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글러스 맥아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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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글러스 맥아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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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880년 1월 26일 미국 아칸소 주 리틀록 |
사망 | 1964년 4월 5일 (84세) 미국 워싱턴 D.C. |
사인 | 병사 |
국적 | 미국 |
별칭 | 맥원수 |
학력 | 미국 웨스트포인트 사관학교 졸업 |
직업 | 군인, 관료, 정치인, 사회운동가 |
종교 | 개신교(장로교) |
부모 | 아서 맥아더 주니어 |
서명 |
더글러스 맥아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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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0년 1월 26일 - 1964년 4월 5일 | |
한국전쟁 인천상륙작전 중의 맥아더 | |
태어난 곳 | 미국 아칸소 주 리틀록 |
죽은 곳 | 미국 워싱턴 D.C. |
복무 | 미국 |
복무 기간 | 1903년 ~ 1937년 1941년 ~ 1951년 |
최종 계급 | 원수 |
근무 | 미국 육군 |
주요 참전 | 제1차 세계 대전 제2차 세계 대전 한국 전쟁 |
서훈 내역 | 명예 훈장 육군 수훈 복무 훈장 해군 수훈 복무 훈장 수훈 비행 십자장 은성 훈장 동성 훈장 퍼플 하트 욱일장 |
기타 이력 | 일본역사 최초의 외국인 집정 |
더글러스 맥아더(Douglas MacArthur. 1880년 1월 26일 ~ 1964년 4월 5일)는 미국의 군인으로 군 계급은 미 육군 원수까지 지냈다.
목차[숨기기] |
[편집] 개요
제1차 세계 대전과 제2차 세계 대전, 한국 전쟁에 미국군과 연합군의 지휘관으로 활동하였다. 필리핀 식민지의 통치자였으며, 1945년 2차 세계 대전 종전 이후에는 극동군의 지휘관을 지냈다. 또한 남한의 미군정 역시 그의 관리 대상이었다.
1937년 퇴역하고 필리핀육군 대장으로 추대되었다가, 1941년 미육군 대장으로 복귀한 후 1944년 원수 계급을 받았다.
제2차 세계 대전의 종결과 일본의 항복이 있은 후 일본에 주둔하다가 한국 전쟁을 지휘하였다. 한국 전쟁 당시 미국군 사령관으로 참전하였으며, 북한의 인민군이 대구까지 밀고 내려왔으나, 인천을 폭격하여 인민군을 남과 북으로 양분시켰다.(인천상륙작전 참고) 그로 인해 남한에 남은 인민군들은 이후 상당수가 빨치산이 되기도 했다. 1945년부터 1951년까지 외국인 신분으로 일본군 점령사령부 원수를 지냈다.
한 때 그가 한국 내란에 끼어들어 학살을 자행한 침략자라는 주장도 있었으나 사실 내란설 자체가 구 소련의 비밀 문서가 공개됨으로 인해 유명무실해진 상황이다.
[편집] 성명 표기
더글러스 맥아더의 성은 원래 정확한 영어 발음 표기는 /məkˈɑrθər/이다. 외래어 표기법에 의한 영어의 한글 표기 원칙대로 그의 성을 한국어로 표기하면 매카서가 맞으나 대한민국에서는 관습에 의한 통용 표기를 존중하여 맥아더로 표기하고 있다.
[편집] 생애
[편집] 생애 초기
[편집] 출생과 소년기
더글러스 맥아더는 1880년 아칸소주 리틀록의 병영에서 스코틀랜드에서 이민한 이민자 출신 군인가의 아들로 태어났다. 위로 4년 연상의 아서 3세 맥아더(1876-1923)와 2년 연상의 맬컴 맥아더가 있었다. 그러나 맬컴은 5세 때인 1883년에 사망한다.
[편집] 부친
더글러스의 아버지 아서 맥아더 주니어(Arthur MacAthur Jr.)(중장 예편)는 독실한 개신교 신자로, 유년기부터 그에게 영향을 미쳤다. 아버지 아서 주니어는 미군 장교로 미국-스페인 전쟁과 미국-필리핀 전쟁에 참전하였고, 1900년 미국이 필리핀 전쟁에서 승리를 거둔 뒤 점령하고 있던 필리핀의 군정 총독으로 재직한 바 있었다. 한때 예편하고 돌아와서 법률공부를 했다가 다시 군인으로 돌아갔다고 한다. 아버지 아서는 행군때마다 자신도 사병들과 똑같이 걸음으로써, 어린 맥아더에게 지휘관이 먼저 규칙을 지켜야 한다는 것을 가르쳐 주었다. 군인정신을 가진 아버지의 영향을 받은 그는 군인이 되기로 결심하고 웨스트포인트 사관학교로 진학한다.
[편집] 모친
어머니 메리 하디 맥아더(Mary Pinkney Hardy MacArthur)는 자신의 사생활을 포기하면서까지 아들의 교육에 매달렸는데, 아들이 웨스트포인트 사관학교에 진학했을 때에는 사관학교 근처에 방을 얻어 숙식하면서 아들을 뒷바라지 하였다.
[편집] 사관학교 생활
웨스트포인트 사관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했는데, 사관학교 당시 만연한 학교내 폭력문제로 방황하기도 하였다.
