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人物情報 參考

박근혜

鶴山 徐 仁 2013. 2. 1. 17:20

 

박근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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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朴槿惠
박근혜 (2009년)
박근혜 (2009년)
대한민국 대한민국제18대 대통령
임기 2013년 2월 25일 ~ 2018년 2월 24일(예정)
전임: 이명박(제17대)

대한민국 대한민국의 제8 ~ 9대 영부인 (대행)
임기 1974년 8월 16일 ~ 1979년 10월 26일
대통령 박정희
전임: 육영수(제5 ~ 8대)
후임: 홍기(제10대)

국적 대한민국 대한민국
출생일 1952년 2월 2일(1952-02-02) (60세)
출생지 대한민국 대한민국 경상북도 대구시 삼덕동
정당 새누리당
학력 서강대학교 전자공학 학사
서명 Park Geun-hye signature.png
웹사이트 http://www.parkgeunhye.or.kr
트위터 @GH_PARK[1]
박근혜 (朴槿惠)
기본 정보
출생 1952년 2월 2일(1952-02-02) (60세)
대한민국 대한민국 경상북도 대구시 삼덕동
학력 서강대학교 전자공학 학사
경력 새누리당 제18대 대통령 후보 (2012년)
새누리당 비상대책위원장 (2012년)
한나라당 비상대책위원장 (2011년 ~ 2012년)
한나라당 제17대 대통령경선후보 (2007년)
한나라당 대표 (2004년 3월 ~ 2006년 6월)
한국미래연합 대표최고위원 (2002년 5월 ~ 2002년 11월)
한나라당 부총재 (2000년 ~ 2002년)
정수장학회 이사장 (1994년 ~ 2005년)
육영재단 이사장 (1982년 ~ 1990년)
영남대학교 이사 (1980년 ~ 1988년)
한국문화재단 이사장 (1980년 ~ )
국회의원 정보
의원 선수 5
의원 대수 15, 16, 17, 18, 19
정당 새누리당
지역구 비례대표
상임위원회 기획재정위원회

박근혜(朴槿惠, 1952년 2월 2일 ~ )는 대한민국정치인으로, 대한민국의 제18대 대통령 당선자이다.

1952년 2월 2일 박정희육영수의 사이에서 태어났다. 1963년 부친 박정희의 대통령 취임 이후 청와대에서 성장하였고, 1970년 서강대학교에 입학하여 전자공학을 전공하였다. 1974년 모친 사후부터 1979년 10·26 사건 이전까지 퍼스트 레이디의 직무를 수행하였고, 10·26 사건 이후 청와대에서 나와 육영재단 이사장과 정수장학회 이사장 등을 맡았다. 1998년 정계에 입문하여 그해 4월 2일에 실시된 재보궐선거에서 제15대 국회의원에 당선된 이후 제19대까지 5선 국회의원을 지냈다. 한나라당의 부총재와 대표최고위원을 역임하였으며, 2007년 한나라당의 대통령 후보 경선에 출마하였지만 이명박에게 석패하였다. 이후 새누리당 비상대책위원장을 지내면서 2012년 4월 11일에 실시된 제19대 국회의원 선거를 승리로 이끌었고, 새누리당의 대통령 후보로 선출되어 2012년 12월 19일에 실시된 제18대 대통령 선거에서 민주통합당의 대통령 후보 문재인을 상대로 약 108만 표 차로 승리하여 당선되었다.[2] 2013년 2월 25일 대한민국대통령으로 취임하게 될 예정이며,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최초의 여성[3] 대통령이자 1987년 대한민국 헌법 개정 이후 최초의 과반 득표 대통령, 최초의 이공계 출신 대통령, 부녀 대통령, 독신 대통령이다.[4]

목차

[숨기기]

[편집] 생애

[편집] 생애 초반

[편집] 출생과 초기 활동

할아버지 박성빈

박근혜는 1952년 2월 2일 경상북도 대구시 삼덕동(현재의 대구광역시 중구 삼덕동)에서 전시(戰時) 대구 주재 육군본부 작전‧교육국 작전차장 박정희 대령과 중등학교 교사 출신인 그의 부인 육영수의 딸로 태어났다. 어머니 육영수에게는 첫 소생이었으나 아버지 박정희는 이혼 경력과 전처소생의 장녀 박재옥이 있었으므로 박정희에게는 차녀가 된다. 형제로는 언니 박재옥(한병기의 아내)과 동생 박근령(육영재단 이사장), 박지만(EG 대표)이 있다. 원적지는 경상북도 구미시 상모동이다.

