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지하 시인, 이정희에 “쥐새끼 같은…” 무슨일?
“국고는 서민이 헐벗어 바친 세금… 그걸 떼먹어? 죽여야지”
1974년 민청학련 사건 주모자로 법정에 선 청년 김지하. 그의 나이 33세였다. 동아일보DB 사진 더 보려면 Click!
《 민청학련(전국민주청년학毁肌Ц�) 사건에 가담한 혐의로 수감돼 사형선고까지 받았으나 39년 만인 이달 4일 무죄를 선고받은 김지하 시인(72)을 이튿날 강원 원주에서 만났다. 이번 대선에서 박근혜 지지 선언을 했던 그는 인터뷰에서 1970년대 고초를 회고하며 박정희 시대와의 화해를 말했다. 인터뷰의 생생함을 살리기 위해 비속어, 존칭 생략 등 그의 육성을 대부분 그대로 싣는다. (*)은 독자의 이해를 도우려고 붙인 설명이다. 》
김지하 시인이 무죄선고를 받았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부인 김영주 토지문화관 관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김 시인이 귀가하는 대로 연락을 달라고 했다. TV에서는 김 시인의 기자회견 장면이 나왔다. 느닷없이 ‘돈’ 이야기를 꺼내 듣는 이를 당혹스럽게 했다. “27억 원씩 받고 도망간 여자(통합진보당 이정희 의원을 지칭)도 있는데 사형선고 얻어터진 김지하가 몇 푼 받아서야 되겠느냐. 5억이 아니라 500억, 5000억 정도 주던가. 적어도 27억 이상은 줘야지.” 그의 발언은 직설적이었다. 하지만 때와 장소에 어울린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몇 시간 뒤, 김 시인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인터뷰하고 싶다”고 했더니 “하기 싫다. 난 내일 (원주에) 없다”고 했다. 그러면서 “토지문화관 구경이나 오든지” 하며 전화를 끊었다. 마지막 말을 들으며 얼굴을 마주하고 인터뷰를 청하면 가능성이 없지 않으리라는 작은 기대가 생겼다.
이튿날 토요일(5일)에 길을 나섰다. 서울에서 두 시간여. 토지문화관에 들어서니 부인 김 관장이 있었다. 기자는 김 시인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꼼짝 못한다는 김 관장을 설득했다. 마침내 김 시인이 오후 7시경 문화관으로 들어섰다. “혼자 정선 아우라지에 다녀오는 길”이라고 했다.
―기자회견 때 돈 이야기만 하셔서 당혹스러웠습니다.
“지금까지 (내가) 수십 년간 떠든 게 민주주의였는데 민주주의 얘길 또 해? 지루하기 짝이 없지. 풍자? 그게 아니야. 누구는 제멋대로 떠들다가 27억 먹고 튀는 판이야. (이정희 의원이 대선후보 사퇴한다는) 기사를 읽는데 나도 모르게 ‘쥐새끼 같은 ×, 지랄하고 자빠졌네’라는 말이 튀어나왔어. 우습더라고. 하하하.”
그의 호탕한 웃음을 따라 기자도 웃었다.
“나도 나이가 들었어. 법원 쪽에는 공손히 인사했어. 근데 기자들을 보니 뭔 말을 하긴 해야 하는데… 느낌이 어떠냐길래 ‘아무 느낌 없다’ 하니 실망한 눈치였어. ‘이 자식들이 왜 실망을 하지?’ 다시 보니까 다 젊어. 똥구멍 같은 내 입에서 뭔가 나오길 기다리는 것 같아. 그래서 돈 이야기 했어. ‘나는 요즘 돈이 좋다. 왜? 돈이 나빠? 돈 싫어하는 사람 손 들어봐.’ 아무도 손드는 사람 없데. 나는 옛날엔 돈을 악(惡)의 징표라 봤어. 오래 살다보니 돈이라는 게 사람과 사람 사이의 소통수단이야. 아들에게 돈 주려다가 안 주면 인상 쓴다구. 부자지간에도 그래. 돈이 얼마나 중요한데.”
―민주투사가 속물 같아 보였습니다.
