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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이 어쩌다…
수십 년간 세계 금융계를 쥐고 흔들던 월스트리트 모델이 무너지자, "미국이 어쩌다 이 지경이…"란 한탄이 들린다. 사실 미국에서 '미국이 어쩌다…'란 말이 나온 건 꽤 됐다. 미국사람들은 유럽에서 유로에 밀리는 달러의 실상을 눈으로 보곤 입맛을 다셨고,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에서 죽어가는 병사들의 수를 일일이 세어 알리는 보도를 접하면서 "이왕 전쟁을 시작했으면 이겨야지 미국이 이게 뭔가?"란 불편한 심사를 감추지 못했다.
미국의 진보적 지식인들은 이라크전쟁의 부당성, 월스트리트의 탐욕을 더 앞세워 놓고 두들기지만, 소련제국을 무너뜨린 과거의 영화(榮華)를 기억하는 보통 미국 사람들은 예전 같지 않은 미국의 구겨진 위상에 더 자존심 상해 있다.
민주당 정치인들이 부시 행정부를 비난할 때 즐겨 쓰는 표현이 있다. '중국에서 돈을 꾸어다 중동에서 석유를 사 온다'는 말이다. 이 말엔 어떡하다가 얼마 전까지 개발도상국 취급하던 중국 같은 나라에 손 벌리는 처지로 미국을 전락시켰는가 하는 힐난이 담겨 있다.
월스트리트 사태는 이렇게 쌓여 온 미국 사람들의 마음의 상처를 통째로 헤집어 놓았다. 지난 주말 정부의 대규모 공적자금 투입 발표가 나오자, 월스트리트를 향한 조사(弔辭)가 줄을 이었다. '미국식 금융자본주의의 실패' '신자유주의의 종언' '미국의 세기는 끝나는가'…. 어제까지 지고지선(至高至善)이던 '큰 시장' '작은 정부'는 하루아침에 시장근본주의자들의 탐욕과 무책임의 상징으로 바뀌었다. 작금의 금융 위기가 정말 탈규제 때문인지 실증적으로 따져 보자는 반박들도 없지 않으나 희생양을 찾아 나선 분노의 함성에 묻혀 그냥 떠내려가고 있다.
미국은 1970년대 이래 사실상 보수정치가 지배해 온 우파의 나라다. 지난 40년간 민주당 출신 대통령은 지미 카터와 빌 클린턴, 단 두 명뿐이었다. 이 우파의 나라의 보수정치를 떠받쳐 온 기둥은 '나라 사랑' '자유시장경제'처럼 참 단순한 덕목들이다. 나라 사랑은 '국가 안보', 자유시장경제는 '큰 시장 작은 정부'의 구호로 나타난다.
얼마 전 공화당 전당대회는 단상에 대형 성조기 하나만 덜렁 걸어 놓고 진행됐다. 단하에선 '국가 먼저' '유 에스 에이'란 두 구호만 넘실댔다. 서울에서 온 한 기자는 "무슨 70년대 집회를 보는 것 같다"고 혀를 찼다. 사실 한국에선 언제부턴가 '애국' '국가' 같은 걸 앞세우면 촌스럽다는 말을 듣기 십상이지만, 미국에선 이 단순한 구호에 담긴 가치가 오랜 세월 보수정치를 떠받쳐 온 힘이다.
'애국' 못지않은 힘을 발휘해 온 구호가 '작은 정부 큰 시장'이다. 이 구호의 파괴력은 민주당 출신의 클린턴 전 대통령이 역설적으로 확인해 준다. 그는 1998년 1월 연두교서에서 "우리는 정부가 적(敵)이라고 말하는 사람들과 정부가 해결책이라고 말하는 사람들 간의 부질없는 논쟁을 거쳐 왔다. 우리는 제3의 길을 찾아냈다. 우리 정부는 지난 35년 만에 가장 작은 정부이지만 더 진보적인 정부이다. 더 작은 정부이지만 더 강한 국가다"라고 말했다. '큰 정부'를 철학으로 하는 진보정당의 대통령이 '가장 작은 정부'를 자랑하지 않으면 안될 정도로 '큰 시장'은 레이건 이래의 미국정치를 지배해 온 대세였다.
이 30년을 이어온 대세가, 모든 걸 시장에 맡기자는 구호가 시장에서 거부된 게 바로 이번 월스트리트 사태의 핵심이다. 그래서 이번 사태의 불길은 단순히 미국 금융계에만 머물지 않을 것이다. 미국 경제 전반으로, 미국 정치로, 국제 정치로까지 번질 수 있다. 미국 안에서 시장만능주의자들이 한 방 맞은 것처럼, 국제무대에서 미국의 시스템을 글로벌 스탠더드로 요구해 온 미국의 말발도 덩달아 떨어지게 됐다.
미국의 불길은 이명박 정부의 선진화 작업으로도 옮아붙고 있다. 우리는 그동안 미국이 말하는 글로벌 스탠더드 이외의 대안을 생각해 볼 겨를이 없었으나 이젠 더 나은 다른 대안은 없는가도 함께 따져 봐야 한다는 말은 맞다. 그러나 경계할 게 있다. 이럴 때면 튀어나오는 "잘됐다. 그냥 이대로 가자"는 퇴행세력들이다.
- 홍준호 워싱턴 지국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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