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1년 헝가리에서 태어난 바르톡은 1907~1934까지 부타페스트 음악학교의 피아노 교수로 재직하며 1934~ 1940년까지 그는 루마니아, 슬로바키아, 트랜실바니아등 헝가리의민요들을 채집했읍니다. 그는 의식적으로 민요로의 접근을 시도 민속음악 리스트를 포함한 19세기 의 사람들은 헝가리 도시지역에서 떠돌아다니는 민요들이 변질되지 않은 순수한 민요라고 생각했었다. 바르톡과 코다이는 서유럽의 영향밖에 놓여 있는 민속음악(노래,무곡) 을 농부들에게서 발견하고, 이를 채보하기 위해 여행했고, 후에는 에디슨 축음기로 녹음했다.
이들은 20개의 농부의 노래들을 수록한 모음집을 1906년에 출간 연구 영역을 확장시켜(특히 동유럽으로)남아 있는 민요의 보존을 일생의 사업으로 삼는다. 1934년 한해에만 1026개의 녹음 원통을 채보, 이 작품은 바르톡이 죽은후에야 완결됩니다. 바르톡 음악의 독특한 본질과 표현은 민요로부터 큰영향을 받은 것으로 장,단조의 극복과 새로운 리듬, 선율, 음색을 지향한다. 1940년 바르톡은 스위스로 망명 뉴욕으로 건너와 그곳에서 생을 마감 하기까지 작품활동을 계속합니다. 그의 작풍은 바흐의 완벽한 대위법적 수법과 베토벤의 음악적 전개발전의 방법, 그리고 드뷔시의 음색등의 영향을 받습니다.
Bela Bartok,(1881~1945)
헝가리의 작곡가. 어머니한테서 피아노의 기초 교육을 받고, 1893년부터는 피아노와 작곡을 라슬로 에르켈 László Erkel에게 배웠다. 이어서 에르뇌 도흐나니의 권유로 부다페스트 왕립 음악아카데미에 입학하여 그곳에서 리스트의 제자였던 이슈트반 토만 István Thomán에게 피아노를, 야노슈 쾨슬레르 János Koessler에게 작곡을 배웠다. 그리고 1900년에 졸탄 코다이와의 교류가 시작되었다. 1902년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교향시를 알게 된 것은 그의 초기의 작품에 영향을 주었다. 열렬한 민족주의자였던 바르톡은 1848년에 헝가리의 독립혁명의 영웅을 찬미한 교향시 코슈트에 의해서 알려지게 되었다. 당시 피아니스트로서의 길을 걷고 있던 그는 바이올린과 피아노를 위한 랩소디 Sz 20, 피아노와 오케스트라를 위한 부를레스크 Sz 28, 이어서 피아노를 위한 랩소디 Sz 26을 작곡했다. 1905년에는 파리에서 루빈스타인 콩쿠르에 참가했으나, 빌헬름 박하우스에게 우승을 빼앗겼다. 굴욕을 맛본 바르톡은 부다페스트로 돌아와 헝가리의 민족전승을 열심히 채집, 연구했다. 그는 코다이와 함께 동양의 유산과 서양의 유산을 결합시키려고 시도했다. 여기서의 서양의 유산은 화성적 감각에 관해서는 드뷔시, 대위법의 투명함에 관해서는 바흐, 그리고 형식에 관해서는 베토벤으로부터의 가르침에 바탕을 둔 것이었다.
부다페스트 왕립 음악아카데미의 교수가 된(1907) 바르톡은 피아노 교육법의 개량을 시도하여 학생들에게 조성의 혼합이나 마디줄의 상대성에 익숙케 하려고 노력했다. 그 결과 1908년 6월의 10개의 쉬운 소곡 Sz 39로 시작하여, 1937년에 완성한 미크로코스모스 Sz 107에 이르는 일련의 교육적인 작품들이 태어나게 된다. 1908년에는 현악4중주곡 제1번을 작곡했는데, 이 작품에는 바그너와 드뷔시의 영향이 현저하게 나타나 있다. 여류 바이올린 주자 슈테피 가이너 Stefi Geyer는 그에게 영감을 주어 바이올린 협주곡 제1번 Sx 36이 완성되게 하였으며, 그 최초의 부분은 두 개의 초상 Sz 37의 제1곡에 전용되었다. 3개의 부를레스크 Sz 47에서는 그 두 번째 곡(허풍쟁이 Kicsit ázottan)에서 건반 위에서 짓눌려진 꾸밈음의 그룹을 주요음 앞에 붙이는 새로운 기법을 사용하고 있다. 1910년에 바르톡은 슈트라우스의 영향에서 벗어난 것으로 보이는데, 그 무렵 그는 엘렉트라를 격렬하게 비난하고 있었다. 1909년 그는 치글러 마르타 Ziegler Márta와 결혼했으며 이듬해에 아들이 태어났다.