“공자도 돈 하면 눈이 커지는 사람이었어. 돈 많은 제자를 아꼈지(*자공·子貢을 말하는 듯). 나는 매일 돈 없어서 부인한테 ‘병신’ 소리 들어.(김 관장이 ‘내가 언제 그랬어요?’ 하자 시인은 다시 껄껄 웃었다.) 은행 가서 몰래 돈 꺼내 택시 타고 다녀서 이 사람한테 혼나…. 실제로 나는 지금 돈이 필요해. 두 아들 놈 유학 보내 공부시켜야 해. 아들 둘이 대학엘 못 갔어. 요즘 세상에 대학도 못 나오면 어디에 쓰나. ‘두 아들이 대학도 못 갔다’ 해도 놀라는 사람이 없어. 욕 안 하기로 맹세했지만 그럴 땐 ‘×발’ 소리가 절로 나와. ‘×발새끼들, 자기 자식들은 대학 졸업시켰으니까. 대학 못 보낸 부모 한(恨)을 모른다.’ 아이들 속에도 한이 맺혔을 거야. 나는 아비로서의 한이 또 있어.”
쩌렁쩌렁하던 목소리가 갑자기 잦아들었다. 김 관장이 “아니, 울려고 그러셔? 우는 건 또 처음 봤네” 하자 다시 우렁찬 목소리가 나왔다.
“안 울어. 내가 왜 울어…. 어떻든 그날 기자들 보니 갑자기 돈 이야기 한번 하자 생각이 들더라구. 근데 젊은 기자들 얼굴이 하나같이 ‘陋� 돈 때문에 재심신청했구나’ 하는 표정이야. 그걸 보고 더 하기 시작했지. 내가 그런 면이 있거든. 남이 싫어하면 더 해. 하하하. 그런데 (회견 끝나고) 나오면서 후회가 들더라구.”
―(기자회견 내용이) 걱정이 되긴 되셨나 보네요.
“그럼, 나는 소심한 남자야.”
소년처럼 맑은 미소가 번졌다. 다시 거친 말이 이어졌다.
“내가 오적(五賊) 쓸 때도 사업가들이 뇌물 주는 건 욕하지 않았어. 하지만 국고금 빼먹은 놈은 찢어 죽여야 한다고 했어. 내 신념이야, 아니 민중의 신념이야. 장사꾼이 뇌물 주는 것은 상관없다 이거야. 그런데 국고금이라는 건 서민들이 헐벗어 바친 세금이야. 그걸 떼먹어? 죽여야지. 거기에다 노무현 정권 말기에 (집권한 자들이) 돈을 쳐먹어? 스스로 혁명가라고 자부하는 목포 광주 한(恨)의 천재들이? 망월동 피값 받은 외에 또 받아?”
비록 욕설은 난무해도 그의 말은 받아 적으면 시가 될 듯, 발음도 정확하고 운율과 리듬까지 있어 몰입하게 했다. 김 시인은 이번 무죄 판결과는 별도로 오적 판결(선고유예)에 대해서는 못마땅한 눈치였다.
“스톡홀름대 한국문학회가 처음 만들어졌을 때, 처음 번역한 외국 문학이 오적이야. 나보고 참관하라 해서 스웨덴까지 갔잖겠어. 동양 최고 시인이 김삿갓 다음에 김지하라더군. 청중이 일제히 박수를 쳤어. 이런 비슷한 일이 러시아, 중국, 미국 등에서 있었어. 미친 생각이지만, 만약에 노벨상을 내게 준다면, 국가에서 오적을 유죄라고 하는 상태에서 주어지면 어떻게 돼. 나라 망신 아닌가. 물론 나는 반체제 작가로 영웅이 될 테지만(웃음)…. 나꼼수는 저질이야. 그런 것들로 무슨 선거를 이기겠다고. 내가 썼으면 간이 덜덜 떨리게 쓴다. 근데 그런 글을 오적 이후 못 썼어.”
그가 먼저 선거 이야기를 꺼내길래 화제를 선거로 돌렸다.
―이번 선거 흐름을 어떻게 봤습니까.