당시 웨스트포인트 사관학교에서는 권투나 체벌을 빙자한 선배들의 가혹 행위때문에 일부 사관 후보생들이 자살하거나 학교를 그만두는 일이 있었을 정도로 폭력이 심각했다. 이 사실이 알려지면서 윌리엄 매킨리 대통령 지시로 의회에서 청문회가 벌어졌는데, 이는 청년 맥아더에게 심적인 방황의 원인이 되었던 것이다. 당시 맥아더는 학교폭력 피해자의 편에서 가해자들을 고발할 것인가, 아니면 군인으로서 입을 무겁게 해야 할 것인가로 고민했다고 한다. 그러나 맥아더는 곧 양심에 따라 가해자들을 고발하는 것으로 결정한다.
한편 웨스트포인트 사관학교에 재학 중일 때에도 그는 다소 동료 관계가 원만하지 못했다고 한다. 웨스트포인트 출신들의 결혼식은 대개 신랑과 교우들의 끈끈한 유대관계를 보여주는 중요한 사교 행사였다. 그런데도 그의 첫 번째 결혼식은 친구와 동료 하객이 너무 적어서 주목을 끌 정도였다. 한편 그는 가식적인 성격을 지독하게 혐오하여, 마음에 없는 말과 행동을 하는 이가 눈에 띄면 대놓고 지적하고 비꼬기도 했다. 이런 태도 때문에 친구보다는 적을 상당히 많이 만들어 놓았다고 한다.[1]
웨스트 포인트를 졸업할 때까지 그는 4년동안 역대 최고 점수인 98점대의 우수한 성적을 유지했다. 맥아더는 아이젠하워 미국 대통령의 사관학교 대선배였는데 졸업 때 성적은 맥아더가 수석인 반면 아이젠하워(Class 1915) 132등이었다. 한편 운동을 좋아하여 교내 야구 선수로 활동하기도 하였다.
1912년 9월 5일 그의 아버지 아서 주니어가 사망한다. 맥아더의 어머니는 사관학교 근처의 호텔에서 묵으며 아들을 뒷바라지 했다고 한다.
[편집] 1, 2차 세계 대전 참전
[편집] 1차대전 참전과 예편
제1차 세계 대전, 제2차 세계 대전, 한국 전쟁 등에 참전했으며, 제1차 세계대전 미군참전시 당시 무지개부대(42사단) 참모장인 대령으로 프랑스에서 복무하였으며. 제1차 세계 대전42사단 근무 시 1918년 육군 준장으로 승진하여, 프랑스 주둔군 84보병여단장 , 42사단 임시사단장이 되었는데 프랑스에서 미군 최연소 사단장이기도 했다. 이후 1919년 육군사관학교 교장이 되고, 모교 웨스트포인트 사관학교의 교장, 1차대전 종전 이후 1925년에 최연소 육군 소장이 되었고, 1930년 윌슨 대통령때 미 13대 육군 참모총장이 되었다. 후버 대통령때인 1932년 중엽 정규군 부대를 워싱턴으로 보내 '노병 보너스 군대'(Bonus Army of veterans)를 무력으로 해산하자 사방에서 비난이 쏟아졌다.1935년 10월 프랭클린 D. 루스벨트 대통령 초기에 육군참모총장 임기를 마쳤으며 1935년에서 1937년까지 필리핀 정부 최고 군사 고문을 지냈다. 1937년 퇴역하였다. 그해에 필리핀 육군 원수(General of the Army)가 되었다. (미군 역사상 육군원수 직함을 가진 사람은 율리시스 그랜트, 윌리엄 테쿰세 셔먼, 셰리던, 존 J. 퍼싱 총 4명이다. 참고로 1976년 포드 대통령이 조지 워싱턴 대통령을 명예대원수(General of the Armies)로 추서했다.) 그의 아버지는 필리핀 총독을 지냈으며, 2대에 걸쳐 맥아더가문은 필리핀에서 막대한 이권과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다. 1935~41년에는 자금의 부족을 무릅쓰고 對日 필리핀 방위군을 조직하는 데 전력했다.)
[편집] 현역 복귀와 2차 대전 참전
- 제2차 세계 대전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1939년 제2차 세계 대전이 발생하자 참전을 자원하였다.
제2차 세계 대전중인 1941년 7월에 예비역에서 소집되어 다시 현역으로 복귀함과 동시에 필리핀 주재 미국 극동군 최고사령관이 되었다. 1942년 3월 서남 태평양 방면 연합군 총사령관이 되고, 1944년 원수가 되었다. 1945년 일본군을 격파하고 필리핀에 상륙하였으며, 이후 대일(對日) 점령 연합군 최고 사령관으로서 8월 30일 일본 땅에 첫 발을 디뎠다.[2]
8월 초 미국 대통령 해리 트루먼은 일본에 원자폭탄 투하를 지시했다. 8월 10일 새벽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이 투하되었고 다수의 인명사상자를 내고 일본은 천황 히로히토가 직접 항복 성명을 발표함으로써 제2차 세계 대전은 종결된다. 당초 미 공군이 원자폭탄을 투하할 장소로 예정한 곳 중 하나는 오사카 시였으나, 이곳은 일본인의 정신적인 유산이 많이 소재한 곳이라 타격을 가했다가 일본인들의 항전 의지를 자극할수 있다 하여 맥아더가 직접 오사카 폭격은 배제했다는 설도 있다. 사실 맥아더는 원자폭탄 공격보다는 일본 본토 진입을 염두에 두고 니미츠 원수와 지휘권을 조율 중이었다.
