁사에서 3대 혹독한 동계전투로 분류된다. 적과 싸워야 하지만, 혹한과의 싸움에 더한 무게가 실린 전투라는 뜻이다.

 

장진호 전투는 일반적으로 중공군에 포위된 미군이 많은 희생을 내긴 했지만 주민 10만명과  10만 여명 유엔군 병사들과 함께 성공적으로 흥남부두를 떠난 것으로 되어 있다.

여기서 10만명의 병사들이란, 후퇴에 참여한 미해병1사단 병사들과,미 10군단 7사단 병사들, 그리고 한국군 수도사단과 3사단 병사들의 총계를 말한다.

그래서 장진호전투는 일본군의 진주만기습 이후 가장 처참한 패배를 기록한 미군의 전쟁으로 보고 있지만, 중공군 12만명에게 포위된 상황에서 그래도 부대의 전열을 흐트리지 않고 후퇴에 성공했기에, 미군 특히 미해병대의 승전의 사례로 꼽히고 있다.

 

장진호 전투는 일반적인 전투의 형태를 띠고 있다고 보기 어렵다.전쟁이란 일반적으로 영토전쟁이다. 땅을 더 차지하기 위해 서로 싸우는 것이다.

그러나 장진호전투는 어떤 대상을 서로 차지하기 위해 싸운 전쟁이 아니라, 후퇴하려는 미군의 성공적인 후퇴를 막고 전멸시키려는 중공군과의 싸움이라는 양상을 띄고 있다.

 

1950년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에 성공한 맥아더는, 파죽지세로 북진하는 UN군을 양분하여 전진하게 했다. 서쪽은 미8군이 맡고, 동쪽은 미 10군단이 맡기로 명령했다. 8군 사령관은 워커중장이었고, 10군단장은 알몬드 소장이었다.

이렇게 두개의 독립된 군령이 존재하게 한 것은, 한반도의 지형상 태백산맥이 횡으로 달리고 있어서 효율적인 전쟁수행을 위한 것이라고 하나, 맥아더는 자신의 부관 출신인 알몬드에게 독립적인 군권을 주어 그의 전공을 높이려는 의도가 있었다고 군사전문가들은 말하고 있다.

 

미 8군에 의해서 평양을 빼앗긴 인민군은 개마산맥 속의 강계에 임시정부를 설치했다. 미군 10군단의 작전지역이었다.

미 10군단은 강계에서 남쪽으로 멀지 않은 장진호를 장악하기 위해 미제1해병대를 투입하였다.  미 해병대는사람인자(人) 처럼 두 개의 가지를 남쪽으로 가지고 있는 장진호의 왼편 쪽 가지 끝쯤에 위치한 유담리 장악을 목적으로 진군했다. 

알몬드로부터 전진명령을 받은 미제1해병사단 사단장 스미스소장은 명령체계상 군령권자인 알몬드의 명령을 즉각 시행하지 않았다. 그래서 전쟁사에는 스미스가 알몬드에게 불려가 촛대를 까였다는 구절도 나온다.

노련한 군사전략가인 스미스는 중공군의 참전이 기정사실화된 지금 어떤 함정이 있을지 알수 없다며 아주 느린 진군을 명령하였다.

이 사실이 12만명의 중공군에게 포위되어 전멸의 위기에 처해진 미해병대가 그래도 활로를 찾을 수 있는 단초가 되었다. 즉 후퇴가 불가능할 정도로 적진에 깊이 들어가지 않았던 것이다.

그리고 보급품의 조달과 부상병 후송을 위해 사람인자의 가지가 갈라지는 지점에 위치한 요충지 하갈우리에 비행장을 닦게 했다. 부상병과 전사자 전원 후송은 미해병대의 오랜 전통이다.

 

그러나 10군단 7사단의 데이비드 바르 소장은 스미스 소장과는 달랐다. 그는 알몬드의 명령을 충실히 따라 장진호의 오른편(동편)을 사정없이 밀고 올라갔다. 7사단은 17연대, 32연대, 33연대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러나 미 10군단은 중공군 9병단(7개사단)의 12만 대군의 의해 포위되고 말았다. 9병단 사령관은 송시륜인데, 국공전투 때부터 홍군의 최고 지휘관 중의 한사람으로 모택동의 신임이 두터운  게릴라전의 명수였다.

그는 미10군단이 함흥 하갈우리 축선을 타고 전진하기 전부터, 장진호 주변의 고산지역에 12만 대군을 풀어 잠복시키고 있었다. 미군이 독안에 든 쥐가 될 날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미군의 전진이 지속되자 드디어 중공군은 포위망을 좁히기 지작하며 잔인한 살율작전을 시작히였다. 월등한 화력을 갖춘 미군이지만 12만 대군의 인해전술 앞에서는 무슨 수가 없었다.

당시 한국전선에 투입된 중공군은 30만이었는데, 18만이 서부전선에서 워커의 군령권 부대들과 싸웠고, 동부전선에서 12만이 한국군을 포함한 알몬드의 군령권 부대들과 싸웠다. 1950년 11월 27일이었다.

서부전선에서는 연패를 거듭하여 후퇴에 후퇴를 거듭하였고, 서울을 다시 내어놓을 입장이었다.

동부전선도 무너지기 시작했는데, 특히 장진호 동쪽을 담당한 부대의 폐해가 심각하였다.

 

(장진호 동쪽)이라는 저서는 장진호전투를 전반적으로 다루지 않고, 패전이 아주 심각했던 장진호 동쪽 전투를 다루고 있다. 그러니까 장진호 서편 유담리 쪽을 담당했던 미해병1사단의 패전기록이 아니라, 미 10군단 7사단의 패전의 기록이라고 보면 되겠다.

