鶴山의 草幕舍廊房

우리나라 畵壇

조선시대의 명화 4

鶴山 徐 仁 2009. 7. 5. 14:34

조선시대의 명화 4

작가 : 정선(鄭敾)
아호 : 겸재(謙齋) 또는 난곡(蘭谷)
제목 : 통천문암(通川門巖)
언제 : 17세기 후반
재료 : 족자 종이에 수묵
규격 : 131.6 x 53.4 cm
소장 : 간송 미술관

해설 : 문암에는 통천(通川)문암과 고성(高城)문암이 있어 혼동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그림은 통천 남쪽 동해변에 위치한 통천문암을 그린 것이다. 정선은 관동(關東)의 여행 때마다. 이 통천문암을 많이 그렸듯이. 현재 전하는 화적(畵跡)이 적지 않다. 그 중에 이 그림이 가장 노숙한 필치를 보이는바. 수직준(垂直皴)을 찰법(擦法)에 가깝도록 부드럽게 구사하여. 거의 윤곽을 노출시키지 않으면서. 골기(骨氣)를 내재시키는 방법으로. 대상의 본질을 함축 표현하고 있다. 따라서 이그림은 정선 최만년의 득의작(得意作)으로 보아야 하겠고. 어느 순간의 사생(寫生)이라기 보다 이전의 사생을 토대로 이상적인 가경(佳景)을 구현한 것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리라 생각된다. 일렁이는 파도가 곧 덮쳐들 것처럼. 물결은 하늘과 맞닿아 땅위에 군림하고. 먼 하늘에는 뭉게구름이 흐르는데. 거대한 바위산이 육지로 들어가는 문인 듯. 우뚝 솟아 파도의 침노를 막고 있다. 그 사이를 동자 하나만을 데리고 나선 단촐한 선비의 행차와. 말타고 구종(驅從)잡힌 호사스런 행차가 함께 지나고 있다. 모두 선비차림인데. 형편의 차이 때문이라기 보다. 의취(意趣)의 고하가 두 행차의 차이를 가져오게 한 듯하다. 정선이 스스로이고 싶어한 것은. 아마 긴 지팡이를 짚고 앞서가는 단촐한 행차였을 것이다. 그래서 문암 사이에 들어서다가 발을 멈추고 고개를 돌려, 바다를 바라보는 유연한 모습으로 선비를 표현하고, 심술기 어린 철모르는 동자의 심정은 지루하기만 하다는 듯 왈자걸음으로 나타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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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 정선(鄭敾)
아호 : 겸재(謙齋) 또는 난곡(蘭谷)
제목 : 해인사도(海印寺圖)
언제 : 17세기 후반
재료 : 족자 종이에 수묵담채
규격 : 22.9 x 67.5 cm
소장 : 국립중앙박물관

해설 : 해인사는 9세기 초엽 신라 시대에 창건된 사원으로, 범어사(梵魚寺). 통도사(通度寺) 와 함께 한국 3대 명찰의 하나로 손꼽힌다. 또 고려판 대장경(大藏經)의 판목이 소장되어 있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이 그림은 경상남도의 명승지 가야산(伽倻山) 기슭에 있는 해인사 가람(伽藍)의 제당(諸堂)을 중심으로. 계류나 단풍으로 물든 산들의 경치를. 담채를 섞은 수윤(秀潤)한 필치에 의해 부채면 위에 그린 것이다. 정선은 이 해인사도를 비롯하여 인왕산. 금강산 등의 명산. 명승지를 탐방하여 자주 그 진경을 그리고 있다. 이러한 진경도를 필두로 그가 그리는 산수는 실경에 기초한 것이 많은 중국화의 분본화법(粉本畵法)의 범위에서. 좀처럼 벗어나지 못했던 이조 회화 가운데. 혼자서 이것을 개방시켰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물론 정선에게 있어서도 표현기법의 점에서는. 종래의 화가들과 같이 절파적(浙派的)인 것이나. 고씨화보(顧氏畵譜) 등에서 배웠다고 여겨지는. 오파(吳派) 문인화 계통의 남종(南宗)화풍의 섭취가 엿보이는 것은. 이 그림에 많이 사용된 미점(米點)이나 피마준(披麻皴)에 의해서도 알수있다. 그러나 그것이 단순한 기술모방에 그치지 않고. 이러한 장점들을 참작하여 자기 것으로 소화시켰다는 점은. 그가 조선 시대의 탁월한 산수화가였음을. 어느 누구도 부정할수 없는 사실이다. 그림 속에는 해인사(海印寺)란 자제(自題)와 겸재(謙齋)의 관기(款記). 그리고 정(鄭). 선(敾)이란 백문방인(白文方印)이 하나씩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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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 정선(鄭敾)
아호 : 겸재(謙齋) 또는 난곡(蘭谷)
제목 : 정양사(正陽寺)
언제 : 18세기 중엽
재료 : 족자 종이에 담채
규격 : 22.7 x 61.5 cm
소장 : 국립중앙박물관

