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아주지 않는, 평창 올림픽의 1등 공신은 김석원(金錫元)씨!
김진선 전 강원도 지사를 비롯하여 여러 사람들의 공(功)이 많지만, 이 모든 이들의 功을 합쳐도 이 한 사람의 개척정신이 없었더라면 평창 겨울 올림픽은 불가능하였다.
김씨는 사전 조사를 철저히 한 편이다. 일본의 스키장 전문 조사기관 세 곳과 프랑스의 한 회사에 용역을 주었다. 이렇게 하여 확정된 곳이 해발 1,400미터가 넘는 발왕산 기슭을 중심으로 한 지금의 용평 일대이다. 슬로프를 3,500미터까지 낼 수 있다고 계산하였다(현재 레인보우 파라다이스 코스는 5,600미터). 그가 용평 리조트의 모체(母體)인 고원(高原)개발을 창립한 것은 1973년 3월. 아버지 김성곤 회장으로부터 자본금 2억원을 빌렸다. 김석원(金錫元)은 초등학교를 일본에서 다녔다. 일본의 사정에 밝았다. 당시 일본의 스키인구는 약1,000만 명이었다. 김석원(金錫元)은, 한국도 소득 향상으로 스키인구가 늘어날 것이라고 예상하였다.
고원(高原)개발이 38년 전 차관으로 도입한 스키장 설비들 이름들, 즉 리프트, 제설기(製雪機), 정설차(整雪車), 설상차(雪上車=스노 모빌)은 이제 한국인들의 귀에 익은 게 되었지만, 당시는 담당 공무원들에게 가르치면서 인허가를 받아야 했다. 우리나라엔 리프트에 관한 법규가 없었다. 케이블카에 적용하는 삭도법(索道法)이 있을 뿐이었다.
공무원이 "도대체 리프트가 뭡니까?"라고 물었다. 김석원은 이렇게 설명하였다.
"쇠로 만든 굵은 철사줄이 일정한 간격의 거리를 타원형으로 빙빙 돌아가면 거기에 매달린 의자에 스키어를 한 사람씩 앉혀서 슬로프 꼭대기로 실어 나르는 시설입니다."
김석원씨는 일본의 관련법을 연구하여 공무원들에게 가르쳐주어야 했다. 그리하여 기존의 삭도법을 개정, 리프트를 포함시키게 되었다. 김씨는 "무조건 안 된다며 문을 걸어 잠그지 않고 함께 해결책을 찾아보자며 같이 고민하던 그 시절의 공무원들이 그리워진다"고 회고한 적도 있다.
지금은 리프트가 스테이션 안으로 들어오면 서행(徐行)함으로 내리고 타기가 쉽다. 당시엔 리프트의 속도가 같아 타고 내리는 데 묘기를 발휘하여야 했다. 70년대 말에 개발된 서행(徐行) 기술은 '디테처블'(detachable: 분리 이탈)이라고 하는데 이 설치 허가를 받는 데도 애를 먹었다. 서행기술은 법규에서 규정한 리프트 속도보다 늦기 때문에 허가를 해줄 수 없다는 것이었다. 김석원씨측은 여기서도 좋은 공무원을 만났다. 평창군청의 담당계장은 派獨(파독) 광부출신의 애국자였다. 대구 팔공산 케이블카가 디태처블 방식을 채용한 것을 확인하고 허가를 내주었다.
당시 제설기(製雪機)는 영하 5도 이하에서만 작동할 수 있었다. 1979년 겨울 시즌 개막날에 맞추어 슬로프를 따라서 발왕산 꼭대기로 제설기(製雪機)를 돌리면서 올라갔는데 10미터를 남겨두고 기온이 상승, 눈을 만들 수 없게 되었다. 김석원씨는 고민하다가 묘안을 냈다.
"가마니를 깔아라!"였다.
평창이 올림픽 개최지로 선정될 수 있었던 요인중엔 골프장, 스키장, 콘도미니엄 등 시설들이 세계적 수준의 친(親)환경 미관(美觀)을 가진 점이 포함될 것이다. 이 또한 김석원씨의 집념과 안목에 감사해야 할 일이다.
평창 올림픽이 확정된 이후 언론은 득표 활동을 잘한 이들을 주로 영웅으로 만들고 있다. 우리나라 최초의 스키 슬로프는 일본인이 만든 금강산 부근 원산 신풍리였다. 분단(分斷) 으로 북한지역의 스키장을 빼앗기고 남한지역에서 슬로프를 찾아 헤매던 스키어들이, 발왕산에서 슬로프를 찾아낸 것은 1956년, 김석원씨가 이곳에 스키장을 짓기로 결심한 것은 그 17년 뒤, 여기에서 동계 올림픽이 열리는 건 그로부터 다시 45년 뒤이다. 모든 좋은 것엔 개척자의 꿈과 집념과 시간이 들어간다. 飮水思源(음수사원), 오늘밤의 기쁨을 마시는 한국인들은 샘물을 판 사람이 누구인지 한번 생각해 봐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