아버지 박정희경상북도 선산군 구미면 상모리(현재의 경상북도 구미시 상모동)에서 소작농 박성빈과 부인 백남의의 5남 2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구미공립보통학교(현재의 구미초등학교), 대구사범학교(현재의 경북대학교 사범대학)를 거쳐 만주군관학교 예과와 일본육군사관학교 본과를 졸업하고 만주국 육군 소위로 임관하여 중위 때 해방을 맞아서 귀국, 국방경비사관학교(현재의 육군사관학교) 제2기로 임관하여 재직 중이였다.

어머니 육영수충청북도 옥천군의 대지주인 육종관과 부인 이경령의 차녀로 태어나 배화여자고등보통학교(현재의 배화여자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옥천공립여자전수학교(현재의 옥천여자중학교)에서 가정과 교사로 1년 반 동안 봉직한 경력이 있었다. 외조부 육종관은 딸이 과거 혼인 경력이 의심스럽고 가난한 군인에 불과한 박정희와 결혼하는 것을 반대하였으나 박정희와의 결혼 결심을 굳힌 육영수가 어머니 이경령, 동생 육예수와 함께 박정희가 있는 경상북도 대구시로 가서 결혼식을 강행하였다.

박정희는 소령이던 1949년, 여순 사건에 따른 숙군 여파로 육군 특무대(현재의 국군기무사령부)의 가혹한 고문끝에 남조선로동당 가입 혐의로 육군 고등군법회의에서 유죄를 선고받고 파면되어 육군 정보국에서 직제에도 없는 문관으로 근무하였다. 1950년 한국 전쟁의 발발로 인해 가까스로 복직하고 대구사범학교 후배이자 부하 장교인 송재천(육영수의 이재종오빠)의 소개로 만난 육영수와의 재혼에 따른 안정기를 구가하던 시절이 박근혜가 태어난 무렵이다. 한국 전쟁이 휴전에 들어가자 군인인 아버지의 임지를 따라 전라남도 광주시, 서울특별시에 거주하며 유년기를 보냈다.

[편집] 5·16 군사 정변에 관한 박근혜의 회고

1961년 5월 15일 오후 10시 경, 거사를 위해 집을 나서려던 육군 제2군 부사령관 박정희 소장에게 부인 육영수가 "근혜 숙제 좀 봐주세요."라며 가족간의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면담을 에둘러 요구하였다. 이에 박 소장은 잠시 방에 들러 숙제를 하고 있던 초등학교 5학년생 박근혜와 곁에서 잠든 장모 이경령과 3녀 근영, 장남 지만을 훑어본 뒤에 집을 나선다. 이 때 "무슨 숙제입니까?"라는 거사 동지 장태화의 물음에 박정희는 "어, 뭐 그림 그리는 거야!"라고 답한다. 하지만 박근혜는 아버지의 기척은 알았으나 자신이 무슨 숙제를 하고 있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고 후술하였다.

"그날 아버지께서 들어오셔서 저를 한번 보고 나가신 것은 기억나는데, 무슨 숙제를 하고 있었는지는 기억에 남아 있지 않아요. 어머니께서는 집안을 정리하시고 계셨습니다. 그날은 집안이 평소와 다르게 긴장되어 있었으나 저는 무슨 일이 있는지 알 수 없었습니다. 나중에 생각하니 어머니께선 만약의 사태에 대비하여 주변을 정리하신 것으로 생각됩니다."

