鶴山의 草幕舍廊房

아시아 중동圈

양마도? 말은 어디에 있을까

鶴山 徐 仁 2007. 7. 4. 10:16

 

[오마이뉴스 조영님 기자]
▲ 이것이 연대대학 동문에서 양마도로 직행하는 오픈카이다.
ⓒ2007 조영님
얼마 전부터 중국 연대시 연대대학 동문 앞에서 양마도(養馬島)로 직접 가는 오픈카를 운행한다는 말을 듣고 한번 가 봐야겠다고 벼르다가 토요일(6월 2일) 아침에 답사하기로 하였다.

오픈카는 하루에 한 번밖에 운행하지 않고, 오전 8시 30분에 출발한다고는 하였다. 하지만 10여 명의 손님이 모두 타기를 기다리느라 오전 9시 즈음에 출발했다.

오픈카를 타고 바닷가 쪽으로 뻥 뚫린 대로를 달리는 기분은 자못 상쾌함을 넘어 가슴 속이 후련하기까지 했다. 멀리 출렁이는 바다 위에 떠 있는 조각배들이 한 폭의 그림 같았다. 그러나 낭만적인 생각도 잠시뿐, 사방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통째로 맞자니 너무 추웠다.

짧은 스커트를 입은 여학생에게 "춥지 않느냐"고 물어보니, "괜찮다"고 하는데 팔과 다리에 소름이 오돌오돌 돋아나 있었다. 우리가 한국 사람인 것을 안 뒷좌석의 여학생들이 "안녕하세요"라고 인사를 하였다. 그래서 우리는 짧은 중국어 반, 한국어 반을 섞어 가면서 대화를 했다.

고향이 장춘이라고 한 학생은 오랜만에 연대에 오신 아버지와 함께 다른 친구들을 데리고 양마도에 놀러 간다고 하였다. 밝고 쾌활한 학생들은 오픈카 안에서 중국 노래를 부르다가 우리 동요인 '곰 세 마리'를 선보이기도 하였다. 오픈카는 양마대교를 지나서 천마광장에 우리를 내려 주고는 오전 11시에 다시 연대대학 동문으로 출발한다고 하였다.

양마도의 유래를 살펴보면, 공원(公元) 219년에 진시황이 일찍이 이 섬에 와서 무성한 초목 위에 말이 뛰노는 것을 보고서 '말을 키우기에 좋은 곳'이라고 여겨 이곳에 말을 기르라고 명령하였다고 한다. 그때부터 이 섬은 양마도(養馬島)로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중국인들, 왜 그토록 진시황을 존경하고 즐겨 말할까?

▲ 비상하는 듯한 천마의 모습
ⓒ2007 조영님
천마광장에는 양마도의 역사를 알 수 있는 여러 조형물들이 있었다. 천마광장에 들어서니 제일 먼저 눈에 띄는 것은 비상하는 듯한 천마(天馬) 조형물이었다. 양마도를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또 그 옆에는 진시황의 일곱 준마가 그려져 있는 '진황칠준(秦皇七駿)' 조형물을 볼 수 있다. 진시황의 칠준마는 추풍(追風), 백토(白兎), 섭경(躡景), 분전(奔電), 비핵(飛翮), 동작(銅爵), 신부(神鳧) 등이 있었다고 한다. 이 중에서 추풍이 가장 뛰어난 명마였다고 한다. 그래서 추풍은 천리마의 대명사로도 쓰인다.

그리고 이곳에는 높이 5.4m의 진시황의 동상이 세워져 있다. 진시황 동상의 전면에는 진나라의 역사가 쓰인 비문 여러 개가 마치 담장처럼 빙 둘러 있다. 중국에 온 이후 중국의 전역에 흩어져 있는 진시황의 흔적을 여기서 또 확인한 셈이다.

이처럼 넓은 중국을 통일한 최초의 임금이 진시황이라고 설명해 주는 대학생들을 보고 중국인들이 왜 그토록 진시황을 존경하고, 즐겨 말하는지 알 수 있을 것만 같았다.

▲ 천마광장에 있는 이십팔수 붉은 기둥.
ⓒ2007 조영님
천마 조형물 앞에는 붉은 기둥 28개로 만든 '이십팔수홍주진(二十八宿紅柱陣)' 조형물이 있다. 28수는 달의 공전주기가 27.32일이라는 것에 착안하여 28개의 구역으로 나눈 것이다.

