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향 속에서 전설을 만나다.
Ⅰ.
숙소가 동정호洞庭湖와 가까운 곳이라서인지 방이 너무 추워서 옷을 껴입고 두 침대의 이불로 몸을 감싸며 잠을 청했다. 비몽사몽간에 자는 둥 마는 둥, 바깥의 떠드는 소리에 잠이 완전히 깨어 버렸다. 시계를 보니 6시가 조금 넘어 있었다. 두터운 커텐을 걷으니 창밖은 이미 허여멀겋게 밝아오고 있었다. 내 객실 방과 이웃인 악양제일중학교는 등교하는 학생들로 시끄러웠다. 지금은 2월 초순이라, 우리네 중등학교는 한창 방학 중이지만 여기는 우리와 학제가 달라 학생들이 등교를 하는 것이다. 자전거를 타고 오는 학생, 삼삼오오 떠들면서 킬킬대며 오는 학생, 혼자서 묵묵히 땅바닥만 쳐다보며 오는 학생 등등 여러 스타일이었다. 중국의 학교도 왜 이리 일찍 등교시키는지 이른 아침인데도 거의 전 학생이 다 오는 것 같았다. 우리나라 청소년만큼이나 그들도 공부에 찌들어 있는 것 같아 왠지 측은했다.
계획대로 동정호 속의 군산도君山島로 가기 위해 동정호반의 나루로 갔다. 오늘은 군산행 배가 뜨지 않는단다. 비수기라 여행객이 별로 없어 배를 띄어도 채산이 맞지 않기 때문이리라. 어떡하면 좋을지 몰라 황당해하자 수부처럼 생긴 중년이 퉁명스레 “동정로洞庭路에 가면 군산가는 버스가 있다”고 가르쳐준다. 아니, 바로 내가 묵는 빈관 앞이 아닌가? 그건 그렇고 섬에 가는데 웬 버스? 상당히 의아했다. 다시 물어보았다. “버스로 어떻게 가요?” 그러나 그는 귀찮은 듯 대꾸도 하지 않는다. 부아가 났지만 설마 거짓말이야 할까라는 생각으로 빈관 앞 버스 정류장에 오자 정말 군산행 버스가 있는 것이 아닌가. 종점이었다.
군산행 버스는 내가 중국을 다니면서 타본 버스 중에 제일로 낡고 더러운 차로 이런 차가 어떻게 가고 있는지 불가사의였다. 동정호를 따라 계속 북쪽으로 가다가 서쪽으로 방향을 돌려 얼마쯤 가자 장강을 가로지르는 다리가 나타난다. 다리를 건너 큰 길을 따라 한참을 가자 군산도 여유풍경구가 나왔다. 이곳 풍경구에서 내린 사람은 백수白首의 허연 이방인과 토착 연인 한 쌍으로 단지 세 사람 뿐이었다. 60원을 주고 통표를 끊어 안으로 들어서자 갑자기 어디에서 나타났는지 제복을 입은 남녀 한 무리가 전동차를 타고 안내를 해주겠다며 따라붙어 강권을 한다. 연인들은 결국 전동차에 올라탔으나 나는 끝내 거절하고는 깨끗하고 조용한 군산 풍경구로 호젓하게 걸어 들어갔다.
입구에서 풍경구의 전경을 설명한 군산유람도를 보니 섬은 자그마치 72개의 언덕 같은 낮은 봉우리로 되어있고, 이 풍경구 안에는 4대臺, 5정井, 36정亭, 48묘廟의 각종 유적과 건조물이 있었다.
Ⅱ.
군산도는 차와 신화와 전설의 섬이다. 이제 차향 그윽한 이 섬에서 아득한 옛날 상비湘妃의 전설 속으로 들어가 순임금의 가련하고 어여쁜 두 여인을 만나보고, 또 유의정柳毅井을 찾아 전설 속의 용궁으로도 가볼 수가 있겠구나. 길목 자연석에다가 힘차게 일필한 “군산독수君山獨秀”의 붉은 행서行書체가 돋보였다.