[편집] 학창 시절

서울 장충초등학교에 입학, 1964년 2월 졸업하였으며, 정몽준 現 새누리당 국회의원과 김승연한화그룹 회장이 그의 초등학교 동기 동창이다.[5][6] 그 뒤, 카톨릭계 미션스쿨인 성심여자중학교를 거쳐 성심여자고등학교로 진학하였으며, 1970년 서강대학교로 진학하였다.

1974년 서강대학교 공과대학 전자공학과에서 공학사 학위를 받았다. 같은 해 프랑스 그르노블 대학교에 입학하였다.

[편집] 청년기

[편집] 귀국과 퍼스트 레이디 대행

육영수 피격 사건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프랑스에서 유학 생활 중이던 1974년, 8월 15일 광복절 기념 행사에서 어머니 육영수가 재일 동포 문세광의 저격으로 살해당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급거 귀국하였다. 육영수 사후 아버지 박정희는 재혼하지 않았기 때문에 대한민국의 영부인 역할을 대행하여야 하였다. 어머니가 살해당한 1974년부터 대통령이었던 아버지가 살해당한 1979년 10월까지가 그 기간이다. 1975년부터 최태민의 권유로 새마을 운동에 참여하였다.[7] 또한 박정희가 추진한 새마을 운동의 일환인 새마을 운동을 주도하기도 하였다. 이때 최태민 등이 그의 새마음 사업에 참여한 것이 후일 문제가 되기도 하였다.

이후 그는 의전상의 영부인 권한대행으로써 아버지 박정희의 공식 행사와 해외 순방 등을 수행하였다. 육영수 피격 후 조직된 육영수여사기념사업회 이사가 되었다.

[편집] 박정희 피격 이후

10·26 사건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1979년 10월 26일 아버지 박정희가 암살되자 며칠 뒤 청와대를 떠나 동생들을 데리고 서울특별시 신당동 사저로 돌아갔다. 부친 암살 당시 육군사관학교 생도이던 남동생 박지만은 1981년 방공포병과를 택해 소위로 임관한다. 그 후 지만은 군 복무중 불의의 교통사고를 당하고 그에 따른 후유증을 덜고자 마약에 손을 댔고, 이후 사창가와 여관 등에서 윤락녀와 공동 투약하며 어울리는 등 상습 투약으로 여러 차례 법원에서 유죄 선고를 받았다.[8] 박정희 피격 당시 슬퍼하지 않고 침착하게 대응하여 화제가 되기도 하였다.

이때 전두환에게서 아버지 박정희가 남긴 통치 자금 6억 원을 수령했는데 이 부분이 후일 그의 정치활동 기간 중 문제가 되기도 하였다. 1980년 육영수여사기념사업회 이사장을 지냈고, 1982년 박근혜는 육영재단, 1994년 정수장학회 이사장을 역임하였다.

[편집] 사회 사업

[편집] 박근혜와 최태민

박근혜는 어머니인 육영수가 서거한 다음 해인 1975년에 위로, 격려편지와 전화를 준 최태민이라는 목사를 알게 된다.[9] 대한민국의 정보기관인 중앙정보부에서 작성한 보고서에 따르면 박근혜와 최태민이 만난 시점은 1975년 3월 6일이라고 한다.[10]

이후 최태민은 박근혜와의 관계를 내세워서 기업인을 자신이 운영하던 구국봉사단의 운영위원으로 위촉하고, 이들로부터 1인당 2천만~5천만 원의 입단 찬조비나 월 200만 원의 운영비를 받았다.[11]

이에 대해 박정희대통령이었을 당시 공보비서관을 지낸 선우연2005년 11월 월간조선과의 인터뷰를 통하여 1977년 9월 12일 밤 박정희가 물의를 일으킨 최태민을 거세하고, 최태민과 관련된 구국봉사단도 해체하라는 지시를 내렸다'고 자신의 비망록을 공개하였다.[9]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를 시해한 김재규육군계엄고등군법회의에서 사형 판결을 받았고, 김재규의 변호인은 육군계엄고등군법회의 '항소이유서'와 '항소이유 보충서'를 군법회의 측에 제출하였는데, 이 두 서류에 992자 분량으로 최태민 관련 내용이 작성되어 있다.

