盧泰愚 肉聲회고록-權力의 갑옷을 벗은 전직 대통령이 들려주는 깊은 곳 깊은
이야기 『손목이 새콤새콤해질 때까지 쓰고 또
썼다. 여생을 전직 대통령의 기록문화를 만드는 데 바치겠다』
『북방정책은 북한을 양파껍질처럼 벗기는 遠交近攻의 전략. 북한의
개방이 바로 통일. 金日成의 頂上회담 초청을 거절했다. 金泳三 정부가 남북대화의 주도권을 놓친 것이
한스럽다』
편집자 注를 대신하여… 이 기록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
1. 대통령이란 자리의
무게
2. 국가대전략-서울올림픽 유치
3. 북방정책의 철학과 戰略-모스크바와 北京을 거쳐 평양으로
4. 동구권 수교 秘話-헝가리가 징검다리 역할
5. 韓蘇수교와 고르바초프-그는 돈에
無知했다
6. 朴正熙·全斗煥과의 인연
7. 韓中수교와 대만 문제-義理와 國益 사이서 고민
8.
북한의 고삐를 잡다-한국을 안 통하고는 對北접촉 못하게 막다
9. 남북頂上회담 추진과 徐東權-털樽?밀사 교환
방문
10. 北核문제와 非核化 선언 내막-群山에 핵무기 있었다
<1999년 5월
월간조선>
* 盧泰愚 대통령
연보 1932년 12월 4일 대구직할시 동구 신용동 596번지에서 출생
1951년 7월
경북고 졸업
1955년 9월 陸士 졸업(11기), 육군 소위 임관
1968년 6월 육군대학 정규과정
졸업(중령)
1971년 11월 보병 제21연대장(대령)
1974년 10월
제9공수특전여단장(준장)
1979년 1월 보병 제9사단장(소장)
1979년 12월
수도경비사령관(소장)
1980년 8월 국군보안사령관(중장)
1981년 7월 전역(육군 대장), 정무
제2장관
1982년 3월∼4월 체육부장관
1982년 4월∼83년 7월 내무부장관
1983년
7월∼86년 5월 서울올림픽조직위원회 위원장
1984년 10월∼86년 5월 대한체육회장
1985년 2월 제12대
국회의원, 민주정의당 대표위원
1987년 6월29일 6·29 선언
1987? 8월 민주정의당 총재
취임
1988년 2월25일 대통령 취임
1988년 7월 7일 「민족자존과 통일번영을 위한 대통령
특별선언」발표(7·7 선언)
9월17일 서울올림픽 개회선언. 다케시타 일본 수상과 韓日 정상회담(서울)
10월15일 서울장애자올림픽 개회식 참석
10월19일 제43차 유엔총회 연설(「한반도에 화해와 통일을 여는
길」)
10월21일 레이건 미국 대통령과 韓美 정상회담(미국)
11월 3일∼14일 말레이시아, 호주,
인도네시아, 브루나이 방문
1989년 2월27일 부시 미국 대통령과 韓美 정상회담(서울)
9월11일 「한민족
공동체 통일방안」천명 특별 연설
10월18일 미국 上下 양원 합동회의 연설
11월18일∼12월4일 유럽
순방(독일, 헝가리, 스위스, 영국, 프랑스)
1990년 5월 9일 민주자유당 총재 취임
5월25일 일본
국회연설(「변화하는 세계 속의 새韓日관계」)
6월 5일 고르바초프 소련 대통령과의 韓蘇
정상회담(샌프란시스코)
6월 6일 부시 미국 대통령과 韓美 정상회담(워싱턴)
12월13일∼17일 盧泰愚
대통령 소련 방문
12월14일 고르바초프 대통령과 韓蘇 정상회담(모스크바), 모스크바대학 연설 (「냉전의 벽을 넘어, 평화와
번영을 향하여」)
1991년 9월10일 가이후 일본 수상과 韓日 정상회담
4월20일 고르바초프 소련 대통령과의
韓蘇 정상회담(제주)
6월29일∼7월 7일 미국, 캐나다 공식 방문
9월17일 남북한 유엔
동시가입
9월23일 부시 미국 대통령과의 韓美 정상회담(뉴욕)
9월24일 유엔총회 연설(「평화로운 하나의
세계 공동체를 향하여」)
9월25일 살리나스 멕시코 대통령과 韓멕시코 정상회담(멕시코)
11월 8일
「한반도의 비핵화와 평화 구축을 위한 선언」발표
1992년 1월 5일 부시 미국 대통령과 韓美 정상회담(서울)
1월16일 미야자와 일본 수상과 韓日 정상회담(서울)
9월22일 유엔총회 연설(「평화와 번영의 21세기를
향하여」)
11월 8일 미야자와 일본 수상과 韓日 정상회담(교토)
11월18일∼19일 옐친 러시아 대통령
공식방한, 韓러 정상회담(서울)
1993년 2월24일 대통령 퇴임
= 편집자 注를 대신하여-이 기록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 내가
대통령이라면 마흔 여섯의 나이에 암살된 미국 대통령 케네디는 저명한 학자들과
담소(談笑)하면서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대통령을 해보니 학자들이 쓴 과거 대통령 전기(傳記)에 대해서 만족하지 못하게
되었다. 대통령을 해보지 않은 학자가 과연 제대로 대통령 전기를 쓸 수 있을지 의문이다』
전두환(全斗煥) 전
대통령도 퇴임 직전에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통치사료담당 비서관의 기록).