“마르크스 읽지도 않은 자들이 마르크스를 말하는 세상이야. 그런 사람들이 노무현 정권 때 전시작전권 반환 외에 한 것이 뭐야. 그것 도로 돌아갔어. 부동산도 완전히 실패했지. 그 다음에 NLL(서해 북방한계선) 취소? 김정일에게 돈 갖다 바친 것. 그것들 꽁무니 따라서 문재인이 또 튀어나왔어. 김대중이 흉내 냈지. 김대중은 돈 갖다 안 바쳤는가? 북에서 날아온 포탄은 거기서 나온 거야. 그 돈은 우리 세금 아닌가? 문재인이 그 꽁무니 따라왔으니 그런 사람을 어떻게 찍어. 이번 선거에서 원탁회의 어쩌구에서 안철수에게 장관 5개를 주고 누가 몇 개를 먹고. 그것을 지들이 결정해서 문재인에게 보고한다 해서, 까불지 말라 혼내려고 대장(아내)에게 물어봤어. 아내 말이 ‘조져!’(웃음) 그래서 내가 원고를 신문사에 보냈어. 원고는 교정됐어. 원래는 그것보다 더 지독했어. 마침 신문에 (글) 나간 날이 원탁회의 하는 날이었더군. 나는 몰랐어.”
그의 말이 이어졌다.
“(민주당은) 자기 쇄신 안 하면 다 망해. 국민 모두가 이석기 이정희 하는 거 봤어. 앞으론 그런 행동 다시 못해. 다시 말해 간첩행동 못한다 이거야. 그렇다고 우파가 옳으냐, 그것도 아니야. 서경석 목사가 전화해서 수만 명이 모인 우파 집회에 나오라 하더군. 내가 왜 가냐 했더니 ‘박근혜 지지했잖아요’ 이래. 그래서 ‘네 눈엔 그렇게 보이냐. 좌우를 넘는 공정한 세상을 만들어야지 무슨 우파 집회야. 지금 우파, 좌파, 중간파가 어디에 있나. 이번 선거를 봐. 좌파 우파로 투표한 게 아니야. (국민들이) 속에 들어 있는 생각으로 찍은 거야.”
―안철수 씨는 다시 (정치판으로) 돌아올까요.
“안철수는 깡통이야. 아무것도 몰라. 그 사람 전공이 뭔가. 융합과학이야. 그런데 그 사람 정치가 융합과학에 맞는 것인가? 지금 융합과학은 유전자까지 확대되고 있어. 하지만 확대할 때는 조건이 있어. ‘절제’라는 동양적인 제약 사항을 끌어들여야 해. 정치에서 절제란 할 말 못할 말 구분하고 잘사는 사람 못사는 사람 구분하는 거야. 그런 것도 없는 사람이 자기 전문영역과 정치의 관계도 모르고, 여야 관계도 몰라. 밑에서 박수 쳐 주니까 붕 뜬 거지. 그런 사람을 깡통 아니면 뭐라고 해.”
―안철수 씨도 시간이 지나면 단련될 수 있을까요.
“끝났다니까. 정치란 게 하고 싶다고 매일 할 수 있는 게 아냐. 배우하고 똑같아. 한번 찍히면 끝난 거야. 문재인 옆에서 왔다 갔다 한 사람들이 대안이 없으니까 ‘안철수, 안철수’ 한 거야. 게다가 개표 전날 미국으로 튀는 사람이 어디에 있어. 문재인을 지지했으면 결과가 어떻게 나올지 봐야 할 것 아냐. 도대체 ‘선거’라는 행위를 뭘로 보는 거야. 선거는 국민의 결정이지 자기들 결정이 아니야. 미국 공항에 들어서자마자 정치 또 한다고 했지? 미친 사람 아니야? 그런 사람을 데려다 뭐에다 써먹어.”
―왜 박 당선인을 지지했죠.