다시 말하면, 하늘에 있는 스물여덟 개의 별자리로 동서남북 방위마다 7개씩이 배치되어 있는데 해, 달, 별의 운행을 관측하는데 활용되었다. 28수를 붉은 기둥에 현대적으로 형상화한 것이 인상적이었다.

▲ 바닷가를 따라 어민들이 해산물을 팔고 있다.
ⓒ2007 조영님
천마광장을 둘러보고 나와서 반대편 쪽에 있는 마을 쪽으로 걸어갔다. 바닷가에는 어민들이 파라솔 아래에서 각종 해산물을 팔고 있었다. 바다의 산삼이라고 불리는 해삼은 양마도의 특산물로 유명하다.

월마트 같은 큰 가게에 가면 인민폐로 몇천 원에 해당하는 고가의 건해삼도 많이 진열되어 있다. 커다란 해삼이 한 마리에 얼마냐고 하니까 100원이라고 한다. 너무 비싸다고 말하자 상인들은 비싼 것이 아니라고 하였다.

다시 중국인 학생들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면서 바다를 보며 마을 쪽으로 한참을 걸어 들어갔다. 이렇다 할 표지판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중국인 학생들은 오픈카가 출발할 시간이 가까워졌으니 다시 돌아가자고 하였다.

그때 마침 마을 쪽으로 들어가는 버스가 한 대 오는 것을 급히 세우고 우리는 그 차를 탔다. 학생들과 제대로 인사도 나누지 못하고 헤어졌다. 아들은 누나들을 따라가는 것이 좋은데, 왜 버스를 탔느냐고 하면서 연방 투덜거렸다.

양마도에 왔으니 어떻든지 말을 타 보고 가야지!

▲ 양마도에는 약 팔천 명이 주민들이 거주하는데 대부분 어업에 종사한다고 한다. 평범한 시골 농가의 모습이다.
ⓒ2007 조영님
'양마도'에 왔으니 어떻든지 말을 타 보고 가야지, 여기까지 와서 그냥 갈 수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버스 안내양이 어디까지 가냐고 하기에 "말을 타러 왔다"고 하니까 마을 안으로 굽이굽이 돌아가다가 내려주었다.

허름하고 낡은 촌집들만 있을 뿐 지나가는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경마장 건물이 눈에 들어왔다. 이 건물 역시 몹시 낡았다. 경기가 없는 날이어서 그런지 사람도 말도 보이지 않았다.

아들의 성화에 못 이겨 결국 다시 천성광장으로 돌아가기로 하였다. 아들은 낯선 시골 마을이 맘에 들지 않았는가보다. 그보다 길을 잃을까 봐 겁이 난 것 같았다.

"아들, 세상의 길은 모두 통하게 되어 있어. 저 길을 계속 따라가면 아까 누나들하고 헤어졌던 그 길이 나올 거야. 그리고 우리가 중국에 와서 약속한 것 있잖아. 안 먹어본 음식은 무조건 먹어본다. 또, 안 가본 길은 무조건 가본다. 잊어버렸냐?"

한적한 시골 길을 한참 걷다 보니 자전거를 탄 아저씨가 보였다. 무척 반가웠다. 아들에게 이렇게 말하였지만 나 역시도 사람이 보이지 않는 시골이 익숙지 않고 안심이 되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마을을 벗어나서 시끄럽게 경적을 울리며 질주하는 자동차가 다니는 대로에 들어서자 그제야 안심이 되었다.

낯선 곳에 떨어져 있다는 두려움을 극복하기까지는 얼마나 더 많은 시간이 걸려야 하는 걸까? 내가 마주칠 다양한 길 위에서 느끼게 될 공포감은 언제쯤 사라질 수 있을까?

다시 천마광장으로 돌아왔다. 연대대학으로 직접 가는 버스가 없어서 버스를 두 번 갈아타고서야 집으로 돌아왔다.

드넓게 펼쳐진 푸른 초원 위에서 아들과 말을 타면서 실컷 놀다 오리라고 생각했던 내 계획이 수포로 돌아갔다. 초원도 보이지 않았고 말 한 마리도 보지 못하였다. 더구나 기대했던 진시황과 관련된 유적도 보지 못하였다. 다소 허탈한 느낌이야 있었지만, 낯선 곳으로의 여행은 늘 변수가 많은 법이려니 생각하였다.

/조영님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