鶴山의 草幕舍廊房

아시아 중동圈

잃어버린 세계-지금은 갈 수 없는 시리아 紀行

鶴山 徐 仁 2016. 2. 25. 20:42

조갑제닷컴



잃어버린 세계-지금은 갈 수 없는 시리아 紀行

도살장이 되어버린 다마스쿠스, 알레포, 팔미라, 홈스, 하마, 크락 드 슈발리에 등의 추억

趙甲濟   




레바논 바알베크 유적

아파미아의 중앙大路는 약 2km. 왼쪽 石柱 뒤는 상점가였고, 그 뒤에는 목욕탕·극장 등이 있었다.


지난 3월23일 기자는 尙美會 여행단과 함께 시리아 다마스쿠스 공항에 내렸다. 한국과 아직 수교하지 않은 시리아이지만 입국 비자를 얻는 데는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에미레이트 항공편으로 인천공항에서 두바이까지는 약 9시간30분이 걸린다. 中東(중동)의 허브공항인 두바이에서 비행기를 타고 아라비아 반도 위를 북상해 다마스쿠스에 도착하는 데 두 시간 반. 우리는 곧장 버스편으로 한 시간을 달려 시리아-레바논 국경을 넘었다.

국경에서 출입국 수속을 밟는 데 한 시간.

작년의 이스라엘-헤즈볼라 전투 때 폭격을 맞아 구멍이 생긴 도로를 달려 바알베크 유적에 도착했다. 세계문화유산이기도 한 이곳엔 서기 1세기부터 약 200년에 걸쳐 지은 로마 시절의 神殿(신전) 건물이 있었다. 지금은 거대한 石柱(석주)와 건물의 잔해로 남아 있다.

이 신전의 배경이 되는 레바논 산맥은 눈으로 덮여 있었다. 中東이라면 자동적으로 사막을 연상하기 때문에 「눈 덮인 산」이 이상하게 여겨지기도 한다. 레바논과 요르단은 고지대이므로 겨울에 눈이 내린다. 바알베크 유적은 우선 그 규모가 엄청나다. 로마의 본거지인 이탈리아에서도 찾아보기 힘들 정도의 크기이다.

바알베크 유적은 레바논의 옥토인 베카 분지에 있다. 이 지역에는 해양무역에 능했던 페니키아人이 살면서 바알神을 섬겼다.

서기전 47년에 시저는 이곳을 로마의 식민지로 만들었다. 기원전 60년부터 시작된 주피터 神殿 공사엔 10만 명의 노예들이 동원되었다. 네로 황제 시절인 기원후 60년경에 거의 완성되었으나 안토니우스 피우스 황제(在位 서기 138~161년) 시절에 확장되었다.

로마는 식민지에서 건물을 지을 때 점령지역 주민들에게 로마의 위력을 과시하여 통치를 쉽게 하려는 의도가 있어 규모에 신경을 썼었다. 여기 쓰인 석재중엔 돌 하나가 1000t(20×4.3m)이나 되는 것도 있다. 이런 돌을 어떻게 옮겨왔는지 수수께끼이다.

로마가 기독교를 공인한 후 이 지역에서는 바알神 숭배가 계속되었다. 로마 황제는 이 건물들을 성당으로 개조하기도 했다.

東로마제국의 전성기를 연 유스티니아누스 황제(在位 서기 527~565년)는 이 지역의 주민들이 기독교 세례를 받도록 강제했다. 다시는 다른 神을 섬기지 못하게 한다면서 神殿을 일부 파괴하고 가장 큰 기둥들은 콘스탄티노플(이스탄불)로 싣고 가서 짓고 있던 聖소피아 성당에 쓰도록 했다.

이곳의 중심인 주피터 神殿엔 원래 54개의 기둥이 있었다. 여러 번의 지진으로 무너지고 지금 남은 것은 6개뿐이다. 이 기둥의 높이는 30m이고, 지름이 2.2m로서 고대 세계에서 가장 크다. 1898년 이곳을 방문한 독일의 윌리엄 카이저 2세는 오스만 튀르크의 술탄으로부터 발굴허가를 얻어 7년간 작업했다. 제1차 세계대전으로 독일이 패망한 뒤로는 프랑스 고고학자들이 발굴했다.

「크락 드 슈발리에」 城 안에서 만난 시리아 학생들. 시리아 여인들은 미인으로 유명하다.


제노비아 여왕이 건설한 오아시스 제국「팔미라」의 유적.


시리아 개황: 복잡하고 다양

시리아는 복잡하고 다양한 나라이다. 단일민족·단일언어의 한국인들은 시리아에서 배울 점이 많을 것이다. 다양성에 대한 존중과 관용은 민주주의의 기초이니까. 권위주의 정부下의 시리아가 활기 차고 자유분방하게 보이는 것은 역사적 배경에서 유래한 인종적·종교적 다양성이 유지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시리아는 우선 5개국과 국경을 맞대고 있다. 이스라엘, 레바논, 요르단, 터키, 이라크. 공식언어는 아랍語이지만 아람語, 쿠르드語, 아르메니아語, 시르카시안語, 그리고 프랑스語가 쓰이고 있다.

인종구성도 복잡하다. 아랍人이 90%이지만 쿠르드族, 아르메니안 등 他민족이 약 10%이다. 종교도 마찬가지이다. 수니派 이슬람 신도가 74%, 시아派·알라위派·두르제派 등이 15%, 기독교인이 10%, 유태교인도 있다.

시리아의 면적은 한반도보다 약간 작은 18만5180km2이다. 국토의 약 25%는 경작이 가능하다. 인구는 북한보다 약간 적은 1888만 명. 여기엔 이라크 난민 60만 명, 팔레스타인 난민 30만 명이 포함된다. 평균수명은 남자가 69세, 여자는 71.7세이다. 문맹률은 23%.

구매력 기준으로 1인당 국민소득은 약 4000달러이다. 연간 2.9% 경제성장률을 보이지만 실업률이 12.5%이다. 시리아를 여행해 보니 할 일 없이 오가는 사람들이 너무 많았다. 외환보유고는 55억 달러. 최근 外貨(외화)를 유로貨로 바꾸고 있다. 시리아에서는 하루 40만 배럴의 기름이 나온다. 23만 배럴을 국내에서 소비하고 나머지는 수출한다. 시리아의 기름 소비량은 한국의 약 10분의 1이다.

GDP의 분포를 보면 농업과 석유가 거의 절반이다. 노동인구의 분포는 농업 26%, 공업 14%, 서비스업 60%이다. 70억 달러어치를 수출하고 66억 달러어치를 수입한다. 군사비 지출은 국민소득의 약 6%이고 복무기한은 30개월이다. 인터넷 사용자는 110만 명, 휴대전화기가 약 313만 대이다.

시리아에서 가장 높은 헤르몬山은 2814m이다. 겨울에는 다마스쿠스에서 눈발이 날릴 때도 있다. 인구는 거의 지중해 연안에 몰려 산다.

8000년 역사가 그려낸 드라마를 지켜본 알레포 성채.


레바논 바알베크 유적의 중심인 주피터 神殿엔 원래 54개의 기둥이 있었다. 여러 번의 지진으로 무너지고 지금 남은 것은 6개뿐이다.


1만 년간 33개 문명을 만든 요람

약 1만 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시리아는 이곳을 지나간 수많은 민족과 문화의 요람이었다. 사막 한가운데 있는 古都 파밀리아에서 산 「시리아의 문명」이란 책의 첫 문장이 나를 압도했다.

「시리아는 33개 문명의 산파이다」

시리아 유적의 특징은 크다는 점이다. 시리아와 레바논을 포함한 터키 남부-이라크-이스라엘-나일강 유역을 「비옥한 초생달 지역」이라 부른다. 가장 먼저 무역과 농업이 발달했던 이 지중해 연안은 인류 문명의 초창기부터 富와 기술과 문화를 쌓아 왔다. 거대한 건조물을 만들어 낼 수 있는 정신적·물질적 바탕이 있었다는 이야기이다.

尙美會(02-734-1245) 여행단을 안내한 여성 가이드 라미스氏는 『로마에 가보고 놀랐다. 우리 시리아의 로마시대 유적보다 초라했기 때문이다』고 말했다. 한 일주일 시리아를 여행하고 나니 이 말이 헛된 자랑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우리는 약 8000년간 인간이 계속 거주했다고 하여 세계에서 가장 오랜 도시로 꼽히는 다마스쿠스를 떠나 버스편으로 北上을 시작했다. 전형적인 시리아 풍경이 나타났다. 시멘트색 不毛(불모)의 산과 나란히 돌밭과 관목이 번갈아 나타나는 황량한 들판이 이어지는가 하면, 어느 새 비옥한 푸른색 평야가 전개되고 순해 보이는 야산들이 나온다.

수평적·수직적으로 변화가 빠른 것이 레반트(Levant: 시리아·레바논·이스라엘·요르단 지역을 이르는 유럽의 용어) 지역의 특징이다. 역사만큼이나 地理(지리) 변화가 급하다. 들판에 나서니 바람이 세게 불었다. 달리는 버스가 흔들리고 소나무들이 아예 옆으로 70도쯤 기울어져 자라고 있었다.

팔미라에 있는 로마시대의 水道橋.


금진호 前 상공부 장관과 함께
크락 드 슈발리에 성벽 앞에서.


요한 기사단

오늘의 목표는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城(성)을 방문하는 것이다. 「크락 드 슈발리에」와 「살라딘」의 城. 크락 드 슈발리에는 프랑스語로 「騎士(기사)의 城」이란 뜻이다. 십자군 전쟁 때 탄생한 聖요한 騎士團(기사단)이 만들고 지켜 냈던 中世의 城인데, 보존상태가 거의 완벽하다. 1272년 제9차 십자군 지휘자 영국의 에드워드 1세는 이 城을 보고는 감탄하여 이를 모델로 잉글랜드와 웨일스 지방에 城을 만들었다.

전설적인 영국의 정보장교 「아라비아의 로렌스」 대령은 이 城을 보고는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城」이라고 평했다. 19세기의 유명한 스위스 탐험가 요한 루드빅 부르크왈트는 『내가 본 중세 건물 중 최고 걸작이다』라고 했다. 크락 드 슈발리에와 살라딘 城이 세트로 묶여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있다. 크락 드 슈발리에는 슐츠라는 여행가가 쓴 「죽기 전에 보아야 할 1000 곳」에 올라 있다.

