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히 인터넷에서 발견한 보리밭 풍경. 그 한 장의 사진이 발길을 이끌었다. 봄이 오지 않는다면 찾아나서자. 기어코 봄을 만나보자. 지난 24일 마음먹고 길을 나섰다. 봄맞이 길을 시샘하는 듯 비가 내린다. 봄을 향해 가고 있으니 그 비마저 봄을 축복하는 비로 보인다. 목적지는 전북 고창의 학원농장. 보리를 대규모로 재배하는 농장이다. 요즈음엔 수요가 거의 없고 수지타산이 맞지 않으니까 보리를 재배하는 모습을 보기가 힘들다. 그런데도 이곳은 대규모로 보리를 재배하고 있다. 단지 보리를 재배한다는 것만으로 주목을 받게 된 것이다.
이 농장이 유명해지기 시작한 것은 봄철 보리밭의 푸른 모습이 사진가들의 각광을 받으면서부터라고 한다. 그러다 보니 지금은 관광농원으로 꾸며져, 봄이 그리운 사람들이 몰려드는 장소가 되었다. 다행히 관람료를 전혀 받지 않고 운영하고 있으니 만든 이의 순수한 열정을 생각하면 구경하는 발길이 더 가벼워진다. 아름다운 농장 풍경을 인정받아 이 주변이 지금은 경관농업특구로 지정되었다고 한다. 전국 최초라고 하니 그런 곳이 또 있는지는 모르겠다. 보리를 재배한다는 사실만으로도 독특하다는 생각이 들지만, 그것이 경관농업특구의 요인이 되었다는 점은 더 놀라운 일이다. 이곳에서는 보리밭이라고 하기보다는 '청보리밭'이란 말을 사용한다. 청보리밭. 처음엔 낯설었으나 보고나니 충분히 이해가 된다. 온통 푸름을 유지한 이곳에 '청'이란 수식어를 붙이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는 생각이 절로 들기 때문이다. 특히 4월 초 보리이삭이 나온 후 5월경까지가 가장 아름다운 모습을 보인다고 한다. 청보리밭 축제가 열릴 정도로. 하지만 그때쯤이면 우리의 산하가 온통 푸른빛을 띠기 시작할 때다. 오히려 요즈음의 모습이 가장 인상적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온통 벌판이 뿌연 회색빛인 지금 이곳만은 푸른 모습이니. 아직은 겨울인 산과 들판을 지나 이곳에 도착했다. 펼쳐지는 시원한 평원의 푸름에 눈이 시려 온다. 비의 가벼운 방해에도 여기가 정말 우리나라인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이다.
한참 보리밭을 바라보고 나니 벌써 40여 년 가까이 지난 초등학교 때가 생각난다. 지독히 못살던 시절. 요즘은 낯선 단어가 된 '보릿고개'가 우리를 아프게 하던 때이다. 정부는 보리 혼식을 정책적으로 추진했다. 그것이 학교에서는 도시락 검사로 나타났다. 잡곡이 30%를 넘어야 통과다. 선생님의 회초리를 바라보며 매일 점심때면 보리가 섞인 도시락을 검사받아야 했다. 그나마 도시락을 가져오지 못한 친구들도 많았다. 또 하나 생각나는 것은 '보리밟기'이다. 겨울이면 학교에서 단체로 근처 보리밭으로 보리밟기를 나갔다. 줄지어 늘어서서 꼭꼭 밟아주었다. 그래야만 보리가 뿌리를 잘 내린다고 들었던 것 같다. 당시의 보리는 지금과는 많이 달랐다. 품종이 다른지 가공 공법이 다른지는 잘 모른다. 어쨌든 보리를 넣어 밥을 짓기 위해서는 먼저 한번 삶아야 했다. 냉장고가 없던 시절이니 광주리에 걸어두었다가 쌀을 섞어 밥을 지었다. 미끄럽기는 왜 그리 미끄러웠는지 입안에서 둥글둥글 맴돌다가 그대로 삼켜지기 일쑤였다. 흰 쌀의 비율의 높았던 아버지의 밥그릇이 얼마나 샘이 났던지. 지금의 보리는 가공을 잘해서인지 쌀과 거의 차이가 없다. 더구나 건강식이 되고 있으니 말해 무엇하랴. 이렇게 우리의 부족한 식량을 보충해 주던 것이 보리였다. 그만큼 소중했다. 그런데 이제는 모두가 아련한 추억으로만 남아 있다. 보리밭이 관광지가 되는 세상이 되었다. 세월의 변화를 읽을 수 있다. 격세지감이란 말은 이럴 때 사용하면 제격일 것이다.
옆에서 내리치는 가랑비를 맞으며 푸른빛의 자연을 사진에 담는다. 시원하게 트인 들판의 풍경이 사람마저 들뜨게 한다. 봄이 아니라 여름 아닌가 하는 착각마저 들 정도로 녹색의 벌판이 눈에 가득 찬다. 보리밭 샛길엔 산보 하는 사람들이 보인다. 비로 인해 길이 질퍽 임에도 봄의 정취를 가까이서 느껴보려는 사람들이다. 사진을 찍기도 하고 보리를 들여다보며 봄을 확인하고 있다. 그 열정이 부럽다. 그들을 따라 고개 숙여 보리를 들여다본다. 가는 빗줄기 속에서 가볍게 몸을 떨며 꿋꿋하게 서 있는 자태가 강인한 모습이다. 차가운 겨울마저 버텨온 끈질김. 그 강인함은 우리가 배워야 할 덕목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스친다. 사실은 이곳에서 이런 생각은 낭비일지도 모른다. 펼쳐진 아름다운 경관에 절로 취하니, 취한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이런저런 생각을 미련 없이 던져버린다. 감탄사만 새어 나올 뿐이다. 이국적인 풍경에 놀라면서 가슴 가득 푸름을 담는다. 다가오는 봄을 주체하기 힘들어진다. 그렇게 봄은 어느새 가슴속 깊이 들어와 있다. 시샘하는 빗줄기마저 이제는 사랑스럽다. 회색빛 도시를 벗어나 처음 맞는 봄 느낌이다. 꽃보다 아름다운 봄을 이곳에서 만났다. 아직도 봄의 정수를 느끼지 못한 사람, 봄이 아쉬운 사람은 이곳 보리밭에서 봄을 맞아보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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