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손진석 특파원
입력 2020.08.23 20:01 | 수정 2020.08.24 02:54
"남을 비판 잘하면서 남의 비판은 수용 안해
정권을 비판하는 의견을 개진하면
각종 법적 조치 벌여"
영국의 대표 시사주간지 이코노미스트가 문재인 정부의 내로남불 행태를 비판했다. 이코노미스트는 22일(현지 시각) ‘한국의 진보 통치자들이 내면의 권위주의를 발산한다’는 제목의 기사에서 “(남을 향한) 비판을 뿜어내던 사람들이 자신들을 향한 비판은 받아들이지 않으려 한다”고 지적했다.
이코노미스트는 “박근혜 전 대통령의 좌파 후임자로서 인권 변호사였던 문재인 대통령은 이전 정부보다 더 개방적이고 반대 의견에 관대한 정부를 만들겠다고 했다”며 “그러나 이런 좋은 의도가 시들어가고 있다”고 했다.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 21일 서울시 방역회의에 참석해 마스크를 쓰고 있다./연합뉴스
이코노미스트는 “정부에 반대하는 의견을 내면 무관심하거나 건설적인 반응을 이끌어내는 것이 아니라 정부측에서 소송을 건다”며 “박근혜 정부 시절보다 정부 고위 인사가 관련된 일에 대해 언론기관을 상대로 한 소송이 20% 가까이 증가했다”고 지적했다.
이코노미스트는 문재인 정부가 정권에 비판적인 의견을 낸 경우에 대해 법적 조치에 나선 사례들을 열거했다. 먼저 “청와대가 한 보수 신문에 실린 칼럼이 영부인의 명예를 훼손했다며 법정 다툼을 벌였다”고 했다. 지난해 중앙일보가 김정숙 여사의 잦은 해외 순방을 비판한 칼럼을 게재한 데 대해 청와대가 정정보도를 요구하며 소송을 제기한 일을 뜻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 사건은 지난달 1심에서 청와대가 패소했다.
문재인 정부의 내로남불 행태를 지적한 이코노미스트 기사의 온라인 제목. 인쇄본에는 '민감한 서울(Sensitive Seoul)'이라는 제목이 달렸다./이코노미스트
이코노미스트는 이어 “우파 유튜버가 조국 전 법무장관에 대한 소문을 퍼뜨렸다가 감옥에 갇혔다”고 했다. 월간조선 등에서 기자 생활을 했던 우종창씨에 대해 조 전 장관이 명예훼손 혐의로 소송을 걸어 지난달 우씨가 징역 8개월에 법정구속된 일을 가리킨다. 지난 19일 파리에 본부가 있는 국제 언론인단체인 ‘국경없는 기자회(RSF)’는 우씨의 석방을 요구했다. RSF는 “우씨가 취재원을 밝힐 것을 거부한 뒤 구속됐다”며 우려를 표시했다.
문재인 정부가 비판적인 의견에 법적 조치를 가하는 행태를 이코노미스트가 풍자한 일러스트./이코노미스트
이코노미스트는 또한 “민주당이 한 정치학 교수가 민주당이 자기 잇속만 차린다며 비판하는 칼럼을 쓰자 형사 고발했다”고 지적했다. 올해 초 경향신문에 민주당을 비판하는 칼럼을 기고한 임미리 고려대 연구 교수에 대해 민주당 고발했다가 비난이 쇄도하자 중간에 취하한 일을 말한다.
이코노미스트는 민주당이 비판을 막으려는 입법을 시도하는 점에 대해서도 우려하며 “한국은 입법부에도 문제가 있다”고 했다. 이코노미스트는 “이달초 민주당 의원들이 언론의 ‘가짜 뉴스’에 정부가 시정명령을 내릴 수 있게 하는 법안을 발의했다”고 했다. 정부에 비판적인 기사가 나오면 ‘가짜 뉴스’로 몰아붙여 억누를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또한 이코노미스트는 “1980년대 민주화 운동가들에 대해 ‘왜곡된’ 역사적 기록을 하면 처벌하는 법안을 고려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국경없는 기자회'가 우종창씨의 석방을 요구한 입장문 제목/국경없는 기자회
이코노미스트는 문재인 정권이 비판에 귀를 막으려는 행동을 이어가는 이유에 대해 “한국의 좌파는 군사 독재에 맞섰다는 정치적 정체성을 쌓았으며, 자신들을 반대하는 사람들의 표현의 자유는 우선 순위가 아니다”고 했다.
이코노미스트는 또한 “정부 안에 있는 좌파들은 약자라는 자신들의 자아상을 버리지 않았다”며 “특정 언론들을 (상대편) 정당의 무기로 여기면서 그들로부터 비판이 나오면 ‘피포위 의식(siege mentality)’을 가진다”고 했다. 피포위 의식이란 적에게 둘러싸여 있다는 강박 관념을 말한다.
이코노미스트는 “문재인 정부가 세종대왕의 말을 잘 생각해보라”고 권유하며 기사를 마무리했다. 기사에 소개된 세종대왕이 1425년 남겼다는 말은 다음과 같다. “나는 고결하지도 않고, 다스리는 데 능숙하지도 않소. 하늘의 뜻에 어긋나게 행동할 때도 분명히 있을 것이오. 그러니 내 결점을 열심히 찾아서 내가 질책에 응답하게 하시오.”
이코노미스트의 이번 기사는 ‘Banyan(반얀트리)’이라는 아시아 이슈에 대해 분석하는 고정 코너에 실렸다. 온라인상에는 필자 이름이 공개돼 있지 않다. 이코노미스트는 이 코너를 자사의 아 시아 전문 칼럼니스트 또는 특파원이 집필한다고 소개한다. 이 코너를 가장 주도적으로 집필하는 사람은 도미닉 지글러 기자로 알려져 있다. 지글러 기자는 이코노미스트의 중국특파원(1994~2000), 도쿄지국장(2005~2009)을 지냈다.
이코노미스트는 이 기사를 ‘민감한 서울(Sensitive Seoul)’이라는 제목으로 인쇄본으로도 펴냈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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