해설 : 실경(實景) 산수의 소재로도 빈번하게 그려졌던 금강산(金剛山)은. 화가들을 포함해 시인 묵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던. 한반도 중심부에 위치한 성산(聖山)이다. 정선이 그의 실경산수를 대성함에 있어 수차에 걸친 방문이 불가피했으며. 금강산이 준 감동이 어떠했는가는. 현존 작품수를 통해서도 짐작이 가능하다. 정양사는 이른바 정선 화풍으로 지칭될 수 있는. 주요 골격인 암산(岩山) 표현의 수직준(垂直皴)과. 토산(土山)표현의 미점 및 산의 정기를 드러낸 담청이 창연(蒼然)한 완숙기의 작품이다. 이를 더욱 분명히 입증해 주는 겸로(謙老) 란 관서(款署)가 있다. 포치(布置)에 있어서 정선에 의해 정형화된. 근경의 토산. 그 너머로 보이는 골산(骨山) 등. 그의 특징을 빠짐없이 담고있다. 더욱이 부채면이 산세를 전개하는 데. 더없이 적합한 화면임을 잘 알고 있던 그는. 그림과 같은 훌륭한 화면구성을 이룩하였다. 노년기로 접어든 의연하고 의젓한 산의 자태가. 노대가(老大家) 정선의 마음과 정신을 거쳐. 화면에 재창조된 이 그림은. 완숙의 극에 달한 대가로서. 한 곳의 허술함이나 흐트러짐이 보이지 않는. 오묘한 조화와 질서를 갖추고 있다. 정선의 실경산수는 한 개인의 천재적 우수성에 기인된 요소도 없지 않으나. 모든 문화가 그러하듯 그 연원은 오래되었으니 현존하는 화적(畵跡)에서도 살필 수 있듯이 계회도(契會圖)나 중국 사행시(使行時) 그 여정을 그린 조천도(朝天圖) 등도 실경산수 발전과정에 있어 간과할 수 없는 그림들이다. 정선의 실경산수는 그 이후에도 유례를 찾기 힘든 넓은 시야로 대경(大景)을 화면에 집약시킨 구성의 묘 또한 그가 창안한 준법(皴法). 용묵법(用墨法)에 못지않게 중시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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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 정선(鄭敾)
아호 : 겸재(謙齋) 또는 난곡(蘭谷)
제목 : 취성도(聚星圖)
언제 : 18세기 중엽
재료 : 족자 비단에 담채
규격 : 145.8 x 61.5 cm
소장 : 한국개인

