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랑탕 히말라야 순례를 시작할 둔체까지는 카트만두에서 버스로 열 시간 이상 걸렸다. 그 긴 시간 동안 비포장 외진 길은 해발 500m에서 해발 2000m 사이를 오가면서 쉼 없이 버스를 흔들어댔다. 외진 길옆 경사 가파른 낭떠러지도 버스가 둔체에 도착할 때까지 계속 이어졌다. 히말라야다웠다.
히말라야는 산스크리트어로 ‘눈의 보금자리’란 매혹적인 뜻을 지녔다. 히말라야산맥은 서쪽 낭가파르바트(8126m) 산에서부터 동쪽 남차바르와(7755m) 산까지 무려 2500km나 펼쳐져 있다. 해발 7300m가 넘는 고봉도 30여 개나 있다.
히말라야가 인간의 지도에 처음 등장한 것은 1590년이었다. 스페인 선교사 안토니오 몬세라테라에 의해서였다. 이후 히말라야는 유럽의 가장 상징적인 '정복대상'이 되고 말았다. 그들에게 세상에서 최고 높은 산맥을 '정복'한다는 것은 곧 세계를 정복한다는 의미였다.
유럽제국의 히말라야 정복 경쟁은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에 극에 달했다. 영국, 프랑스, 독일 등의 경쟁은 식민지 쟁탈전만큼이나 치열했다. 영국은 1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아예 세계 최고봉인 초모룽마('에베레스트 산'은 영국의 식민지였던 인도에서 측량국장을 지낸 조지 에베레스트의 이름을 따 붙인 것이다-기자 주) 정복만을 위한 원정대를 꾸릴 정도였다.
오만과 탐욕에 가득 찬 제국의 본성. 이 위악스런 본성은 근대적 개화와 계몽을 구실로 아시아와 아프리카, 남아메리카를 식민 정복했던 바로 제국주의의 습성이다.
히말라야는 제국의 이 오만한 습성을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일까. 히말라야가 유럽제국의 등반가들을 자신의 품에 받아들인 것은 1933년이 넘어서였다. 1921년 이후 초모룽마에만 10여 차례가 넘는 유럽 원정대의 정복 시도가 있었다. 하지만 번번히 그들은 히말라야 천 년 설에 발이 묶이고 말았다.
특히 '세계의 어머니 여신'이라는 도도한 이름에 걸맞게 초모룽마는 1953년에 이르러서야 등반가들을 받아들였다. 뉴질랜드 양봉업자 힐러리와 전설적 셰르파 텐징 노르가이가 초모룽마의 품에 처음으로 안긴 주인공들이다.
유럽제국의 수많은 히말라야 원정대가 실패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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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유럽제국의 수많은 히말라야 원정대가 실패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누가 뭐라 해도 히말라야를 정복 대상으로만 간주했던 오만함이 가장 큰 원인일 것이다. 타자를 정복과 동원의 대상으로만 규정했던 그들의 근대성은 히말라야라고 예외로 하지 않았다.
그들이 히말라야 산맥의 정상에 올라가서 한 일이라곤 만세삼창을 부르고 제국의 깃발을 꽂는 것뿐이었다. 영산(靈山)에 휘날리는 깃발을 제국의 거침없는 위용으로 드러내고 싶었던 그들. 제국은 이 별의 모든 것이, 산과 바다와 강과 인간 모두가 자신을 경외하고 굴종하기를 바랐다.
히말라야 품 안으로 조금씩 다가서는 나의 길은 어떤 길일까 스스로 물어보았다. 혹여 나의 길이 20세기 초 제국의 등반대와 같진 않은가. 혹여 내 마음 속 깊은 어딘가에 정복해야 통쾌할 산이, 산맥이 몇 개 숨어 있진 않은가.
마음을 다잡았다. 나는 어느 봉우리, 어느 능선을 정복하기 위해서 여기 온 것이 아니라고. 그저 그 산의, 산맥의 품에 작은 발걸음과 마음을 들여놓고 싶을 뿐이라고. 그래서 나의 길은 오르는 길(등산 登山)이 아니라 들어서는 길(입산 入山)일 뿐이라고. 이 또한 히말라야가 거부한다면 순순히 발걸음 돌릴 것이라고….
오후 5시 무렵 도착한 둔체 마을에 랑탕 히말라야의 노을이 드리우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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