이 城은 터키의 남부 도시 안티오크에서 베이루트와 지중해로 나가는 통로를 감제할 수 있는 650m 산꼭대기에 만들어졌다. 멀리서 바라보면 거대한 전함 같다. 버스는 산비탈을 따라 생긴 오랜 마을 사이를 지나는 좁은 도로를 따라 올라가 성문 앞에 섰다.

주위의 평야·호수가 한눈에 들어온다. 전략적 요충지인 크락 드 슈발리에 주변에서는 기원전 3000년경부터 수많은 전투가 이어져 왔다. 바로 이곳에 처음 城을 쌓은 이는 이슬람 지배下 알레포(다마스쿠스에 이은 시리아 제2의 도시)의 領主(영주)로서 1031년이었다.

1099년 제1차 십자군을 이끈 프랑스 툴루즈 영주 레이몽 4세가 이 城을 점령했다. 1144년에 城의 관리는 聖요한 기사단으로 넘어갔다. 요한 기사단은 템플 기사단, 투톤 기사단과 함께 중세 유럽의 역사에서 뺄 수 없는 존재이다. 요한 기사단은 기독교 성직자들이 모여서 예루살렘 지역의 구급의료단으로 출발했다가 기사단으로 바뀐 경우이다. 동양의 僧兵(승병)과 비슷한 조직이다. 騎士 겸 神父라고 할까?

기독교 신념으로 무장한 騎士집단이므로 전투력이 막강했다.

요한 기사단은 나중에 이곳에서 밀려나자 지중해 로도스 섬으로 옮겨가 주인이 되었다. 16세기 초 오스만 튀르크의 전성기를 연 슐레이만 大帝의 20만 군대가 이 섬을 강습했다. 요한 기사단은 불과 8000명의 병력으로 당시 세계 최강의 군대와 맞서 거의 대등하게 싸웠다.

요한 기사단의 영웅적 싸움은 슐레이만 大帝를 감동시켰다. 그들은 결국 명예로운 撤軍(철군)에 합의해 지중해의 또 다른 섬 몰타로 옮겨 갔다. 요한 기사단은 40여 년 뒤 다시 이곳을 쳐들어온 오스만 튀르크의 10만 大軍을 물리쳤다. 복수전에서 요한 기사단은 거의 100대 1의 衆寡不敵(중과부적) 상태에서 싸워 이긴 것이다.

나는 여행을 떠나기 전부터 요한 기사단을 다룬 「로도스 섬 공방記」(시오노 나나미) 같은 책을 읽으면서 도대체 어떤 집단이기에 이렇게까지 처절하게 싸울 수 있었는지 궁금했다. 로도스와 몰타에서 보여 준 그들의 축성 기술이 승리의 요인이었는데, 그 기술이 꽃핀 곳이 바로 이 城이었다.

요한 기사단은 18세기 말 몰타를 나폴레옹 군대에 넘겨주고 로마로 옮겼다. 그들은 「몰타 기사단」이란 이름으로 지금까지 활동하고 있다. 유엔에 옵서버로 가입해 70여 개국과 國交를 맺고 있다. 영토는 없지만 準국가 대접을 받는다. 이는 유럽 나라들이 요한 기사단의 역사적 역할을 인정한 덕분이다. 요사이는 본연의 의료봉사 활동에 종사하고 있다. 예루살렘에서 요즘의 앰뷸런스 제도를 처음 만든 것이 요한 기사단이고, 우리 눈에 익은 앰뷸런스의 로고와 복장이 바로 요한 기사단의 그것이다.

다마스쿠스 大모스크.


맘루크에 함락되다

알레포 성채를 수백 년간 점거하고 관리했던 이집트 맘루크 왕조의 紋章. 맘루크는 튀르크 용병집단인데, 모시던 왕을 몰아내고 왕조를 세워 中東지역을 통치했다.

크락 드 슈발리에城을 인수한 요한 기사단은 이 城을 보수, 확장해 예루살렘 부근에서 가장 큰 城으로 만들었다. 城의 외벽을 새로 쌓았는데 두께가 3m였다. 성벽을 따라 일곱 개의 탑을 올렸다. 그 두께는 10m이다. 보통 때 이 城에서는 50~60명의 요한 기사단 소속 기사들이 약 2000명의 보병을 지휘했다.

돌산 같은 성 안으로 들어가 보면 층층이, 겹겹이 쌓인 요새 속에서 하나의 소도시가 전개된다. 마구간(2000마리 수용), 우물, 해자, 교회, 회의실, 식당, 곡식 창고(길이가 120m나 된다), 비밀통로, 빵 굽는 곳, 그리고 맨 꼭대기에 사령관실이 있다. 사령관 자리에 앉아 벽 틈으로 아래를 내려다보니 이 城을 둘러싼 수많은 공방전의 함성과 비명, 砲聲(포성)과 화살 날아가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이슬람의 영웅 살라딘도 이 城을 점령하지 못했다. 1188년 그는 사로잡은 프랑스 領主(영주)를 문 앞으로 끌고 와서 항복을 권유하도록 했다. 이 領主는 아랍 말로 『항복하라』고 소리치고 프랑스 말로는 『항전하라』고 외쳤다고 한다.

이 城이 이슬람 군대에 넘어간 것은 1271년 4월8일이었다. 이집트 맘루크(튀르크 계통의 傭兵인데 나중에 이집트의 정권을 빼앗고 왕조를 만들었다) 王朝의 창시자 바이바르 왕이 이끄는 군대가 요한 기사단을 속인 것이다. 트리폴리(리비아에 있는 도시가 아님)의 십자군 領主가 기사단에게 항복을 권유하는 편지를 쓴 것처럼 위조해 이를 城 안으로 들여보냈다고 한다.

크락 드 슈발리에城을 함락시킨 바이바르는 이집트와 近東(근동)을 400년 가까이 지배한 맘루크 王朝의 창시자이다. 그는 지금 러시아 남부의 초원지대에 살던 騎馬용사였다. 몽골군이 그를 잡아 노예로 팔았다. 그를 산 시리아 하마의 이슬람 領主는 바이바르의 용모에 겁이 나서 맘루크 용병단에 다시 팔아넘겼다. 바이바르는 장신이고 금발이었으며, 눈에 흰 점이 있었다고 한다. 그는 당시 이집트 일대를 지배하던 이슬람의 아유브 왕의 호위병이 되었다.

맘루크軍의 사령관으로 승진한 바이바르는 1250년에 프랑스의 루이 4세가 이끈 제7차 십자군을 무찔렀다. 바이바르가 지휘한 맘루크 군대는 1260년 지금의 이스라엘 아인 자루트에서 세계사적인 의미가 있는 결전을 벌여 승리했다. 칭기즈칸의 후예들이 보낸 無敵(무적)의 몽골 기마군단을 전멸시킴으로써 中東의 이슬람 문명권을 지켜낸 것이다.


살라딘 城砦

살라딘 성채의 성벽과 언덕 사이 계곡을 잘라서 격리시킨 자리에는 오벨리스크 같은 기둥이 남았다. 십자군은 꼭대기에 다리를 걸쳐 놓고 침입군이 들어올 때는 이를 들어올려 접근을 막았다.

이 전투 직후 그는 이집트 왕 쿠투즈를 죽이고 스스로 왕이 되어 맘루크 왕조를 열었다. 쿠투즈가 자신의 절친한 친구 악타이를 죽인 데 대한 의리의 복수였다는 說이 있다. 그의 여생은 십자군과의 전쟁으로 소모되었다. 그때 십자군은 몽골군과 연합해 맘루크에 대항하려고 했다. 바이바르는 이 시도를 무산시켰다. 그는 지금의 리비아 등 北아프리카를 원정하고, 수많은 건물을 지었고, 역참제를 발전시켜 다마스쿠스에서 카이로까지 4일 만에 우편배달이 이뤄지도록 했다. 행정과 건설의 達人(달인)이었던 그는 회고록까지 남겼다. 역사상 드문 매력적인 인물이다. 물론 기독교 세계에서는 聖地(성지)를 파괴한 惡人(악인)으로 여겨졌다.

13세기 몽골 군대의 침략을 저지한 나라는 일본, 베트남, 그리고 바이바르의 맘루크뿐이다. 이 세 군대의 공통점은 몽골-튀르크 계통이란 점이다. 몽골군은 몽골계통에는 약했다. 서로 약점과 장점을 잘 알았기 때문인가, 아니면 우연의 일치일까?

시리아의 항구도시 라타키아에서 내륙으로 45km 들어간 절벽 위에 살라딘의 성채로 불리는 성터가 있다. 해발 400m 산 위에 있는 이 城으로 가려면 마이크로 버스에 갈아타고 벼랑길을 달려야 한다. 우리 여행단이 탄 작은 버스가 워낙 낡아 과연 브레이크가 들을까 걱정하는 사이 城門 앞에 도착했다.

城은 양쪽이 절벽인데 한쪽 절벽은 계곡을 더 깊게 파서 건너편 언덕과 절단해 버리고 그 위에 영도다리 같은 다리를 걸어 놓아 언제든지 다리를 들어올리면 접근로를 끊을 수 있게 했다.

이 성터는 길이 700m, 너비 120m의 대규모이다. 3000년 전 페니키아人들의 城으로부터 출발했다. 10세기경 이 城은 비잔틴 군대의 차지였다. 12세기 城은 십자군 손에 넘어갔다. 비잔틴과 십자군이 만든 城이지만 이슬람이 점령한 뒤 손질을 했다. 여러 군대의 축성기술이 다 전시되어 있다.

이 城은 견고하게 보이지만 이틀 만에 떨어졌다. 쿠르드族 출신의 이슬람 영웅 살라딘이 돌 투척기로 맹공을 하니 성벽이 무너진 것이다. 이때 쏜 돌포탄이 보존되어 있다. 한 개가 300kg이 넘는다.


敗者에 대한 관용

13세기에 십자군을 무찌른 이슬람의 영웅 살라딘의 동상.

서양의 城과 일본의 城은 구조가 비슷하다. 문을 여러 겹으로 만들고 통로를 직각으로 두어 침입군이 들어왔을 때 매복과 기습을 쉽게 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사령관실 옆엔 비밀통로를 두어 탈출할 수 있게 한다. 일본과 서양이 축성 기술을 교환한 것이 아니라 전투에서 이겨야겠다는 일념으로 궁리하니 공통된 설계가 나타난 것이다. 일본과 서양은 기사와 무사 계급이 집권을 오래했으므로 군사문화가 국가의 분위기를 주도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살라딘 성채에는 여러 곳에 우물이 있었고, 저수창고도 있었다. 5000t의 물을 저장할 수 있는 깊이 6m짜리 지하 저수지는 지금도 축축하다. 이 城을 점령했던 살라딘은 아유브 왕조를 만든 사람인데 아주 너그러웠다고 한다. 敗者(패자)가 된 십자군에 대해서 관용을 베풀고 약속은 반드시 지켰다는 것이다. 오스만 튀르크의 전성시대를 연 슐레이만 大帝도 그런 사람이었다.