해설 : 이 작품은 주자대전(朱子大全) 권85의 취성정화병찬(聚星亭畵屛贊)에 나오는. 후한(後漢) 때의 명사 진식(陳寔)의 고사도(故事圖)이다. 취성 이란 덕이 있는 사람들의 모임이란 뜻으로. 주자(朱子)도 그가 살던 고정(考亭)에 취성정을 두었었다. 송자대전(宋子大全)에 보면 송시열(宋時烈)이 김수증(金壽增)과 함께 <취성도>를 만들었는데. 주자의 찬(贊)의 뜻이 깊고, 또 장식(張栻). 황헌(黃軒)의 논설이 의의가 커서. 쇠세(衰世)를 권계(勸戒)하는 큰 단서가 될 만하여. 김수증 과 이 그림을 그리는 일을 경영하였다. 이들은 서로 그림의 곡절을 헤아린 다음. 먼저 주자의 찬문을 쓰고. 다시 주자. 남헌. 면재의 논설을. 찬 아래 붙인 다음. 그 아래 우암의 발(跋)을 적어 동지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하는데. 실제 그림 발문에도 족자를 만들었다고 써 있다. 취성도는 상단에 위에서 말한 찬과 발문이 예서체로 단정히 적혀있고. 하단에는 바로 진식(陳寔). 순숙(筍淑) 양가의 고사(故事)가. 아주 사실적으로 산수화 안에 전개된다. 나무. 개울가의 바위. 인물묘사. 산봉의 기법이 모두 겸재정선의 것이 틀림없으니. 예전부터 전해온 취성도를 보고 모사(摹寫)한 것임이 분명하다. 인물, 소, 수레등이 작은 그림인데도. 매우 꼼꼼하고 각종 나무들. 그중에서도 대숲. 삿자리울타리. 초당의 지붕은 말할것도 없고. 방안의 기물과 산수병풍까지 그림 속에 있어 정선의 실경도들과는 달리. 여간 치밀하지가 않다. 뒷산은 주름잡힌 계곡을 피마준(披麻皴)과 태점(笞點)으로 처리하고. 청록산수의 채법(彩法)이 돋보이기도 한다. 원경의 고산준봉에서도 세심한 구성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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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 조영석(趙榮祏)
아호 : 관아재(觀我齋)
제목 : 송작도(松鵲圖)
언제 : 18세기 중엽
재료 : 족자 비단에 담채
규격 : 46.5 x 41 cm
소장 : 한국개인

해설 : 조영석은 자를 종보(宗甫). 호를 관아재(觀我齋)라 하는데. 숙종. 영조 연간에 활약한 대표적인 사대부 화가로 겸재(謙齋) 정선(鄭敾). 현재(玄齋) 심사정(沈師正). 과 함께 사인삼재(士人三齋)라 일컬어졌다. 그는 높은 관직을 지내진 못했지만 시. 서. 화 삼절로 선비의 청빈한 삶과 풍류를 즐긴 것이. 그의 문집(文集) 관아재고(觀我齋稿) 곳곳에 잘 나타나 있다. 송작도는 왼쪽 중앙에서 아래로 휘어지면서 처지는. 늙은 소나무 줄기에 까치 두 마리가. 나란히 오른쪽을 향해 앉아 있는 것을 그린 그림인데. 까치는 꼬리를 치키고 내린 것만 빼놓고는. 둘 다 앉은 자세가 같다. 흰 호분(胡粉)을 두껍게 칠한 까치 배의 영모기법(翎毛技法)과. 늙은 소나무의 갈필 붓놀림이 대조적이고. 나란히 앉은 까치의 자세에 변화가 조금 있었더라면. 공간구성이 좀 나았을 것이다. 실제로는 그림밑에 후손 조문서(趙文瑞)의 시(詩)가 같이 표장되어 전체적인 구도에 안정감을 주고 있어. 그림만 따로 보는 것과 는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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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 조영석(趙榮祏)
아호 : 관아재(觀我齋)
제목 : 원주행선도(原州行船圖)
언제 : 18세기 중엽
재료 : 족자 종이에 담채
규격 : 62.5 x 43.5 cm
소장 : 한국개인

