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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치민의 주석궁, 참으로 검소하구나 |
베트남 문화체험기 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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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철관(3356605)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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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주석궁 | | ⓒ 김철관 | | 베트남어의 똥통(Tong Thong)은 무슨 뜻일까. 변기통을 의미하는 것일까. 아니다. 똥통은 외교를 담당하고 조약체결을 하는 '대통령'을 뜻한다. 대통령은 해외사절이 오면 관례에 따라 주석궁으로 모셔 영접을 한다.
베트남 바딘광장 옆에 있는 노란색 바탕의 주석궁은 호화스럽게 보이는 프랑스풍의 건축양식이다. 1906년부터 주둔한 프랑스 식민지시대 인도차이나 총독관저로 알려지고 있다.
평생 결혼하지 않고 독신으로 산 호치민이 1946년 베트남 사회주의 공화국 대통령으로 취임해 3개월을 기거하기도 했던 곳이다. 현재 주석궁은 국빈 영접이나 중요한 손님이 왔을 때 회담 장소로만 사용하고 있다.
| | ▲ 호치민 생가와 주변 호수 | | ⓒ 김철관 | | 호치민이 이곳에 기거할 때 국민들처럼 평범한 주택에서 살고 싶다는 그의 말에 따라 주석궁에서 200~300m 정도 떨어진 곳에 베트남 소수민족이 사는 전통가옥을 지어 직무를 봤다.
이곳에서 직무를 본 호치민은 또 다른 주상가옥으로 집무실을 옮기게 된다. 전통가옥에서 500m 떨어진 곳에 위치한 주상가옥은 땅으로부터 1.2m 정도 떨어져 지은 집이다. 뱀, 쥐 등의 침입을 막기 위한 소수민족의 아이디어를 그대로 살렸다. 호치민은 1.2m 높이의 주상가옥 밑 공간을 간부 회의실로 활용했다. 지붕은 전통가옥답게 야자나무 잎으로 덮여 있다.
| | ▲ 호치민이 살았던 주상가옥 | | ⓒ 김철관 | | 하지만 대통령의 집이라고 부를 수 없을 정도로 아주 소박하고 초라하기까지 했다. 주변 잉어로 가득한 연못가에 잘 가꾸어진 정원이 눈길을 끌었다. 첫 번째 생가와 두 번째 생가로 이어진 주변은 생태환경이 잘 보존돼 있었다.
참고로 호치민은 일당독재를 막기 위해 일찍이 집단지도체제를 도입했다. 모택동 등 일당독재의 최후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서열이 가장 높은 사람은 공산당 서기장이다. 그 뒤를 이은 주석은 대통령과 같은 외국과의 조약, 대외활동을 담당한다. 세 번째가 국무총리 격인 수상이다. 그다음은 국회의장격인 국회 주석이고, 다섯 번째가 베트공(북부 베트남) 하부 게릴라조직이었던 조국통일전선 의장, 다음이 국방위원장이다. 6명의 집단지도체제로 움직인다.
바딘광장, 호치민 영묘, 주석궁, 호치민 생가에 이어 호치민박물관으로 향했다. 호치민 영묘 옆에 위치한 거대한 시멘트 건물이었다. 1990년 5월 17일 호치민 탄생 100주년 기념을 위해 개관했다. 박물관 입구 들어설 때는 가방과 카메라는 맡겨야 한다. 사진 촬영이 금지돼 있기 때문이다. 일행도 입구에서 짐을 맡겼다.
| | ▲ 호치민 박물관에 걸려 있는 호치민 | | ⓒ 김철관 | | 디지털 소형 카메라를 호주머니에 넣고 있었다. 그리고 입장을 했다. 호주머니 검사를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기왕 카메라가 있어 관심 있는 부문을 촬영했다.
사진을 촬영하는데도 관리인들은 아무런 반응을 보이질 않았다. 이상한 일이였다. 계단 상단 우측에 출발해 박물관 아래층을 향해 시계 방향으로 걸어가면서 관람을 했다.
먼저 호치민과 관련된 게릴라 전투 시절의 활동사항, 비밀 외교편지, 쓰던 물건 등 유물을 즐겨봤다. 물론 베트남 전통문화와 풍습도 한눈에 볼 수 있었다. 박물관에서 가장 눈에 띈 곳은 베트남 국화인 연꽃이었다. 크게 단장된 연꽃은 베트남이 불교국가라는 것을 말해 주는 듯했다.