김재규 측은 10·26 사건의 정당성을 주장하는 논거의 하나로 최태민을 거론하였고, 김재규 변호인이 항소이유서에서 밝힌 최태민 관련 전문은 아래와 같다.

피고인(김재규 본인)은 1975년 5월 구국여성봉사단 총재로 있는 최태민이라는 자가 사이비 목사이며 자칭 태자마마라고 하고 사기횡령 등의 비위사실이 있는데다 여자들과의 추문도 있는 것을 알게 되었는데, 이런 일을 아무도 문제 삼는 사람이 없어서 대통령에게 보고하였더니 박 대통령은 ‘정보부에서 그런 것까지 하냐?’ 하면서 반문하길래 피고인으로서는 처음에 대통령의 태도를 보고 놀랐으며, 대통령은 큰딸인 박근혜에게 그 사실을 알렸으나 근혜가 그렇지 않다고 부인하여 대통령이 직접 조사하겠다고 하였는데, 그 조사 후에 최태민이란 자를 총재직에서 물러나게는 했으나 그 후 알고보니 근혜가 총재가 되고 그 배후에서 여전히 최태민이 여성봉사단을 조종하면서 이권개입을 하는 등 부당한 짓을 하는데도, 박 대통령은 김 피고인의 ‘큰 영애도 구국여성봉사단에서 손떼는 게 좋습니다. 회계장부도 똑똑히하게 해야 합니다’란 건의를 받아들이지 않았던 일도 있어서, 대통령 주변의 비위에 대하여 아무도 문제 삼지 못하고 또 대통령 자신 그에 대한 판단을 그르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12]

그리고 김재규 변호인은 '항소이유 보충서'에서 아래와 같이 최태민에 대하여 언급하였다.

구국여성봉사단이라는 단체는 총재에 최태민, 명예총재에 박근혜양이었는 바, 이 단체가 얼마나 많은 부정을 저질러왔고 따라서 국민, 특히 여성단체들의 원성의 대상이 되어왔는지는 잘 알려져 있지 아니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큰 영애가 관여하고 있다는 한 가지 이유 때문에 아무도 문제 삼는 사람이 없었고 심지어 민정수석 박승규 비서관조차 말도 못 꺼내고 중정부장인 본인에게 호소할 정도였습니다. 본인은 백광현 당시 안정국장을 시켜 상세한 조사를 하게 한 뒤 그 결과를 대통령에게 보고하였던 것이나 박 대통령은 근혜양의 말과 다른 이 보고를 믿지 않고 직접 친국까지 시행하였고, 그 결과 최태민의 부정행위를 정확하게 파악하였으면서도 근혜양을 그 단체에서 손떼게 하기는커녕 오히려 근혜양을 총재로 하고, 최태민을 명예총재로 올려놓아 결과적으로 개악을 시킨 일이 있었습니다.”[12]

김재규 측에 이러한 증언과 관련하여 당시 중앙정보부에서 파견되어 최태민을 수사를 하였던 백광현은 김재규가 10.26 후에 10.26의 명분으로 주장한 최태민 사건은 김재규가 억지로 10.26의 명분으로 주장하였을 뿐이라고 증언하였다.[13]

이후 최태민은 그의 활동에 대해 의문이 제기되어 1980년신군부에 의하여 활동을 못하도록 잠시 강원도로 보내졌다.[11]

1982년 박근혜는 육영재단 이사장에 취임하였고, 최태민도 육영재단에 합류하였다. 이후 박근혜와 최태민은 함께 1989년 육영수를 추모하는 단체인 근화봉사단을 조직하였고, 박정희와 육영수를 추모하는 월간 신문인 근화보도 발행하였다.