해설 : 조영석의 그림은 특히 인물과 속화(俗畵)에서. 당대부터 높은 평가를 받았고. 산수화에 있어서도 남종문인화풍의 수용이라는. 또다른 특징을 지니고 있으며. 특히 산수인물화 중에는 설중방우(雪中訪友)나 유음납량(柳陰納凉)처럼 속화나. 자신의 삶의 분위기를 반영한 작품이. 많이 전하여 크게 주목된다. 이 그림역시 특별한 사연을 담고 있다. 그가 37세 때 가을에 그의 벗 김신로(金莘老)가 가족과 함께 섬강(蟾江)을 따라 원주(原州)로 이주하게 되자. 그 석별의 정으로 그림과 칠언율시(七言律詩)를 지어 주었던 것이다. 제시의 내용대로 책가지를 보자기에 쌓아 싣고. 배를 타고 원주로 떠나면서 대화를 주고받는 장면이다. 강 대안(對岸)은 갈대밭의 해오라기로 시정을 살려냈고. 뱃길은 유려한 필치의 물결 묘사로 속도감을 나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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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 변상벽(卞相璧)
아호 : 화재(和齋)
제목 : 계자도(鷄子圖)
언제 : 18세기 중엽
재료 : 족자 비단에 수묵담채
규격 : 94.4 x 44.3 cm
소장 : 국립중앙박물관

해설 : 변상벽은 자를 완보(完甫). 호를 화재(和齋)라 했으며. 초상화를 잘 그려. 국수(國手) 라는 칭호를 받았고. 벼슬이 현감(縣監)에 이르렀던 화원화가(畵員畵家)이다. 생몰년은 알수 없으나. 그가 그린 윤급(尹汲)의 노년기 초상화로 미루어. 그의 활약연대를 대략 영조 연간으로 짐작할수 있다. 그는 특히 고양이를 잘 그려 변고양(卞古羊)이라는 별칭으로 까지 불렸으며, 고양이 라고 하면 그를 지칭할 정도로 이 분야에서 독보적 위치를 누려왔다. 이작품의 표현은 동심적이라기 보다 매우 정밀하게 어미 닭과 병아리의 생태사실(生態寫實)에 힘을 기울였으며. 나무와 꽃 그리고 날아드는 나비와 벌들을 그린 세밀한 필선(筆線)과 는 대조적으로. 배경의 괴석묘사(怪石描寫)가 대범한 수묵 처리를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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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 김두량(金斗樑)
아호 : 남리(南里)또는 운천(芸泉)
제목 : 견도(犬圖)
언제 : 18세기 중엽
재료 : 화첩 종이에 수묵
규격 : 94.4 x 44.3 cm
소장 : 국립중앙박물관

해설 : 김두량은 영조(英祖)대에 활약한 화가로. 자는 도경(道卿). 호는 남리(南里)또는 운천(芸泉)이라 했다. 그는 산수화가로 일가를 이루고. 인물화에도 능했으나. 때로는 고양이를 소재로 한 뛰어난 작품을 남기고 있다. 그 중에서도 이 개 그림은. 그 화흥(畵興)이나 묘사의 기교등 그의 독특한 면모를 보여주고 있는 작품이다. 가려운 곳을 뒷다리로 긁는 개의 생태가, 자못 익살스럽게 묘사되어 있으며. 이와 같은 사실수법의 묘미는. 그의 새로운 묘사기법과 더불어. 당시로서는 보기 드문 표현이었다. 배경인 초목의 묘사와 대조적인. 동물의 입체적 표현기교는 아마도 서구적 묘사기법. 이르테면 당시 중국 북경(北京)을 통해 들어온. 서양화 기법을 이런 주제 속에서 시도해 본 자취라고도 볼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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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 김두량(金斗樑)
아호 : 남리(南里)또는 운천(芸泉)
제목 : 월야산수도(月夜山水圖)
언제 : 18세기 중엽
재료 : 족자 종이에 수묵담채
규격 : 81.9 x 49.2 cm
소장 : 국립중앙박물관