아니나 다를까 걸음을 몇 발짝 옮기자 벌써 찻집이 나타난다. 빈관과 겸한 곳으로 이름도 상군원湘君園이다. 차벌레인 내가 어찌 감히 눈 딱 감고 지나칠 수 있으랴! 장사할 채비도 미처 갖추지 못한 너절한 곳에서 애써 창밖에 펼쳐진 동정호만 내다보며 등황색의 군산은침君山銀針 한 잔을 우려 그 내음을 맡고 또 맡고, 아까운 듯 홀짝 거린다. 이 차는 막 돋아난 순잎을 채취해서 앞의 여린 부분을 화살과 같이 뾰족하고 흰털이 하늘하늘한 첨차尖茶로 만들어 황실에 공차貢茶로 바쳤다고 한다. 남은 어린잎들은 약간의 검은 털이 있는 두차兜茶로 만들어진다. 그래서 좋은 군산은침은 외형이 곧게 뻗어 있으며, 금색 털이 빽빽하고 향기가 맑고 청량하다. 이른 아침 중국 10대 명차의 반열에 당당히 이름을 내밀고 있는 이 차를 그 본향에서 이렇듯 호젓하게 마실 수 있다니, 자꾸 우려 마셨다.
찻집을 나와 동정호를 옆으로 끼고 안으로 약간 들어가니 건물과 회랑이 이어져있고 그 사이사이의 잔디밭에는 각종 전설에 상응하는 하얀색의 상군湘君의 조소상과 붉은 글씨가 새겨진 자연석이 여기저기 흩어져 놓여있었다. 아마 여기가 상군의 영역인가 보다. 상군은 호남성 일대를 적시며 흘러와 이곳 동정에서 장강과 만나는 강인 상강湘江(상수湘水)의 남신男神이다. 이곳의 가장 주된 웅장한 건축물이 상군사湘君祠이다. 상군사로 들어섰다. 화려한 용무늬로 조각된 세 칸의 석문 안으로 들어가니 이층 팔작지붕의 웅장한 동정묘洞庭廟가 앞을 막아선다. 이 묘에서 상군의 상을 모셔두고 제를 올린단다. 상군의 소상은 시커먼 얼굴로 두 눈을 부릅뜨고 무섭게 나를 홀겨 본다. 아마도 내가 시주함에 돈을 넣지 않은 것에 기분이 상했는가 보다. 실실 웃으며 “뛔이부치對不起”하니 정말로 골이 난 듯 “메이관시沒關係”라고 얼른 대꾸하지도 않는다. 묘를 벗어나 뒤로 돌아가니 웬 나한님께서 이렇게 많이 쭈그려 앉아 계시는가? 메케한 향불 연기 속에서 따가운 눈을 비비대며 상군사를 나서면서 혼자 중얼거렸다. “어딜 가나 종교 종합 선물세트로군!”
≪사기史記⋅진시황본기秦始皇本紀≫에 의하면 시황이 기원전 219년에 강을 건너 이곳 상군사에 이르렀단다. 마침 갑자기 큰 바람이 불어 강을 건너갈 수 없게 되었다. 주위에서 상군의 노여움 때문이라고 웅성거리자, 시황이 천문박사에게 물어 왈 “상군이 어떤 신인가?”, “요의 딸로 순의 처입니다. 이곳에 장사 지냈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 이에 시황이 대로하여 군사를 시켜 상산湘山의 나무를 모두 베게 하고는 붉은 민둥산에 봉인을 하여 출입을 못하게 하였다고 한다. 이때부터 이 산은 자수봉赭[홍갈색]樹峰이라 불려졌다. 지금도 그 전설에 따라 군산의 동쪽 호숫가 석벽에 봉인의 흔적이 남아 있다나. 여기에서 사마천司馬遷은 요堯임금의 두 딸 중 순舜의 정비가 된 아황娥皇이 상군이고 둘째비가 된 여영女英이 상부인湘夫人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고대 이래 많은 문화사가와 문인들은 그간 상군은 상수의 남신이고 상비는 아황과 여영의 두 비라고 이해하였다. 오늘날에도 많은 사람들이 후자의 견해를 따르고 있는 것을 심심찮게 볼 수 있다.
조금 더 걸으니 상비사湘妃祠가 보인다. 여기부터 상비의 영역인가 부다. 상비사로 들어섰다. 정면의 보이는 전각의 현판에 “구하면 반드시 응답이 있으리라(有求必應)”라는 문구가 쓰여 있었다. 불현듯 신약성경 마태복음 한 구절이 생각났다.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얻을 것이요, 찾는 이가 찾을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이니라.” 너무 흡사하여 경탄해 하는 것도 잠시, 안을 들여다보자 관운장關雲長이 언월도를 들고 검은 얼굴로 지긋이 노려보며 폼을 잡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 좌우의 대련을 보니 “이건 아니구나!”였다. 좌우에는 각각 “천하가 나로 인하여 바뀌었다(乾坤因我轉)” “복과 귀함은 네가 맡아 구하라(福貴任你求)”
관우關羽의 묘당 뒤에 있는 이비사二妃祠에는 두 비의 소상을 받들고 있었다. 벽에는 순임금과 이비의 행복한 순간을 그린 그림과 이비가 창오蒼梧에서 죽은 순을 그리는 모습의 그림이 그려져 있어 4천 년 전의 세계로 나를 이끌어 가는 것이 아닌가? 이비는 하나같이 아름다운 세요細腰각시였다. 아마 당시에도 몸짱 열풍이 불어 다이어트와 헬스가 성행했는가 보다.
