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13.03.16 09:22 | 수정 : 2013.03.16 14:06
“나는 언제나 다음 꿈을 꾸었다”
김동연 국무총리실장 인생극장
- 김동연 국무총리실장이 지난 3월 8일 세종로 정부서울청사에서 열린 차관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회의실로 들어서고 있다./뉴시스
1950~1960년대 서울에서 가난한 사람이 살던 곳이 청계천 판자촌이었다. 6·25전쟁이 끝나자 전국에서 무작정 상경 러시가 벌어졌다.
서울에 왔지만 가진 것 없고 비빌 곳 없는 이들이 모여든 곳이 청계천이었다. 이들은 목재로 기둥을 세우고 판자로 비바람을 막아 거처를 마련했다. 무허가 판잣집이었다. 기와지붕과 함석지붕은 언감생심, 꿈도 꾸지 못했다. 바람에 판자가 날아가지 않게 벽돌이나 돌멩이를 얹어놓는 게 전부였다.
건천(乾川)인 청계천은 아낙네들의 빨래터였고 오물의 집하장이었고 아이들의 놀이터였다. 흑백사진으로 남아 있는 청계천 판자촌을 보노라면 이런 곳에서도 삶이 진행되었구나 하는 생각에 숙연해진다. 한 사진작가의 청계천 판자촌 사진을 보면 이런 간판이 나온다.
■ 열한 살 나이에 소년가장이 되다
‘名山 藥 구렁이 살모사 두더지’. 오물 냄새가 진동하고 모기와 파리로 들끓던 청계천에 복개공사가 시작된 것은 1960년대 말. 복개공사와 함께 무허가 판잣집들이 헐리면서 이들은 또 한 번 서울에서 밀려나 변두리인 성남에 터를 잡았다.
소년의 아버지는 서울 신당동에서 미곡 도매상을 하고 있었다. 그러던 아버지가 심장마비로 갑자기 돌아가셨다. 아버지 나이 서른셋에 젊은 아내와 어린 아이 넷을 남겨놓고 불귀(不歸)의 객이 되었다. 가장을 잃고 하루아침에 가난에 몰린 일가가 선택한 곳은 청계천 7가 판자촌. 그게 1968년이었다. 소년의 나이 열한 살 때였다. 일가는 무허가 판잣집을 짓고 하루하루를 연명했다. 청상(靑孀)이 된 어머니는 자식 넷을 먹여살리려 채석장 돌 나르기, 나물 행상 등 험한 일을 가리지 않았다. 몇 년 뒤 무허가 판자촌이 도시정비사업으로 헐리면서 일가는 철거민 신세가 된다. 이들이 정착한 곳은 성남시 수정구 단대동 허허벌판. 소년의 일가는 이곳에서 천막을 치고 살았다. 그로부터 40여년이 흐른 뒤 소년은 장관이 되었다. 김동연 국무총리실장 얘기다.
김동연 국무총리실장은 인생극장의 주인공이다. 그러나 온화한 그의 얼굴에서는 도저히 청소년기의 불우를 읽어낼 수가 없다. 직접 만나 보면 귀공자 같은 분위기가 더 물씬 풍긴다. 고위공직자 특유의 뻐기거나 으스대는 태도 같은 것은 찾기가 힘들다. 그의 휴먼스토리는 기획재정부 예산실장, 기획재정부 2차관에 임명되면서 조금씩 언론에 알려졌다.
■ 朴 대통령이 발탁한 배경
그는 인사권자인 박근혜 대통령 입장에서 보면 껄끄러운 사람일 수 있다. 2012년 대선 전 여야가 앞다투어 보편적 무상복지를 내세울 때 그는 2차관으로서 이를 포퓰리즘이라고 반대했던 인물이다. 김 실장 본인이나 덕수상고 동문들은 ‘장관 승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고 한다. 그런데도 박근혜 대통령은 그를 장관에 기용했다. 박 대통령은 취임사에서 “스펙 초월 사회를 만들겠다”고 약속했다. 김동연 실장은 바로 오로지 실력만으로 차관에 오른 인물이다. 박 대통령이 그를 발탁한 배경이다.
그는 1957년 충북 음성에 태를 묻었다. 아버지는 1960년대 초 솔가해 서울로 올라와 미곡상에 취직했다. 미곡상 서기를 거쳐 독립적인 미곡상을 차려 제법 유복한 생활을 하고 있던 상황에서 아버지가 돌연 세상을 떴다.
