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親盧성향 안경환 서울대 교수가 10년 공들여 박정희 대통령 친구 전기를 쓴 까닭은?/ 조선일보

鶴山 徐 仁 2013. 6. 14. 11:09

[클릭! 취재 인사이드] 親盧성향 안경환 서울대 교수가 10년 공들여 박정희 대통령 친구 전기를 쓴 까닭은?

  • 김기철 문화부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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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입력 : 2013.06.14 03:12

                                 
      

     
	김기철 문화부 차장

                                                김기철 문화부 차장

     

     

    지난달 9일 서울 강남의 한 중국음식점에서 조그마한 환송연이 열렸습니다. 황용주(1918~2001년)씨의 부인인 이창희(92세) 여사와 그의 딸 란서씨, 그리고 안경환(65) 서울법대 교수가 마련한 자리였습니다. 이 여사와 란서씨의 친척·지인 40여명이 참석했는데, 저도 그 자리에 있었습니다. 

    이창희 여사는 사흘 뒤 파리에 사는 딸 란서씨와 함께 프랑스에 영구 이주할 계획이었습니다. 고국 땅에서 갖는 마지막 자리인지라 모임은 찬물을 끼얹은듯 착 가라앉아 있었습니다. 이런 분위기를 반전(反轉)시키려는 듯 이 여사는 12년 전 세상을 떠난 남편을 떠올리며 또박또박 말했습니다.

    
	1967년 이화여대 2학년에 다니던 딸 란서와 함께 한 황용주 부부. 오른쪽이 황용주와 1939년 오사카 유학시절에 만나 평생을 해로한 이창희 여사. 지난 달 딸 란서가 사는 프랑스로 영구이주했다/까치 제공
    1967년 이화여대 2학년에 다니던 딸 란서와 함께 한 황용주 부부. 오른쪽이 황용주와 1939년 오사카 유학시절에 만나 평생을 해로한 이창희 여사. 지난 달 딸 란서가 사는 프랑스로 영구이주했다/까치 제공

    “나는 그의 아내가 아니라 평생 연인이었어!.” 90세를 넘긴 여인에게서 이런 말이 나올 줄 몰랐습니다.

    여든 넘게까지 함께 산 부부(夫婦)사이인데 이렇게 애틋하게 남편을 추억하는 아내라니, 약간 충격이었습니다. 이창희 여사는 광주수피아 여고를 다니다 1938년 학교가 폐교되자 일본 오사카로 유학을 떠난 신여성입니다. 일하면서 돈을 벌어 공부하던 중 오늘의 주인공인 남편 황용주를 만나 자유연애로 결혼했습니다. 

    
	1962년 8월 해운대해수욕장을 찾은 박정희 당시 최고회의 의장과 황용주 부산일보 사장/까치 제공
    1962년 8월 해운대해수욕장을 찾은 박정희 당시 최고회의 의장과 황용주 부산일보 사장/까치 제공

    문재인 대선 캠프 새정치위원장 맡았던 안경환 교수와 황용주씨 가족과의 ‘인연’

    황용주씨는 고(故) 박정희 대통령과 대구사범학교 4기 동기생입니다. 1950년대 후반 언론계에 투신했고 부산일보 주필로 있던 1960년, 부산 군수기지사령관에 부임한 박정희에게 쿠데타를 부추겼던 인물입니다. 5·16 이후 부산일보 사장, 문화방송 사장으로 잘 나가다 1964년 11월, 필화(筆禍) 사건으로 반공법위반으로 구속되면서 세인의 눈앞에서 사라졌습니다. 40대에 최고 권력자의 측근이었다가, 나머지 40년 가까이를 범부(凡夫)로 살다가 조용히 눈을 감은 겁니다.

    아무도 기억하지 않던 황용주를 되살려낸 것은 최근 까치출판사에서 ‘황용주그와 박정희의 시대’를 펴낸 안경환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입니다. 솔직히 “그가 과연 전기까지 낼 만한 인물인가” 싶었습니다. 무엇보다 안 교수가 왜 황용주 전기를 썼을까 하는 게 궁금했습니다.

     

     

     

     

    
	안경환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조선일보DB

     

     

    안경환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조선일보DB
                                       

     

     

     

     

    안 교수는 지난해 대통령 선거 때 문재인 민주당 후보 캠프의 새정치위원장을 맡았고, 노무현 정부때 국가인권위원장, 참여연대 창립 멤버 등 진보진영에서 활동하신 분인데, 왜 박정희의 옛친구에게 관심을 가졌을까도 의아했습니다.

    안 교수는 황용주와 같은 경남 밀양 출신입니다. 게다가 안 교수는 평소 일제치하 학병으로 끌려갔던 ‘학병세대’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1987년 서울대 교수가 된 후, 야인(野人)이 된지 오래인 황용주를 매년 찾아가 만났답니다.

    사실, 안 교수는 황용주와 악연(惡緣)이 있습니다. 황용주가 1955년 밀양의 세종학교 초대 교장이던 시절, 재단과 갈등을 빚어 학교에서 쫓겨납니다. 그 후임 교장으로 온 이가 안 교수의 선친입니다. 밀양 부잣집 막내아들이자 일본 유학을 거쳐 고려대를 졸업한 지식인이었습니다.

    해방 직후에도 아나키스트 운동에 참여하신 분으로 알려져있습니다. 아마도 안 교수는 ‘황용주 전기’를 쓰면서 아버지 세대의 구원(舊怨)을 풀고, 그 세대와의 화해를 염두에 두고 있었을 지도 모르겠습니다.

