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바람- 조병화
가을 바람이 솔솔 불기 시작한다.
저녁이 일찌기 다가든다.
서울의 가로수들도 하나하나 가을물이 들기 시작한다.
술맛은 이때부터이다.
이집에서 한 잔, 저집에서 한 잔 장안을 돌아가는 맛은 이때부터이다.
땀으로 젖는 어수선한 계절이 돌아가고 차가운 맛이 피부에 스며드는 가을 계절,
긴 저녁을 이렇게 술집에서 잠시 쉬는 재미, 인생의 피곤이 이런 곳에서 풀리곤 하는 거다.
그런데 올들어 이 가을은 너무나 차다.
몇 군데 돌다 보면포켓이 텅비어 찬바람만 가득하다.
이렇게 빨리 돈이 새어가서야!
허전할 정도로 돈의 속도가 빨라졌다.
여름방학 전만 해도 그렇지 않았다.
1만원 정도만 호주머니에 있어도 든든했다.
친구들을 길에서 만나도 반가왔다.
두서너명이 한 자리에 같이해도 든든했다.
얼근히 취해서 기분풀고 나설 수 있었다.
그런데 이번 가을에 접어들어선 그렇지 않다.
훅훅 돈이 빠져나가는 그 속도는 겁이 날 정도다.
호주머니 걱정을하면서 마셔야 한다.
안주값을 따져 가면서 마셔야 한다.
그러니 꼴이 아니다.
그러나 그럴 수밖에 없게 되었다.
이러한 물가고 불경기는 지금 세계 어디서나 그렇다니까 좀 안심이 가지만
이렇게 물가가 뛰어선 나중에 어떻게 될 것인가 하는 생각, 긴장의 연속이다.
그 긴장의 연속 속에서 갈증나는 술을 마시고 있다.
차가운 가을 바람이다.
호주머니엔 돈이 자취도 없이 사자린 그 먼지뿐, 항상 헌전한 그 서울을 산다.
참으로 바빠진 세상을 산다.
사람도 바빠지고, 돈도 바빠지고, 사건도 바빠지고, 역사도 바빠지고,
세상만사가 다 심히 바빠진 이 역사(歷史)의 현장을 살고 있다.
언제 한번 이 바빠진 돈의 도가니 속에서 벗어나 즐거운 벗들과 인생을 호탕하게 한번 마셔 볼는지.
허전한 가을 바람, 허전한 호주머니, 허전한 인간관계, 허전한 이 목숨의 여로..
수록산문집 : 꿈을 꾸는 파이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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