1년 뒤인 1990년 9월 근화보는 15호를 마지막으로 폐간하였고, 박근혜와 여동생인 박근영과의 육영재단 운영권 다툼이 시작되었다. 박정희, 육영수 숭모회에 따르면 다툼의 원인은 최태민이 박근혜를 배후에서 조종하여 육영재단의 운영을 전횡한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당시 육영재단의 간부는 1987년 9월 2일 어린이회관 노조원들이 외부세력 물러가라며 1주일 동안 농성하였던 것은 최태민을 겨냥한 것이라고 한다. 또 '특별한 직책도 없으면서 육영재단 운영을 좌우해온 최태민을 싫어하면서도 박근혜와 막역한 관계 때문에 어느 누구도 기를 펴지 못하였다'고 한다.

이에 박근혜는 1990년 11월 육영재단 이사장 퇴진 기자 회견에서 아래와 같이 밝혔다.

내가 누구에게 조종을 받는다는 것은 내 인격에 대한 모독이다, 최 목사는 88년 박정희 기념사업회를 만들 때 내가 도움을 청해 몇 개월 동안 나를 도와주었을 뿐이다.[14]

이 때 박근혜의 여동생과 남동생인 박서영박지만은 최태민이 언니인 박근혜를 속이고 있으니 구하여 달라며, 당시 대통령이던 노태우에게 A4용지 12장 분량의 편지를 보냈다. [15]

최태민은 1994년 사망하였으며, 이후 박근혜는 언론에서 최태민에 대하여 '저에게는 고마운 분'이라며 두둔하였다.

이에 논객인 조갑제는 '박대표는 한번 믿어버린 사람에 대해서는 객관적인 평가를 안하는 경향이 있는 듯하다'라고 말하였다. [16]

[편집] 10·26 사건 이후

1980년민주공화당 인사들과 유신정우회 인사들이 한국국민당을 창당했고, 1987년에는 김종필을 중심으로 다시 신민주공화당이 출범하였으나 참여하지 않았다.

1982년 박근혜는 육영재단, 1994년 정수장학회 등을 인수하여 운영하였다. 이후 언론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정치적 발언은 삼가하며 육영재단과 정수장학회 일에 전념하다가 1998년이회창의 정계 입문 권유로 정계에 입문하였다. 그러나 육영재단이나 정수장학회, 영남대학교 재단 운영 과정에서 비판이 있었고 후일 그가 한나라당 대표나 2007년 유력 대선 주자로 나올 때마다 수시로 의혹이 제기되었다.

[편집] 정치 활동

[편집] 정계 입문 초기

[편집] 정계 입문

박근혜는 1997년 12월 2일 사촌 오빠 박재홍의 소개로 한나라당제15대 대통령 선거 후보였던 이회창과 만났다. 이후 1997년 12월 10일 제15대 대통령 선거 이회창 지지를 선언하며 한나라당에 입당하였다. 이후 이회창의 권유로 1998년 4월 2일 한나라당의 후보로 대구광역시 달성군의 국회의원 보궐선거에서 당선되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의 딸이라는 점과 미혼 여성 정치인이라는 점 등으로 많은 주목을 받았다. 출신 성분은 아버지인 박정희 전 대통령을 지지하는 보수 진영 및 영남, 어머니인 육영수의 고향인 충청 지역의 지지를 얻는 데 유리하게 작용하였다.

이후 2000년 한나라당의 부총재로 선출되었지만 2002년 2월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이회창을 비판하며 한나라당에서 탈당하였다. 이후 한국미래연합을 창당[17]하였으나 대선 전에 복귀하였다. 2002년 5월 12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방문, 5월 13일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만나 회담을 하고[17] 5월 14일 서울특별시로 돌아왔다.[17]

[편집] 노무현 대통령 탄핵 역풍과 당 대표

2004년 3월 12일, 한나라당이 다수(133석/273석)이던 제16대 국회에서 한나라당은 새천년민주당과 함께 노무현 대통령을 탄핵 소추하려고 단식농성을 했다. 비슷한 성향의 언론과 학계의 지원이 있었으나 한나라당은 국민의 외면을 받고 계획은 물거품이 되었다. 차떼기 사건이 불거지면서 한나라당의 지지도는 유례없이 급락해 최병렬 대표마저 사퇴하게 된다.

