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14.03.13 04:00
도시 자체가 오랜 역사의 흔적을 고스란히 품은 거대한 화석 같은 곳들이 있다. 이를테면 폼페이와 두브로브니크가 그렇다. 베수비오 화산 폭발이 도시 전체의 시간을 멈춰버려 사람도 동물도 집도 물건도 살아있는 화석처럼 굳어버린 도시가 폼페이라면, 내전의 상처로 여기저기 팬 역사의 흔적을 고이 보듬고 있는 도시가 바로 두브로브니크다. 최근에는 '꽃보다 누나'때문에 화제가 된 곳이다.
과도한 개발로 역사의 흔적을 말끔히 지워버린 도시들과 달리, 두브로브니크는 아픈 곳은 아픈 대로 아름다운 곳은 아름다운 대로 시간의 발자취를 간직하고 있다. 구시가지 전체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이곳은 길이 2㎞ 높이 25m 성곽으로 둘러싸인 올드타운의 웅장하면서도 정겨운 풍모로 여행자들을 사로잡는다. 비행 시간 때문에 부득이 밤에 도착했지만, 올드타운은 전혀 무섭지 않았다. 필레게이트를 지나 올드타운에 들어서니 가로등보다 눈부시게 빛나는 대리석들이 플라차 대로를 환히 밝혔다.
- 두브로브니크(Dubrovnik)
- 크로아티아 달마티아 남부 아드리아 해(海)에 접한 역사 도시. 두브로브니크의 역사는 7세기 라구사(Ragusa)라는 도시를 형성하면서 시작된다. 12세기 말 일찍이 베네치아 공화국의 주요 거점 가운데 하나로 지역 내 무역 중심지로 떠오르며 지중해와 발칸 지역을 연결하는 역할을 했다. 1205년에는 베네치아 공국의 지배하에 들어갔으나 1358년 자치권을 회복한 뒤로는 상업 중심지로 계속 부흥하며 예술, 과학, 문학이 번성했고 작곡가, 시인, 철학자, 화가 들이 몰려들어 아드리아 해의 주요 문화 중심지로 떠올랐다.
밤이 찾아오면 두브로브니크 성곽 전체가 광대무변한 아드리아해를 지키는 외로운 등대처럼 보인다. 아침이 밝자마자 부지런히 성곽 투어에 나섰다. 아드리아해의 푸른 바다와 어우러져 더욱 선연히 빛나는 오렌지빛 지붕집들, 육중하거나 삼엄한 느낌보다는 아늑하게 그 안에 있는 모든 존재를 감싸는 듯한 푸근한 성곽 도시가 눈길을 사로잡는다. 이보다 더 아름다운 풍경이 또 있을까 싶다가도, 몇 계단만 더 오르면 또 다른 각도로 신비로운 자태를 뽐내는 두브로브니크의 변화무쌍한 얼굴을 만날 수 있다. 성벽 투어가 시작되면 마음의 시계가 평소보다 느리게 움직이기 시작한다. 관광 안내 책자에는 두세 시간이면 충분하다고 나오지만 막상 계단을 오를 때마다 시시각각 달라지는 아드리아해의 풍광을 마주하면 걸음을 재촉하기는커녕 오히려 일부러 발길을 멈추게 된다.
천혜의 전망대로 꼽히는 올드타운의 부자(Buza) 카페
성곽을 따라 걷다 보면, 건물 곳곳에 구멍이 뚫려 있거나 지붕이 날아간 집들을 볼 수 있다. 1991년 크로아티아가 유고연방으로부터 독립을 선언한 후 시작된 내전의 상처들이다. 내전으로 건물 800여채 중 68%가 무너졌다.
내전의 상처를 더욱 생생하게 보여주는 곳은 스르지산 정상의 전쟁박물관이다. 성곽 투어를 마친 후 케이블카를 타고 스르지산 꼭대기에 올라가니 비로소 내전의 트라우마가 여전히 꿈틀대는 전쟁박물관이 보였다. 포탄에 맞서 지식인들이 인간띠를 만들어 문화유산 파괴에 반대하였던 두브로브니크는 단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이기 때문이 아니라 내전의 상처를 공유하는 모든 이의 아픔과 정성이 빚어낸 집단적 기억의 장소이기에 더욱 가슴 시린 곳이다.
두브로브니크를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스르지산 꼭대기의 노천 카페는 올드타운의 부자(Buza) 카페와 함께 가장 한가롭게 두브로브니크의 풍경을 즐길 수 있는 천혜의 전망대다. 동트는 두브로브니크나 석양의 아드리아해를 오래오래 바라보고 싶다면, 스르지산에 오르면 된다.