해설 : 김두량은 도화서(圖畵署) 화원으로 별제(別提) 벼슬까지 지냈는데. 그의 호 남리’ 는 그를 신임한 임금의 사호(赐號) 였다고 한다. 그처럼 화원으로서 별제에 발탁된 점이나. 임금의 사호가 있었다는 사실로 보아. 대단히 두각을 드러냈던 화가임이 분명하다. 이 그림은 낙관에 보이는 갑자(甲子) 란 간기(干紀)로 미루어. 49세 때의 작품임을 알수 있다. 안개 낀 늦가을의 으스름 달빛 풍경을 독특한 묵훈법(墨暈法)으로 실감있게 표현하여. 그 쓸쓸한 정취가 가슴에 스미는 듯하다. 이처럼 자율화된 기법으로 한국 자연의 스산스러운 정취를. 실감있게 나타내 준 예는 매우 드물다. 그의 다른 작품으로는. 전가낙사도(田家樂事圖) 등 가작(佳作)들이 약간 전해질 뿐이며. 그는 화가로서의 계보나 교우관계를 자세히 밝힐 자료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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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 심사정(沈師正)
아호 : 현재(玄齋)
제목 : 하경산수(夏景山水)
언제 : 18세기 중엽
재료 : 화첩 종이에 담채
규격 : 33.5 x 41.7 cm
소장 : 국립중앙박물관

해설 : 심사정의 자는 이숙(頤叔). 호는 현재(玄齋)이며. 정선 과 더불어 18세기의 대표적인 문인화가이다. 부사(府使)를 지낸 그의 아버지 심정주(沈廷胄)도 그림을 잘 하였다. 그는 젊어서 정선에게서 그림을 배웠으나. 때마침 유행하기 시작한 남종(南宗)산수화에 심취하여. 스승인 정선의 진경(眞景)산수화 보다는. 전통적 중국화제(畵題)의 문인화를 즐겨 그렸다. 이그림은 여름 장마철. 산간의 비오는 경치를 묘사 하였는데. 화면 중앙에 흐르는 시냇물 위로, 돌다리가 가로놓여 있고. 오른쪽 근경에 담묵의 버들과. 초묵(焦墨)으로 둥치와 가지를 치고. 총총히 잎새를 묘사한 몇 그루 나무가 서 있는데. 우장을 쓴 두 행인이 보인다. 돌다리를 건너 왼쪽으로 가면 가파른 벼랑이 있고. 물을 따라 길이나 있는데. 중경 숲속에 초가 몇 채가 지붕만 보일 뿐이다. 그뒤로 산등성이가 밋밋하게 여름 안개 위로 전개되고. 멀리 담청색의 원산이 보인다. 그 위 왼편 공간에. 천고절작(千古絶作) 이라 끝을 맺는 평시(評詩) 한 귀절이 초서채로 써 있어. 달아빠진 붓과 지두(指頭)로 꼭꼭 찍은 듯 한 전체 분위기와 잘 어울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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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 심사정(沈師正)
아호 : 현재(玄齋)
제목 : 강상야박도(江上夜泊圖)
언제 : 18세기 중엽
재료 : 족자 비단에 수묵
규격 : 153.8 x 60.8 cm
소장 : 국립중앙박물관

해설 : 심사정의 작품 중에서는 특히 눈을 끌게 하는 복고풍의 작품이다. 명대(明代)의 원체(院體)산수화로 느껴지는 북종화(北宗畵)적인 여운을 원숙한 기법으로 처리하여. 거의 조선시대의 것으로 볼수 없을 정도로. 아주 자연스럽게 중뮌岵?감각을 갖추고 있다. 원경 또한 미불(米巿)이나 동기창(董其昌)을 연상시키는 격조를 띠고 있고. 화면의 색감도 가라앉은 어두운 색으로 일관하여. 충만감이 있는 그림의 밀도를 느끼게 한다. 번지듯 스며 있는 담묵과 부드럽고 습윤한 농묵이 차분하게 조화를 이루고 있는 이 그림은 1747년의 작품으로 41세 때의 그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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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 심사정(沈師正)
아호 : 현재(玄齋)
제목 : 명경대(明鏡臺)
언제 : 18세기 중엽
재료 : 화첩 종이에 담채
규격 : 27.7 x 18.8 cm
소장 : 간송미술관

