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수많은 흑인 여성 아티스트들 중 휘트니 휴스턴은 전세계가 주목한 팝의 여왕이었다.
마이클 잭슨, 프린스 등 새로운 흑인 아티스트들이 전세계를 호령하던 1980년대 혜성처럼 등장한 휘트니 휴스턴은 단연 독보적인 여성 보컬리스트였다. 마이클 잭슨과 프린스처럼 비주얼적인 면에서도 흑인에 대한 편견을 깨고 수많은 팬들을 거느렸던 휘트니 휴스턴은 1985년 ‘휘트니 휴스턴’이라는 음반으로 데뷔했다. 이 앨범은 전세계에 걸쳐 2500만 장 이상이 팔렸고 ‘세이빙 올 마이 러브 포 유’ ‘그에티스트 러브 오브 올’ 등 주옥같은 명곡을 수록했다.
폭발적인 가창력과 관능미를 지닌 휘트니 휴스턴은 그 이후에도 빌보드를 석권하며 1990년대까지 국내에도 수많은 팬들을 보유한 팝스타였다. 1992년 전성기 무렵 케빈 코스트너와 함께 주연한 영화 ‘보디가드’와 OST 음반 수록곡 ‘아이 윌 올웨이즈 러브 유’는 국내에서 폭발적인 성공을 거두기도 했다. 총 1억7000만 장의 음반 판매고와 그래미상 6회, 빌보드 뮤직 어워드 16회 수상 등 총 415번의 상을 받아 세계에서 가장 많은 상을 받은 여가수로 기네스북에 오르기도 했다.
1963년 미국 뉴저지에서 가스펠 가수인 씨시 휴스턴(Cissy Houston)의 딸로 태어난 휘트니 휴스턴은 1960년대 ‘솔의 여왕’ 아레사 프랭클린이 대모(godmother)였다. 교회에서 성가대 활동으로 시작해 10대 시절 저메인 잭슨 등 유명가수의 코러스로 활동했다. 그러다 19세에 한 클럽에서 노래를 부르다 유명 음반제작자인 클라이브 데이비스의 눈에 들어 가수로 본격 데뷔했다. 이렇게 시작된 휘트니 휴스턴의 전성시대는 1992년 당시 최고의 남성 흑인 가수였던 바비 브라운과의 결혼과 함께 막을 내렸다. 바비 브라운의 폭력설이 루머로 떠돌더니 급기야 2003년 바비 브라운이 가정폭력 혐의로 경찰에 체포됐다. 휴스턴 역시 마약 등 약물에 손을 대기 시작하면서 나락으로 떨어졌다.
2007년 바비 브라운과 이혼한 후 제작자 클라이브 데이비스와 다시 손잡고 2009년 새 음반 ‘아이 룩 투 유(I Look to You)’를 발표했다. 이듬해 시작된 월드투어의 일환으로 내한 공연을 펼쳤지만 전성기 시절의 목소리는 더 이상 아니었다. 결국 전세계 팬들에게 ‘전설적인 팝의 여왕’으로 남게 됐다.
한준호 기자 tongil77@sportsworld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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