[편집] 일본에서의 군정 활동
- 연합군 최고사령부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일본 역사 최초의 외국인 집정관이기도 한 맥아더는 일본에 대한 정서를 어느정도 이해하고 알고 있었다. 그래서 맥아더는 일본인을 쉽게 다스리기 위해 일본 천황의 “덴노는 인간” 발언을 이끌어 낸 것으로도 유명하며, 성서를 대량으로 유포하는 등 종교로써 일본을 순응시키려고 하였다.
즉, 일본 군국주의의 사상적 근거가 된다고 판단한 신토를 무력화시키고, 신화교육 등 철저히 금지시켜 전쟁도발을 막고자 한 것이었다. 그외 일본에서의 맥아더의 탈군국주의화 정책으로는 사회주의와 노동운동 묵인을 통한 자본가 견제(자본가들이 군대와 협조하지 못하게 하려는 정책), 교과서 내 천황 신격화 금지 조치, 군국주의 체제의 버팀목이었던 재벌해체, 전쟁 책임이 있던 공직자 2만명 공직추방 등이 있다. 그러나 그의 이러한 시도들은 시행되는 도중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이후 일본 사회가 다시 보수화되면서 의미가 없게 되었다. 공직추방령이 해제되면서 전전의 우익성향 정치인, 공직자들이 모두 복귀했으며, 해체되었던 재벌은 다시 재결합하였다. 이로 인하여 메이지유신 지지자들로부터 맥아더는 GHQ막부의 쇼군이라는 칭호를 얻게 되었다.
[편집] 한반도에서의 영향 및 활동
[편집] 미 군정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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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년 초가을, 이승만 대통령 내외는 정한경(1949년 1월 주일대표부 대사로 임명된다.), 김양천 비서, 김동성 공보처장, 이정순 공보국장 4명의 수행원과 함께 일본을 처음으로 방문하였다. 이 방문은 맥아더의 초청으로 이루어진 것으로서, 1박2일은 비공식적 사교 방문이었으나, 대한민국이 주권을 회복하고 나서, 초대 대통령이 일본 땅을 처음 밟는 것이었다. 주일 미국대사관저에서 맥아더와 1차 회담을 가진 이승만은 이날 밤 맥아더의 저택으로 초대되어 함께 축배를 들었다. 이 방문은 맥아더의 방한에 대한 답방형식이었으나, 맥아더 장군으로부터 한국 방위에 대한 확실한 지원을 얻어내자는 것이 주목적이었다. [3]
이후 그는 이승만의 귀국 편의를 봐 주었고, 10월 12일 도쿄에 도착한 이승만에게 자신의 전용기를 내주어 귀국시켰다. 이후 이승만은 수시로 그에게 사람을 보냈다. 그러나 국내에서의 미군정을 지휘하던 존 하지와는 수시로 마찰을 빚는다.
[편집] 한국전쟁
- 한국전쟁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 | 군대에 민주주의는 없다. - 낙동강 방어선을 사수하라는 워커 장군의 명령을 옹호하면서 |
” |
1950년 6·25 전쟁이 일어나자, 유엔 군 총사령관에 취임하였다.
한국전쟁 당시 맥아더는 한국군의 군세를 돌아보고 채병덕 육군참모총장이 '허세가 높은 반면 실속이 없는 인물'이라는 것을 간파하여 채병덕의 면전에서는 채병덕을 극찬한 반면 이승만 당시 대통령과 단 둘이 있을 때 채병덕의 보직을 해임시키라고 건의한다.[4] 이승만은 맥아더의 이러한 건의를 적극적으로 수용하여 채병덕을 육군참모총장에서 해임시키고 그 후임으로 정일권을 임명했으며 채병덕에게는 1개 연대의 병력만 부여하여 부산 방어의 임무를 맡겼으나 채병덕은 지휘경험 부족으로 인하여 전사하고 만다.
그해 11월 외신과의 인터뷰에서 북한 외의 공산국가의 군인이 한국 전쟁에 참여하는 것 같다고 공식 발표했다가 UN의 공산권 국가들로부터 제소당한다.[5]
[편집] 인천 상륙 작전
- 인천 상륙 작전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당시 대한민국 국군은 부산까지 후퇴해 있었고 백선엽 등이 다부동 전투를 승리로 이끌면서 부산 지역에 겨우 방어선을 구축하고 있었다. 이때 맥아더는 북조선이 점령한 지역의 중심부를 타격하여 보급로를 끊는 계획을 세운다.
맥아더는 1950년 6월 29일 전쟁발발 4일 뒤 미국 정부에, 한강방어선을 시찰하며 인민군의 후방에 상륙, 병참선을 차단하고 낙동강을 통해 반격에 들어간다는 기본 전략을 세웠다고 보고했다. 그러나 미 해군은 인천항의 간만의 차가 평균 7미터로, 항에 상륙하기 전에 월미도를 먼저 점령해야 하는데다 선단의 접안지역이 좁아 상륙 후 시가전이 불가피한 점 등의 이유로 상륙작전의 최악의 지형이라며 완강히 반대하였다. 해군 일부 인사들이 작전성공률이 5천대 1이라며 격심하게 반대하는 와중에, 맥아더는 이런 난점이 오히려 적의 허점을 찌르는 기습이 될 수 있다며 끝까지 인천상륙을 주장, 결국 8월 28일 미합참본부로부터 승인을 얻어냈다.