이비사를 대충 훑어보고 난 후 계속 동정 연안을 따라 들어가자 약간은 황폐한 무덤이 “순제이비지묘舜帝二妃之墓”란 비석으로 앞을 가리고 대나무 숲속에 숨어있었다. 이 무덤도 문화대혁명을 비켜가지 못하여 훼손되었다가 1979년 중수하면서 그때 묘 옆에 반죽 숲도 새로 조성하였다고 한다. 묘 앞으로 가니 양 옆에 각각 하나의 비석이 서 있었는데, 이 역시 이 무덤을 중수하면서 세운 것이었다. 오른쪽 비는 악양시 문물관리소에서 찬한 ‘이비묘서二妃墓序’가 정갈하게 예서체로 씌어 있었고 뒷면엔 당나라 이백의 <유동정游洞庭>과 유장경劉長卿의 시 등 동정과 이비를 노래한 고대 시인 묵객들의 시가 역시 예서체로 엄정하게 새겨져 있었다. 맞은편 비석에는 이비의 선각線刻모습이 율동적으로 아름다웠고 뒷면에는 굴원의 ≪이소離騷 • 구가九歌≫ 중 <상군>과 <상부인>의 전문全文이 역시 예서체로 빽빽하게 기록되어 있었다. 이비에 대한 시가는 무척 많으나 가장 먼저 노래한 시가는 역시 굴원의 <상부인>이다.
묘의 입구부터 묘 주위 일대는 조성된 반죽斑竹 숲이 우거져 있었다. 순임금이 창오에서 죽었다는 소식에 이비인 아황과 여영이 너무나 슬피 울어 그 눈물이 옆의 대나무에 방울방울 떨어져서 얼룩이 생겨 반죽이 되었다는 전설의 바로 그 대나무였다. 살펴보니 대나무 전체에 반점이 있었다. 방금 오면서 들린 한 정자의 영련楹聯이 생각났다. “만고의 상비죽은 어찌 이렇게 무궁토록 슬퍼할까. 해마다 봄에 순이 자라면 오직 눈물 자국만 많아지는 것을. (萬古湘妃竹, 無窮奈怨何. 年年長春笋, 只是淚痕多)”
Ⅲ.
추연한 마음을 여전히 가슴에 담은 채 이비사를 나와 계속 걸어가자 갈림길이 나왔다. 표지판을 보고 낭음정朗吟亭으로 향했다. 차밭 사이를 헤치고 난 길로 언덕바지로 올라가니 고풍스런 낭음정이 대나무와 차밭으로 둘러싸인 곳에 자리 잡고 있었다. 낭음정은 전설적인 당나라 선인 여동빈呂洞賓의 “소리 내어 읊으며 동정호를 날아간다朗吟飛過洞庭湖” 라는 시구에서 이름을 땄다고 한다. 안에는 여동빈이 한 손에 연단약을 들고 그가 지었다고 전해지는 사詞 <심원춘心園春 • 동정호>의 녹색 글씨를 뒤의 배경으로 하고서 심술궂게 서있었다. 좌우간 이 여씨呂氏는 가는 곳 마다 잘도 맞닥뜨린다. 어제도 악양루의 삼취루三醉樓에서 보더니 오늘도 강 건너 와서 또 본다. 중국의 어지간한 명산대천에 가면 자주 그가 나보다 앞질러 와서 나를 기다리고 있다. 이제 만나도 별 반가움이 없어 대강 일별하고는 밖으로 나와 오히려 대나무 속에서 차밭의 운치를 한참동안 즐겼다.