해설 : 내금강(內金剛)으로 들어가는 관문인 장안사(長安寺)를 지나. 기암이 연이은 백천동 (百川洞)계곡을 따라 오르면. 문득 방주형(方柱形) 거암이 눈앞에 우뚝솟아나고. 그 밑으로는 만폭동(萬瀑洞) 물줄기가 흘러 오다가. 깊이 모를 큰못을 이루어 놓는다. 여울져 흐르던 물이 갑자기 흐름을 멈춘 듯. 명경지수(明鏡止水)가 되어 주위의 제봉(諸峯)을 머금고. 고요히 누워 있는 것이다. 그래서 방주형 암봉을 명경대라 하고. 못은 황천강(黃泉江). 못가의 소대(小臺)는 업경대(業鏡臺)라 하였다. 모두 불가(佛家)에서 말하는 명부(冥府)세계를 상징한 이름들이다. 이곳을 마치 사후(死後)의 저세상으로 생각했던 듯. 얼마나 절승(絶勝)이었기에 문득 현세감(現世感)을 잃고. 저세상으로 착각할 정도 이었을까. 때문에 이곳은 조선시대 후기를 풍미한 진경산수화의 소재로. 뭇 화가들의 손에 자주 요리되곤 하였다. 이그림은 현재 (玄齋) 심사정이 그린. 일련의 금강산도 중의 한 폭이다. 심사정은 정선과 달리 남종 화풍을 조선화한, 조선남종화의 종장(宗匠)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 그가 진경산수화를 그린 것은 얼핏 이례적으로 보일수도 있지만. 그가 50대 이후 남종화풍을 조선화시키는 과정에서. 조선전통화풍의 맥이 정선의 진경산수에 닿고 있음을 간파하고. 이후 정선의 화법을 즐겨 구사 하였던 것을 생각하면. 심사정의 진경산수는 조금도 이상할 것이 없다. 정선의 금강산도에 비하면 골기(骨氣)가 다소 상실되었지만. 절대준(折帶皴)을 사용하여 거암과 주위봉우리들을 단순화시키고. 거암을 나타내기 위해 옅게 바른 천강색(淺絳色)을. 먹빛 짙은 태점(笞點)과 산뜻하게 조화시키는 기량은. 남종화법을 자유롭게 구사한 노대가(老大家)의 원숙한 솜씨로서 조금도 손색이 없다. 업경대 위에는 갓 쓴 선비 셋이 앉아, 절경에 넋을 빼앗기고 있는데. 그 곁에는 삭발한 승려 하나가 맨머리를 드러내 놓고 서서. 열심히 무엇을 설명하고 있는 듯 하다. 아마 주변 경관을 자세히 지적하며 안내하고 있는 모양이다. 대(臺) 아래에는 그들 세 선비를 태우고 왔을. 남여(藍輿) 두 틀이 보이고. 그 곁에 고깔쓴 군상(群像) 다섯이 보이니. 아마 대 위의 안내승과 합쳐 6인의 승려가. 이 세력있는 선비 셋을 남여에 태우고. 금강산을 구경시키고 있는 모양이다. 당시 여덟 천민(賤民)의 하나로 박해받던 승려들의 진상을. 눈으로 확인할수 있는 좋은 자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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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 심사정(沈師正)
아호 : 현재(玄齋)
제목 : 선유도(船遊圖)
언제 : 18세기 중엽
재료 : 종이에 담채
규격 : 27 x 39.5 cm
소장 : 한국개인