“남자의 시대가 가고 여자의 시대가 왔다는 것은 내가 오래전부터 해온 말이야. 근데 박근혜 혼자로는 불가능할 것 같았어. 그래서 이원집정제를 생각했지. 박근혜가 가능하려면 남자 중에 보조적인 역할이 필요하다고 본 거야. 안철수 쪽에서 도와준다면 혹시 가능할지 모르겠다고 생각하기도 했었지. 근데 자세히 보니까 안철수가 깡통이야… 아내도 박근혜가 좋다 하더라구. ‘아버지 어머니 모두 총탄에 죽었다. 그런 상황에서 18년 동안이나 고독 속에서 무엇을 생각했겠느냐, 어떤 내적(內的) 상태가 왔는지 나는 이해할 수 있다’고 하는 거야. 그 말을 듣고 내가 놀라서 대꾸를 못했어. 거기까진 생각 못했거든. 박근혜가 내공이 쌓였을 것이라고 결론 냈지. 내공이 뭐냐, 독한 마음이야. 뭔가를 하겠다는 독한 마음. 박근혜가 (지난해 12월 13일) 여기 토지문화관에 왔을 때 ‘당신 내공이 있는 것 같다’고 말했어. 그러면서 아버지 이야길 꺼냈지.”
김 시인은 옛일이 주마등처럼 흐르는 듯 잠시 숨을 고르더니 말을 이었다.
“내가 감옥에 들어가 있을 때 미쳤었어. 참선을 지독하게 하면 치유 효과가 있다더라고. 그래서 시작했어. 잘 때도 가부좌를 틀 정도로 독하게 했지. 얼굴은 해골이 됐어. 참선 100일을 끝내고 101일째 되는 날이었어. 낮 12시에 교도소 방송에서 박정희가 죽었다고 나오는 거야. 그때 떠오르는 게 있었어. 공(球)이 세 개가 떠올랐어. 그게 참선이야. 공마다 이름이 있었어. 첫째 공은 인생무상, 둘째 공은 안녕히 가십시오, 셋째 공은 나도 곧 뒤따라갑니다. 껄껄 웃음이 나오더라구. 참선이 코미디야 코미디. 이튿날 12시에는 또 추모방송이 나와. 방송에 나온 김수환 추기경의 첫마디가 인생무상! 아따, 나 그렇게 소름 끼치기는 처음이네. 무서워서가 아니야. 내가 인생무상을 생각했는데 가톨릭의 거인이 인생무상을 이야기하니 소름이 끼친 거야.”
▼ “정치가 뭐냐고? 모든걸 제자리에 앉히는거지” ▼
4시간여 인터뷰를 하는 동안 김지하 시인은 피로한 기색이 없었다. 우주론 동학이론에서부터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여성 문제에 이르기까지 거침없이 넘나들었다. 원주=허문명 기자 angelhuh@donga.com
―인생무상이라… 그건 어떤 느낌이었나요. (박정희 대통령이) 잘 죽었다는 통쾌함?
“그런 게 아니야. 차원이 달라. 나는 사람을 극단적으로 미워한 적이 없어. 참선을 하면서 박정희를 생각해 보니 ‘자기도 나라 먹여 살리려 애쓰다 갔지 뭐’ 이런 생각이 들더라고. 이전처럼 욕이 안 나와. 이 이야기를 박근혜 앞에서 했어. 그런데 얼굴이 하나도 안 변해. 눈물은커녕 웃음도 없어. 조금은 감동할 줄 알았는데 꼼짝도 안 해. ‘김지하니까 경계해야겠다’는 것도 아닌 거 같았어. 그냥 독한 거야. 그래서 내가 속으로 ‘18년 동안 자기 혼자 가슴 안에 칼을 세우고 혼자서 지켰구나. 그게 뭔지는 모르지만 그것이 내공이다’라고 생각했지. 그래서 박근혜에게 이렇게 말했어. ‘당신이 뭘 해낼 사람이다’.”
―(박 당선인이) 앞으로 잘할까요.
“잘할 거야. 잘 안하면 설 자리가 없어. 가난한 사람 먹여 살려야 해. 지금 국운이 서 있어. 3000년 동안 남성이 여자를 억압해 왔어. 남성주의, 가부장제 역사에서 여성 지도자가 나올 때는 대세가 움직인다는 거야. 지금이 바로 개벽기야. 음(陰) 개벽이야. 양(陽) 지배에서 음 지배로 넘어가는 때야. 이번에 5060세대가 움직였어. 5060세대는 민주화운동과 산업화의 주체야. 그들이 달라졌다는 것은 국운이 바뀐 거야. 또 젊은 세대 34%가 박근혜를 지지했어. 이것이 국운을 움직인 힘이 아니면 뭔가.”