언덕배기를 돌아 몇 구비를 가서 아치형 조교弔橋를 지나니 군산의 ‘전설 따라 삼만 리’의 백미가 나타난다. 바로 유의정柳毅亭의 전설의 현장이다. “우리나라는 ‘전설 따라 삼천리’하면 모든 전설 설화가 다 수용되는데, 이 나라는 전설 따라 삼만 리(?)라고 해야 할 것 같으니, 내 참!” 그러나 유의정의 전설은 나의 흥미를 불러 일으켰기에 꼭 찾아보려고 한 곳이었다. 예부터 군산을 일러 풍수적으로 조룡와수형鳥龍臥水形 지형이라고 했다. 군산의 중앙부의 용설산龍舌山이 용의 머리 부분이고 이곳 바로 용의 꼬리에 해당하는 곳에 유의정이 있다. 원래 이 설화는 당나라의 서생인 유의가 이곳을 지나다가 용녀龍女의 부탁을 받고 동정호의 용왕에게 편지를 전했다는 당대 전기傳奇소설 <유의전>에서 나왔다. 그 때 용녀가 “동정의 북쪽에 큰 귤나무가 하나 있는데 그 나무에 가서 세 번 주문을 하면 응답이 있을 것입니다” 라고 가르쳐 주었다. 과연 그대로 말하니 동정의 용궁으로 들어갈 수가 있었다. 이 전기소설을 바탕으로 하여 원대에 <유의전서柳毅傳書>란 잡극이 생기기도 했다. 유의정은 바로 그 용궁 들어가는 입구로써 혹은 귤정橘井이라고도 했다.
유의정 위에는 악양루의 지붕모양을 본뜬 투구형 지붕으로 전서정傳書亭을 아담하게 지어 놓았고 샘 옆으로는 정중하게 서있는 유의와 편지를 손에 들고 있는 용녀가 선남선녀善男善女의 멋진 모습으로 조각되어 서 있었다. 그런데 이들이 뒤에 대동하고 있는 두 마리의 조각 양은 전설과 무슨 연관이 있는지 알지 못하여 답답하였다. 청나라 때까지는 주위에 귤나무를 둘러 심어 귤정이란 이름에 걸맞았으나 지금은 귤나무가 한 그루도 없었다. 대신 샘 앞에 5미터 정도의 비스듬한 콘크리트길의 나지막한 턱에 게와 새우 등을 장군으로 삼아 부조해 놓아 용궁 가는 길의 형상을 비유하고 있었다.
유의정에서 아래로 내려가니 용탄정龍涎亭이 있었다. 정자 아래에는 돌출된 용머리 조각에서 마치 침을 흘리듯 입의 물이 밑의 샘으로 떨어지는 형상으로 만들어 놓았다. 조잡하기 이를 데 없이 만들어 놓고서 그리고는 아마 이 샘을 용이 침을 흘리는 샘[용탄정龍涎井]이라고 하는 것 같았다.
차밭이 펼쳐진 샛길을 통해 군산의 곳곳을 걸었다. 이 섬은 어디를 가든지 전설과 역사와 문학이 서로 어울린 하나의 굿판을 연출하고 있었다. 그 정체감의 혼돈이 나그네로 하여금 운무雲霧를 잡고 허공을 떠다니게끔 만들었다.
Ⅳ.
이제 군산도에서 가볼만한 곳은 거의 다 간 것 같았다. 그러나 너무나 고혹적으로 조용하고 호젓한 풍광을 홀로 독점하여 즐기니, 비록 인공적인 공간이지만 쉽게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아 무작정 이리저리 돌아다녔다. 그런데 갑자기 눈이 확 떨어졌다. 저 멀리 성채가 보이지 않는가? 이 섬에 웬 성채인지 호기심이 발동하여 마음이 급해졌다. 성문 앞에 다가가보니 양마채楊麽寨란 현판이 붙어 있었다. 아! 바로 남송 때 농민 출신 양마楊麽가 의거를 일으킨 곳이 아닌가!
성문을 통과하여 좁은 통로를 벗어나자 팔작지붕의 충의당忠義堂 건물이 위용도 당당하게 모습을 드러낸다. 양쪽 가에는 농민군 여러 명이 창을 꼬나들고 제법 험상궂게 도열하여 사뭇 냉랭하고 살기까지 느껴지는 것 같았다. 아무도 없는 이 살벌한 공간에서 어서 벗어나고 싶은 마음이 일어났지만 결국 호기심을 막을 수는 없었다. 충의당 안으로 들어가자 중앙에 양마가 앉아있고 양쪽에 두 명씩의 참모가 늘어서 있었다. 그들 뒤로는 두 개의 범선 모형도가 있어 이들이 동정호를 중심으로 활동하였음을 알 수 있었다. 양마는 제법 관복을 갖춰 입고 있어 위엄도 풍겼지만 앞의 막료들은 양민 복장의 좀 점잖아 보이는 자와 웃통을 벗어재낀 노동 복장의 우악스럽게 생긴 자들이 서로 섞여 있었다. 그러나 내가 위안을 받은 것은 양마의 근엄한 인상 속에 푸근한 자애로움이 섞여 있는 것이었다. 그러한 생각이 들자 이때까지 느끼던 살벌한 공기가 어디론지 사라져버려 마음 푸근히 볼 수 있었다. 게다가 꼭대기 망루로 올라가자 비록 좀 흐렸지만 어디가 하늘이고 어디가 물인지 구분할 수 없는 동정호 넓은 공간이 내 마음을 확 틔어주었다.
