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 기적같은 한국 '70년 평화'…그건 4360명 목숨값이었다 [정전 70년 한미동맹 70년]
중앙일보 입력 2023.07.24 05:00 업데이트 2023.07.24 13:14
중서부 전선에서 제28보병사단(무적태풍) 이대순 중사(오른쪽)와 허규범 상병이 야간 경계를 서고 있다. 박영준 작가
1974년 11월 20일 경기도 연천군의 비무장지대(DMZ). 6ㆍ25전쟁이 멈춘 지 21년이 지난 이날 이 지역의 땅밑에서 한국군과 미군의 장교 2명이 전사했다. 닷새 전인 그달 15일 한국군 수색조가 이곳에서 수증기가 올라오는 걸 발견했다. 수색대원들이 조사를 시도하자 북한군이 총을 쏴 총격전까지 벌어졌다. 북한군이 군사분계선 아래로 몰래 파놓은 땅굴이었다.
매퀸 밸린저 중령. 미 해군
그달 20일 로버트 매퀸 밸린저 미 해군 중령과 김학철 해병대 소령 등이 한ㆍ미 병사를 이끌고 땅굴 조사에 나섰다. 땅굴은 자연적으로 만들어진 게 아니었다. 부비트랩까지 설치돼 있었다. 이게 터지면서 현장에서 김 소령과 밸린저 중령이 사망했다. 한국군과 주한미군 총 6명도 중상을 입었다. 이곳은 북한이 후방 침투를 위해 파내려온 뒤 콘크리트로 다져놓은 너비 90㎝, 높이 1.2m, 깊이 지하 45m, 길이 3.5㎞의 인공 구조물이었다.
1년 전인 1973년 한국에 배치돼 유엔군사령부 군사정전위원회에 근무했던 밸린저 중령. 그는 1964년 베트남전 당시엔 강을 수색하던 중 베트콩의 매복 공격을 받자 81㎜ 박격포를 직접 쏘면서 맹렬하게 반격했고, 부하들이 사기를 되찾으면서 베트콩을 격퇴했던 전쟁 영웅이었다. 이 전투로 그는 은성무공훈장을 받았다. 그는 한국의 DMZ에서 제1땅굴을 수색하다가 숨졌다. 함께 전사했던 김학철 소령(중령 추서)은 아내와 두 자녀를 남긴 채 현충원에 안장됐다.
6ㆍ25 전쟁의 포성은 1953년 7월 27일 멈췄다. ‘최후적인 평화적 해결이 달성될 때까지’ 전투를 그만하자는 정전협정을 통해서다. 그러나 정전협정 7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전쟁은 공식적으로, 사실상으로도 끝나지 않았다. 정전협정의 결과인 휴전선을 지키기 위해 53년 7월 27일부터 이날까지 한국군 4268명과 미군 92명 등 모두 4360명이 북한과의 저강도 전쟁ㆍ비정규전 등에서 전사했다. 전후 대한민국이 한강의 기적을 일구고 87년 개헌에 이어 이젠 K-팝 등으로 세계로 향하는 동안 4360명이 자신의 목숨을 희생해 평화와 번영을 뒷받침했다.
23일 국방부에 따르면 정전협정 이후 교전ㆍ대간첩 작전 등에서 전사한 장병이 4268명이다. 이중 육군 4128명, 해군 58명, 공군 16명, 해병대 66명이다. 또 한미동맹재단(회장 임호영 전 연합사부사령관)은 이날 정전협정 이후 모두 92명의 미군이 북한군의 적대행위로 목숨을 잃었다고 밝혔다. 특히 북한이 대남 혁명화 전략을 강화했던 1967~69년 사이에 피해(75명)가 집중됐다.
고 이익수 준장
육군의 이익수 준장은 1968년 1ㆍ21 사태 때 북한 무장공비 소탕작전에서 적의 총탄에 쓰러졌다. 그는 광복군으로 항일 무장투쟁을 벌였고, 6ㆍ25 때 화랑무공훈장(2번), 충무무공훈장, 미국 은성무공훈장을 받은 전쟁영웅이었다.
고 민평기 상사
고 서정우 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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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대 들어서도 전사자는 계속됐다. 2002년 제2연평해전(6명), 2010년 천안함 피격(46명), 연평도 포격전(2명)에서 북한군 공격으로 장병들이 전사했다. 2010년 11월 마지막 휴가를 앞두고 소셜미디어에 ‘내일 날씨 안 좋다던데 배 꼭 뜨길 기도한다’며 휴가를 고대했던 서정우 해병 병장(사후 하사로 추서). 그는 다음날인 11월 23일 북한군 포격이 시작되자 곧바로 휴가를 접고 급히 부대로 복귀하다 파편에 전사했다.
지난 6월 6일 윤석열 대통령이 국립서울현충원에서 대간첩 작전 전사자 묘역 방문해 참배객과 인사를 하고 있다. 현역 대통령으로선 첫 참배다. 대통령실
4360명에는 2010년 3월 26일 천안함 폭침으로 전사했던 해군 민평기 상사도 있다. 대학 재학 중 해군 부사관으로 입대한 아들을 안타까워하는 어머니 윤청자 여사에게 “군 생활 하면서도 얼마든지 공부할 수 있다”고 위로하던 효자였다. 민평기 상사의 희생은 부활한 해군 천안함에 ‘3ㆍ26 기관총’으로 각인됐다. 어머니 윤 여사가 유족 보상금과 성금을 기부해 마련됐다.
전쟁은 끝났지만 완전히 종료되지는 않았다. 70년이 지난 지금도 누군가 155마일의 휴전선을 지키고 있다. 박명림 연세대 교수(정치학)는 “휴전선은 남북의 분단선이자, 자본주의와 공산주의의 분할선이었다”며 “70년 동안 휴전선을 지켜온 건 한반도에서 제2의 6ㆍ25 전쟁을 막아내면서 동아시아의 안보를 확보했다는 것인 만큼 국제적으로도 큰 의미가 있다”고 평가했다.
이철재 기자 seajay@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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