―만약 당선인이 잘못하면?
“알게 뭐야. 내게 책임 있어? 나는 책임 질 생각 없어. 내 할 일 하면 돼. 글 쓰면 돼.”
다시 화제를 과거로 돌렸다.
―박정희 대통령이 많이 미웠나요.
“지독했지. 가랑이를 찢어서 개한테 줄까. 미워할 수밖에 없지. 내가 그렇게 얻어터졌는데. (기자를 보며) 불로 지지는 것만 고문이라고 알지? 그렇지 않아. 천장이 내려오고 벽이 다가들어와. 가끔 밑바닥도 올라와. 24시간 감시받으며 독방에 오래 있으면 누구라도 정신착란에 빠져. 온몸을 뒤틀고 몸부림치면서 소리를 지를 때마다 정보국에서 연락이 와. 항복하라고. 차(車) 사 준다 어쩌고 하면서 ‘각하에게 편지 한 통 쓰세요. 나라를 위해 같이 좀 일 좀 합시다. 뭐가 어렵습니까?’ 나는 면회실에 걸린 태극기를 가리키며 ‘태극기가 왜 저렇게 생긴 줄 아세요?’라며 딴청을 부렸지. 내가 (그들에게) 손들 수 있어? 손들 수 없지.”
―인생무상을 깨닫고 감옥에서 나왔는데 왜 그 뒤로도 마음고생을 했나요.
“(내가) 미쳤었다니까. (갑자기 호통을 치며) 한번 말하면 왜 못 알아들어. 정신병이었다고 정신병! 나는 미쳤었어. 10년 동안 정신병원을 열두 번이나 들어갔어. 지금은 약을 안 먹지만 항우울제 안정제 수면제로 폐인이 됐다고. 그것 때문에 온 가족이 우울했어. 아내는 정보부와 빨갱이들 사이에서 얼마나 고생을 했는데. 세 번이나 살해될 뻔했어. 고생을 강조하고 싶진 않아. 하지만 언젠가 책을 쓸 테니 기다려. 신문에 쓸 내용은 아니야. 왜? 더러우니까. 돈이 나오고, 나한테 속임수를 쓰고, 간첩이 나오는데. 아직 (책 쓰기엔) 일러.”
옆에 있던 김 관장이 조용히 말을 받았다.
“처음에 붙잡혀 간 후 1년 동안 면회도 안 됐다. 김지하 죽었다는데 어떻게 된 거냐는 전화는 시도 때도 없이 오는데. 그런데 소문이 들리기로 백낙청, 이영희(*리영희 전 한양대 교수(1929∼2010)를 말함. ‘우상과 이성’ ‘전환시대의 논리’ 등의 책으로 386세대에 큰 영향을 끼쳤다) 이런 인간들이 모여 김지하 욕을 한다는 거야. 내가 이영희 집에 서슬이 퍼래서 쳐들어갔지. 이영희가 너무 놀라 담배를 거꾸로 물었을 정도였어. 김지하가 형무소에 들어간 초부터 백낙청과 이영희는 김지하를 씹었어. 자기들 마음에 안 들었던 거지.”
다시 김 시인의 말이다.
“내가 대학 다닐 때 시골에서 돈이 안 올라오면 강의실에서 잤거든. 그래서 우리 패거리 별명이 거지야(웃음). 근데 이영희가 나한테 술 취해서 ‘김지하는 거지’라는 거야. 그래서 내가 ‘당신이야말로 거지다’ 했지. ‘매일 프롤레타리아 만세를 부르고, 없는 사람 만세 부르면서 내가 밥 얻어먹으려고 손 벌리는 게 뭐가 나빠. 당신이야말로 더러운 거지야. 사상(思想)거지, 당신 글 다 읽어봤는데 당신 창작물이 어디에 있어. 아사히신문, 뉴욕타임스, 인민일보 인용한 것 외에 더 있나?’ 그랬더니 후배들이 낄낄 웃고.”
시인은 마치 그 자리에 앉아 있는 듯 아이처럼 깔깔댔다.
―얼마 전 신문 칼럼에서는 백낙청 교수를 비판하셨어요.
