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산 좋은 절] 운달산
김룡사 대자연의 서기로 가득한 피안의 길목 | ||||||||||||||||
여름 한철, 우리는 맹렬히 자유로웠습니다. 옷자락을 조금 풀어헤쳐도 크게 허물이 될 게 없었습니다. 설사 그것이 방종이라 할지라도 유쾌한
일탈이었습니다. 우리의 몸과 마음을 산수간(山水間)에 두었기 때문이겠지요.
하루하루의 삶을 벗어나 찾아야할 도는 없다는 선사들의 통찰은 비루한 일상 그대로를 보석으로 바꾸어 놓습니다. 선사들에게 깨침은 ‘세수하다 코 만지기’입니다. 구름을 타고 찾아야할 도 같은 건 없다는 말이겠지요. 어쩌면 선사들이야말로 일상성에 주목한 최초의 인류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해 봅니다. ‘잘 쉬는 것도 하나의 경쟁력’인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쉬는 일 자체가 일종의 스트레스가 될 소지도 다분해졌습니다. 이제 곧 매스컴에서는 바캉스 증후군 운운하면서 뻔한 소리를 심각한 표정으로 하는 데 천재적인 재능을 지닌 전문가라는 사람들을 동원하겠지요. 괜히 덩달아 심각해질 필요는 없습니다. 우리는 이미 처방전을 들고 있으니까요. 평상심시도(平常心是道)! 김룡사를 감싸고 흐르는 자연의 광휘, 금강소나무로 절정 운달산 김룡사를 찾았습니다. 귓속에 맴도는 파도소리나 주머니 속에 남은 모래알을 털어내는 데 산사의 침묵이 필요할 것 같아서였습니다. 아주
단순한 생각에서였습니다. 하지만 소득은 기대한 것의 몇 갑절이었습니다. 그것은 세 번의 놀람으로 다가왔습니다.
그 중 서남쪽으로 흘러내리는 계곡이 바로 운달계곡인데 현지에서는 냉골로 불립니다. 얼음처럼 서늘한 계곡이라는 말이겠지요. 태고부터 도끼 소리를 들어본 적이 없다는 원시림이 머금었다 흘려보내는 풍부한 물이 사철 계곡을 적시고 있습니다. 계곡은 흐르는 물 위로 또 한 겹 물결처럼 안개를 피워 올리고 있습니다. 주차장에서 차를 버리고 안개 위에 몸을 실어 올리면 울울창창한 전나무 숲길이 길잡이를 해줍니다. 이 땅에 아름다운 전나무 숲길이 한둘은 아니지만 이곳은 특별합니다. 계곡을 끼고 그 흐름을 따라 자연스럽게 휘어 돌기도 하고, 사이사이에 단풍나무와 층층나무 같은 활엽수들을 끼고 있어 진한 원시성을 느끼게 합니다.
홍하문 아래에 걸린 ‘雲達山金龍寺(운달산김룡사)’ 편액은 구한말의 독립운동가로 상해 임시정부의 요인이었던 동농(東農) 김가진(金嘉鎭)의 글씨라고 합니다(대한불교진흥원 편 <한국사찰의 주련과 편액> 하권 참조). 홍하문 오른쪽에는 민예품처럼 투박한 조각수법의 귀부가 눈길을 끄는 비석이 보이는데, 이는 절에 전답을 희사한 계성당(桂城堂)의 송덕비라고 합니다. 일주문 안의 비는 김룡사에서 출가한 근세의 걸출한 학승이자 초대 동국대 총장이었던 퇴경당 권상로 대종사의 사적비입니다.