한나라당이 '역풍 위기'에 처했을때, 착실하게 당 내에서 입지를 쌓고 있던 박근혜가 그의 뒤를 이어 3월 23일 당 대표가 되었다.[18] 기존의 다선 의원, 중진 의원, 운동권에서 포섭해 온 세력 등과 다르게 박근혜는 여러 차례 기자 회견을 통해 국민에게 사죄를 표명했고, 제17대 총선에서 한나라당은 원내 1당의 자리는 내주었지만 121석을 차지하여 예상 외의 선전을 하였다. '탄핵 역풍 위기'에서 박근혜가 한나라당을 구해낸 것이다. 이때부터 박근혜의 영향력이 커지기 시작하면서, 잠재적 차기 대권 주자로 부상했다. [19]

6월 13일 오전 신라호텔에서 열린 6.15 공동선언 5주년 기념 학술 회의에 다녀오기도 했다.[20]

2005년 12월 여당인 열린우리당은 사학법을 직권상정하여 처리하였다. 당시 대표인 박근혜는 곧바로 장외 투쟁을 선언하고 거리로 나섰다. 당시 한나라당 내부에조차 회의적인 시선이 많았다. “한나라당이 무슨 장외 투쟁이냐”는 비아냥도 있었고, 국회 등원에 대한 여론의 압박도 심했다. 하지만 박 전 대표는 장외 투쟁을 계속했고, 결국 여야는 한나라당의 장외 투쟁 3개월 만에 사학법 재개정 논의에 합의하게 된다. 박근혜 대표는 주변의 반대와 한나라당의 체질이라는 문제에도 불구하고, 사학법 재개정을 이끌어낸 것으로 평가되었다. 2004년 17대 총선의 ‘한나라당 천막 당사’ 역시 “쇼 아니냐”는 비판에도 불구하고 한나라당의 상징물로 기억됐다.[21]

제17대 국회의원 선거 승리를 위한 한시적인 대표가 될 것이라는 일부 예상을 깨고 오랫동안 대표 자리를 지켰다.

[편집] 박근혜 피습 사건

2006년 5월 20일 지방 선거 유세 중 지충호가 휘두른 문구용 칼에 베어 얼굴에 심한 상처가 났음에도 불구하고 당원들에게 선거 판세를 물어보는 모습을 보여 당 안팎에서 높은 지지를 받았다. 지충호는 2006년 5월 20일 인천에서 버스를 타고 서울 신촌에 와서 4시간을 기다려 오후 7시 20분경에 오세훈 전 서울시장 선거유세를 위해 도착한 박근혜가 연설 목적으로 단상에 오르는 순간 박근혜의 목에 커터칼로 공격을 가하였다. 당시 공격으로 박근혜는 11센티에 걸쳐 최저 1센티에서 최고 3센티 깊이의 자상을 입어 수술을 받았다. 병원에서도 '대전은요'라는 말로 선거를 챙겨 지방 선거를 승리로 이끌었다.

[편집] 2007년 대선

2004년부터 한나라당의 위기와 재도약을 이끈 박근혜는 2007년 대선의 유력한 예비후보 중 하나였다. 박근혜는 한나라당의 당권과 대권의 분리 방침에 따라 2007년 대선을 1년 남긴 2006년 6월 16일에 대표직을 사퇴하고 대선 레이스에 돌입하였다. 박근혜의 가장 큰 상대는 서울시장을 지냈으며, 그 과정에서 청계천 복원, 버스노선 개편 등으로 인기를 끈 이명박이었다. 본격적인 대선 경선 레이스가 시작되고 박근혜는 이명박의 부패 비리 의혹을 집중 제기하였다. 이 과정에서 BBK 주가 조작 사건 등이 처음으로 제기되기도 하였다.