9월 15일, 작전개시일에 함정 206척, 7만여 명을 동원하여 영종도 근처에 집결, 작전이 시작되었다.
작전의 제 1단계는 월미도의 점령으로 시작되었다. 새벽 5시에 시작된 공격준비사격에 이어 미 제5해병연대의 3대대가 전차 9대를 앞세우고 월미도 전면에 상륙하였다. 월미도는 2시간만에 완전히 미군에 의해 장악되었다. 미군은 부상 7명의 경미한 피해를 입었으며, 인민군은 108명이 전사하고 106명이 포로로 잡혔다.
제2단계는 국군 제17연대, 미군 제7사단, 미군 제1해병사단의 주도로 인천반도 공격으로 이어졌다. 인민군 제18사단과 인천의 경비병력의 틈새를 비집고 들어간 미군 제1해병사단과 국군 해병 제1연대는 성공적으로 인민군의 주력이 규합할 시간적 여유를 빼앗아버리며 인천 장악에 성공하였다.
인민군이 38선에서 낙동강 방어선까지 진격하는데 81일이 걸렸지만, 인천상륙 이후 아군이 38선까지 돌아오는데 15일이 걸렸으니 적의 배후를 불의에 공격한 인천상륙작전의 크나큰 성과다.
[편집] 중공군의 참전
인천상륙작전 이후 맥아더는 중공의 참전 가능성을 크게 오판하여 같은 해 겨울의 치명적인 패배를 불러왔다.
[편집] 한국 전쟁의 민간인 학살 논란
1950년 벌어진 서울대학교 부속병원 학살 사건은 북한군이 부상 한국병과 민간인들 1000여명을 학살한 사건이고 이리 폭격, 청주 폭격은 미군항공기가 지상의 화력을 만회하려고 민간인에게 폭격한 사건이다.[출처 필요] 전라북도 이리에서는 국회의원 연설 행사에 참석한 수많은 학생들이 죽었다.[6]
한국전쟁은 불행히도 인민군의 서울대학교 부속병원 학살 사건이나 신천군에서 벌어진 민간인끼리의 학살, 이승만 정권 당시의 보도연맹 학살, 노근리, 이리, 청주 등에서 벌어진 미군 학살 등으로 민간인들의 피해도 많았다.[출처 필요]
[편집] 인천 상륙 작전
- 이 부분의 본문은 인천 상륙 작전입니다.
맥아더 장군의 인솔하에 감행된 인천 상륙 작전은 워싱턴 등 군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전투를 성공적으로 지휘, 전쟁의 양상을 뒤바꿔 놓았다. 최측근들은 인천은 조수간만의 차가 커서 위험하다며 군산으로 상륙 지점을 변경할 것을 제안했지만 맥아더의 신념은 확고했다. 서해 어느 항구에 미군이 상륙한다는 정보는 북한군에게도 알려졌지만, 북한군은 이미 보급선이 너무 길게 늘어져서 낙동강방어선에서 돌릴 군사력이 부족했고 김일성은 이 정보 자체를 크게 믿지 않았다. [7] 그러나 막상 작전 돌입 단계에 이르러서 주요 간부끼리 'Go/No go(작전 실행/중지) 회의'를 했다. 당시 주한미해군 사령관이 반대했다. 미국 군부는 군산 상륙 작전이 효율적이라고 여겼다. 맥아더는 "이건 내 고집대로 해야겠으니 따라와달라"고 말한 바 있다. 그렇게 맥아더는 인천을 선택했다. 그러나 인천 상륙 작전에 대해 중국의 마오쩌둥은 예측하고 있었다. 그래서 수차례 김일성에게 경고했지만, 김일성은 듣지 않았다. 결국 미군은 단 한 명의 사상자도 없이 월미도를 차지하여 인천항을 점령할 수 있었고, 이후 이어진 첫날 전투에서도 미군의 사망자는 20명에 불과했다.
막상 서울로의 진입은 여의치 않았다. 북한군은 미군을 막을 만한 정규사단이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알더라도 막을 병력이 없었지만 공산주의 운동가, 인민경찰, 해안포병 등이 중심이 되어 방어 작전을 펼쳤기 때문이다. [8][9]
그러나 결국 작전은 성공하였고 맥아더의 작전을 제대로 간파하지 못한 북한군은 이 작전에 의해 인천을 빼앗긴 이후 1.4후퇴가 도래할 때까지 연전연패했다. 실제로 김일성은 한국전쟁의 실패 원인으로 '인천상륙 대비실패', '서울 조기포위 실패', '춘천 조기점령 실패' 3개를 꼽은 바 있다. [10] 이를 기념하여 후일 대한민국 정부는 인천직할시에 맥아더의 동상을 건립하기도 했다.
[편집] 월미도 민간인 폭격 피해
1950년 9월10일 미군 항공모함에서 출격한 항공기들이 95개의 네이팜탄을 월미도 동쪽 지역에 투하하고 기총소사를 하는 방식으로 9월 13일 아침까지 계속됐다.
신원이 확인된 희생자가 10명이고, 실종자와 신원을 확인할 수 없는 사람을 포함하면 실제 희생자가 100여명에 이를 것으로 진실화해위원회는 추산했다.