살라딘과 많이 싸웠던 영국의 사자왕 리처드는 수천 명의 이슬람 군대 포로를 학살한 적이 있다. 이 사자왕 리처드가 병을 앓자 살라딘이 의사와 의약품을 보내 주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수천년의 역사를 간직한 성터를 한가롭게 걸어다니니 萬感(만감)이 교차했다. 얼마나 많은 군인들이 여기서 죽어 나갔을까? 中東은 왜 전쟁·암살·자살·내전·쿠데타가 많은가? 이런저런 생각을 하면서 피·땀·눈물이 서린 돌덩어리 사이를 헤매고 다니니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아파미아의 중앙大路

시리아의 경치는 다양하다. 사막, 비옥한 평원, 돌밭, 회색의 야산, 눈 덮인 高山, 지중해, 그리고 호수들. 尙美會 여행단은 지중해변 항구도시 라타키아에서 하루를 묵고 다시 北進하면서 평야지대로 들어갔다. 두 산맥 사이로 비옥한 녹색의 카펫이 펼쳐졌다. 오론테스江의 유역이기도 한 이 알가이브 평원은 한때 코끼리가 살았다고 한다. 이집트왕이 코끼리를 잡기 위해서 이곳으로 원정을 온 적이 있다. 로마와 싸워서 패배한 뒤 카르타고의 한니발 장군은 이곳으로 망명을 와서 시리아 사람들에게 코끼리를 전투에 사용하는 방법을 가르쳐 주었다고 한다. 放牧場(방목장)으로 안성맞춤인 이곳에 「아파미아」라는 거대한 유적이 있다.

아파미아는, 알렉산더 대왕의 부하로서 대왕의 死後 이 지역을 통치했던 셀레우쿠스의 페르시아 부인 이름이다. 셀레우쿠스는 유능한 행정가이고 외교관이었다. 시리아에는 그가 건설한 고대도시가 많다. 아파미아는 그중의 하나이다.

셀레우쿠스는 지금의 터키 안티오크를 수도로 하여 시리아 일대, 소아시아, 페르시아, 그리고 인도의 일부를 통치했다. 그는 아버지의 이름을 따서 「안티오크」라 이름 지은 것을 비롯하여, 어머니 이름을 따서 「라타키아」라고 붙이기도 했다. 그의 아내 아파미아는 알렉산더 대왕이 페르시아 王女인 록사나와 결혼한 관례를 따라서 얻은 여자였다. 알렉산더 대왕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조언을 받아들여 외국여자와 결혼할 것을 부하들에게 권했다.

교통의 요충지인데다가 생산성이 높은 분지에 있던 아파미아에는 5000년 전부터 사람이 살았다. 아파미아의 황금기는 로마시대였다. 기원전 64년에 이 도시는 로마의 폼페이우스 장군에게 점령당하고 셀레우쿠스 왕국은 망했다. 서기 2세기에 이 도시는 큰 지진으로 인해 많이 부서졌다. 로마의 식민지였던 아파미아는 이 지진 뒤 재건되었다. 우리가 볼 수 있는 유적은 주로 이 재건된 부분이다.

전성기에 아파미아의 인구는 약 50만 명이었다고 한다. 당시 세계 유수의 도시였다. 이 규모를 짐작하게 해주는 것이 石柱(석주)가 전봇대처럼 나란히 서 있는 중심 大路(대로)이다. 로마 도시엔 항상 이 남북 방향의 중앙大路가 있다. 「직선도로」라는 뜻의 「카르도」라고 불리는데, 너비가 약 30m나 된다. 돌이 깔린 이 도로의 한쪽은 상점가였다. 남북 방향의 중앙도로를 십자가 식으로 가로지르는 동서 방향의 大路는 좀 짧다.

발굴된 이 아파미아의 카르도는 길이가 약 2km이다. 石柱를 따라 걷다 보면 기원전 2세기, 즉 로마의 전성기로 돌아간 듯하다. 주변의 풍요로운 녹색 평원, 그 멀리 병풍 같은 산맥들이 유장하게 넘실댄다. 「과연 50만 명을 수용할 수 있었겠구나」 하는 감이 온다.

시저가 죽은 뒤 클레오파트라의 애인이 된 안토니우스는 아르메니아 원정을 마친 뒤 이집트로 돌아가는 길에 클레오파트라와 함께 이 도시를 방문했다고 한다. 50년 전만 해도 아파미아는 언덕뿐이었다. 1930년대 이후 벨기에 발굴팀이 이곳을 파헤쳐 누워 있는 기둥을 올려 세우는 등 복원작업을 벌이고 있다. 발굴된 부분은 50만 도시의 일부이다.


기독교 인구가 많은 알레포

서기 2세기에 황금기를 보낸 아파미아는 그 뒤 비잔틴제국 치하로 들어갔다가 6, 7세기엔 페르시아의 침략을 받았고, 7세기 말 시리아가 이슬람화하면서 쇠퇴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이 도시의 건축물은 그리스와 로마식이 大宗(대종)을 이룬다. 카르도를 따라 세워진 600개의 기둥은 거대 서양 건축양식을 다양하게 대변하고 있다. 건축박물관인 셈이다.

지금도 그렇지만 고대 시리아는 「지중해와 동양(페르시아·인도·중앙아시아·중국)」 즉 東과 西, 「이집트-아라비아와 그리스 터키」 즉 南과 北의 십자로 상에 있었다. 이 십자로를 따라 민족과 문화가 오고 가면서 충돌, 융합했다. 그리하여 시리아를 요람으로 하여 33개 문명이 꽃을 피웠다. 문명은 피었지만 사람들은 죽어 나갔다. 수많은 전쟁·정복·반란·흥망이 연출된 무대였다.

시리아의 남북 2대 도시는 남쪽의 다마스쿠스와 북쪽의 알레포이다. 거리는 서울-부산과 비슷한 350km이다. 두 도시는 「중단 없이 거주한 세계에서 가장 오랜 도시」라는 타이틀을 놓고 경쟁하는 관계이다. 대략 8000년의 역사이다. 다마스쿠스를 출발하여 북상한, 尙美會 여행단을 태운 버스는 이틀 만에 드디어 알레포로 들어갔다.

인구 약 300만 명인 이 도시는 3800년 전 기록에 이미 동서, 남북 무역으로 번성한 상업도시였다. 알레포는 기독교 인구가 약 30%나 된다. 20세기 초 터키에서 추방된 아르메니아 등 기독교도들이 이 도시로 피란 왔기 때문이다. 소련 제국이 붕괴된 이후엔 러시아와 중앙아시아 쪽으로부터 상인들이 옛날처럼 이 도시를 오고 가면서 장사를 하고 있다.

시리아와 신라는 유라시아 대륙의 東과 西의 極端(극단)이었다. 東의 신라에서 출발한 실크로드와 스텝 루트의 한 줄기가 지중해의 東岸(동안)인 시리아에서 끝난다. 이 무역로를 따라 신라와 시리아 사이에 물건과 사람이 오고 갔음을 실증하는 것이 경주 皇南大塚(황남대총·98호분)의 南墳(남분)에서 출토된 11점의 로만 글라스, 즉 유리잔들이다.

일본의 유명한 유리공예가 요시미즈 쓰네오(由水常雄)는 이 로만 글라스를 분석하고는 로마제국이 東西로 분열한 395년부터 西로마제국이 게르만족에 의해 멸망하는 476년 사이에 시리아에서 만들어진 것이라고 결론지었다.


주인이 수십 번 바뀐 알레포

이 사이 시리아는 東로마제국(나중에 「비잔틴제국」이라 불린다) 治下에 있었다. 요시미즈씨는 신라와 로마 사이에 초원의 길을 따라서 문화와 인간의 교류가 있었다고 주장했다. 시리아産 로만 글라스는 그 교류의 한 가지 물증일 뿐이다. 경주 계림로에서 출토한 黃金寶劍(황금보검)은 로마 영내이던 지금의 불가리아(당시는 트라키아)에서 만들어진 것이라고 한다. 요시미즈씨는 「로마文化王國新羅」라는 책을 썼다.

東로마 치하 시리아의 유리잔이 신라에 오게 된 경로는 시리아-黑海北岸-몽골 초원-중국 북부-경주였다. 신라 출신인 한국인들이 비행기편으로 대강 그 초원의 길 위를 날아와 지금 알레포로 들어가고 있는 셈이다.

알레포에 대한 역사 기록은 3000년 훨씬 이전으로 거슬러 오른다. 바빌론의 함무라비 왕과 알레포 왕이 협정을 맺어 20여 개의 작은 왕국을 관할했다는 기록이 있다. 알레포는 아모르族의 왕국 얌카드의 수도였다.

예수 탄생 전 19세기 지금의 터키 지방에서 번성한 히타이族이 남하해 알레포를 점령한다. 남쪽으로부터 이집트의 침략이 있었다. 서기전 1200년 전엔 해양 민족의 공격을 받았고, 아람왕국의 지배下에 들어갔다가 서기 전 854년부터는 아시리아 치하가 되었다. 그 뒤 알레포는 아람族, 아시리아, 칼데아族, 다시 아람族, 페르시아의 지배를 받다가 서기 333년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더 대왕이 이끄는 군대에 점령됨으로써 그리스-로마문화권으로 들어간다.

알렉산더 대왕이 죽은 뒤 알레포를 포함한 시리아와 터키, 페르시아 일대는 후계자의 한 명인 셀레우쿠스 장군이 다스리게 되었다. 셀레우쿠스 제국의 수도는 지금의 터키 도시 안티오크였다. 시리아는 셀레우쿠스와 이집트를 인수한 알렉산더 대왕의 부하 프톨레미 제국 사이 쟁탈전의 무대가 되었다. 로마가 기원전 1세기에 시리아를 점령하고 기원후 4세기부터는 東로마제국 치하로 넘어가면서 시리아는 기독교 문명을 흡수한다.