『노태우(盧泰愚)도 인간 全斗煥은 알지만 대통령
全斗煥은 모를 거야』
고 박정희(朴正熙) 대통령이 술을 마신 뒤에 기자들에게 내뱉었던 말,
『내가 죽거든 내 무덤에 침을 뱉어!』도 대통령직에 대한 국민들의 이해 부족을 개탄하는 의미를 품고 있다.
기자(趙甲濟)는 1970년대 말 부산에서 사회부 기자로 일할 때 시각(視覺)의 중요성을 절감(切感)한 경험이
있다. 부산 중심지 광복동 거리를 택시를 타고 지날 때였다. 인도(人道)와 차도(車道) 사이에 쇠말뚝을 이어 박아놓은 것이 보였다. 쇠말뚝
사이엔 쇠줄을 연결했다. 기자는 「누가 저렇게 살벌한 설치물을 만들었단 말인가」라고 개탄하면서 저 흉물(凶物)에 대해 취재를 해봐야겠다고
별렀다. 며칠 뒤 광복동 거리에 나갔다가 인도(人道)를 걷게 되었다. 쇠말뚝과 쇠사슬 때문에 그렇게 편할 수가 없었다. 자동차 행렬에 신경쓰지
않고, 안심하고 거리를 활보할 수 있었다. 쇠말뚝이 고맙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행인(行人)의 시각과 승객의 시각은 정반대의 가치판단을 결과했다.
국가운영이란 것을 기준으로 할 때 대통령 자리는 정상(頂上)에서 내려다 보는 자리이고, 기자는 계곡에서
올려다 보는 자리일 것이다. 기자는 이번 盧泰愚 전 대통령과의 인터뷰 때 꼭 물어보고 싶은 말이 있었다.
『우리가 중국과 수교할 때 대만에 대해서 그렇게 해야 했습니까. 수교 발표 며칠 전까지 대만 사람들에게
절대로 옛 친구를 버리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 것은 너무 심한 배신(背信)이 아니었습니까』 盧 전 대통령은 한중(韓中)수교 부문에서 기자가
질문하기도 전에 이렇게 설명했다.
『지금도 대만에겐 미안하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럴 수밖에 없었습니다.
중국이 우리에게 조건을 달았습니다. 자신들도 북한에 수교사실을 비밀에 붙일 테니 한국측도 대만에 비밀을 유지해달라는 것이었습니다. 만약 북한이
韓中수교를 미리 알게 되면 어떤 방해책동을 할지 모르는데 그 요구를 들어주지 않을 수 있었겠어요』
기자는
잠시 「내가 대통령이었으면 이 문제를 어떻게 처리했을까」하고 생각해보았다. 과연 인구 12억 중국의 요구를 묵살하고 우방국가간의 의리를 지키기
위해서 인구 2천만의 대만측에 미리 韓中수교 예정일을 알려주고 양해를 구할 수 있었을까. 의리를 기준으로 판단할 수 있는 기자와 국익(國益)을
기준으로 할 수밖에 없는 대통령의 시각차.
盧 전 대통령에 의한 그러한 결정의 당부(當否)는 오히려
韓中수교가 가져온 사후(事後)효과로써 판단될 것이다. 韓中무역액은 수교 연도인 1992년엔 63억7천9백만 달러, 93년엔 90억8천만 달러,
94년엔 1백16억6천6백만 달러, 95년엔 1백65억4천5백만 달러, 96년엔 1백99억 달러, 97년엔 2백36억9천만 달러, 98년엔
22%가 줄어 1백84억2천만 달러였다. 작년의 무역총액은 줄었지만 우리나라의 무역흑자는 54억6천만 달러를 기록, 역대 최고였다.
우리나라는 수교 다음해부터 對中 무역흑자를 기록해 왔는데, 작년까지의 흑자누계는 1백54억5천8백만
달러이다. 중국은 미국, 일본에 이어 우리나라의 세 번째 큰 시장이다. 작년 한국인의 방중(訪中)인원은 48만7천명, 중국인의 訪韓인원은
8만9천6백명이었다.