2007년 당시 검증 청문회를 받았다. 이때는 그동안 박근혜가 정계 입문 이후 제기되어왔던 각종 의혹이 모두 도마에 올랐다. 그러나 전두환 자금 6억 원 수수설 등 일부는 시인했으나 일부는 부정, 비판하였다. 이를 두고 朴, 곤란한 질문에는 이리저리 답변 피했다[22]는 비판도 있다.

열린우리당 윤호중 대변인은 이날 국회 브리핑에서 “박근혜 전 대표가 전두환 전 대통령으로부터 받은 돈이 9억이 아니라 6억이라는 것이 밝혀진 것을 빼고 하나도 새롭게 검증된 것이 없는 청문회였다”면서 “국민이 궁금해 하는 후보의 자질의혹을 검증하기보다 면죄부와 해명 기회만을 준 시간이었고 후보자의 맷집만 훈련시킨 청문회였다고 평가한다”고 주장했다.[23] 민주노동당 김형탁 대변인은 “정치쇼에 불과하다”면서 “하나마나한 청문회, 시간낭비, 전파낭비일 뿐”이라고 깎아 내렸다.

한나라당 대선후보 경선에서 일반 당원, 대의원, 국민선거인단 경선에서 모두 승리하였지만, 1표를 실제의 5표로 환산한 여론조사에서 뒤져 이명박에게 대선 후보 경선에서 패했다. 표의 등가성 문제와 관련하여 논란이 일었으나, 박근혜는 깨끗이 승복하였다.[24] 하지만, 논란의 연장선상으로 이후에 대선 후보 자리를 박근혜에게 양보해야 한다는 주장도 제기되었다.[25]

[편집] 이명박 정부 시절

이명박이 대통령에 당선된 이후, 한나라당 내부에는 친이명박 계열과 친박근혜 계열의 논쟁이 있었다. 한나라당 내에서 친박계 의원들의 숫자는 2011년 6월 현재 비공식적으로 90 ~ 100명 정도 되는 것으로 추산된다.[26] 이명박 정부 출범 이후 이명박의 대통령 선거를 직접적으로 도와준 이재오, 이방호 등이 한나라당의 주요 직책을 맡았으며, 상대적으로 박근혜 계열의 정치인들은 홀대를 받았다.

2008년 총선에서 이재오, 이방호 두 명은 적극적으로 이명박 계열의 정치인들을 후보로 내세우고, 공천에서 박근혜 계열의 정치인들을 대거 탈락시켰다. 박근혜는 이에 대해 공천의 공정성이 결여되어 있다고 수차례 비판하였으나 공천 결과에는 변함이 없었다.

박근혜는 이에 대하여 "한나라당 공천이 잘못돼 가고 있고, 기준도 없는데다 엉망"이라고 비판하였다. 또 "오로지 원칙과 기준을 가지고 공정하게 해 달라고 했는데 BBK 이야기를 한 사람은 공천에 안 된다는 둥 살생부가 공공연하게 나돌고 있는데 이것은 정말 아니다"고 지적하였다. 그는 이어 "지난 번에 경선에서 정치 발전을 위해 깨끗하게 승복했고, 한나라당에서 처음 제대로 경선을 한 것이 아니냐"며 "그로 인해 정치가 크게 발전을 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할 수 있었는데 잘못된 공천으로 그것을 다 잃어버렸다."고 말했다. 박 전 대표는 "이런 공천을 가지고는 앞으로 선거가 끝나도 한나라당이 화합하기도 힘들고, 힘든 상황이 올 것이라고 믿는다"며 "정치 발전도 앞으로 기대할 필요가 없고, 한나라당의 발전도 기대할 필요가 없다"고 경고했다.