알레포城

시리아 남쪽 아라비아 반도에서 일어난 이슬람 세력은 가장 먼저 다마스쿠스와 알레포를 비롯한 시리아를 정복한다. 서기 636년의 일이었다. 다마스쿠스를 수도로 한 움마야드 왕조가 동서양에 걸친 이슬람 대제국으로 팽창하게 된다. 90년 뒤 압바시드 왕조가 움마야드 왕조를 무너뜨리고 수도를 바그다드로 옮겼다.

10세기에 일시적으로 알레포는 비잔틴 제국 군대의 공격을 받아 점령되었었 다. 이 무렵 大지진이 알레포를 파괴했다. 1124년 십자군이 알레포를 포위했으나 점령하지는 못했다. 알레포는 살라딘이 창건한, 이집트에 본부를 둔 아유브 왕조의 치하로 들어갔다.

13세기 초 몽골에서 일어난 칭기즈칸이란 대폭풍은 1260년 알레포를 덮친다. 이집트에서 달려온 맘루크(튀르크 노예용병) 기병은 몽골 기마군단을 이스라엘의 아인 잘루트에서 격파하고 알레포를 수복했다. 아유브 왕조는 맘루크 왕조로 교체되고, 1516년 오스만 튀르크에 망할 때까지 약 260년간 알레포 등 시리아를 통치했다. 그 사이 알레포는 또 한 번 몽골기마 군단의 말발굽에 짓밟힌다.

1400년 티무르의 기마군단이 알레포를 3일 만에 점령하고 주민들을 학살했다. 그들은 기술자들만 골라 그들의 수도 사마라칸트(지금의 우즈베키스탄 소재)로 끌고 갔다. 티무르는 칭기즈칸의 후예를 자칭했다. 그의 치하에 티무르 제국은 중앙아시아, 이란, 인도 북부, 지금의 터키, 시리아 일대를 점령하거나 공격했다. 中世 역사상 가장 큰 파괴와 학살을 자행했다.

동서남북 문명의 십자로에 있었던 알레포는 이런 전쟁과 지진 속에서도 불사조처럼 일어났다. 「무역」의 힘이었다. 돈의 유혹이었다. 15세기엔 베니스 상인들이 이곳으로 몰려왔다. 1919년 알레포는 오스만 튀르크로부터 해방되자마자 곧 프랑스의 위임통치를 받기 시작했다. 오스만 시절 알레포엔 영국·프랑스·네덜란드·베네치아가 영사관을 따로 둘 정도로 中東의 가장 중요한 무역중심지였다.

이상의 드라마를 지켜본 것이 알레포 중심부 언덕 위에 세워진 알레포城이었다. 알레포는 다마스쿠스 및 보스라와 함께 도시 전체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이다. 도시의 역사만큼 긴 것이 이 城이다. 636년 아랍군대가 계교를 써서 이 城을 비잔틴 군대로부터 탈취한 이후 본격적인 이슬람 성채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이 城은 33m 높이의 원추형 언덕 위에 건설되었기 때문에 더 높아 보인다. 너비 32m, 깊이 22m의 해자가 파여 있다. 해자 바닥에서 꼭대기까지 높이는 55m이다. 이 城으로 들어가는 계단식 입구는 아랍 예술의 극치를 보여 주는 여러 가지 조각품으로 장식되었다. 성 안엔 궁전 터, 모스크, 저수지, 감옥 등 많은 부대시설이 있다.


「시어머니를 위해 선물합시다」

「시어머니를 위해 선물하세요」라고 쓴 선전문을 들고 있는 알레포 시장 상인. 이런 商魂이 戰亂과 지진 속에서도 이 도시를 유지한 힘이었다.

8000년에 걸친 알레포의 도시 생명력을 짐작케 해주는 것은 城 바로 바깥에 있는 「수크」라고 불리는 시장이다. 카펫, 면직물들을 많이 판다. 한국 관광객들이 벌써 길을 내놓았다. 한 상점에선 한글로 「시어머니를 위해 선물합시다」란 푯말을 내놓았다. 상인들의 이런 힘이 바로 이 도시를 戰禍(전화)와 지진 속에서 지탱해 왔을 것이다.

아담 스미스가 「國富論(국부론)」에서 한 말이 생각났다.

<우리가 오늘 저녁식사를 즐기고 있는 것은 정육점과 빵 만드는 사람들의 好意(호의) 덕분이 아니라 그들의 이기심 덕분이다>


너그러움을 배운다

한반도에서 오랫동안 1민족·1국가·1국어의 전통을 이어온 한국인들은 인종적·종교적·언어적 多元性(다원성)과 복잡성에 대한 이해가 생래적으로 부족하다. 그런 한국인들에겐 시리아와 같은 복잡다기한 역사와 문화를 체험하는 것이 민주국가 시민으로 성장하는 데 좋은 공부가 될 것이란 생각이 문득 들었다.

시리아의 땅은 옛날 그대로 그 자리에 있지만 주인은 수십 번 바뀌었다. 오늘날 주인은 이슬람을 믿는 아랍族이지만 역사를 거슬러 오르면 튀르크族, 맘루크族, 그리스人, 로마人, 아람人, 아시리아人, 페니키아人들이 한때의 주인들이었다.

말이 다르고, 얼굴이 다르고, 생각이 다른 이들과 함께 섞여 산다는 것은 다름에 대한 이해와 관용을 키운다. 한국인이 머리는 좋지만 너그럽지 못하다는 평을 듣는 것은 다름을 체험해 볼 기회가 별로 없었기 때문이다.

19세기 말 개화기 때 한국을 여행했던 서양인들의 기록에 공통적으로 등장하는 묘사가 있다. 조선팔도 어디를 가든지 아이들과 어른들이 異國人(이국인)을 신기해하면서 쫄쫄 따라다니고 문 틈으로 들여다본다는 것이다.

유럽에서 주인이 가장 크게 바뀐 것은 西로마가 멸망한 5세기였다. 로마·그리스인들이 지배하던 古代 세계가 무너지면서 게르만族이 유럽의 새로운 주인으로 등장했다. 롬바르드族은 北이탈리아, 고트族은 스페인, 프랑크族은 프랑스, 앵글로-색슨族은 영국, 바이킹族은 스칸디나비아, 기타 여러 게르만 부족은 독일의 지배세력이 되었다. 물론 게르만族의 인구는 피지배 민족보다 훨씬 적었다.

지배층은 인구가 적어도 권력을 잡았으므로 자신들의 언어·풍습·종교·제도를 피지배 민족에게 강제할 수 있다. 나라의 모습이 지배층을 닮아 가게 되는 것이다. 5세기에 유럽의 주인이 된 게르만族은 그 뒤 1600년 동안 기독교를 받아들이고, 문예부흥을 하고, 종교개혁을 하고, 식민지를 개척하고, 산업혁명을 하고, 민주주의를 발전시킴으로써 오늘날 세계의 주인이 되었다. 유럽의 파생국가인 미국·호주·뉴질랜드·캐나다는 기본적으론 게르만族이 주도하는 나라이다.

게르만族은 체질이 강건하고 지능지수가 상대적으로 높다. 하지만 이들이 기독교가 아니라 이슬람化했더라면 세계의 주인이 될 수 있었을지 의문이 든다.

유럽을 여행해 보면 이슬람이 700년간 지배했던 스페인을 제외하고는 서기 5~11세기 사이 약 600년간 지어진 건물이 잘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콜로세움이나 聖베드로 사원 등 유명한 건축물은 대부분 이 600년 시기 이전이나 이후에 세워졌다.

이 600년을 흔히 「中世 암흑의 시대」라고 부른다. 로마가 무너진 후유증이 그렇게 길었다. 600년간 그리스·로마 문명은 잊혀졌다. 기독교가 로마문명을 대체하는 중심적 권위로 자리 잡았으나, 로마의 법치와 토목기술은 맥이 끊어졌다. 이 시기 기독교의 가장 큰 역할은 게르만族을 기독교化한 일이다.


苦行 수도사 시몬 이야기

이 600년 사이 그리스·로마 문명의 전통을 이어간 것은 콘스탄티노풀을 수도로 삼은 東로마제국, 즉 비잔틴제국과 이슬람 세계였다. 이 시기 기독교 교회 건물로서 가장 유명한 것은 지금 이스탄불에 있는 聖소피아이다. 6세기 중엽(신라 진흥왕 시절)에 유스티니아누스 황제가 건축한 이 건물은 유럽에서 문예부흥이 일어나기까지 약 1000년간 최고 ·최대의 기독교 건축물이었다.

시리아 알레포市에서 약 한 시간 거리의 야산 위에 아주 귀중한 초기 기독교 교회터가 있다. 「콸라트 사만」이란 곳인데, 여기에 거대한 5세기 말 교회 유적이 있다. 시리아를 통치하던 비잔틴제국 시절인 서기 490년에 14년간의 공사 끝에 완성한 이 교회는 당시 세계 최대 규모였다. 교회당 한 곳과 순례자용 세 棟(동)의 건물터가 남아 있다. 이 교회는 시몬이란 수도사 덕분에 세워졌다.

시몬은 양치기의 아들로 서기 392년에 났다. 그는 어릴 때 수도원에 들어갔으나 만족하지 못했다. 그는 더 엄격한 생활을 원했다. 시몬은 동굴을 찾아가 그 안에서 苦行(고행)하면서 修道(수도)했다. 그에 대한 소문이 퍼지자 사람들이 찾아오기 시작했다.

그는 사람들이 싫었다. 3m 높이의 돌기둥을 세우고 그는 기둥 위에서 사람을 피해 가면서 살았다. 사람들이 더 몰려왔다. 그는 기둥을 더 높였다. 전설에 의하면 그는 40년 동안 기둥 위에서 살았는데 마지막 기둥 높이는 18m였다.

시몬의 이름은 유럽의 기독교인들에게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영국·프랑스에서 순례객들이 몰려왔다. 東유럽에서는 시몬을 본떠서 기둥 위에서 修道하는 이들이 나타났다. 이들은 東歐의 날씨가 너무 추운 탓에 실패했다.

시몬은 기둥 위에서 설교를 하기 시작했다. 아래 모인 순례객들과는 문답을 주고받았다. 그는 여자들에겐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자신의 어머니한테도 입을 떼지 않았다. 그는 서기 459년에 죽었다. 시몬은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기독교인이 되어 있었다. 그가 기둥 위에서 수도하던 곳에 거대한 교회가 섰다. 시몬이 수도했다는 기둥은 순례객들이 기념으로 떼어가는 바람에 밑만 겨우 남아 있다.

苦行 수도사 시몬이 기둥 위에서 살면서 道를 닦았다는 기둥은 순례객들이 뜯어 가는 바람에 난쟁이가 되었다.