盧泰愚 전 대통령과 이틀간 약 16시간의 대화를 나누면서 기자는 여러 번 『내가
대통령이었으면…』하고 생각해보았다. 이 인터뷰의 의미는 독자들이 대통령의 입장과 시각(視覺)에 서 보는 경험을 할 수 있다는 점일 것이다.
盧 전 대통령의 증언을 견디어낼 것인가
월간조선(月刊朝鮮)은 盧泰愚 대통령이 퇴임하기 직전인 1993년 1월호 별책부록으로
「비록(秘錄) 한국의 대통령」이란 책을 만들었다. 그 머리글에서 기자는 이런 말을 했다.
<月刊朝鮮은
그 동안 「대통령은 국민들의 마음을 알아야 한다」는 뜻이 담긴 기사들을 주로 써왔다. 그런 시각을 한번 바꾸어 「국민들도 대통령의 고독과 고민을
알아야 한다」는 생각을 해보았다. 즉, 국민과 대통령은 마주 보아야 하는 사이란 뜻이다>
月刊朝鮮은
盧泰愚 대통령의 재임기간에 집요하게 6·29 선언의 진상을 추적해왔다.
1989년 6월호 「全斗煥씨 측근들의 폭탄증언
『6·29 선언은 全斗煥 작품이다』」
1992년 1월호 「全斗煥 육성증언 6.29 前夜」
1992년
11월호「全斗煥 첫 발언 『이것이 6·29 正史다』」.
이 세 건의 기사는 盧대통령의 가장 큰 업적에 먹칠을
했다 하여 당시 정치권에 큰 파문을 일으켰고 「6·29 異說」이란 말을 만들어냈다. 세월이 지나자 이설(異說)은 어느새 정설(定說)이 되었다.
요사이는 「6·29 선언은 全斗煥 당시 대통령이 먼저 발상하여 盧泰愚 후보를 설득하여 받아들이게 한 것이다」는 쪽으로 굳어져 있다.
기자는 현직 대통령의 권위에 직격탄을 쏜 이 세 건의 기사가 月刊朝鮮에 실릴 수 있었고, 이 기사로 해서
압력은 많이 받았으나 아무도 안기부(安企部)에 연행되지 않았다는 점에서 민주화의 혜택을 실감한 적이 있었다. 기자는, 주로 全斗煥 전 대통령의
증언에 많이 의존했던 6·29 관련 기사가 盧泰愚 전 대통령의 증언에 의하여 보완될 때 비로소 진상에 가까운 모습을 그릴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그런 기회를 기다려 왔었다. 한 사건을 온전하게 그려내기 위해서는 당사자와 관련자들의 시각을 종합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盧 전 대통령을 인터뷰하게 되었을 때 기자가 가장 호기심을 갖게 된 대목은 月刊朝鮮이 갖고 있는 6·29
선언에 대한 정보와 시각이 盧 전 대통령의 증언을 견디어낼 것인가, 아니면 수정될 것인가 하는 문제였다. 盧泰愚 전 대통령을 인터뷰하러 가기
전에, 꼭 10년 전인 月刊朝鮮 1989년 7월호에 기자가 쓴 「盧泰愚 대통령 리더십 연구」란 기사를 다시 읽어보았다. 임기 2년째에 접어든
盧대통령이 민주화의 진통이 극에 달해 있었을 때 어떤 모습으로 기자에게 다가왔는지, 또 기자는 그의 지도력에 대한 정확한 분석을 하고 있었는지를
10년의 세월이 흐른 시점에서 검증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2백자 원고지 약 1백 장 분량의 이 기사의 처음과
끝은 이러했다.
<盧泰愚 대통령의 리더십이 가진 최대 강점은 「약하게 보이는 것」이라고 한 청와대
비서관은 말했다. 대통령이 약해 보이니까 국민들이 불안해하면서 『이제는 공권력도 믿을 바 못되니 우리가 정신을 차려야 한다』는 자율, 자위
의식을 다지기 시작했다. 이런 움직임이 사회의 각 집단으로 확산될 때 우리 사회는 비로소 민주적인 자생력을 지닌 강력한 구조로서 뿌리박게 될
것이라고 그 비서관은 말했다. 그래서 盧대통령은 스스로를 약하고 답답하게 보임으로써 국민들에게 민주주의의 자율학습을 시키는 「커다란
어리석음(泰愚)의 지혜」를 실천하고 있다는 분석이었다>
<1980년대의 한국을 변화시키고 있는
민주화운동은 盧대통령의 인간됨과 정치가됨에도 큰 변화를 가져왔고, 盧대통령의 그런 변화는 다시 한국사회를 변화시키고 있다. 한국 사회의 역동성은
이 시대를 사는 사람들에게 변증법적인 변화를 가져오고 있으며, 12·12 군사변란의 지휘자에서 민주화를 리드하는 지도자로 변신한 盧대통령이야말로
가장 대표적인 시대정신의 산물인 셈이다. 따라서 盧대통령을 어떤 모습의 대통령으로 만드느냐 하는 것도 오늘의 한국인이 같이 지고 있는 숙제인
것이다.