해설 : 심사정이 초년에 그림을 배운 정선(鄭敾)은 동국진경산수(東國眞景山水) 라는. 우리나라 산천을 실제로 보고 그리는 실경화법(實景畵法)을 다져나가고 있었는데. 심사정은 어느 정도 화가로 성장하자. 중국에서 들어온 전통적화법을 더 좋아하여 그 기법을 익히고. 명나라 오파(吳派)의 대가인 심주(沈周)의 화풍을 많이 따랐다. 심사정의 산수화는 전체적으로 남종화 법을 따르고 있지만, 보수적. 고전적 이어서 창조적 개성이 모자란다는 평을 들었다. 그러나 만년에는 오히려 대담하고 실험적인 지두화(指頭畵)와 몽당붓 같은 것을 써서. 소품들에서 상당한 수준을 보였다. 그리고 거칠거나 작고 섬세한 필법을 겸하여. 스승인 정선과 더불어 쌍벽을 이루었다. 이 그림은 화제(畵題)가 알려지지 않은 만년작인데 구도. 묵법. 필법에서 완숙한 경지를 보여준다. 구도를 살펴보면 파도가 심한 바다 한가운데에. 약간 오른쪽 아래로 치우치게 일엽편주를 띄어놓고. 그림 상단부를 가로질러 안개를 걸쳤고. 그 위에 파도같기도 하고 구름같기도 한 것을 그려 넣어. 구도에 변화를 주고 있다. 다음에 매우 꼬불꼬불한 묵선으로 파도의 움직임을 표현하고 있으며. 거의 일적선으로 약간 비스듬이 그려진 배는. 이상할 만큼 정지되어 있어서 전체적으로 볼 때. 정(靜) 과 동(動)의 대비를 보여 준다. 배 한가운데에는 대발로 만든 선실(船室)에 휘장을 걷어올린 창문이 있고 선미 가까이에는 탁자 위에 문적(文籍)과 화병. 향로. 술잔등이 보이며. 용트림을 하며 구부러진 고목위에 학 한마리가 막 외발로 몸의 평형을 유지하면서 부리로 무엇을 쪼고 있다. 전체적으로 볼 때 출렁이는 파도의 흐름은 해룡(海龍)이 신선들의 배를 호송하는 듯하고. 하늘에는 운룡(雲龍)이 인도하는 것 같다. 학과 선인. 바다등의 고사(故事)나 신선 이야기를 회화로 엮은 것으로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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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 강희언(康熙彦)
아호 : 담졸(淡拙)
제목 : 인왕산(仁王山)
언제 : 18세기 중엽
재료 : 종이에 수묵담채
규격 : 24.6 x 42.6 cm
소장 : 한국개인

해설 : 강희언 의 자는 경운(景運). 호는 담졸(淡拙) 로. 운과(雲科)에 급제하여 감목관(監牧官)의 벼슬을 지냈다. 동국문헌(東國文獻) 화가편(畵家篇)에 의하면. 그는 특히 풍속화와 호렵도(胡獵圖) 등을 잘 그렸다 한다. 인왕산도는 오늘날 새로운 안목으로 평가해서 미처 몰랐던 강희언의 두드러진 자질을 돋보여 주는. 뛰어난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즉. 이작품은 당시의 화단에서는 좀처럼 실천하기 어려웠던. 정확한 원근법과 거의 완전한 투시가 이루어진 서구적 기법의 사생풍경을 연상케 해줄 뿐더러.산수 묘사의 전통적인 준법(皴法)을 초월해서 특이한 묵훈(墨暈)의 농담과 작은 점묘(點描)로 이루어진 입체감의 표현이. 매우 참신한 감각을 드러내고 있다. 더구나 인왕산의 산용(山容) 전체를 동북방에서 바라볼수 있는. 도화동(桃花洞) 에서 측면으로 묘사한 화의(畵意)도 새롭고. 또 능선을 타고 꿈틀거리는 서울 성곽을. 분명하게 부각시킨 포치(布置)도 매우 주목할만하다. 이러한 한국 사경(寫景)산수의 좋은 전통은. 정선이 이미 이루어 놓은 기틀이 있었으나. 강희언의 이 작품은 그러한 기틀 위에서 한 단계 더 근대화 되었다는 느낌이 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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