민요가 갖고 있는 선법적 서법과의 연관은 작곡가 바르톡에게 4개의 만가(輓歌) Sz 45의 착상을 얻게 했다. 이 곡은 장조, 단조의 선법조직의 전제(專制)를 전혀 알지 못하던 시기의 매우 오래된 노래에 바탕을 두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1911년은 피아노를 위한 알레그로 바르바로 Sz 49라는, 충격적인 동성(動性)과 헝가리어의 자연스러운 운율을 특별히 사용한 최초의 오페라인 푸른 수염 공작의 성(城) Sz 48에 의해서 주목할 만한 해가 되었다. 이 푸른 수염 공작의 성은 헝가리의 수필가이며 민중적인 발라드나 민화 속에 그 진보적인 정치사상을 담으려 한 벨라 발라주 Béla Balázs와 바르톡의 협력이 낳은 최초의 매우 결실이 큰 결과이다. 바르톡과 발라주에 의한 이 오페라는 전통적인 테두리에서 벗어나 모든 창조자의 고독, 즉 무익한 지식을 갈망함으로써 사랑이라는 모든 재산이 파괴되었다는 것을 표현하고 있다. 1913년 코다이와 바르톡은 아랍과 카빌리아의 노래를 200편이나 채집했고 몽고나 헝가리, 핀란드 지방의 민요까지도 채집했다. 당시 바르톡의 교육상의 의향은 그가 찾아낸 민족음악을 재창조하고 싶다는 희망과 일치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피아노를 위하여 동양의 춤곡 Sz 54와 루마니아의 민속 춤곡 Sz 56, 20개의 루마니아의 코린다(크리스마스 노래) Sz 57을 작곡했다. 성악곡으로는 9개의 루마니아 민요 Sz 59, 5개의 가곡 Sz 61과 Sz 63, 8개의 헝가리 민요 Sz 64 등을 통해 재창조를 시도했다. 그러나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여 그의 탐구의 길은 중단되었다. 당시의 바르톡은 현악4중주곡 제2번 Sz 67을 작곡하고 있었다.
전쟁 직후 바르톡은 신정부의 원조를 얻을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가지게 되었다. 그러나 이 신정부는 편협한 민족주의 속에 움츠러들어 국가라는 테두리를 초월하려 한 그의 작품을 비난했다. 그 이후 바르톡은 자기 자신의 독자적인 방법으로 재창조가 가능한 음악적 소재를 사용했다. 당시 그가 작곡한 극히 자유로운 형식에 따른 피아노곡 헝가리 농민의 노래에 의한 즉흥곡 Sz 74, 그리고 특히 두 곡의 바이올린과 피아노를 위한 소나타 Sz 75와 Sz 76은 현재까지도 그 격렬함과 신선함을 유지하고 있다. 부다 시와 페스트 시의 합병 50주년 기념행사를 위해서 그에게 작품이 위촉되었다. 무도 모음곡(1923)이 바로 그것이다. 이것은 두 개의 아랍 춤곡과 한 개의 헝가리 춤곡, 한 개의 루마니아 춤곡으로 만들어진 것으로서, 바르톡은 최후의 알레그로 악장에서 그러한 리듬과 선법의 특이성을 절묘하게 하나로 묶고 있다. 또한 1923년에는 아내와 헤어지고 디타 파스토리 Ditta Pásztory와 재혼했다. 그리고 그는 스카를라티나 이탈리아 르네상스 시대의 쳄발로 주제 등에 관해서 연구했고, 그의 최초의 피아노 협주곡 Sz 83을 작곡했다. 이 작품은 1927년 7월 작곡자 자신에 의한 피아노 연주와 푸르트벵글러의 지휘로 초연되었다. 현악4중주곡 제3번 Sz 85가 필라델피아 콩쿠르에 입상하자 처음으로 미국여행을 경험했고, 바이올린과 피아노를 위한 두 개의 랩소디 Sz 86과 Sz 89를 썼으며, 전자를 거장 요제프 시케티에게, 후자를 졸탄 세케이 Zoltán Székely에게 각각 헌정했다.