이후 들린 곳이 하노이 재래시장이다. 우리의 재래시장의 모습과 비슷했다. 망고, 야자수, 수박 등 베트남 전통 과일이 많이 즐비해 있었다. 여러 과일을 골고루 시식도 했다. 모든 과일들이 당도가 높고 맛이 있었다.
| | ▲ 하노이 재래시장 | | ⓒ 김철관 | | 특히 우리의 찐쌀과 같은 베트남 야자나무 잎으로 찐 녹색 빛깔의 쌀은 쫄깃쫄깃해 씹을수록 감칠맛이 났다. 재래시장과 더불어 하노이는 작년에 백화점이 개장됐단다. 상품도 비싸고 대중화가 되지 않아 아직 썰렁한 것으로 알려졌다. 하노이 부유층을 제외한 대부분의 주민들은 상품을 사기 위해서는 백화점보다 재래시장을 아직 많이 이용한다.
버스 창문으로 보이는 큰길가에 빼곡히 들어서 있는 하노이 가정집의 모습은 너무 이채롭게 느껴졌다. 폭이 좁고 긴 형태의 모습 때문이다. 화재가 나면 이웃집과 틈새가 없어 잇달아 타버릴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1980년 베트남 신진정치세력들이 시장경제를 받아드리면서 사유재산을 인정해 토지를 분배했다. 이때 습지가 많은 나라이기 때문에 국민들 대다수가 길가에 햇빛이 들어오는 집을 선호했다.
이런 이유로 베트남 정부는 햇빛이 들어온 양지바른 곳에 4m로 폭을 제한해 집을 짓게 했다. 그래서 4m 폭에 뒤로 길게 늘어진 형태의 집이 많아졌다. 정치적 이유 때문인 것이다. 하지만 프랑스풍의 건축 형태로 아주 멋있고 아름답고 아기자기한 형태들이 유난히 돋보였다.
특히 하노이 시내 중심에는 여러 개의 매력적인 호수가 있다. 대표적인 호수가 호완 끼엠 호수다. 버스를 타고 지나면서 본 호완 끼엠 호수 주변에는 데이트를 즐기는 여인, 배드민턴과 조깅을 즐기는 사람들이 엿보였다. 호완 끼엠(일명 還劍湖, 환검호)은 거북이가 검을 하늘의 주인에게 돌려줬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호수 중앙의 작은 섬 위에 있는 붉은 별이 꼭대기에서 밝힌 버려진 탑으로 알려진 주어(거북이탑)는 하노이의 정신적 상징으로 불리고 있다.
하노이에서 가장 큰 호수는 서호다. 호수가에 선상카페도 즐비해 있다. 그 주변에는 고관대작들의 유럽풍 호화별장들도 많다. 이렇게 하노이는 빈익빈 부익부, 극과 극의 사회지만 아직 국민들의 불만은 없는 듯 보였다.
130년 전통의 베트남 뷔페식당에서 점심을 먹었다. 베트남 음식을 골고루 맛보았다. 베트남 쌀국수는 물론이고, 과일, 빵, 고기, 생선 등 푸짐하게 쌓여 있었다. 가장 맛있는 음식은 짜카였다. 짜카는 가물치 찜이다.
| | ▲ 베트남 뷔페 식당 | | ⓒ 김철관 | | 새우 소스에 찍어 먹으니 정말 한사람이 죽어도 모를 정도였다. 짜카는 살아 생전 호치민이 무척 좋아한 음식이다. 이곳에서 음식을 만들거나 서빙을 한 종업원들의 한 달 월급은 100달러(10만원)를 넘지 못했다. 베트남 노동자들의 평균 월급인 셈이다.
점심을 끝내고 공자 사당인 문묘에 들렸다. 호완 끼엠 호수에서 약 2km지점에 위치한 문묘는 베트남의 전통 건축양식이 잘 보존된 곳이다. 이곳 문묘를 가기 바로 직전, 하마(下馬)비가 세워져 있다. 바로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이곳을 지날 때는 말에서 내려 예의를 갖추라'는 의미였다.
| | ▲ 문묘 앞 하마비 | | ⓒ 김철관 | | 우리와 같이 뿌리 깊은 공자중심의 유교 사상 전통이 엿보인 대목이다. 이곳은 1070년 레 탄 똥 황제가 문인들의 학문적 업적을 기리기 위해 공자에게 바친 사원이다.
관료자식들을 교육시키기 위한 베트남 국자감도 1076년 이곳에 설립됐다. 재직 때 레 탄 똥 황제가 3년시(3년마다 치루는 과거 회시라는 뜻)에 급제한 1302명의 진사의 이름, 출생지와 업적을 돌거북위 비석에 기록해 놓았는데 이를 '진사재명비'라고 부른다. 십장생인 거북이 등에 비석을 세워 이름을 새겨둔 것은 '오래토록 빛나라'는 의미이다.
당시 '오지임'이라는 사람은 과거시험에 8등으로 급제해 이름을 새겼는데 희미하게 보일 정도로 이름이 지워져 있었다. 관료로 있으면서 역적으로 몰려 사형을 당했기 때문이었다. 문묘마당은 임금을 앞에 두고 공자사상으로 과거시험을 치렀다. 3년시에 합격하면 1등부터 6등까지의 우수한 인재는 어사가 됐다. 우리 조선과 똑같이 이들은 임금을 대신해 지방 관리를 감찰하는 암행어사로 활동을 했다.
| | ▲ 문묘 안 진사재명비 | | ⓒ 김철관 | | '진사재명비'에 별로도 이들의 행적도 적고 있다. 과거에 합격해 관료 활동을 잘한 강희재라는 사람을 두고 만세사표(萬世師表)로 불렀다. '만세에 사표로 삼으라'는 뜻이다.