위성TV 수신용 접시의 숲

교회의 正面(정면)은 로마네스크式인데 잘 보존되어 있다. 이곳에서 내려다 보는 경치가 일품이다. 터키의 안티오크 쪽으로 퍼져간 대평원이 멀리 보인다. 기독교인들은 이슬람 세력이 접근하자 이 교회를 요새로 만들어 저항했다. 이곳은 서기 1017년 이슬람 군대에 넘어갔고, 그 후로는 교회로 쓰이지 않았다.

우리가 묵었던 알레포의 한 고층 호텔에서 아침에 일어나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거대한 회색 시가지가 눈앞에 펼쳐졌다. 아파트와 단독주택 할 것 없이 지붕마다 위성TV 수신용 접시들이 密林(밀림)을 이루고 있었다. 아파트에는 통합 수신 시스템이 없는 듯 각호마다 따로 접시를 두고 있었다. 시리아 사람들은 시리아 정부에 비판적인 미국의 CNN와 영국의 BBC를 마음대로 볼 수 있다.

시리아는 이란과 함께 中東의 대표적인 親北·反美 국가이다. 북한으로부터 미사일 등 무기를 사들이고 있다. 시리아는 인접국인 레바논의 정치에 개입하고 테러단체를 지원하고 있다. 몇 년 전 사망한 아사드 대통령의 절대권력은 아들에게 넘어갔다. 여러 가지 점에서 북한과 비교된다.

그러나 시리아에서 며칠만 있으면 이 나라를 북한과 비교하는 것은 모욕이란 것을 알 수 있다. 북한 평양의 屋上(옥상)에 위성TV용 접시의 숲이 있는가? 다마스쿠스 시장과 같은 시끌벅적한 시장이 있는가? 일반 국민들이 명랑하고 친절한가? 외국인 투자가 허용되는가?

시리아의 거리는 자동차 홍수이다. 그 30%가 한국 자동차라고 한다. 굶는 사람이 없다. 공개적으로 정부를 비판하지 않는 한 감옥에 가지 않는다. 요사이 시리아를 찾는 한국 여행객들이 많아졌다. 한국 공관이 없어 한국 여행객들이 시리아에서 여권을 잃어버리면 인접한 레바논 대사관으로 사람을 보내 여행증명서를 만들어 와야 출국할 수 있다.

시리아 사람들은 인상이 참 좋다. 특히 외국인들에게 친절하다. 사회주의 색채가 강한 독재국가임이 틀림없으나 김정일式의 인간말살형 독재는 아니다. 아사드가 金日成을 만나고 난 뒤부터 개인숭배로 갔다는 이야기가 있다. 루마니아의 차우셰스쿠도 그랬다고 한다. 여러 나라를 망친 것이 金日成이다.

시리아의 두 번째 도시 알레포의 호텔에서 내려다본 시가지의 옥상은 온통 위성TV수신용 접시이다. CNN, BBC 등 시리아에 비판적인 방송도 시청할 수 있다. 시리아는 독재국가이지만 북한과 비교할 나라가 아니다.


대학살의 현장에서

우리 尙美會 여행단이 아침에 알레포를 떠나 고속도로를 따라 남쪽으로 약 세 시간 달려가는 목표지는 하마市이다. 인구가 약 40만 명인 이 도시는 1982년에 있었던 무슬림 형제단의 무장봉기와 유혈진압으로 유명하다.

舊約 성경에 「가난 왕국의 수도」라고 쓰인 하마는 기원전 10세기 무렵인 다윗과 솔로몬 시절 이스라엘과 교류했다. 이 도시는 「저항의 도시」이다. 아시리아에 의해 점령당하자 하마 사람들은 다마스쿠스 사람들과 손잡고 봉기해 그들을 몰아냈다가 130년 뒤 아시리아 군대의 보복을 당해 도시가 파괴되었다.

현지 가이드에 따르면 하마 사람들은 잘 웃지 않는다고 한다. 여자는 검은 베일로 얼굴을 가린 사람이 많았다. 이슬람 원리주의자들이 뿌리 내릴 만한 토양이 있는 도시이다.


自爆테러의 등장

1982년 시리아는 곤경에 처했다. 시리아는 레바논을 침공한 이스라엘과 대결하고 있었다. 레바논 베카 계곡 상공에서 일어난 공중戰(전)에선 이스라엘 전투기를 한 대 격추시키고 시리아 전투기는 80여 대가 격추되었다. 터키는 시리아가 터키內 쿠르드族의 반란을 사주한다고 軍 동원령을 내려 위협하고 있었다. 이집트의 사다트 대통령은 무슬림 聖戰派(성전파)에 의해 암살당했다.

이런 시기에 시리아內에서 이슬람 원리주의 단체인 「무슬림 형제단」의 테러가 격화되었다. 그들은 공무원과 아사드를 배출한 알라위派 사람들을 잔인하게 죽였다. 이때 처음으로 목베기 수법이 나왔다. 1979년 6월 형제단은 알레포에서 사관생도들을 공격해 83명을 죽였다. 1980년 8월부터 11월까지 다마스쿠스에선 자동차 폭탄 테러로 수백 명이 죽었다.

이들의 목표는 아사드 대통령이었다. 1980년 6월26일 다마스쿠스를 방문한 말리 대통령 환영만찬이 벌어지고 있었다. 무슬림 형제단이 잠입해 아사드를 향해 기관총을 쏘고 수류탄을 던졌다. 아사드는 발 앞쪽으로 굴러오는 수류탄을 발로 차냈다. 경호원 한 사람이 다른 수류탄 위로 몸을 날려 대통령을 보호하고 爆死(폭사)했다.

아사드의 보복은 빨랐다. 감옥에 있던 수백 명의 형제단원들을 불러내 처형했다. 형제단에 가입하는 것만으로도 사형에 처하는 법을 공포했다.

1982년 2월 무슬림 형제단은 원리주의자인 수니派가 많이 사는 古都(고도) 하마의 중심부를 장악하고 전국적인 봉기를 선동했다. 하마를 해방구로 선포했다. 아사드는 군부대를 투입하여 강경진압에 나섰다. 형제단에 대해서 최후통첩을 하고, 「일반 시민들도 도시를 떠나지 않으면 반란군으로 간주하겠다」고 경고했다. 2월2일 진압군은 전투기와 탱크까지 동원해 하마市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중심부의 골목이 좁아 탱크가 진입하지 못하자 폭격해 길을 텄다.

2주간 계속된 시가戰으로 쌍방에서 1만 명 이상이 죽었다. 그 뒤 팔레스타인 지역과 이라크에서 유행이 된 自爆(자폭)테러가 이때 처음으로 등장했다. 하마 중심부에 있었던 옛 궁전과 모스크가 사라졌다. 진압군은 하마 시내를 뒤지고 다니면서 부상자들까지 찾아내 확인사살했다.

이 무자비한 봉기와 진압은 그러나 시리아에서 원리주의자들의 반란을 근절시키는 효과를 보았다. 아사드의 진압은 많은 시리아 사람들의 지지를 받았다. 형제단은 테러수법이 너무 잔혹했기 때문에 민심을 잃었다. 내가 만난 한 시리아 여성은 『서방세계는 아사드에게 감사해야 할 것이다』고 말했다.

이 사건 뒤 「하마의 교훈」이란 말이 유행했다. 이슬람 원리주의를 이기는 유일한 방법은 아사드가 하마에서 했던 식으로 하는 것이란 뜻이었다.

「무슬림 형제단」에 대한 유혈진압으로 수만 명이 희생되어 묻힌 하마市에는 고층건물이 올라갔다.


사람이 할 일이 없다는 것의 비참

하마 도심부로 들어서니 거리에 사람들이 넘쳐나고 있었다. 실업률이 12%라고 한다. 시리아를 여행하면서 가장 안쓰러웠던 것이 할 일 없이, 유령처럼 오가는 사람들의 모습이었다. 시리아 사람들은 키가 날씬하게 크고 얼굴이 길다. 中東에서 가장 잘생긴 민족이라는 평을 듣는다. 그런 사람들이 無爲徒食(무위도식)하고 있다. 인간에게 할 일이 없다는 것만큼 기막힌 일은 없을 것이다. 이탈리아가 부럽지 않은 유적을 가지고 있으면서 시리아는 관광을 통해서 연간 10억 달러를 벌지 못하고 있다.

우리가 하마에 들른 것은 「노리아스」라는 水車(수차)를 구경하기 위해서였다. 하마를 지나는 오론테스 강물을 끌어올리는 이 장치는 지름이 20~30m나 된다. 서기 5세기부터 가동했다고 한다. 지금은 관광거리이다. 움직이지 않는 水車 너머 언덕 위엔 호텔이 서 있다. 시가戰에서 죽은 반란군을 집단 매장한 땅 위에 세운 것이라고 한다.

오랜 역사와 문화적 축적으로써 中東의 지식인 사회를 이끌었던 시리아는 한때 中東을 풍미했던 汎아랍주의 바트黨을 만들어 냈다. 1947년에 창당한 바트黨은 汎아랍주의-사회주의를 이념으로 하면서 공산주의와 이슬람 원리주의를 반대했다. 시리아의 바트黨은 中東의 여러 나라에 지부를 두었다. 집권에 성공한 것은 시리아와 이라크이다.

작년에 처형된 이라크의 후세인이 바트黨 출신이다. 이라크를 점령한 미군은 이라크 군대와 함께 바트黨을 해산해 버렸다. 이것이 권력의 공백을 초래해 이라크의 시아派-수니派 내전을 통제불능사태로 몰았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많다. 바트黨은 민족주의적인 성향이 강해 이슬람 원리주의를 억제하는 역할을 했다.

아사드와 후세인은 무자비한 탄압과 反美정책으로 미국을 괴롭혔지만 동시에 이슬람 원리주의를 억제했다. 이라크가 종교내전으로 빠져들어 가는 것을 지켜보면서 『차라리 후세인을 그냥 두는 것이 나을 뻔했다』고 말하는 이들도 있다.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아랍 사람들과 이슬람 문화는 근대 국민국가를 만들어 운영해 본 경험이 日淺(일천)하다. 이슬람은 교리상 종교공동체를 강조하므로 종교와 계급의 차이를 극복해야 하는 국민국가와는 맞지 않는 면이 많다. 그 점에서 이슬람 원리주의와 공산당式 계급투쟁을 다 같이 거부하는 바트黨은 상당히 진보적이다. 미국의 정책입안자들은 바트黨이나 아사드와 후세인의 그런 역할을 看過(간과)하는 경향이 강했다. 中東을 지배해 본 경험이 있는 영국 사람들은 비교적 정확한 시각을 갖고 있지만 세계를 움직일 힘이 없다.