1930년의 칸타타 프로파나에서 바르톡은 코린다(루마니아의 크리스마스 노래) 중에서 어떤 전설적 주제를 차용했다. 즉, 어떤 농부의 9명의 아들이 사슴으로 모습이 바뀌지만 결국에는 자유를 찾아낸다는 이야기이다. 이 주제는 노예 같은 처지에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이해의 결여와 전쟁의 절망적인 악순환을 가져오는 굴종보다도 항상 희구해온 독립을 쟁취하기 위하여 위험을 무릅써야 할 필요성과 다시 생을 쟁취하기 위하여 노래해야 할 필요성을 하나로 융합시키고 있다. 그리고 1933년 바르톡은 피아노협주곡 제2번을 한스 로스바우트 지휘, 작곡자 자신의 연주로 프랑크푸르트에서 초연했다. 또한 에리히 되플라인 Erich Do‥flein의 요청에 따라서 여러 곡의 피아노곡을 두 대의 바이올린용으로 편곡하였다. 이 44개의 2중주곡 Sz 98은 바르톡에 의하면, 학생들이 민중음악의 자연스런 단순성, 그리고 그 리듬과 선율의 독자성을 발견하는 데 도움이 되는 것이었다. 1935년 4월에는 콜리슈4중주단이 워싱턴에서 그의 현악4중주곡 제5번을 초연했다. 그 형식의 완전함, 팽팽한 표현주의, 그리고 리듬의 복잡한 대위법은 이 작품을 그의 실내악 창조의 정점에 올려 놓고 있다. 그리고 1936년에는 나치즘 대두에 대한 우려를 표명하기 위하여, 바르톡은 그의 작품이 유태인 작곡가들의 작품과 똑같은 운명(발행 및 연주 금지)을 받게 되기를 원했다.
그는 종종 스위스에 있는 친구인 지휘자 파울 자허를 찾아가서 휴식을 취했다. 이 친구의 요청에 따라 작곡된 것은 그의 2대 걸작인 현악기와 타악기와 첼레스타를 위한 음악 Sz 106 및 현악을 위한 디베르티멘토 Sz 113이다. 이들 작품은 1937년과 1940년에 자허가 지휘하는 바젤 관현악단에 의해 초연되었다. 터키 여행에서 돌아온 후 그는 바이올린을 위한 작품을 쓰기 시작했다. 이 곡은 헌정을 받은 거장 졸탄 세케이의 희망에 따라서 바이올린 협주곡 제2번의 형식을 취했으며 세케이와 멘겔베르크가 지휘하는 오케스트라에 의해서 1939년 4월에 초연되었다. 현악기, 타악기, 첼레스타를 위한 음악과 병행하여 바르톡은 두 대의 피아노와 타악기를 위한 소나타 Sz 110을 작곡했는데, 이것은 작곡자 자신과 그의 아내에 의해서 1938년 1월 바젤에서 초연되었다.
1939년 미국 여행 때 시게티를 알게 된 바르톡은 망명을 결심하고, 1940년 10월 8일 부다페스트에서 야노슈 프렌치크의 지휘로 최후의 연주회를 열게 된다. 그 후 뉴욕으로 건너가 콜럼비아 대학의 연구원으로 있으면서 몇 차례 강연도 했으나 경제적으로는 매우 어려웠다. 그는 시게티, 재즈 클라리넷 주자인 베니 굿맨과 공연하는 콘서트를 몇 차례 열었고(클라리넷과 바이올린과 피아노를 위한 콘트라스트 Sz 111), Sz 110을 오케스트라용으로 편곡하기도 했다. 그의 건강 상태는 점점 악화되었다. 백혈병에 걸린 것이다. 그러나 1943년에는 지휘자 쿠세비츠키의 위촉으로 보스턴 교향악단을 위해 협주곡을 작곡하여 1944년 12월에 초연했다. 또한 예후디 메뉴인의 의뢰로 무반주 바이올린 소나타 Sz 117을 작곡했다. 이러한 것들이 성공을 거두자 많은 작곡 의뢰를 받게 되었다. 그는 피아노협주곡 제3번을 거의 완성시키고, 윌리엄 프림로즈의 의뢰로 작곡 중이던 비올라 협주곡의 독주 파트의 스케치를 완성했다. 그것은 제2차 세계대전 말기의 일이었다. 이제 바르톡의 희망은 부다페스트로 돌아가는 일뿐이었다. 그러나 그 희망도 헛되이 그는 뉴욕의 웨스트사이드 병원으로 옮겨져서 1945년 9월 26일 그 생애를 마쳤다.