참고로 현재 베트남은 학사 석사 박사 외 진사라는 제도가 있다. 진사는 박사를 마치고 훌륭한 학문적 업적이 있는 박사에게 진사라는 자격이 주어진다. 진사는 베트남 전체에서 5~6명 정도로, 교수로는 인민교수를 말한다. 유교의 영향 때문인 것이다.
문묘는 5개의 정원으로 구성됐다. 중앙 통로와 문은 황제전용이다. 한쪽 통로는 문관전용이고 또 다른 통로는 무관전용 통로다.
문묘 공자 사당에는 공자를 중심으로 좌우측에 각각 두 사람씩, 총 4사람이 앉아 있다. 한 사람을 빼고 3사람은 공자의 제자들이다. 수제자 중 맏형으로 종가집 종손격인 '증자'가 있고, 그 옆에는 증자와 선의의 라이벌 관계에 있었던 '안자'가 있다. 반대편 두 사람 중 한 사람이 바로 '맹자'로 공자보다 200년 후의 사람이다. 그가 제자의 반열에 함께 끼어 있는 것은 공자사상을 발전 시키는 데 가장 공로가 컸기 때문이다. 그래서 제자에 버금가는 대우해 후세 사람들이 그를 기리고 있다.
맹자 옆에 있는 '자사'는 공자가 무척 사랑했던 제자로 공자의 친손자다. 천부적으로 천재적 머리에 명석하고 사리에 밝았던 자사는 32살에 단명했다. 이들 4사람을 흔히 '사성'이라고 부르고 공자와 함께 이곳에서 제를 지내고 있다.
문묘 문화체험 관광을 마치고 버스에 탔다. 부슬비가 내렸다. 오토바이는 줄고 얼마되지 않는 버스나 승용차의 움직임이 분주했다. 비가 온 탓에 오토바이가 밖으로 나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정각 오후 5시 사이렌 소리가 울렸다. 궁금했다. 사회주의 국가의 전통에 따라 일과시간을 마감한 소리였다. 과거 우리 군사정권시절의 국기 하강식 사이렌 소리가 떠올랐다.
버스에서 본 큰길가에 도자기를 판매한 사람이 간간이 보였다. 과거부터 베트남은 질 좋은 점토가 많은 곳으로 익히 알려졌다. 그런 탓에 도자기가 많이 나온 듯했다.
세계 최대 탄광인 노처탄광이 있는 곳도 베트남이다. 프랑스가 침범한 이유 중 하나도 역사는 석탄 채굴로 막대한 부를 창출하기 위해서였다고 적고 있다. 프랑스 지배하던 시대에 베트남 석탄을 해외 각지에 팔아 본국의 수익을 올리기도 했다. 또 베트남은 세계 최고의 계피생산지로 유명하다. 흔히 코카콜라에 톡 쏘은 맛을 내는 재료가 계피인데, 코카콜라는 상당 부분 이곳 베트남에서 계피를 수입하고 있다.
베트남 중부는 세계 3대 커피 생산지이다. 베트남 중남부 지역은 고무를 많이 수출한다. 고무는 수분이 많은 알칼리성 땅에서 잘 자란다. 동남아시아 3대 고무 수출국이면서 세계 9대 고무수출국이 베트남이다. 편안한 잠을 재촉하는 침대 쿠션의 라텍스, 베개 라텍스 등은 고무나무에서 나온 재료로 만든 것으로 현재 베트남에서 가장 인기 있는 효자 수출품이다.
고무나무에서 약 20년간 고무를 재취하면 그 땅에는 어떤 식물들도 자라지 않는다. 고무나무에서 채취한 힌 액체가 땅 토양성분(영양분)을 빨아드려 토양이 변질되기 때문이다. 이런 것을 방지하기 위해 베트남 원예 연구원들이 연구 끝에 대안을 발견했다.
고무나무를 심은 땅에 알칼리성 파인애플 나무를 심은 것이다. 고무나무가 빼앗아간 알칼리성을 보충해 땅의 토양을 유지하게 된 것이다. 덧붙여 그곳에 나온 파인애플은 크지 않고 신맛과 단맛이 잘 어우러져 맛이 있다. 베트남 중부에서 많이 생산되지만 남부 하롱시에서도 생산된다. 베트남 특산품으로 상당히 인기를 누리고 있다. 하노이시 문화체험 관광이 끝나고 하롱베이로 이동했다.
출처 ▒ 'http://www.ohmy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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