■ '고덕회' 멤버
베이비붐 세대의 한복판에서 그는 덕수상고와 국제대(야간)를 졸업했다. 어딜 가나 사람으로 미어터지던 베이비붐 세대. 그의 청소년기는 서울의 변천사, 특히 주변부 역사와 고스란히 겹친다. 그의 청년기는 또 개발연대의 한국현대사와 상당 부분 일치한다.
김동연은 덕수상고를 졸업했다. 그의 덕수상고 동기로는 홍준호 조선일보 경영기획실장, 김효준 BMW코리아 사장 등이 있다. 현재 덕수산업정보고로 이름이 바뀐 덕수상고는 집안 형편이 넉넉지 않은 똑똑한 학생들이 진학하는 학교로 유명했다. 그는 성남 단대동 천막촌에 살면서 덕수상고를 다녔다. 어머니와 동생 세 명을 먹여살려야 했던 그는 대학 진학은 꿈도 꾸지 못했다. 일찌감치 취업반에 들어갔고, 고교 졸업 4개월 전인 1974년 11월 한국신탁은행에 취직했다.
그는 왜 한국신탁은행을 선택했을까? 당시 덕수상고 학생들은 진학반과 취업반으로 나뉘었다. 집안 형편이 어려운 학생들은 낮에는 돈을 벌고 야간에 대학 공부를 하는 경우가 있었다. 야간대학 진학을 희망하는 학생들은 국책은행에, 그렇지 않은 학생은 일반은행에 입행하곤 했다. 한국은행, 외환은행, 산업은행, 신탁은행 등이 당시 국책은행에 속했다. 국책은행은 일반은행과 달리 창구업무를 하지 않는 데다 근무시간이 일정해 야간대학 진학을 원하는 학생들에게 인기가 높았다. 당시 야간대학을 운영하고 있던 대학으로는 성균관대, 동국대, 건국대, 국제대 등이 있었다.
지금 한국신탁은행이라는 이름의 은행은 없다. 안국동에 있던 한국신탁은행은 서울은행과 합병해 서울신탁은행이 되었다가 2002년 하나은행으로 태어났다. 신한은행 부행장을 역임한 고림개발 남기도 부회장은 그의 덕수상고 6년 선배이면서 대학 직속선배다. 그가 한국신탁은행에 입행했을 때 남기도 부회장은 한국신탁은행 인사과에 근무하고 있었다. 남기도 부회장의 증언이다. “신입행원들 연수를 시키다 보니 김동연이 눈에 띄었다. 똘망똘망하고 눈빛이 워낙 강렬하고 연수에 임하는 태도가 진지했다. 당시 신입행원들은 연수가 끝나면 지점에 보내는 게 관례였는데 나는 김동연을 본점 신용조사부에 보냈다.”
열일곱 살에 한국신탁은행 본점 행원이 된 그는 야간대학인 국제대 법학과에 진학했다. 그는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외할머니, 어머니, 세 동생을 부양해야 했기에 덕수상고를 졸업하기 전에 은행에 취직해 야간대학을 마쳤다. 어린 나이에 은행에 들어갔을 땐 우쭐했다. 하지만 고졸 출신이라는 현실의 벽은 높았고, 100m 달리기 경주에서 50m쯤 뒤처진 채 출발하는 답답한 기분이 들었다. 그래서 야간대학에 다녔다. 어느날 은행 합숙소에서 옆방 선배가 쓰레기통에 버린 고시 관련 잡지를 보고 고시에 도전하기로 결심했다. 그전까지는 고시를 생각해 보지도 않았다. 그리고 1982년 입법고시에 붙었고, 같은 해 행정고시(26회)에도 합격했다. 세상을 원망하고 세상에 절망한 적도 있었지만 나를 지탱해준 것은 분수에 맞지 않게 가졌던 꿈과 낙관적인 마음자세였다.”
행정고시 합격 후 8년간 다닌 은행에 사표를 냈다. 1983년 3월 경제기획원에서 사무관으로 공직 생활을 시작했다. 경제기획원이 어떤 곳인가. 경기고와 서울대 아니면 명함도 못 내밀 정도로 엘리트의식이 강한 집단이다.