진실화해위원회는 미군이 민간인 희생을 줄이기 위한 최소한의 조치가 없이 월미도 전체를 무차별 집중 폭격한 것은 국제법 등에 위반된 작전이라며, 한국과 미국 정부가 협의해 희생자와 쫓겨난 피해 주민들에 합당한 피해 보상과 귀향 대책을 취하도록 권고했다. [11]
[편집] 만주 폭격 주장
1951년 3월 10일 그는 한국 전선의 제12차 시찰을 마치고 성명을 발표했다.[12] 그는 국제적 결정이 없으면 한국은 침체상태에 빠지고 말 것이라고 지적하였다.[12] 이날 성명에서 그는 만주 폭격을 해도 군사기지 시설에 한판 폭격이며 민간인 피해는 없을 것[12]이라고 언명하였다.
1951년 4월 19일 오전 상하양원 합동회의에서 '침략자 중공을 응징'하자며 소신을 피력하였다.[13] 상하양원 합동회의에서 그는
한국전쟁을 조속히 종결짓지 않으면 더 큰 전쟁을 면할 수 없을 것이며, 한국전쟁을 조속히 종결시키려면 첫째로 압록강 피안의 적보급기지를 폭격하고, 둘째로 중공에 대한 경제봉쇄를 실시하고, 셋째로 미 해군으로 중국 봉토의 연안을 봉쇄하고, 넷째로는 공군으로 중국 본토를 공격하고, 다섯째로 타이완에 있는 국부군에 가해진 제한을 없애야 한다.[13]
그의 발언 이후 민주당에서는 그를 전쟁광이라고 비난하였다.
그러나 그는 4월 21일 인터뷰에서 "이러한 나의 주장을 가리켜 전쟁도발이라고 비난하는 일부 인사들도 있으나 촉발된 전쟁을 조속히 종결시키는 것이 군인의 사명일 뿐만 아니라 누구던지 이렇게 생각하고 있다[13]"고 부언하였다. 동아일보는 그날 특별 사설을 발표해 그를 위대하다고 평하였다.
[편집] 트루먼과의 불화와 해임
그러나 그는 전쟁에서 독단적인 행동에 대한 당시 대통령 해리 S. 트루먼의 불신으로 인해, 한국 전쟁 후 미국에서 매카시스트 즉, 극단적 반공주의인 매카시즘 추종자로 낙인찍힌다. 또한 중화인민공화국 정규군(중국인민해방군)의 개입을 무시하다가 중국이 전쟁에 수십 개 사단급 병력을 보내어 개입하자 만주에 원자폭탄 투하와 장개석총통 지휘하의 대만군 동원을 주장하기도 하였다. 맥아더는 "공산주의의 뿌리를 뽑겠다"는게 목표였던 반면, 트루먼은 정치가인지라 "제한전쟁"으로써 전쟁은 시작한 곳에서 끝나야 하고, 얼른 전쟁을 종결지어야 정치적으로 안전하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이런 의견차로 결국 맥아더는 해임되기에 이르렀다. 당시 중공군의 참전 이후, 맥아더는 보급/충원의 근거지가 되는 만주에 항공폭격을 허가해 달라고 본국에 요청했다. 하지만 미국 정부는 소련에 참전빌미를 줘 확전되는 것을 우려하여 불허했다. 중공군 참전 이전에 대만을 연합군에 편입시키지 않은 것도 중공에 대한 자극을 피해보려는 이유에서였다.
미국 정부로서는, 소련의 힘과 의지를 과대평가한 미국의 전략적 판단 실수와, 2차대전 종전 직후 대다수의 부대를 해체하여 동원가능병력이 극히 줄어든 것이 확전을 피하려 한 가장 큰 이유였다.
이런 기미를 눈치챈 소련은 비공식적으로 공군조종사를 중국에 보내 한-만국경에서 미군 폭격기를 공격해 상당한 전과를 올리기도 했다. 한국전쟁은 미국 국내에서 인기 없는 전쟁이었다. 기간이 길어지자 여론의 종전압력도 커졌다. 이로 인해 휴전회담이 시작되었다.
노병은 죽지 않는다. 다만, 사라질 뿐이다.[14]
-웨스트포인트에서의 은퇴연설문 중 일부
그의 해임에 대한 구체적인 해임 이유에 대해 명령 불복이 원인이라는 견해도 있다.
첫째, 한국군 백선엽이 중공군 포로를 잡아 심문했다. 또한 중공군 포로를 보여주며 맥아더에게 중국인민해방군이 참전했다는 보고를 했지만 맥아더는 사실을 은폐했다.
둘째, 미국은 전쟁이 장기화 될 것을 예상하고 한국으로 겨울을 대비한 보급품을 보냈다. 맥아더는 전쟁이 빨리 끝날 것이라 판단하고 보급품을 하와이로 돌려 보냈다. 겨울에 미군이 필요한 지원을 받지 못해 많이 얼어죽었다.