“내가 옛날부터 다 말했던 거야. 다만 (공개적으로) 참은 거지. 옛날에 백낙청한테도 이야기했어. 지금 우리나라 민중 형태는 밑바닥이다. 이쪽(민중)부터 들어올려야 한다. 중산층이 형성되기 시작할 때 당신이 배운 미국 문학을 하면 좋겠다. 문학은 고통의 산물이야. 아무나 하는 게 아니야. 하버드 갔다 온 걸로 사람들 겁주고, 가르치려 들면 안 되지. 심지어 (내가) 감옥에서 막 나온 뒤에 실천문학에서 나하고 백낙청 대담을 시켰어. 며칠 후 (당시 주간이었던) 이해찬(전 국무총리)이 전화를 했어. 백낙청이가 자기가 말한 부분을 수정한다고 원고를 가져갔다는 거야. 그러면서 나한테도 수정할 부분이 있으면 하라고. 내가 그랬지. 아니 대담 원고를 수정하는 놈도 다 있냐.
또 있어. 내가 장모(*소설가 박경리)를 만나기도 전이야. 백낙청이 장모 문학평을 썼어. ‘시장과 전장’이란 책이었어. 근데 이걸 완전히 멜로드라마로 만들어 놓은 거야. ‘시장과 전장’은 결코 쉬운 책이 아니야. 그걸 백낙청이 멜로드라마로 만든 거야. 이런 자가 평론가라고 나서고 대담원고를 수정해? 내가 그 동네 풍경을 잘 알아. 한국 문화를 알려면 한국 문학전통에 집착을 해야지. 배우지도 않고 미국 소설 몇 개를 읽고 들어와서 휘저으려고 하니. 그런 문학 지식이 지식이야? 이번에 쓴 칼럼이 그 이야기야.”
문득 그에게 인생이란 뭘까 하는 궁금증이 일었다.
―김 관장님은 아까 제게 “다시 태어나고 싶지 않다”고 하셨어요. 선생님은요?
“인생은 한 번 왔다 가는 거야. 내가 오래 살고 싶을 것 같아? 돈 많이 벌어서? 지금 이렇게 정신 차리고 있는 것만도 사실 무리야. (옆눈으로 김 관장을 보며) 나는 굉장히 소심한 사람이야. 소심한 사람이 대게 마누라 한마디에 움찔해. ‘헤어집시다’ 하면 바로 ‘안 돼’라고 말해. 밥은 얻어먹고 살아야 할 것 아냐. 하하하.”
―선생의 병을 고친 한의학자 장병두 할아버지가 선생을 보고 ‘서 푼짜리 분노를 집어치워라’고 했다던데 그 분노는 뭐였나요? 박정희였나요?
“모두 포함한 건데, 못났으니까 분노를 느낀 거야… 집안이 불행했지. 아버지는 공산주의자였어. 기관총 들고 게릴라전까지 간 사람이야. 우익들이 나를 가마니에 넣고 목포 앞바다에 집어넣는다고 마을 사람들이 말하니까 기관총 내던지고 하산했어. 자수한 거지. 굴욕이 심했을 거야. 자살 기도를 세 번이나 했어. 불행했어. 전쟁은 끝났지만 고향(목포)으로 갈 수 있었겠나. 흘러 흘러 원주로 왔지. 판자로 지은 극장에 영사주임으로 있으면서 당시 열세 살이었던 나를 불러 원주에서 함께 살게 됐어.”
그의 입에서 듣는 아버지의 이야기는 가슴 아픈 한국 현대사 그대로였다.
“굶지는 않았지만 가난했어. 돈이 생기면 아버지는 술을 드셨지. 그래도 나를 서울대학까지 보낸 거야. 나는 외아들이었고. 이런 내가 어떻게 공산주의가 되겠나. 공산주의에 개인은 없어. 내가 감옥 들어간 뒤 나더러 마르크스, 레닌주의자라고 한 것은 다른 놈들이 만들어 붙인 거야. 4·19 이후부터 이상하게 자칭 마르크시스트들이 나를 대장으로 만들려는 분위기가 있는 거야. 나는 아닌데 말이야. 그 뒤로 몇십 년 동안 사람들이 심심하면 전화를 해 ‘아무개가 형님 찍어 죽인다 했어요’라는 거야. 내가 뭐라 대꾸했는지 알아? ‘네가 더 나쁜 놈이다, 동지를 고자질하고, 뭐하는 새끼냐. 전화 또 하면 죽일 거야.’ 한국의 자칭 혁명가들이 잘하는 고자질, 그게 나를 위해서가 아니야. 내 이름이 왜 지하인줄 알아?”