그는 ‘고덕회’ 멤버다. 고덕회는 덕수상고 출신으로 고시에 합격한 사람들의 모임이다. 은행을 다니며 고시를 준비한 사람들은 거의 대부분 중간에 은행을 그만두고 고시에 전념했다. 하지만 그는 행정고시에 붙어 첫 출근을 하기 전날까지 은행에 다녔다. 고덕회 멤버 중 주경야독으로 고시에 합격한 사람은 그가 유일하다. “집안 형편상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다”고 그는 말한다.
덕수상고 출신으로 행정고시를 거쳐 차관급 이상 고위공직에 오른 이는 현재까지 3명이 있다. 김동수 전 공정거래위원장과 반장식 전 기획예산처 차관, 김동연 국무총리실장 후보자가 그 주인공이다. 같은 덕수상고를 나왔더라도 김동수 전 공정거래위원장은 고려대 출신이다. 고교 2년 선배인 반장식 전 차관은 국제대학도 선배다. 반장식 전 차관과 김동연 후보자는 기획재정부에서도 선임자와 후임자로 일했다.
상고와 야간대 출신이라는 ‘비주류’의 핸디캡에도 불구하고 그는 핵심 요직을 두루 거쳤다. 기획예산처 사회재정과장, 재정협력과장, 재정정책기획관, 청와대 경제금융비서관, 기획재정부 예산실장, 기획재정부 제2차관이 그가 맡은 보직이다.
그는 1989~1993년 미국 미시간대학에서 정책학 석·박사 학위를 땄다. 국가 장학금과 미국 풀브라이트 장학금을 받아 3년9개월이라는 최단기간에 석·박사 학위를 받은 기록도 보유하고 있다. 김동연 실장은 “공직 생활 초기에는 학벌·학연이 없어 손해 본다는 생각을 많이 했지만 끊임없는 자기 계발과 노력을 통해 이런 고민을 극복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정부의 정책은 결국 예산으로 표현된다. 그는 재정정책과 예산에서 경력을 쌓았다. 재정부 출입기자들은 그를 소신이 뚜렷하고 할 말을 하는 사람으로 기억한다. 지난해 여야가 한창 경쟁적으로 0~2세 보육정책을 발표할 때였다. 그는 “재벌가 손자까지 정부가 보육비를 대주는 것은 문제있다”고 제동을 걸어 정치권의 미움을 사기도 했다. 그는 국민일보와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이 문제는 재원 문제에 앞서서 보육정책을 어떻게 끌고 갈 것인가 하는 점에서 중요하다. 0~2세의 경우 많은 전문가들이 가정양육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현행 지원체계의 문제점을 제기하고 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도 가정 양육을 권고하고 있다. 그런데 보육료를 100%를 지원하다보니 ‘보육시설에 보내지 않으면 손해’라는 생각으로 모든 영유아를 시설에 보내는 일이 많아졌다. 따라서 보육시설에 보낼 것인가, 가정양육으로 바꿀 것인지 현행 지원제도를 지속하는 것을 포함해 보육 지원체계를 재구조화하는 방향에 대해 검토하고 있다.”
■ “나는 언제나 다음 꿈을 꾸었다”
그가 공직자로서 장관까지 올라갔지만 그에게는 아픈 상처가 있다. 앞서 언급한 대로 철부지 나이에 소년가장이 되어 집안을 책임져야 했던 그 세월이다. 그는 기획재정부 2차관 시절 동아일보에 기고한 ‘죽기 전에 이것만은…’에서 가슴에 묻어두었던 아버지 얘기를 꺼냈다.
“항상 꿈을 꾸었다. 그중에서도 절실한 꿈이 하나 있었다. 이룰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버킷리스트 가장 앞 자리에 있는 꿈이었다. 바로 돌아가신 아버지와의 대화였다.
아버지는 서른셋 젊은 나이에 아내와 네 자식을 두고 돌아가셨다. 나는 장남으로 열한 살이었다. … 일찍 철이 들면서 갖게 된 가슴에 사무친 꿈 하나는 바로 돌아가신 아버지와의 대화였다. 단 하루, 아버지와 철든 남자 대 남자로서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면 수명을 일 년쯤 단축해도 좋다고 생각했다. 만약 아버지와 대화할 수 있다면 처음에는 아버지를 원망하리라 생각했다. 뭐가 급해서 젊은 아내와 네 자식을 두고 그리 빨리 가셨냐고. 장남인 제 좁은 어깨에 너무 많은 짐을 얹어서 힘들었다고.