이로 인해 맥아더는 책임을 물어 해임했다.[15]
이에 대해 얄타회담 이후 일어난 한국전쟁은 미국과 소련의 양극체제를 굳히기 위한 전쟁이다. 미군은 이미 전선의 크기를 정해놓고 전쟁을 하였다. 그래서 맥아더가 만주를 폭격하는 것을 막았다. 특히 맥아더는 만주에 핵폭격을 요구했다. 또 당시 중공군은 홍콩, 마카오를 통해 다수의 미국 무기를 수입해서 사용했다. 이는 미국이 2차대전이 끝나고 자국의 군수업자들을 위해 전쟁을 방관한 증거 중의 하나이다. 스탈린은 중앙유럽에서의 소련의 영향력을 확대하는 기회로 삼으려고 박헌영과 김일성에게 전쟁을 승낙했고, 미국은 영향력 확대와 군수업자들의 이익을 위해 한국전쟁이 일어나는 것을 방관했다. 당시 대만의 장개석은 모택동이 한국전쟁에 참전하자 대만해협을 건너 중국 본토를 침공하려 했으나 미군이 대만해협을 막았다. 한국전쟁으로 모택동의 중화인민공화국은 내몽골과 만주를 획득했고 위구르와 티벳을 침략하는 발판을 만들었다는 등의 반론이 있다.
[편집] 기업인 활동
1951년 민주당 트루먼 대통령과의 대립으로 4월 사령관의 지위에서 해임된 이후 별다른 활동을 보이지 않았다. 1948년과 1952년 미국 공화당의 강경 반공주의 보수세력은 연이어 맥아더의 대통령 후보자 지명을 얻어내기 위해 노력했지만 온건파들의 반대로 번번이 실패하였다.
맥아더는 1952년 레밍턴랜드 회사의 이사회 회장직 제의를 수락하였다.[16] 1952년 레밍턴랜드 회사 회장으로 직무를 보는것과 공개석상에 가끔 나타나는 것 외에는 뉴욕 시내의 저택에서 은거생활을 하였다.
그 뒤 스페리랜드 회사의 취체역 회장에 선임되었다.[17]
1960년 2월 2일 요도 질환으로 레녹스 힐 병원에 입원[17]했다. 3월 19일 전립선을 제거하는 수술을 받고[17] 병원에 입원해 있다가 4월 5일 63일만에 퇴원하였다.[17]
[편집] 은둔과 만년
1962년 10월부터 11월까지 미국을 방문중이던 김종필을 만났다. 미국 방문 길에 그는 맥아더 미국 육군 원수를 방문하기도 했다.[18]
김종필과의 면담에서 맥아더는 김종필에게 "한국이 하루빨리 통일이 되기를 바란다. 나는 한국이 통일될 때까지 죽을 수 없다.[18]"는 의사를 피력한다. 또 맥아더는 김종필에게 "한국 전쟁을 승리로 이끌기 위하여 만주 폭격을 주장"했으며 "한국 전쟁의 휴전에 있어서 미국은 잘못을 저질렀으며, 한국에서의 북진 통일이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오늘의 인도네시아 사태가 발전된 것"이라고 답하였다.[18]
만년에 그는 기업인과 언론인으로 활동하다가 1964년 워싱턴 D. C.에서 84세를 일기로 타계하였다. 버지니아 주 노퍽에 매장되었다. 당시 한국에서는 서울에 정부의 주도로 빈소를 차리고 조문행렬이 이어지기도 했다.
[편집] 가족 관계
- 아버지 : 아서 맥아더(Arthure MacAthur, Jr., 1845년 6월 2일 ~ 1912년 9월 5일)
- 어머니 : 메리 하디 맥아더(Mary Pinkney Hardy MacArthur, 1852년 3월 22일 ~ 1935년 12월 3일)
- 형 : 아서 3세 맥아더(1876년 - 1923년)
- 형 : 맬컴 맥아더(1878년 - 1883년)
[편집] 상훈 경력
- 의회 명예훈장
- 육군 수훈 복무 훈장
- 해군 수훈 복무 훈장
- 수훈 비행 십자장
- 은성 훈장
- 동성 훈장
- 퍼플 하트
- 욱일장
[편집] 평가
맥아더에 대한 인간적, 업무적인 평과는 극과 극으로 나뉜다. 업무적 측면에서 그는 유능한 상관이라는 평가와 출세주의자, 성과주의자라는 비판이 공존하고 있다.
맥아더는 자신의 편이라고 생각되는 인간에게는 한없이 친절하고 자비로운 인물이며 자신의 것을 아끼지 않고 선물로 줄 만큼 호의를 베풀었다. 그러나 자신의 편이 아니라고 생각했을 때는 지나치리만큼 냉정하게 대하였다. 따라서 많은 사람에게 그는 다소 고압적이고 도도하며, 이기적이고 잘난체하는 사람으로 인식되어[16] 부정적으로 평가되었다. 그러나 그의 군대 부하, 사령부 직원들이 보기에는 다정하며 용기있고 가식이 없으며 겸손하기까지 한 사람이라는 상반된 평가도 있다.[16] 지독한 출세주의자라는 비판도 있다.
1944년 한때 그의 부하였던 조지프 스틸웰은 맥아더의 수석 보좌관 프랭크 돈(Frank Dorn)에게 "맥아더 장군은 1918년에 처음 별을 달았기 때문에 삼십 년을 장군으로 지낸 셈입니다. 삼십 년 동안 많은 사람들이 비위를 맞추며 굽실거리고 그가 원하는 것을 해왔죠. 이는 모두에게 좋지 않은 일입니다."라며 그의 권위주의적인 태도와 타인이 자신에게 맞추기를 강요하는 성격을 지적한 바 있다.