갑작스러운 그의 질문에 기자는 “지초 지(芝)에 물 하(河) 아닙니까”라고 답했다. 그가 허허 웃었다.
“땅속에나 갈 놈이라는 뜻이야. 나중에 유식한 놈들이 한자를 붙인 거지. 한글로 그냥 ‘지하’야. 서울대 문리과대학 다닐 때 시화전을 했어. 그 당시 우리 세계에서는 시화전 한번 하면 이름이 나게 돼. 그러니까 이름이 중요하잖아. 내 본명이 김영일이야. 그런데 같은 이름이 5명이나 됐어. 그러던 참에 동아일보에 있던 선배 한 명이 술 사준다고 오라는 거야. 당시에 낮술 사주는 선배는 큰 선배였지. 얼큰하게 취해 학교로 가려는데 돈이 한 푼도 없는 거야. 그래서 걸었어. 길가를 지나는데 ‘지하 이발소’ ‘지하 다방’ 옳다, 지하다. 그때부터 내 이름을 지하라고 한 거야… 더러운 이름이야.”
그의 말끝이 너무 쓸쓸해 기자 마음까지 쓸쓸해졌다.
문득 화제를 바꾸고 싶었다.
―뱀띠시죠?
“맞아. 근데 하나도 안 즐거워. 올해 (서민들은) 고통의 해야. 내년 봄까지도 안 좋을 것 같아. 그 대신 이 고비만 넘기면 참 좋은 시절이 올 것 같아. 물론 내 생각이니 믿지는 말고(웃음). 요즘 나는 무조건 아내 (생각) 따라가. 옛날에 나는 빠르고 단호했는데 지금은 안 맞아. 그래서 기다려야지, 신중해져야지 해. 박근혜에게 국민들 희망이 집중되는 것을 보면서 내가 생각한 것은 안도였어. 이제 좀 살겠구나, 이제 나는 글만 쓰자. 나머지는 후배들에게 맡기고… 이제 짐을 놓았어.”
―정치가 뭡니까?
“정치? 모든 것을 제자리에 앉히는 거지.”
역시 그다운 대답이었다. 저녁을 먹으러 인근 식당으로 옮겨서까지 진행된 4시간여 인터뷰 동안 그는 걸림과 막힘이 없었다. 기자는 그를 만나기 전 그의 모진 삶을 연민했다. 하지만 때로는 두 눈을 부릅뜨며 욕설과 호통을 치면서 화를 내고 때로는 어린아이처럼 순수한 표정으로 깔깔대는 모습을 보며 기자는 ‘태어나서 제 하고 싶은 대로 하며 사는 사람의 모습이 저런 게 아닐까’ 생각했다.
:: 김지하 시인은 ::
△1964년 한일회담 반대 학생시위로 4개월 투옥
△1969년 ‘시인’지에 ‘황톳길’등 발표하며 작품 활동 시작
△1970년 사상계에 발표한 풍자시 ‘오적’ 으로 반공법 위반, 1개월 투옥
△1973년 ‘토지’의 소설가 박경리의 딸 김영주와 결혼
△1974년 민청학련 주모자로 기소돼 사형 선고(긴급조치 4호 위반)
△1975년 형 집행정지로 석방. 동아일보에 연재한 옥중수기 ‘고행 1974’와 관련해 재구속(반공법 위반), 노벨 문학상·평화상 후보로 추천
△1978년 무기징역에서 20년으로 감형
△1980년 형 집행정지로 석방
△1941년 목포 출생
△1959년 중동고등학교
△1966년 서울대학교 미학과(학사)
△1985년 미국 명예인권실천 박사
△1993년 서강대 명예문학박사
△명지대, 영남대, 동국대, 한국예술종합학교 석좌교수 역임
△현재 원주 상지대 출강
인터뷰=허문명 오피니언팀장 angelhuh@donga.com
< 출처 : dongA.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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