피바람이 휘몰아쳤던 하마의 오론테스 강가엔 거대한 水車가 구경거리가 되고 있다.


시리아에 대한 오해

시리아에 와서 여행해 보면 「그동안 많이 오해했구나」 하는 부분이 보인다. 한국인은 시리아를 주로 성경, 이스라엘, 미국의 시각에서 보아 왔다. 그런 시리아는 反기독교, 親北, 독재, 테러지원국가이다. 그런 면이 있지만 과연 「惡의 축」이라고 불릴 정도인가, 하는 생각이 든다.

시리아의 지난 100년 역사만 알아도 언론에서 얻은 선입관이 달라질 수 있다. 시리아(오늘의 레바논 포함)와 팔레스타인(오늘의 이스라엘) 지역은 1516년부터 오스만 튀르크의 지배를 받았다. 제1차 세계대전이 터진 1914년 오스만 튀르크 제국은 독일 편에 섰다.

영국은 오스만 튀르크를 中東에서 몰아내기 위하여 아랍민족주의 세력을 지원했다. 영국의 정보장교 T.E.로렌스가 아랍 추장들을 설득해 反튀르크 독립전쟁을 일으키도록 하는 일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영국이 지원下는 아랍 군대는 파이잘 부족장의 지휘하에 튀르크領 시리아를 점령하고 1918년에 정부를 세웠다. 파이잘은 大시리아의 왕으로 선포되었다. 이때 大시리아는 지금의 시리아뿐 아니라 레바논과 이스라엘 땅을 포함했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국제연맹은 戰後 처리 차원에서 시리아에 대한 위임통치를 프랑스에 맡겼다. 프랑스는 아랍세력이 세운 파이잘을 쫓아내 버리고 레바논을 大시리아에서 떼내어 다른 나라로 만들려고 했다. 레바논에는 기독교인들이 많았다. 이들이 프랑스를 설득하여 분리 독립하려고 했다. 이에 반발한 시리아인들이 봉기하자 프랑스는 다마스쿠스를 폭격하는 등 강경 진압했다. 프랑스 위임통치 기관은 시리아의 알렉산드리타市를 터키에 떼어 주는 공작을 했다.

1940년 프랑스 본국이 독일軍에 항복한 뒤 시리아는 비시 정부(나치 독일이 프랑스의 남부지방에 설치한 괴뢰정부) 통치下로 넘어갔다. 1941년 6월 이후엔 영국軍과 자유프랑스軍이 지배하게 되었다. 레바논에서는 기독교인과 이슬람인들이 인구비율에 따라 권력을 나눠 갖기로 합의해 독립국가를 만드는 준비에 들어갔다. 1943년에 합의된 것은, 대통령은 기독교인, 총리는 수니派 이슬람, 군대는 기독교, 의회 의석은 기독교가 6 이슬람이 5의 비율로 하기로 했다.

시리아와 레바논은 영국軍과 프랑스軍이 물러난 1946년에 독립을 선언했다. 시리아에서는 독립 후 여러 차례의 쿠데타가 있었다. 1950년대 중반이 되면 시리아의 권력은 군대 안의 바트黨員들에게 넘어갔다. 바트黨 세력은 시리아와 이라크로 확산되면서 아랍통일국가를 만들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민족주의派 장교단을 대표하는 나세르가 쿠데타로 親英派(친영파) 왕을 내쫓고 이집트에서 집권한 직후인 1958년, 이집트와 시리아가 일종의 국가연합식 통일아랍공화국(United Arab Republic)을 결성했다. 이집트는 그러나 시리아를 북부의 속주처럼 대접했다. 다시 이에 불만을 품은 시리아 군인들이 1961년 쿠데타를 일으켜 집권한 뒤 시리아는 主權(주권)을 되찾았다.

이에 불만을 품은 汎아랍주의 바트黨 세력이 반격한 것이 1963년의 쿠데타였다. 이를 계기로 공군 장성인 아사드가 바트黨의 핵심멤버로 등장한다. 같은 해 이라크에서 바트黨 군인들이 쿠데타로 집권하여 이집트·시리아·이라크 세 나라를 통일하는 움직임이 있었으나 실패하고, 이라크에선 그해 11월에 바트黨이 쿠데타로 失權(실권)했다.

시리아의 집권세력이 된 바트黨은 사회주의 및 汎아랍정책을 밀고 나가는 과정에서 반발을 사고 黨이 분열되었다. 1966년 당내의 강경사회주의자들이 또 다시 쿠데타를 일으켰는데, 이때는 아사드가 주모자였다. 이 바트黨 정권은 두 가지 큰 패배를 맛보았다.

1967년 6월 中東전쟁에서 이집트·요르단과 연합해 對이스라엘戰에 참전했던 시리아는 골란고원을 빼앗겼다. 1970년 요르단의 후세인 왕은 국내의 팔레스타인 무장세력을 몰아내는 전쟁을 벌인다. 이때 시리아는 아라파트가 이끌던 팔레스타인 무장세력을 지원했으나 이들은 쫓겨나고 말았다. 아사드는 시리아 정부의 팔레스타인 지원정책을 반대했었다. 그는 1970년 11월 무혈 쿠데타로 정권을 잡고 그 이듬해 대통령이 되었다.

1973년 10월 사다트의 이집트가 이스라엘을 기습하여 제4차 中東전쟁이 일어났다. 아사드의 시리아軍이 참전하였으나 이스라엘의 반격에 무너졌다. 일시 수복했던 골란고원을 내주고 다마스쿠스까지 빼앗길 뻔했다. 이스라엘軍은 다마스쿠스를 35km 앞둔 지점에서 휴전했다.


주변국에 뜯어먹힌 나라

아사드는 2000년 6월10일에 죽을 때까지 30년간 철권통치를 했다. 그는 戰後 중동의 최장기 집권자였다. 아사드는 수니派가 압도적으로 많은 시리아에서 소수파인 시아派 중 이단시되어 왔던 알라위派 출신이다. 시리아에서 알라위派는 전체 인구의 11.5%에 지나지 않는다. 아사드는 군대·관료·정보기관에 알라위派 출신들을 많이 배치해 권력을 공고히 했다. 알라위派는 오랫동안 탄압을 받아 오다가 프랑스가 위임통치할 때 우대를 받았다. 아사드 정권을 바트黨 정권이 아닌 알라위派 정권으로 여기는 시각도 있다.

아사드에 대한 개인숭배는 시리아를 여행해 보면 실감할 수 있다. 자리 좋은 언덕, 산꼭대기마다 오른손을 든 아사드의 石像(석상)이 있다. 그가 살아 있을 때부터 있었던 이 석상은 조지 오웰의 소설 「1984」에 나오는 大兄(대형)을 연상시킨다.

그는 생전에 아들인 바시르 알 아사드를 후계자로 지명해 놓고 있었다. 바시르는 런던에서 안과의사로 일했다. 그가 34세 때 아버지 아사드가 죽었다. 당시 헌법은 40세 이상만 대통령이 될 수 있었지만, 하루아침에 개헌이 이뤄져 제한연령이 34세로 변경되었다.

시리아는 레바논內의 反이스라엘 헤즈볼라軍을 지원하고 레바논의 國政에 간섭하며, 최근에는 前 총리의 암살에 관여했다고 해서 국제적 압력을 많이 받고 있다. 암살사건 이후에는 레바논으로부터 철군했다. 시리아 입장에서 보면 레바논은 원래 시리아 땅인데 기독교인들이 프랑스를 구워삶아 분리독립해 나간 나라이다. 따라서 레바논에 대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은 당연한 권리라는 의식이 강하다. 시리아는 터키·레바논·요르단·이스라엘에 의해 국토가 여기저기 찢기고 떼어먹힌 나라이다.


草原과 사막, 말과 낙타

팔레스타인-이스라엘 분쟁도 그렇지만 中東의 많은 문제는 이 지역을 400년간 지배했던 오스만 튀르크가 무너지고 영국·프랑스 세력이 일시 지배하다가 철수하는 과정에서 생긴 것이다. 인류문명의 요람이었던 이곳이 지난 500년간 받은 역사적 수모가 오늘의 時事문제에 짙은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우리 尙美會 여행단 일행은 하마를 떠나 다시 南下했다. 시리아의 배꼽에 해당하는 古都 홈스에서 좌회전하여 동쪽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계속 가면 이라크이다. 이라크와 국경을 맛대고 있는 시리아는 2003년 이라크 전쟁으로 크게 피해를 보고 있다. 약 60만 명의 난민들, 주로 수니派들이 內戰을 피해서 수니派가 많이 사는 시리아로 넘어왔다. 이들 중엔 부자도 많다. 이들이 다마스쿠스 일대에 부동산 투기를 하여 집값이 많이 올랐다. 시리아 인구 1800만 명 중 100만 명 이상이 이라크·팔레스타인 난민들이다. 이 가난한 나라가 그 많은 난민들을 받아 주는 것이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길은 대평원을 달린다. 초원으로 변하더니 점점 나무와 풀이 줄어들면서 사막 분위기로 바뀐다. 양떼를 모는 베두인族, 텐트, 낙타가 자주 나타난다. 시리아 국토의 절반가량이 이런 사막지대이다.

낙타는 사막의 배이다. 280kg의 짐을 싣고 천천히 걸어가면 하루에 시속 4km씩 10시간을 갈 수 있다. 짐은 싣지 않고 사람이 타고 여행하는 데는 시속 16km로 하루 200km나 간다. 굵은 눈썹과 닫을 수 있는 코가 모래먼지를 막아 준다. 더위에 몸의 수분을 20%나 잃어도 견딘다. 사람은 물을 사흘만 먹지 않으면죽지만 낙타는 10일까지 견딘다. 한꺼번에 물을 60리터나 마시고 몸속에 저장한다. 수컷은 몸무게가 평균 665kg이다.

세계 역사는 대체로 말(낙타)을 달린 민족과 배를 몬 사람들이 권력을 잡고 지배했다. 말과 낙타를 일종의 탱크 같은 兵器로 이용한 유목민족 출신들이 17세기에 소총이 등장할 때까지 세계를 지배했다. 몽골·튀르크·아랍 민족이다. 16세기를 분기점으로 하여 배를 잘 모는 포르투갈·스페인·네덜란드·영국·프랑스 세력이 세계 도처에서 식민지를 개척하기 시작하면서 大勢가 바뀐다. 세계사의 주도권이 기마민족에서 해양민족으로 넘어가는 것이다.