다시 숲길을 걸어올라 오른쪽으로 살포시 돌아 오르면 김룡사의 전각들이 모습을 드러냅니다. 그러나 그보다 먼저 눈길을 붙잡는 것은 마치
금강역사인양 가람을 감싸고 있는 금강 소나무의 모습입니다. 김룡사를 감싸고 흐르는 자연의 광휘는 그것으로 절정을 이룹니다. 운달계곡과 전나무숲,
그리고 소나무는 김룡사의 살아있는 탱화입니다(참고로 수령 50~90년에 이르는 이 전나무들은 경북산림환경연구소에서 관리하는 채종림이이기도
하다). 조금 속물스럽긴 합니다만 두번째 놀람은 왜 이런 절이 전국적으로 널리 알려지지 않았을까 하는 것입니다. 일제강점기에는 전국 31본산의 하나로 50개 말사를 관장하던 큰 절이었습니다. 이런 절이 왜 한갓진 산속 절로만 치부되고 있는 것일까요. 상당히 주관적인 얘기일지 모겠지만, 근래의 과도한 문화재 집착이 이런 현상을 가져온 게 아닌가 합니다. ‘만약 무엇이든 마음에 걸어 두는 일 없다면, 늘 호시절일진저’ 언제부턴가 우리 사회에서 사찰의 격을 말할 때 국보급 문화재의 보유 유무를 그 척도로 삼곤 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절대 기준일 수는
없습니다. 결코 절은 박물관이 아닙니다. 당연히 불교 신자들에게는 제1의 의미가 신앙 공간일 테지만, 아닌 사람들에게는 ‘잘 쉴 수 있는’
곳이어야 합니다. 그것이야말로 ‘닦음’이 아닐까요. 문화(재) 학습장으로서 기능도 중요하지만, 그것은 후순위로 밀려도 좋을 것입니다. 자연
속에서 얻은 한가한 마음. 이보다 좋은 수신(修身)이 또 있을까요. 첨단 문명사회일수록 자연과 인간의 매개공간으로서 절의 소중함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입니다. 절이 자연의 품에 안김으로써 우리는 삶 깊숙한 곳에 자연을 담을 수 있습니다.
봉명루(종각)에서 감로당쪽으로 오르는 길가의 개미취 보랏빛 꽃은 지상으로 내려앉은 별빛인양 합니다. 그 빛을 밝고 오르면 대웅전 뒤쪽으로 금륜전(산신각.독성각)과 극락전, 응진전 앞에서 배롱나무(나무 백일홍)가 꽃불을 밝히고 있습니다. 우리 육신의 그림자는 그 꽃 그림자 속에서 피안(彼岸)에 이릅니다.
풍수가들의 말에 따르면 김룡사의 가람은 누운 소(臥牛)의 형국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 소의 눈에 해당하는 부분이 동쪽 계곡 너머 명부전이랍니다. 앞서 말한 스님들 모두 그곳에 머물렀다 합니다. 눈 밝은 스님들이어서 소의 눈을 찾은 것인지, 소의 눈이 스님들의 눈을 밝혔는지는 모르겠으되, 자연에 대한 눈뜸 없이 깨달음을 말할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김룡사의 초창은 588년(신라 진평왕 10)의 일입니다. 이후 조선 중기까지의 역사는 알 길이 없고, 1625년(조선 인조 3년)에 다시 지었다고 합니다. 운달 스님이 창건할 당시의 이름은 운봉사였다고 하는데, 냉골의 차가운 기운이 구름을 피워 올리는 정경을 떠올리기 어렵지 않습니다. 현재의 이름으로 바뀐 때는, 절에 전하는 괘불의 화기(畵記)에 1703년으로 기록된 것으로 보아 그 이후로 보입니다. 전설에 따르면 김씨 성을 가진 이가 냉골에 숨어 살며 신녀(神女)를 만나 용(龍)라는 아들을 낳고부터 가운이 성했다고 해서 동리 이름이 김룡으로 바뀌었고 절이름도 그리 됐다고 합니다.
남전 스님의 ‘평상시도(平常是道)’를 우리에게 전해 준 무문 스님은 그 때의 심회를 이렇게 노래합니다. 그 노래에 김룡사를 나서는 내 마음을 실어봅니다. ‘봄에는 온갖 꽃, 가을에는 달. 여름에는 시원한 바람, 겨울에는 눈. 만약 무엇이든 마음에 걸어 두는 일 없다면, 늘 호시절일진저(春有百花秋有月, 夏有.風冬有雪, 若無閑事?心頭, 便是人間好時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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