12월 28일에 벌써 유담리와 하갈우리, 그리고 함흥으로 나가는 길목에 있던 하갈우리와 함흥 사이의 요충지 고토리까지 중공군에 의해 포위되었다.

11월 30일, 군단사령부로부터 10군단의 하갈우리로부터 퇴각하라는 명령이 하달되었고,

미해병대는 12월 1일까지 동해안에서 퇴각하라는 명령이 하달되었다. 후퇴를 거듭하고 있는 서부전선과 전선을 맞추기 위해서 였다.

 

유담리 턱밑까지 밀고 올라갔던 미제1해병대는 하갈우리에 남겨두고 온 사단본부와 병참본부로 악전고투 끝에 전열을 유지하면서 그래도 후퇴할 수 있었다.

그러나 퇴로가 막혀버린 장진호 동편의 신흥리 주변을 장악하고 있던 미7사단 병력은 운신의 폭이 아주 좁았다. 잘못하다가는 전멸될 지경에 처한 것이다.퇴로가 막혔기 때문에 알어붙은 장진호를 걸어서 하갈우리를 향해 남하하는 도리밖에 없었다.

속칭 패이스부대라고 칭해지는 32연대 3대대는 후퇴 도중 600 여명의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12월 2일 5시 30분, 패이스부대 첫 생존자가 장진호를 걸어서 하갈우리에 도착했다.이후 이틀간 2500명 중에서 1050명만이 살아서 장진호의 얼어붙은 수면을 걸어서 하갈우리 사단본부에 도착했다.

12월 4일, 10군단 후위대가 하갈우리로 철수를 완료했다. 그 사이 미군의 희생은 말할 수도 없었다.

중공군의 인해전술에 의한 희생도 컸지만, 무엇보다도 혹한에 의한 폐해가 훌씬 더 컸다.평균 온도가 영하 30도였고 경우에 따라서는 영하 40도까지 내려갔다.

가만히 있으면 얼어죽고, 몸을 움직이면 땀이나고 그 땀이 얼어서 몸을 얼게 했다. 그래서 영하 3-40도의 혹한 속에서도 웃통을 벗고 사격을 하는 형편이었다. 부상을 당하여 누워 있으면 99%는 얼어죽었다.

번역서 (장진호 동쪽)은 미 10군단 7사단의 후퇴의 과정을 추적하고 있다. 일종의 패전 기록이라고 보면 된다.  

12월 6일, 미해병1사단은 하갈우리를 장악하고 후퇴를 성공시키고, 편제를 흐트리지 않은 채 고토리를 향해 진군하였다. 해병대의 막강한 화력은 사지를 벗어나려는 강력한 의지로 중공군의 포위망을 뚫는데 성공했다.

 

12월 7일, 10군단 후위 부대들이 고토리에 집결했다.

고토리에서 흥남까지 후퇴하는데 또다시 일주일이 걸렸다.

12월 15일부터 24일까지 흥남부두로부터 철수가 시작되었다.

미군 10군단의 장진호 전투를 진주만 이후의 최대의 패전이라고 하면서도, 미국 전쟁사에서 유례가 드문 승리의 전투로 보는 이유는 12만 대군의 중공군을 궤멸시켜면서 후퇴에 성공한 전적을 찬양하기 위한 것이다. 지금 미국에서는 이 장진호 전투를 (17일간의 혹한)이라는 이름으로 영화로 찍고 있으며, 중국도 이 전쟁을 영화하려고 한다는 기사를 보았다.

그러나 장진호 전투는 연승을 자랑하던 미 최강 제1해병사단을 전장에서 겨우 목숨을 부지한 채 후퇴에 성공하게 한 수치스런 전투였으며, 조전부대라고 할 수 있는 미7사단의 심각한 폐해는 아무래도 이 전투를 승전이라고 보기 어렵게 만든다. 후퇴의 성공을 승전이라고 볼수는 없지 않은가.미제1해병사단은 이 전투에서 사단병력 12000명이 7000명으로 줄어들었다.

 

최근 7사단 32연대 3대대의 대대장 페이스 중령의 유골이 발견되었다. 52년간의 추적끝에 거둔 일대 쾌거였다. 유골을 수습한 이후 8년간 연구에 연구를 거듭하여 이 유골이 패이스중령의 것임을 밝혀 내는 쾌거를 거두었다고 한다. 미 해병대는 부상자 혹은 전사자를 전원 후송하는 것이 원칙이지만, 도저히 불가능할 때는 땅에 묻었다가 종전 후 수습한다.

 

허빈의 (장진호 전투)는 이런 장진호전투의 수치스런 면을 여실히 파헤치고 있어서 주목된다. 소설이 아니기 때문에 과장도 없고 시적인 면도 없다. 오직 정직한 전사로서의 기능을 다할 뿐이다. 장진호전투의 진면목을 알고 싶어하는 사람들에게는 유익한 책인 것같다.

 

스마트 폰 시대로 접어든 요즈음, 일반인들의 독서욕은 그만큼 줄어들었다. 

일반인들이나 출판사는 소설집이나 시집을 내어도 아주 적은 페이지의 가벼운 주제만을 다룬 것을 택한다.

이런 시대에 무거운 주제의 6.25 전쟁사를 다룬 400 페이지가 넘는 번역서를 낸 출판사 (문학과 의식사)와 번역자에게 경의를 표하고 싶다.

출처 : 경대사대 부중고1215회 동기회
글쓴이 : 정소성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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