鶴山의 草幕舍廊房

文學산책 마당

비오는 날에 - 이해인

鶴山 徐 仁 2008. 7. 29. 18:07

비오는 날에 - 이해인 1 비를 맞고 일어서는 강, 일어서는 바다, 내 안에도 갑자기 물난리가 나네. 사랑하고 싶은 마음의 소나기를 감당 못하는 기쁨이여. 2 온종일 사선(斜線)으로 나를 적시는 비. 나도 몰래 내가 키운 일상(日常)의 안일함을 채찍질하는 목소리로 나를 깨워 일으키는 눈물이여. 3 비가 너무 많이 와도 우리는 울고
비가 너무 오지 않아도 우리는 운다. 눈물로 마음을 적시지만 아름다운 사랑처럼 오늘도 세상을 적시는 꼭 필요한 비야. 생명을 적시기 위해 눈물일 수밖에 없는 비야. 4 삶이란 한바탕 쏟아졌다 어느새 지나가는 비와 같은 것. 폭풍속에서 '큰일났다' '큰일났다' 말하다가도 지나고 나면 다시 개인 하늘을
보며 새롭게 웃어 보는 - 5 먼지 뒤집어쓰고 피부병을 앓고 있는 도시의 꽃과 나무들을 씻어 주는 비야, 갈라진 논바닥에 떨어져 생수가 되는 비야, 그리고 오늘은 내 가슴을 적시며 마음놓고 참회의 시가 되는 비야. 씻고 또 씻어 내도 다시 그을음이 생기는 나의 일상엔 다시 내리는 비처럼 크고 작은 허물들이 참 많기도 하구나, 쏟아지는 비처럼. 6 하얀 비가 내리네. 죽어서도 잊혀진 무명(無名)의 순교자의 뼈처럼 희고 단단한 슬픔, 더디 부서지는 슬픔의 조각들이 하도 많은 이 땅에 오늘은 하얀 비가 내리네. 7 우산도 받지 않고 빗속으로 황망히 뛰어들던 벗이여, 함께 쏟아지는 빗줄기가 각각 홀로이듯이 함께 사는 우리도 각각 홀로임을 깨닫는 비오는 날 아침. 우리의 젊음이 너무 빨리 가버린다 해도 아직은 갈길이 멀구나.
얻기 위하여 버릴 것들이 너무 많구나. 8 비를 맞고 더욱 환해진 꽃밭의 꽃들을 보며 슬픔의 눈물을 흘린 뒤에
더욱 아름다워진 한 사람을 생각한다. 대지가 비를 필요로 하듯 사람에겐 꼭 눈물이 필요하다. 9 내가 사랑했고 나를 사랑했던 젖은 얼굴들이 보이네. 열기를 식혀서 더욱 담담하고 편안해진 참 오래된 사랑의 눈길로 그들이 나를 바라보네. 마른 가슴 가득히 고여 오는 물살을 감당못해 나는 처음으로 비와 함께 시인이 되네. 10 젖지 않으려고 비옷을 입어도 소용 없듯이 장마철이 아니어도 계속되는 그대의 소나기 같은 사랑의 말에 나는 내내 젖지 않을 수가 없네. 11 이른 아침부터 쏟아지는 소나기의 4부합창. 오랜 세월 연꽃처럼 피워 올린 나의 조용한 기도에 대한 힘찬 응답의 소리로 오늘은 비의 노래를 듣는다. 12 기다릴 땐 안 오다가 문득 예고 없이 나의 창을 두드리는 비처럼 나의 죽음도 언젠가 그렇게 올 테지. 미리 열어 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