한참 뒤에는 도대체 아버지가 어떤 분이었냐고 묻고 싶었다. 공부가 짧았지만 젊어서 사업을 일으켰던 분. 남 돕기를 좋아했던 분. 1등을 하지 못하면 어김없이 매를 들던 분. 그런 그분이 어느 몹시 추운 날 등굣길 내게 ‘춥지? 춥지 않게 해줄게’ 하며 불러줬던 ‘꽃집의 아가씨는 예뻐요. 그렇게 예쁠 수가 없어요’라는 노래. 돌아가신 뒤 발견한 일기장에서 본 젊은 아버지의 고민들. 그분을 만나면 묻고 싶었다. 도대체 아버지는 어떤 분이었냐고. 어떤 꿈을 가지고 계셨냐고.”
청소년기 불우한 가정환경에서 성장한 사람 중에는 자신에게 닥친 불행을 사회구조 탓으로 돌리며 왜곡된 생각을 키우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그는 균형된 사고방식의 소유자다. 예산과 정책을 다루는 공직자로서 그는 정치권의 ‘포퓰리즘적 요구’와 맞서왔다. 공직자로서 그의 신념은 ‘사회변화에 대한 기여’이다. 김동연 실장은 이 대목에 대해 솔직한 고백을 털어놓았다.
“나도 처음에는 원망스럽고 세상이 불공평하다고 생각했다. 열등감도 많았다. 그렇다고 내가 일찍 주저앉으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은행원으로 편안한 생활에 만족할 수도 있었지만 나는 꿈을 키워 갔다. 은행에 다니면서는 대학생의 꿈을 키웠고, 대학에 다니면서는 고시 합격의 꿈을 키웠다. 공무원이 되어서는 유학을 꿈꿨다. 나는 언제나 자리가 아닌 다음 단계의 꿈을 키우며 살아왔다.”
인간극장의 주인공이기에 그는 강연 요청을 많이 받는다. 지난해 6월에는 학생 수가 모두 21명인 강원도의 중학교를 다녀오기도 했다. 어려운 가정형편 때문에 희망을 갖지 못하는 어린이들에게 희망을 심어달라는 교사의 편지를 받고 나서였다. 그는 이곳을 다녀온 뒤 “어려운 학생들의 진학과 취업을 지원하는 ‘교육 희망사다리’ 사업을 역점적으로 추진해야겠다”고 결심했다. 이후 그는 학생들로부터 십여 통의 편지를 받았고, 지난 2월에는 답례로 이 중학교를 찾아가 다시 학생들을 만났다.
그는 중앙부처 차관으로 드물게 중앙선데이에 1년6개월간 칼럼을 기고를 했다. 한두 편만 읽어 봐도 금방 그의 필력과 내공이 간단치 않음을 짐작할 수 있다. 고위공무원이 직접 이 정도 수준의 글을 쓰기는 결코 쉽지 않다. 이 부분에 대한 의문은 고교·대학 선배인 남기도 부회장의 설명으로 해소되었다.
“김동연이 본점 신용조사부에서 일하는 데 김동연이 글을 잘 쓴다는 얘기가 금방 퍼졌다. 기업에 대한 종합의견을 쓰는데 김동연은 한 번도 고치지 않고 거의 완벽하게 종합의견을 써낸다는 것이다. 알고 보니 어렸을 때부터 김동연은 백일장 대회에 나가면 거의 장원을 도맡아했었다는 것이다.”
현재의 고위공직자 중 김동연 실장만큼 어려운 청소년기를 보낸 사람은 찾기 힘들다. 고난을 극복한 사람이기에 그의 말 한 마디 한 마디는 큰 울림으로 다가온다. 그는 젊은날의 고난을 ‘위장된 축복’이라고 표현한다. 젊은날의 고난은 성공의 밑거름이라는 뜻이다. 기자들이 가장 자주 던지는 질문이다. 기자 역시 이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 어려움의 한복판에 있을 때는 원망스럽고 힘들기도 하다. 축복은 때때로 고통스러운 모양의 탈을 쓰고 찾아온다. 그래서 그 탈을 깨고 나면 그게 자신에게 축복이 된다. 자기 하기에 따라 얼마든지 축복으로 만들 수 있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어려웠던 시절은 내게 ‘위장된 축복’이었다. 그때 어려움이 없었다면 지금의 나는 없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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