[편집] 논란과 의혹
[편집] 한국전쟁 생화학 무기 사용 의혹
1951년 북한에서 세균전 현장 실험을 명령했음을 보여 주는 문서가 발견됐다고 아랍권 위성채널 알-자지라가 보도했다.[19]
[편집] 일본인 여성 비서 총살 의혹
일본인 여성 미야자와 요시코를 비서로 채용 후 내연녀로 삼았다는 주장도 있다. 그런데 미야자와 요시코가 서명을 조작해서 일본 전범들을 많이 풀어주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맥아더가 이 사실을 알고 재판 없이 총살했다는 의혹이 있지만, 명확히 확인된 바는 없다.
[편집] 만주 폭격 계획
한국전쟁 중 그는 만주의 폭격을 계획하였다. 그러나 미국 대통령 해리 트루먼과의 갈등 끝에 해임됨으로써 만주폭격 계획은 수포로 돌아간다.
[편집] 동상 존치 논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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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년 이후 대한민국에서는 인천광역시의 자유공원에 세워진 맥아더의 동상을 비롯, 대한민국 국내에 있는 맥아더 동상의 존치 여부를 놓고 찬반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다. 이는 맥아더를 한국 전쟁의 영웅으로 보느냐, 한국 통일 전쟁을 방해한 인물로 보느냐의 관점에 따라 달라진다.
2005년 7월에는 맥아더 동상 주변에서 보수 단체와 진보 단체간의 맥아더 동상 사수, 철거 집회를 나란히 개최하였다.[20]
[편집] 2005년 맥아더 동상 철거,사수 충돌 사건
2005년 9월 11일에는 인천상륙작전(1950년 9월 15일) 55주년을 나흘 앞둔 11일 인천 자유공원 일대에서 맥아더 장군 동상의 철거를 주장하는 단체와 동상 사수를 주장하는 단체의 대규모 동시 집회가 동시에 개최되었는데, 이때 동상 철거를 주장하는 단체 회원들이 폭력시위를 벌이며 경찰과 격렬하게 충돌했다. 이로 인해 시위대와 경찰 모두 부상자가 속출하고 공원 일대는 난장판이 됐다.[21]
보수단체와 전국민중연대·통일연대·한총련 등 동상 철거를 주장하는 단체 회원 4000여명의 충돌이 예상되자 곧 경찰이 투입되었다. 전국민중연대·통일연대·한총련 등 동상 철거를 주장하는 단체 회원 4000여명은 이날 오후 5시15분쯤 자유공원 내 맥아더 동상을 둘러싸는 ‘인간띠 잇기’ 행사를 가지려다 대한민국 경찰관들이 이를 저지하자, 경찰에게 쇠파이프와 2~3m 길이의 대나무를 마구 휘두르고 달걀 수십 개를 던졌다. 시위대가 흙까지 뿌리자 흥분한 경찰이 방패와 곤봉을 휘두르고 소화기를 뿌리며 이에 맞섰고, 양측 간에 투석전까지 벌어지면서 부상자가 속출했다.[21] 시위대측에서는 박범수(경희대)씨 등 20여명이 경찰이 던진 돌에 맞아 머리가 찢어지는 등 크고 작은 상처를 입었으며, 전경 십수 명도 시위대가 휘두른 둔기에 얻어맞아 쓰러지기도 했다.[21]
9월 15일 보수 단체는 1만 5천 명의 인파를 동원해 맥아더 동상 사수 집회와 맥아더 동상을 지켰다. 15일 인천 자유공원에서 예비역 장병과 시민단체가 참여하는 대규모 ‘맥아더 동상 사수’ 집회가 열린다. 집회에는 최대 1만5000여명이 참석할 전망이다. 해병대전우회는 “맥아더 동상 앞 광장에서 ‘국가안보 및 맥아더장군 수호결의’를 15일 오후 1시30분부터 개최한다”고 14일 밝혔다.[22] 9월 15일 보수단체 회원과 시민 등 1만 5천명은 맥아더 동상 주변에서 집회를 하였다.
[편집] 일제부역자들의 맥아더 우상화 의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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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아더는 일왕이 머리를 숙인 유일한 외국 장군이다. 그래서 일제 부역자들이 맥아더를 우상화한다는 주장이 있다.[23] 또 이들이 일제부역 문제가 거론되는 걸 막기위해 맥아더를 우상화하여 정부 초기의 혼란기에 있던 폭력을 상기시키고 끊임없이 좌파논쟁을 일으킨다는 것이다.
[편집] 극적인 상황 연출 의혹
맥아더는 나이가 들면서 극적인 연출을 좋아하는 스타일로 변모해갔다. 그런 성격은 종종 자아도취로도 나타났다. 한 지인의 주장에 의하면 그는 사진이나 카메라 앞에서도 멋있게 보이려고 의도적으로 애썼다 한다. "제1차 세계대전 당시에는 승마용 바지와 목까지 올라오는 스웨터를 입고 스카프를 두르고 다녀서 부하들이 ‘호전적인 멋쟁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그저 주목받으려는 욕구가 강했던 것이 아니라 그런 순간에 중독된 상태였다. 언제나 카메라 위치를 의식하면 움직였고 사진이 가장 잘 나오는 각도로 턱을 내밀곤 했다. 나이가 들면서는 부하들이 모든 사진을 일일이 검열하여 영웅답지 못한 사진이 유출되지 않게 했다. 카메라의 각도에 대한 구체적인 규칙을 지켜달라고 요구하기도 했다. 따라서 기자들은 항상 정해진 각도에 따라 사진을 찍어야 했다. 한번은 '스타스 앤드 스트라이프'(Stars and Stripe) 지의 사진 기자에게 맥아더가 더 위엄있어 보이게끔 무릎을 꿇고 사진을 찍으라고 지시한 적도 있었다. 사무실에서 일할 때는 안경을 썼지만 안경 쓴 모습을 남들에게 보이는 걸 싫어했기 때문에 그 또한 사진을 피해야 할 순간이었다. 이렇든 매순간 맥아더의 모습은 연출되었다."는 것이다.