바르톡은 동서 문화가 교차하는 동쪽 지중해 연안 전역에서의 최초의 민족음악학자였다. 연구활동을 통하여, 그는 다양한 민중음악의 동일성을 분명히 하게 되었다. 그리고 민족주의나 문명이라는 영역을 초월한 민족간의 공통 언어를 발견하는 데 전념했던 것이다. 바르톡은 이렇게 채집한 선율에서, 그런 것을 변화시켜버린 외국의 요소를 제거시켜 조국의 전통음악의 원류에 이르게 되었다. 민족과 민족간에 서로 영향을 주고 받은 것, 구전에 의해서 전해진 선율의 유동성을 고려하여 그는 새로운 기보법을 창조했다. 이 기보법은 절대로 고정되지 않은 소재를 재현하는 것이 아니다. 필요하다면 그 지적 재창조를 위하여 그 음악의 기초 도식을 기록하는 것이다.
이처럼 민족음악의 정신을 깊게 흡수한 바르톡은 폐쇄적인 화성체계를 일체 배제했다. 바르톡의 예술이 리듬과 화성의 완벽한 협력으로 이루어진 이상, 그에게 있어서 이 양자를 분리시키려고 시도하는 것은 무의미한 일이다. 따라서 작곡가로서의 그의 방법은 낭만파적 개념과 상반된 것이었다. 낭만파의 개념은 모든 것에서 개인적인 것을 추구하고 주제의 창조에 지나치게 큰 중요성을 두기 때문이다. 바르톡은 민족음악은 어떠한 점에서는 개인적 예술의 상대물이며, 또 어떠한 점에서는 그 본질 자체에 의해서 민족 음악의 표현 전체는 집단적인 것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바르톡은 조금씩 선법성과 조성, 반음계법과 온음계법 사이에, 그러한 것들을 종합하는 독자적인 방법을 만들어냈다. 엄밀하게 보자면 그의 여러 작품에 존재하는 화성의 자유로움과, 예비도 해결도 되지 않은 불협화음의 존재 사이에는 양의성이 있다. 거친 온음계법에 의한 고풍스런 노래의 선법적 질서가 반음계적 요소의 퇴적에 의해서 사라져 버리지 않는다는 이원론을 뛰어넘고 있는 것이다. 바르톡의 중요한 여러 작품에는 온갖 수사법전통적인 또는 12음음악적인에서 떨어져 그 작품을 구성하는 으뜸음과 딸림음의 극(極)을 느끼게 한다. 사용되고 있는 여러 음정은 어느 정도의 자율을 획득하여 민요에서 볼 수 있듯이 3도나 5도, 아울러 7도의 음정도 자연스럽게 취급되고 있다. 그의 원숙기의 작품에 있어서 시간적 질서는 리듬에 대해서와 마찬가지로 화성에 대해서도 적용되고 있으며, 그것은 황금분할의 수치에서 유래한 비율에 따르고 있다. 에르뇌 렌드바이 Ernö Lendvai는 반음계법과 온음계법의 관계나 리디아 선법, 도리아 선법 등 5음음계의 사용 역시 황금분할과 결부된, 매우 독창적이고 개성적인 탐구의 결과를 볼 수 있음을 말해주고 있다.
바르톡 예술의 형식상의 복잡함은 신바르톡파나 후기 바르톡파의 존재를 용납하지 않을 정도이다. 같은 시대의 많은 작곡가들이 바르톡의 영향을 받았는데, 그들은 대개 농민의 노래의 주제적인 것에서 착상을 얻는 데 그쳤을 뿐, 재창조라는 진정한 일에 노력을 기울이는 일이 없었다. 그들이 모범으로 삼은 사상가 바르톡은 우선 이 재창조라는 일에 따랐고, 그 후 이것에 의해서 자신을 완벽하게 표현했던 것이다. 바르톡의 메시지의 보편성은 이 음악가가 자기의 본원(本源)인 원점을 초월하는 데 성공했음을 보여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