그래도 19세기 세계 4大 제국 중 3大 제국은 유목·기마민족 출신이었다. 여진族이 세운 淸, 튀르크族이 만든 오스만 튀르크, 몽골族의 정복왕조 무갈제국(인도). 기마민족 출신이 아닌 것은 大英제국뿐이었다.


기동성과 단순성

세계사의 주도권을 잡으려면 속도의 우월성을 확보해야 한다. 화살보다는 소총이 빠르고, 기관총은 더 빠르다. 배보다는 비행기, 그리고 유도탄이다. 미국의 세계 경영은 기동성에서 나오고, 기동성은 가장 빠른 航母戰團(항모전단), 가장 빠른 전투기, 가장 멀리 가면서 정확한 미사일에서 나온다. 세상만사가 기동성에 의해서 결정된다고 믿었던 사람들이 기마민족이요, 해양민족이었다. 인생은 유한한 시간이므로 매사에서 속도가 생명 그 자체인 것이다.

삼국을 통일한 신라 사람들은 말도 잘 타고 배도 잘 몰았다. 이슬람의 전성기 때 아랍 사람들도 그러했다. 이슬람이란 신앙으로 무장한 아랍의 기마부대가 중앙아시아에서 스페인까지 휩쓸고 있을 때 인도양과 東중국海는 아랍상인들의 무대였다. 신라·고려도 아랍상인들의 기항지였고, 한반도 사정을 서양에 처음으로 전한 이들도 아랍인들이었다.

1970년대 中東건설 시장에 진출한 한국인들이 한때 30만 명이나 되었다. 두바이는 한국 건설회사가 만든 도시라는 말을 들을 정도이다. 아랍과 한국은 결코 멀기만 한 관계가 아니었다.

기동성(Speed)을 확보하려면 개인이든 군대이든 국가이든 가벼워야 한다. 가벼워지려면 삶이 단순해야 한다(Simplicity). 단순하게 살려면 그렇게 사는 것이 자랑스럽다는 자부심(Self confidence)이 있어야 한다. 이 「3S」가 기업의 성공비결이라고 주장한 이가 GE의 전설적 경영자 잭 웰치였다.

中東 사막의 주인공 베두인族은 몽골고원의 유목민족처럼 이웃한 중국·이란 등 도시문명을 부러워하지 않았다. 하늘과 초원을 벗 삼으면서 유유자적하다가 도시를 공격하여 문명인들이 만든 물건을 빼앗아 와서 먹고사는 삶이 더 자유롭고 근사하다고 믿었다. 그런 자부심이 그들을 도시 및 농경문화에 동화시키지 않게 했다.

사막과 草原의 단순성, 삶의 단순성, 美的 감각의 단순성, 그리고 이슬람과 유태교, 기독교의 단순성은 서로 통한다. 神을 거추장스럽게 우상으로 형상화하지 않았다는 점이 최고의 단순성이다. 神을 형상으로 만들었다면 파괴할 수 있지만 마음속에 神을 가진 사람은 강하다. 형상을 떠난 神이기에 어디든 존재할 수 있는 것이다. 이슬람과 유태·기독교의 세계 전파는 여기서 시작되었다. 사막의 밤하늘을 인간이 바라볼 때 느끼는 절대자의 존재감, 인간과 神의 직접 소통, 이런 사막적 감수성 속에서 인류역사를 바꾼 3大 종교가 탄생한 것이다.


제노비아 여왕

로마제국에 맞섰던 팔미라의 여왕 제노비아의 얼굴이 새겨진 鑄貨.

버스는 사막 속으로 더 깊이 들어갔다. 홈스에서 서쪽으로 달리는 이 길은 지중해와 이라크를 연결하는 隊商路(대상로)이자 아시아 북방을 종단하는 실크로드의 서쪽 끝 부분이었다. 오늘의 목표는 이 東西 무역로의 거점이었던 오아시스 도시 「팔미라」(Palmyra. Palm=종려의 도시라는 뜻. 아랍어로는 타도몰이라 불린다)이다.

팔미라로 들어가니 사막이란 바다를 항해하다가 항구로 들어가는 기분이 들었다. 모래산이 내려다보는 가운데 나지막하게 발달한 숲의 섬이 신기루처럼 태양 아래서 잠들어 있었다.

서기 271년 로마 황제 아우렐리아누스는 우리가 왔던 경로를 거쳐 팔미라로 進軍(진군)했다. 터키 남부의 안티오크와 홈스에서 팔미라의 여왕 제노비아의 군대를 무찌른 로마 군대는 팔미라를 포위하고 관대한 항복조건을 제시했다.

자존심이 강한 제노비아는 이를 거부하고 페르시아의 도움을 청하기 위해 포위망을 빠져나와 동쪽 유프라테스江으로 달리다가 로마軍에 붙들려 아우렐리아누스 황제한테 끌려왔다. 그 뒤 전설이 된 제노비아의 운명에 대해선 異說(이설)이 많다. 황제가 로마에서 개선식을 거행할 때 쇠사슬에 묶인 채 나타났고, 그 뒤 로마 근교의 별장에서 잘 먹고 잘 살았다는 說이 있는가 하면, 로마로 압송 도중 굶어서 자살했다는 說이 있다.

로마軍은 팔미라를 약탈하고 주민들을 많이 죽였다. 철학자 롱기누스가 이때 죽었다. 273년 팔미라는 로마 주둔군 600명을 죽이고 또 반란을 일으켰다가 무자비하게 진압되었다. 이때부터 이 사막도시는 亡兆(망조)를 보이기 시작했다.

제노비아는 팔미라를 거의 독립적으로 다스리던 오다이나트 왕의 부인이었다. 로마의 하드리아누스 황제는 서기 130년에 팔미라를 방문하여 자유도시로 선포하고 세금을 거둘 권리를 주었다. 서기 212년 카라칼라 황제는 이 도시를 로마 식민지로 인정하고, 주민들에겐 로마 시민권을 주는 등 우대했다. 팔미라 군대가 로마軍과 함께 페르시아와 싸운 데 대한 보상이었다. 東西 무역로에 놓인 이 도시는 오가는 隊商들로부터 세금을 거두고 隊商들이 필요한 물품을 공급하는 기지였다.


사막의 밤

오다이나트는 야심가였다. 페르시아의 사산朝 군대를 격파한 뒤엔 왕을 자칭했다. 로마도 처음엔 이곳에 주둔하는 로마 군대의 지휘권을 주는 등 그를 우대했다. 서기 267년 오다이나트 왕이 의문의 죽음을 당한 뒤 제노비아가 실권을 잡고 아들을 허수아비 왕으로 내세웠다. 로마가 이를 인정하지 않고 진압군을 보내자 제노비아는 로마 군대를 맞아 싸웠다.

제노비아는 대단한 미인인데다가 전략가였다. 로마제국의 멸망사를 쓴 영국의 에드워드 기본은 『그녀는 미모에선 조상인 클레오파트라를 능가했고, 용기와 순결함에선 따를 여인이 없었다』고 극찬했다.

로마 군단을 격파한 제노비아는 내친 김에 로마領이던 시리아와 팔레스타인 지역 전부를 점령하고 이집트로 침입하여 항복을 받아 냈다. 오아시스 도시를 큰 제국 수준으로 키운 제노비아를 로마가 그냥 둘 수 없었던 것이다.

팔미라 유적은 서기 2, 3세기 때 지은 도시 건축물의 잔해이다. 발굴된 면적은 수십만 평에 걸쳐 뻗어 있다. 로마 도시의 전형이다. 神殿·大路·극장·목욕탕·광장·개선문·상점가들이 발굴되어 재현되었다. 다 둘러보려면 하루 종일 걸릴 것이다.

이 도시는 2세기의 로마 황제 셉티미우스 세베루스가 특별히 보살펴 주었다. 세베루스는 北아프리카 리비아 땅에서 태어난 페니키아 사람으로서 시리아 홈스의 神殿 司祭(사제)의 딸과 결혼해 고향 땅인 시리아에 애착이 많았다.

필자는 팔미라의 이곳저곳을 거닐다가 10代 후반의 한국 젊은이 세 명을 만났다. 청년이 둘, 여자가 한 사람이었는데 요르단을 거쳐서 버스편으로 팔미라까지 왔다는 것이었다. 시리아에서 만난 최초의 한국인이었다. 시리아의 매력은 관광객들이 밀려 오기 전의 순수함을 유지하고 있다는 점이다.

팔미라에는 돌탑을 만들어 유해를 안치했던 로마시대 유적들이 많다. 첨성대처럼 생긴 돌탑 하나에 가족 단위로 수십 명의 유해가 보존되었다. 이곳을 구경하고 나오는데 두 살 정도의 아기를 안은 30代로 보이는 여인이 「아기를 안고 사진을 찍으라」고 권했다. 한 장 찍는 데 5달러를 요구했다. 자신의 아기를 돈벌이로 이용하는 商術 또한 상업도시의 수천년 전통을 이어 가는 듯했다. 약 4만 명이 살고 있는 팔미라 근방에는 공군기지가 있다. 전투기들이 유적을 표적으로 삼고서 저공비행을 한다.


대폭발

베두인族 텐트에서 빵「코부즈」를 굽는 여인.

저녁에는 베두인族의 천막으로 들어가 그들의 춤과 노래를 구경했다. 천막 바깥으로 나와 하늘을 보았다. 장작불 위에 솥뚜껑을 엎어 놓고 밀가루 반죽을 그 위에 얹어 얇게 구워 내는 「코부즈」라고 불리는 빵이 있다. 별 보이는 밤 코부즈를 굽는 베두인 아줌마 옆에 자리하여 바로 구워 나오는 빵떡을 1달러씩 주고 먹었다.

7세기 초 아라비아의 사막에서 일어난 이슬람이 100년 사이 동서양에 걸친 대제국을 건설한 것은 13세기 초 몽골 고원을 통일한 칭기즈칸이 50년 만에 세계제국을 건설한 것과 비견되는 대폭발이다. 이 대폭발의 엔진은 몽골의 騎馬유목민족과 아라비아의 베두인 騎馬(낙타)부대였다. 마호메드가 메카를 점령한 것이 서기 630년, 2년 뒤 그는 죽었지만 이슬람 세력은 「한 손에 코란, 다른 손에 칼」을 들고 北上, 東進, 西進한다.