[편집] 기타
그는 베트남과 필리핀에 한자와 원주민어 식 표기문자 대신 표음문자로 전부 바꾸라고 강요하였고, 이들은 한자와 원주민 언어를 포기하고 영어식 표음문자를 사용하게 되었다.
1945년 8월 일본의 패전 이후 그는 일본에게도 한자를 없애고 표음문자로 전부 바꾸라고 일본 정부에 압력을 넣었으나 국어심의위에서 오랜 연구 끝에 당분간은 1,850자의 한자를 사용할 수밖에 없다고 당용한자(當用漢字)를 제정 시행하다가 불편하여 그 후 95자를 늘려 1,945자에 지명(地名)과 인명(人名)에 쓸 벽자(僻字) 166자를 추가하여 현재 2.111자를 사용하고 있다. [24] 미군정 중인 한국에는 부하 사령관인 존 하지를 통해 전달하였으나, 이승만 등은 거절, 한국의 고유 언어라서 없앨 수 없다고 하여 상용한자를 일부, 한글과 병행해서 쓰게 했다.
[편집] 같이 보기
[편집] 주석
- ↑ 그러나 그는 자신의 적이 많다는 사실에 부담을 느끼거나 걱정하지는 않은 것 같다. 불필요하게 많은 친구 보다는 마음을 터놓는 소수의 친구를 두는편이 낫다고 말하고 다녔다.
- ↑ 조용중, 《미군정 하의 한국정치현장》(나남, 1990) 36~37쪽.
- ↑ “秘錄 韓國外交<28> : 政府樹立 직후 ⑩”, 《경향신문》, 1975년 3월 17일 작성.
- ↑ 1950년 6월 30일~: 조지프 굴든, 김쾌상 옮김,《한국전쟁: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일월서각, 1982),112쪽.
- ↑ "중공 침범을 맥아더 장군 제소", 동아일보 1950년 11월 17일자 정치, 1면
- ↑ 문정현 신부 증언
- ↑ <<콜디스트 윈터>> 데이비드 핼버스탬, 2007
- ↑ <<콜디스트 윈터>> 데이비드 핼버스탬, 2007, pp461~465
- ↑ [김성전 국방정책 연구소장의 말] 아프리카 망치부인 2011.4.1 인터뷰 중에서
- ↑ 학사장교 전술교육교재 '전쟁사'중 일부
- ↑ 누리망 한겨레 신문 2011.3.1 인천상륙작전 피해 월미도 주민들 손해배상청구소송
- ↑ 가 나 다 동아일보 1951년 03월 10일자 사설
- ↑ 가 나 다 동아일보 1951년 04월 21일자 사설
- ↑ 한국 전쟁 당시 트루먼 대통령과의 불화로 인해 해임당했을 때, 의회 연설에서 한 말. 지금까지도 널리 알려져있는 명언으로 알려져있다.
- ↑ [김성전 국방정책 연구소장의 말] 아프리카 망치부인 2011.4.1 인터뷰 중에서
- ↑ 가 나 다 맥아더 - Daum 백과사전
- ↑ 가 나 다 라 동아일보 1960년 04월 05일자 외신, 1면
- ↑ 가 나 다 "통한 전까지 죽을 수 없다, 인사태는 한국전 실패로", 동아일보 1962년 11월 01일자, 1면
- ↑ 중앙일보 "美, 한국전쟁 중 세균전 현장실험 명령"
- ↑ http://www.chosun.com/national/news/200507/200507150345.html
- ↑ 가 나 다 http://www.chosun.com/national/news/200509/200509110366.html
- ↑ http://www.chosun.com/national/news/200509/200509140312.html
- ↑ [김성전 국방정책 연구소장의 말] 아프리카 망치부인 2011.4.1 인터뷰 중에서
- ↑ http://www.jndn.com/read.php3?no=74431&read_temp=20080721§ion=54
[편집] 참고 자료
[편집] 바깥 고리
위키미디어 공용에 관련 미디어 자료가 있습니다. |
- (영어) Douglas MacArthur's biography at the Official U.S. Army website
- (영어) The MacArthur Memorial - The MacArthur Memorial at Norfolk, Virginia
- (영어) MacArthur Museum Brisbane - The MacArthur Museum at Brisbane, Queensland, Australia
- (영어) MacArthur - a site about MacArthur from PBS.
- (영어) Killing the Budda - Red Flags and Christian Soldiers - about MacArthur's effort and vision to establish International Christian University
- 맥아더, 한국에서만 '신'이 된 사나이 - 오마이뉴스 2005년 09월 11일자
- (다시쓰는6·25전쟁) 맥아더 해임 조선일보 2011-02-28
- 15일 '맥아더 사수' 1만5000명 집회 조선일보 2005년 09월 14일
- 대통령과 육참총장이 충돌할 때... 조선일보 2007년 12월 07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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