    안 교수는 책에서 황용주에 대해 깍듯한 예의를 갖추고 있습니다. “어떤 나라를 만들 것인가 고뇌하고, 만들어가면서 분노하고 좌절했던 고인(故人)의 세대, 그 세대 지식인들이 입었던 상처에 따뜻한 위로와 깊은 경의를 표한다. 누가 뭐래도 대한민국의 역사는 성공한 역사다. 그 성공의 역사에 이분들의 열정과 좌절, 환희가 분노가 밑거름이 되었다.”

    앞 세대에 바칠 수 있는 최고의 헌사(獻辭)가 아닌가 싶습니다. 요즘처럼 편을 나누고, 자기 편이 아니면 객관적 평가는 고사하고 깎아내리기에만 올인하는 시대에서 이런 평가를 할 수 있다는 게 드문 일입니다.

    일기장, 각종 자료 및 증언·인터뷰 등으로 12년 전 타계한 황용주씨 복원(復元)

    안 교수는 편가르기에 가담하지 않고, 균형잡힌 시각으로 세상을 보려는 지식인의 사명을 늘 생각하는 분입니다. 최근에도 “박근혜 대통령이 박정희의 딸이라고 해서 비토(veto)하는 것은 또 다른 연좌제다. 그의 정치를 보고 비판해야지, 핏줄을 가지고 비판해서는 안된다”고 얘기했다가 박근혜 대통령을 좋아하지않는 주변 어른들께 야단을 많이 맞았다고 하시더군요. 여기엔 아나키스트 운동을 했던 아버지 때문에 ‘연좌제’로 몰려 고생했던 젊은 시절에 대한 기억도 한몫한 것같습니다.     

    
	1962년 12월 박정희 최고회의 의장과 황용주. 세대 필화사건 2년 전으로 마흔 넷 황용주는 부산일보 사장으로 욱일승천하던 때였다/까치 제공
    1962년 12월 박정희 최고회의 의장과 황용주. 세대 필화사건 2년 전으로 마흔 넷 황용주는 부산일보 사장으로 욱일승천하던 때였다/까치 제공

    안경환 교수는, 황용주나 박정희는 모두 5·16을 국가 비상상황에서 부득이한 수단으로 생각했고, 권력을 장악한 후에 산업화를 통해 근대국가를 만든다는 구상이 있었다고 봅니다. 5·16은 헌정질서를 파괴한 쿠데타인 것은 분명하지만, 그것을 통해 근대국가를 세우려는 열정을 가지고 있던 사람들을 비난만 할 순 없고, 또 그 사건이 오늘의 대한민국을 가져오는 계기가 됐다는 것을 인정한다는 것이지요. 굴곡 많은 우리 현대사를 좀 더 넉넉하게, 현실적으로 받아들이는 여유가 있습니다.    

    황용주의 노년은 쓸쓸했습니다. 연초 옷을 깨끗이 갈아입고 손님 맞을 준비를 하지만, 아무도 찾지 않는 방문객 때문에 허탈해 하기도 했습니다. ‘소년 등과(登科)’ 이후 급전직하와 ‘노년 빈곤’까지 겪으면서 20년 가까이를 더 살았습니다.

    젊은 날의 황용주와 가족들이 실린 빛바랜 흑백사진을 들여다보며 한참동안 잠겼습니다. 학병세대와 같은 험난한 시대에 태어나지 않은 게 감사했고, 오늘을 만드는 데 기여했던 그분들의 희생과 헌신을 기억하지 못했다는 것도 미안했습니다.

    
	1937년1월1일 오사카 유학시절 황용주가 쓴 일기장. 유학생들은 대부분 일어가 상용문자였다/까치 제공
    1937년1월1일 오사카 유학시절 황용주가 쓴 일기장. 유학생들은 대부분 일어가 상용문자였다/까치 제공

    안경환 교수가 ‘나의 세대의 무지와 후속세대의 경박한 오만에 절망하곤 했다’고 쓴 것처럼, 우리는 이전 세대에 대한 존경은커녕 그들의 약점만 들춰내기에 몰두합니다. 황용주의 생각과 실천에 동의하든, 그렇지 않든, 그분들이 헤쳐 나가려했던 고민과 열정에 대한 공감과 이해가 아쉬운 시절입니다. 그런 점에서 안경환 교수가 참, 힘든 일을 했다고 생각합니다. 같은 편끼리만 몰려다니는 요즘 세상에서, 정말 드문 미덕이기 때문입니다.

    안 교수는 이 전기 집필을 위해 10년 넘게 각종 자료를 모으며 공을 들여 정성을 다해 준비했다고 합니다.

    2001년 황용주 선생이 타계하면서 그가 써온 일기장이 안 교수에게 넘어왔고, 황용주와 관련된 사람들을 하나씩 만나면서 증언도 들었습니다. 이렇게 공들인 취재와 묵힌 생각들이 책 곳곳에 담겨있습니다.

    안 교수는 황용주와 같은 학병세대인 소설가 이병주의 평전을 쓸 계획도 갖고 있다고 하시더군요. 안 교수는 수년 전 조선일보에 독서칼럼을 쓸 때, 이병주 문학을 높이 평가했던 적도 있습니다. 두어달 후 정년을 맞는 안 교수가 어떤 역작(力作)을 내놓을지 기대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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