641년에 시리아와 페르시아를 정복하고, 643년부터 北아프리카를 치고, 705년부터 7년간 중앙아시아를 복속시키고, 708년부터 7년간 지금의 파키스탄 펀자브 지방을 이슬람化했다. 北아프리카의 이슬람 세력은 지브롤터 해협을 건너 스페인에 상륙하여 710년부터 4년간의 戰役으로 이를 점령한 뒤 프랑스로 쳐들어갔다. 727년엔 러시아 남부의 그루지아를 치고, 750년엔 지금의 카자흐스탄 탈라스에서 고구려 출신 고선지 장군이 지휘한 唐軍과 결전해 이겼다. 이때 製紙(제지) 기술자가 포로로 잡혀 그 기술이 아랍을 거쳐 유럽에 전해졌다.

이슬람 세력은 페르시아에서 만든 우수한 선박으로 인도양, 남중국海로 진출했다. 인도, 인도지나, 말레이반도, 중국에까지 이슬람의 씨가 뿌려졌다. 육지와 바다에서 이슬람 세력은 無敵(무적)이었다. 이들은 통일신라期에 한반도에까지 진출하여 무역을 하고, 신라를 최초로 서방에 소개했다.


코르도바와 다마스쿠스

미국을 제외하고 제1관광大國(관광수입 기준)인 스페인의 남부지방은 「안달루시아」라고 불린다. 이곳의 3大 도시는 코르도바·세비야·그라나다이다. 무어人(아랍과 아프리카 베르베르族의 혼혈)이 主力인 우마야드 왕조(수도 다마스쿠스)의 이슬람 군대가 서기 710년에 이곳에 상륙했다. 그들은 불과 4년 만에 이베리아 반도(스페인과 포르투갈) 전체를 점령했다.

이슬람 세력은 콜럼버스가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한 1492년에 그라나다에서 철수해 아프리카로 돌아갔다. 700년이 넘게 계속된 이슬람의 스페인 경영은 찬란한 문화유적을 남겼다. 스페인이 이탈리아와 프랑스보다 더 많은 관광수입을 올리는 이유는 이슬람 문명의 유적이 많기 때문이다.

이때 스페인을 경영한 이슬람 세력의 본부는 다마스쿠스를 수도로 삼아 90년간 이슬람 세계를 통치했던 움마야드 王朝였다. 요사이 수니派라고 불리는 종파가 중심인 움마야드 王朝는 동서양에 걸친 이슬람 대제국을 건설한 뒤 750년에 시아派가 중심인 압바시드 王朝에 의해 멸망했다. 압바시드 王朝는 수도를 바그다드로 옮겨 1258년 몽골軍에 짓밟히기 전까지 약 500년간 이슬람 세계에 군림했다.

다마스쿠스의 움마야드 王朝는 망했지만 왕족의 일파는 스페인으로 피란 와서 코르도바를 수도로 삼고 통치를 계속했다. 당시 이슬람 문명은 과학·문학·군사 등 모든 면에서 중세 암흑기를 겪고 있었던 유럽의 기독교 문명을 앞섰다. 이슬람은 기독교도나 유태인들을 박해하지 않았다.

유태교·기독교·이슬람은 한 뿌리에서 파생된 종교이다. 유태교는 아직 메시아가 나오지 않았다고 하고, 기독교는 예수가 메시아라고 하고, 이슬람은 예수는 여러 선지자 중의 한 사람일 뿐이며 마호메드가 마지막 선지자로서 왔다고 믿는 점에서 다르다.

움마야드 王朝가 만든 코르도바의 大모스크(메조키트)와 그라나다의 알함브라 궁전은 안달루시아뿐 아니라 세계사를 대표하는 위대한 건축물이다. 움마야드 王朝가 망할 때 코르도바로 피신해 와서 왕이 된 압둘 라만 1세는 코르도바를 유럽의 中世를 밝히는 「등대」로 만들었다.

코르도바에선 이슬람·기독교·유태교가 공존했다. 大모스크에선 세 종교가 함께 예배를 올렸다. 유태교의 시나고그, 가톨릭의 성당, 이슬람의 모스크를 다 겸하고 있는 예배당이었다.

8~13세기의 약 500년간 코르도바는 「유럽의 빛」이었다. 10세기에 코르도바엔 27개 학교, 50개 병원, 900개 공중목욕탕, 6만300채 고급주택, 그리고 8만455개의 상점이 있었다고 한다. 인구는 50만 명을 넘었다.

코르도바는 13세기에 기독교 세력에 넘어갔다. 故地를 탈환한 기독교 세력도 코르도바에서 이슬람과 유태인을 그렇게 박해하지는 않았다(1492년까지). 大모스크도 부수지 않았다. 16세기 초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와 스페인 왕을 겸했던 카를로스 5세 시절 가톨릭 세력이 大모스크 한복판에 성당을 만들었다. 이 공사가 끝난 뒤 시찰 나온 카를로스 황제는 개탄했다고 한다. 그는 성당 측 사람들에게 말했다.

『당신들은 평범한 성당을 짓기 위해서 세계에서 여기밖에 없는 명물을 파괴했군요』


같은 교회 안에서 이슬람·기독교 공존

尙美會 여행단은 드디어 이슬람의 전성기 수도였던 다마스쿠스로 들어갔다. 우리는 움마야드 王朝의 작품인 大모스크로 직행했다. 다마스쿠스의 움마야드 大모스크는 이슬람 세계의 가장 중요한 건물이다. 가톨릭 세계에서 로마의 聖베드로 성당이 차지하는 위치라고 보면 된다. 서열에선 사우디아라비아의 메카와 메디나 모스크에 다음 가지만, 역사성에서는 따라올 건물이 없다.

이슬람 군대가 다마스쿠스에 들어온 636년, 그들은 이 자리에 있던 기독교 교회당의 동쪽 반을 모스크로 사용했다. 이 교회당은 참수당한 세례 요한의 목이란 것을 보존하고 있었다. 기독교인들에겐 서쪽에서 예배를 올릴 수 있도록 허용했다.

이슬람은 이교도에게 改宗(개종)을 강요하지 않았다. 다만 이슬람 신도를 일류시민으로 대우해 특권을 주고, 개종하지 않은 유태인이나 기독교인을 2류시민으로 대우했다. 종교가 없는 사람들에겐 이슬람으로 改宗할 것을 강요했다. 100년 사이 이슬람이 세계제국을 만들 수 있었던 비결은 이런 포용성이었다.

다마스쿠스에서 이슬람 신도들이 늘어나자 칼리드 이븐 알 왈리드 황제는 「전무후무한 모스크」를 짓기로 결심한다. 1000명의 石工(석공)과 1만2000명의 노동력이 10년간 동원되었다. 이 모스크는 그 뒤 여러 차례의 지진과 화재를 견뎌 냈다. 보수는 있었지만 原型(원형)은 보존되었다. 몽골 군대는 다마스쿠스를 약탈했으나 이 건물은 부수지 않았다. 너무 아름다우면 적이라도 감히 손을 대지 못하게 되는 모양이다. 아름다움이 가진 카리스마이다.

이 모스크 안으로 들어갔다. 넓은 마당 前面으로 모스크의 위용이 나타났다. 간결하고도 거대한 느낌이었다. 이슬람 대제국의 표상이자, 모든 모스크의 어머니가 되는 위대한 건물 앞에서 압도되는 기분이었다. 신라통일기에 해당하는 시기에 지어진 이 모스크는 아랍의 예술 감각이 총동원되었다. 아치, 모자이크, 코린트式 기둥, 미나렛(기도탑), 수도원.

마당은 150×100m의 규모였고, 본당은 140×40m의 길쭉한 건물이다. 신발을 벗고, 여인들은 모스크에서 내주는 검은 덧옷을 걸치고 들어갔다. 모스크는 사막의 텐트처럼 간소하다. 속은 텅 비어 있다. 여기저기 신도들이 모여 기도하고 예배를 올린다. 1300년짜리 모스크는 유물이 아니라 오늘도 살아 숨 쉬는 생물이다. 모스크 중앙엔 세례 요한의 목이 안치되었다는 큰 청색 보석함 같은 시설이 있었다. 물론 中東에는 세례 요한의 목을 보존하고 있다는 유적이 많아 眞僞(진위)는 알 수 없다.

기도탑(미나렛)은 세 개인데 하나는 「예수의 기도탑」이라고 불린다. 예수가 최후 심판의 날에 나타날 곳이 여기라는 뜻에서 붙인 이름이다.


이슬람과 페르시아 문명의 접목

기자는 이 大모스크를 바라보면서 스페인에서 감동했던 그라나다 알함브라 궁전과 코르도바의 大모스크를 떠올렸다. 이 세 건축물은 아마 이슬람의 3大 건축물일 것이다. 이를 만든 움마야드 王朝의 교양과 안목과 기술은 그리스-로마-비잔틴의 전통과 연결된다. 7~8세기 이슬람이 동서양을 석권할 때 이들은 그리스-로마의 전통을 이어서 예술과 과학 기술을 발전시켰다.

이것이 코르도바나 나중의 십자군을 통해서 유럽에 전해졌고, 르네상스의 원동력이 되었다. 유럽에선 5세기에 로마를 무너뜨린 게르만族이 기독교化해 가면서 그리스-로마를 잊고 있을 때 이슬람이 中東에서 그 전통을 이어 갔던 것이다.

움마야드 王朝에 의해서 이슬람 치하로 들어간 시리아와 그 주변 지역은 그리스와 로마를 포함한 서양문명의 오랜 요람이었고, 문화적 축적이 엄청났다. 그런 토양에서 이슬람 문명이 자라난 것이다. 움마야드 王朝를 무너뜨린 압바시드 王朝는 수도를 바그다드로 옮겼다.

이슬람은 여기서 찬란했던 페르시아 문명과 접목되어 다시 한 번 꽃을 피운다. 이란(페르시아) 사람들은 이슬람化한 뒤 유능한 테크노크라트가 되어 中東·인도·중앙아시아·몽골제국의 구석구석에서 중용되었다.

시리아를 여행해 보니 이 나라와 국민들은 비록 가난하지만 품격이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건축물, 음식, 옷차림, 상품, 태도 등을 통해서 드러나는 품격이야말로 문화와 역사의 축적에서 자연스럽게 우러난 것이리라. 다양한 민족·종교·제도가 약 1만년의 역사 속에서 충돌, 융합하면서 빚어낸 33개의 문명, 그 後光(후광)을 받은 나라이고 사람들이기에 촌스럽지 않고 어른스러운 것이다. 역사는 흉기가 아니라 교양인 것이다.●


[ 2016-02-25, 09:0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