충의당을 나와 뒤로 돌아가서 여유롭게 순천전順天殿과 천왕전을 차례로 살펴보았다. 농민 항쟁을 일으킨 그들이 충의를 찾고, 천명에 순응한다면 그들의 항쟁은 아마 탐관오리 숙청 차원이지 왕조 교체의 혁명까지는 안 갔는가 보다만, 천왕전은 또 무엇인가? 혹시 그들도 태평천국처럼 천왕을 주장했을 리는 없고 다만 도교에 심취된 뒷사람의 작명이 아닌가 보았다.
그러나 하나 충격을 받은 것은 우리나라에서는 아직도 지배층 중심 왕조 사관의 잔재로 농민 항쟁의 현장은 여태껏 홀대를 받아왔지만, 여기는 신중국이 들어서면서 사회주의 사상으로 프롤레타리아 계급혁명을 찬양하고 있으니 그들의 사관에 의해 명말 농민 혁명의 이자성李自成도 추앙받고 군산도의 양마도 기림을 받고 있는 것이다.
Ⅴ.
그래도 혹시 하는 심정으로 부두로 갔으나 여전히 오늘 배는 뜨지 않는단다. 꼭 배를 타고 호수를 건너면서 손에 동정의 물을 담아 이 물이 두보의 초당이나 동파東坡의 고향 사천四川에서 장강을 타고 흘러온 물인지, 아니면 굴원의 멱라나 유종원柳宗元의 영주永州에서 湘水를 타고 흘러온 물은 아닌지 물어보고 싶은 나의 작은 소망은 완전 도루묵이 되고 말았다. 할 수 없이 다시 털털거리는 폐차 직전의 버스를 타고 돌아와야만 되었으니. 그러나 이제는 전설에서 벗어난 현실이요 생활이다.
군산도에서는 나 혼자 승객이었으나 나가면서 제법 많은 사람들이 탔다. 장강 다리를 건너 시내로 들어설 즈음에 갑자기 버스의 왼쪽에 탄 사람들이 이구동성으로 합창을 한다. “다섯 여섯 일곱 여덟 --- 열셋” 그리곤 내다보던 모든 승객이 박수를 치면서 “열 세대다, 열 세대” 신기한 듯 소릴 지르며 환호한다. 결혼식 후의 시내 일주 퍼레이드였다. 보통 결혼식은 네다섯 대 정도가 대부분이란다. 그래서 그들도 처음에는 헤아리지 않다가 네다섯 대가 넘자 비로소 소리 내어 헤아리기 시작한 것이다. 열 대만 넘어도 호화판인데, 오늘은 무척 보기 힘든 열 세대나 테이프를 달고 폼을 잡으니 사람들이 열광한 것이리라. 지금부터 50 년 전에는 우리네도 결혼식 후에 오색 테이프를 감은 차를 타고 시내를 일주하곤 했다. 나도 고모님 결혼식 때 영광스럽게도 한 자리를 차지하여 제법 우쭐대던 생각이 떠올랐다. 버스 안의 사람들은 아직 흥분이 가라앉지 않았는지 자기들끼리 삼삼오오 웃으면서 이 결혼식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하나같이 모두 축복해 주는 분위기였다. 인상을 쓰면서 얼굴을 붉혀가며 폄하하려는 사람은 없었다. 순박함이 뚝뚝 묻어나는 정겨운 사람들이었다. 나도 덩달아 기분이 좋아져서 생면부지의 이 축복받은 신혼부부에게 마음속으로 축하해주었다. “쭈니 지에후운 쿠아이러! (祝你結婚快樂).
이제 악양을 떠날 때가 된 것 같다. 숙소에서 짐을 챙겨 역 앞의 장도버스 정류장으로 갔다. 빨리 가서 오늘 밤에는 무창의 동호를 한 번 거닐어 보고 내일은 황주로 동파를 찾으면 되겠구나! 생각하니 다시 가벼운 흥분이 일상처럼 밀려든다.
무창행 버스는 오후 3시에 있었다. 남은 시간을 소화하기 위해 역 주변의 시내 중심가를 어슬렁거리며 배회했다. 사람 구경이 좋았고, 그들의 사는 모습을 되새김질하는 것이 흥겨웠다. 언제 다시 볼지 기약할 수 없는 악양이여, 잘 있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