위협당하는 자신의 기득권을 지켜줄 강한 대통령, 또는 우리의 마음속에 아직 남아 있는 독재시대의
거울에 비친 「결단력 있는 대통령像」을 그리워하고 아쉬워하면서 盧대통령을 약하다고 비판하고 있지 않은지를 생각해볼 때인 것 같다. 盧대통령의
약함과 강함에는 오늘날 한국인의 몫이 다 들어 있기 때문이다. 盧泰愚씨를 일찍이 우리가 가져본 적이 없는 「강하면서도 선한 대통령」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지식인은 자기에게 보다 정직해야 하고, 기득권층은 자기희생을 각오해야 하며, 소외층은 자신의 탓도 할 줄 아는, 전국민적인 반성이 함께
따라주어야 한다는 것이, 덧붙이고 싶은 기자의 사견(私見)이다>
이「盧泰愚 전 대통령의 육성(肉聲)
회고록」은 역사적인 문건이다. 전직 대통령이 네 분 생존해 있으나 지금까지는 한번도 공식적인 인터뷰를 허용하지 않았고, 회고록도 나오지 않았다.
대통령과 국민의 共感과
共有 盧泰愚 전 대통령이 퇴임 후 최초의 인터뷰를 月刊朝鮮과 갖기로 했을 때는 4시간
정도의 시간을 내기로 했었다. 기자는 여기서 욕심이 생겼다. 盧 전 대통령의 이야기를 통상적인 인터뷰가 아니라 「역사를 위한 육성증언」으로
확대하여 하나의 사료(史料)가 될 만한 작업을 하자는 욕심이었다. 기자의 이런 의욕에 대해서 盧 전 대통령은 동의해주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盧 전 대통령은 1997년 12월 출옥(出獄)한 이후 측근들에게 『이제 우리가 할 일은 우리가 한 일들을 제대로 기록함으로써 후세 사람들이 더
잘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해주는 것이다』고 말한 뒤 곧바로 회고록 준비작업에 착수했다고 한다. 盧 전 대통령은 퇴임 후 직접 공책 수십 권에
기록해 둔 기억들을 기초로 하여 주요 정책과 사건별로 구술을 시작했고, 관계자들을 배석시켜 정확성을 기했다. 이 구술 정리 작업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이번 인터뷰에 임하면서 盧 전 대통령은 자신의 구술자료를 간추려서 증언에 이용했다.
「집중연재·盧泰愚 육성회고록」 제1회분은 이틀간 총 16시간에 걸친 인터뷰를 정리한 것이다. 한 시대의 주인공이었던 전직 대통령이 작심하고
자신이 통치한 시대를 설명하고 해설해가는 인터뷰는 우리나라에선 전례(前例)가 없는 일이다. 기자는 盧 전 대통령의 해설을 들으면서 저절로
대통령의 시각에서 국정(國政)을 바라보는 가상체험을 할 수 있었다. 그 체험은 기자에게 사물을 보는 새로운 시각을 제공해주었다. 「내가 대통령을
해봤으면 더 정확한 기사를 쓸 수 있었을 텐데…」라는 망상(妄想)도 해보았다.
기자는 盧 전 대통령의
육성증언을 놓고 「따지고 가리는」 일도 중요하지만 보다 중요한 것은 그의 증언을 충실하게 기록, 전달하는 것이란 판단을 하게 되었다. 일단 盧
전 대통령이 털어놓는 6共 비사(秘史)를 읽어본 다음에 평가하고 비판하는 것이 순리(順理)일 것이기 때문이다. 주장이나 견해에 대해서는 『내
생각은 다릅니다』라고 할 수 있지만 「사실」은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다. 1백 가지 주장보다 중요한 것은 한 가지 「사실」이듯 6공화국에 대한
평가가 급한 것이 아니라, 6共의 진실과 사실이 중요한 것이다.
따라서 기자는 盧泰愚 전 대통령의 역사적인
증언을 잘 편집하여 독자들이 읽기에 쉽도록 하는 일에 치중했다. 사실들이 제대로 정리만 되면 평가는 자연스럽게 따라올 것이며, 그런 평가는
어려운 일도 아니다. 어렵고 중요한 작업은 평가가 아니라 그 평가의 기초가 되는 事實과 史實의 축적인 것이다. 고급정보를 독점했던 대통령이 그
정보를 국민들과 공유하면서 한 시대의 혼란, 애환, 성패, 고뇌를 함께 느껴보는 일은 서로를 위해서, 무엇보다도 내일의 역사 창조를 위해서 의미
있는 시도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