저녁에는 두브로브니크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공연을 보려고 서둘렀다. 소프라노 산드라 바가리치(Sandra Bagaric)의 노래는 허스키하면서도 격정과 애상을 동시에 품고 있어 객수(客愁)를 자극했다. 집시풍의 애절함과 발랄한 낙천성이 동시에 느껴지는 매력적인 목소리였다. 두브로브니크의 상징인 스폰자궁으로 가는 길에는 내전 당시 용감하게 싸우다 목숨을 잃은 병사 200인을 추모하는 전시 공간이 있다. 전쟁의 상처는 이곳을 향한 크로아티아인들의 장소애(場所愛)를 더욱 굳건히 만들었을 것이다.
이푸 투안은 장소에 대한 인간의 사랑을 '토포필리아(Topophilia)'라 불렀다. 단지 어떤 장소가 좋아서 찾아가거나 거주하고 싶은 욕망만이 토포필리아는 아니다. 장소에 대한 깊은 사랑은 인간의 끈질긴 속성조차 바꾼다. 장소와 뿌리 깊이 연결된 자신의 삶을 바꾸는 힘, 그것이 진정한 토포필리아다.
철학자 이반 일리치는 '과거의 거울에 비추어'에서 거대한 아파트에 수용되어 스스로를 가두는 현대인을 호모 카스트렌시스(수용되는 인간)라 불렀다. 진정 장소를 사랑하는 이는 그 장소에 파묻혀 스스로를 안전히 봉인하는 것이 아니라, 공간을 자신의 손으로 끊임없이 가꾸고 보살피고 어루만진다. 그들은 애초에는 고향이라는 이유로 이곳을 사랑했겠지만, 이제는 내전의 상처를 극복한 집단적 기억으로 더욱 굳게 뭉쳐 두브로브니크를 지켜내고 있었다.
여행은 단지 익숙한 공간을 떠나 새로운 공간에 자신을 던지는 것만은 아니다. 낯선 공간을 영혼의 거울 삼아 내가 사는 공간을 되비춰보는 것, 그럼으로써 우리가 사는 공간을 더욱 밝고 따스한 장소로 변화시키는 창조적 상상력이야말로 여행이 주는 최고의 기쁨이다. 장소에 대한 사랑, 그것은 우리 삶을 바꾸고 꿈을 바꾸며 마침내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터전이 지닌 고유의 빛깔까지 바꾸어낸다.
여행 수첩
호텔 엑셀시어 호텔(www.hotel-excelsior.hr)
CNN이 선정한 세계 10대 밸런타인데이 프러포즈 장소로 꼽힐 정도로 야경이 멋지다. 호텔에서 나와 올드타운으로 내려가는 길 왼편에는 아드리아해가 거대한 병풍처럼 시원하게 펼쳐진다. 인터파크투어를 통해 문의하면 13만1400원부터 예약 가능하다. 그 밖에도 다양한 가격대의 호텔과 민박이 즐비하다.
가는 방법
한국에서 출발하는 직항 노선은 없지만, 유럽의 대도시에는 대부분 두브로브니크로 가는 비행기나 기차가 있다. 로마~두브로브니크 왕복 비행기표는 1인당 43만원 정도. 로마에서 두브로브니크까지는 비행기로 1시간 25분 거리. 크로아티아항공에서 예매 가능하다.
즐길 거리 : 두브로브니크 성곽 투어, 올드타운, 프란체스코 수도원과 렉터궁, 스폰자궁, 블라이세 광장과 성 블라이세 교회 등이 볼만하다. 케이블카를 타고 스르지산 꼭대기로 올라가면 두브로브니크 전체는 물론 로크룸섬과 드넓은 아드리아해를 시원하게 조망할 수 있다.
인근 여행지 : 환상적인 하이킹 코스를 자랑하는 플리트비체 국립공원은 층층이 계단으로 연결된 호수 16개, 크고 작은 폭포 90여개로 장관을 이룬다. 성 도미니우스 대성당으로 유명한 스플리트 구시가지도 관광객이 많이 찾는 명소다.
먹을 곳 : 크로아티아는 해산물 요리로 유명한데, 달마티노 식당(Konoba Dalmatino)의 오징어와 새우 요리가 특히 훌륭했다. 구운 오징어 요리는 90쿠나, 오징어 먹물 리조토는 90쿠나, 새우 요리는 138쿠나다 (1쿠나 193원 기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