2008년 3월 12일 박근혜는 이명박 대통령과 박근혜 전 대표가 현역 의원 50% 물갈이에 합의했다는 설과 관련, "어마어마한 음모"라며 "나는 전혀 모르는 일"이라고 반발했다. 박근혜는 "오늘 아침 기사를 보고 기가 막히기도 하면서 하다하다 이런 술수까지 난무하는구나라는 분노를 참을 수가 없었다"며 "이 쪽(친박계)에 다 뒤집어 씌우는 것이다."고 흥분했다. 그러면서 그는 "한나라당 이방호 사무총장이 우리 핵심 누구와 이야기를 했는지 분명하게 밝혀야 한다. 끝까지 밝혀 내겠다"며 "이방호 사무총장이 친박계 핵심 인사가 누군지 못밝힌다면 영남권 물갈이를 50% 한다고 해 놓고 우리한테 다 뒤집어 씌우려는 것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고 말하였다.[27]

박근혜는 2009년 이명박 정부가 세종시 수정 의견을 내자 반대하였다. 그러나 이로 인해 한나라당의 친이계와 친박계의 계파 갈등이 더 확산되었다. 최근 여론조사 결과 텃밭인 영남 지역, 중장년층, 보수층의 박근혜 지지 비중이 1 ~ 2% 낮아지고 진보층, 충청지역, 기타 연령대의 지지 비중은 1 ~ 2% 높아진 걸 볼 수 있는데 이 까닭은 여권 주류가 마음먹고 세종시를 지원해 경상북도 지역의 혁신도시가 기업을 유치하지 못하게 된다는 불안감에 따른 것으로 추정된다. 세종시 논란 이후, 지지율이 다시 회복되고 있다.[28]

박근혜는 2009년 10월 31일 부산광역시 해운대구에서 기자들과 만나 "세종시는 국회가 국민과 충청도민에게 한 약속"이라며 "세종시 문제를 개인적인 정치신념으로 폄하해선 안 된다"고 말했다. 정운찬 총리의 면담 제안에 대해서도 "국민과의 약속이 얼마나 엄중한 것인지 모르고 하는 말"이라며 "설득하고 동의를 구한다면 국민과 충청도민에게 해야지 내게 할 일이 아니다"라고 일축했다. 또 "행정복합도시라는 말 속에 문화시설과 교육, 과학 등을 다 포함한 자족기능이 들어가 있는 것"이라며 "약속을 지키고 부족하면 플러스 알파로 더 잘되게 해야지 약속을 어기면 안 된다"고 지적했다. "자족기능 강화를 위해 세종시 계획을 수정해야 한다"는 정운찬 총리의 논리에 대해 조목조목 반박했다. 이 같은 비판은 10·28 재보선이 끝나자마자 정 총리가 세종시 수정 추진 행보에 속도를 붙이자 제동을 건 것으로 보인다.[29] 이명박 대통령의 공식 세종시 수정 발언에도 불구하고 11월 27일 “할 말을 이미 다 했고, 입장(원안+알파(α))에 변함이 없다”며 기존 입장을 고수하였다.[30]

[편집] 친박연대 창당

대한민국 정당의 역사상 유례가 없는, 개인의 이름을 정당명으로 사용한 정당이 친박연대이다. 박근혜라는 개인의 이름을 정당명으로 사용하였다. 그래서 개인의 이름을 정당명으로 사용하는 것이 가능한가에 대한 시비가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급기야 서청원, 홍사덕 등의 주도로 공천에서 탈락한 박근혜계 정치인들이 대거 탈당하여 친박연대를 창당하고, 다른 정치인들은 친박 무소속 연대를 결성하였다. 박근혜는 이들과 행보를 같이 하지는 않았지만 공천 결과에 대해 "나도 속고 국민도 속았다"는 강도 높은 비판과 함께 "살아서 돌아오라"는 발언을 통해 간접적인 지원을 하였다.

박근혜는 한나라당 후보로 국회의원에 다시 당선되었고, 이재오, 이방호는 낙선하였으며, 친박연대는 지역구 6석, 전국구 8석이라는 예상 외의 높은 지지율을 달성하였다. 친박 무소속 연대도 총 12명이 당선되었다. 이후에도 박근혜는 꾸준히 친박연대 및 무소속 친박 당선자들의 복당을 요구하였다. 친박 측과 앙금이 남아있던 강재섭 대표의 임기가 종료되고 박희태 전 의원이 대표로 부임한 뒤 마침내 친박 무소속연대 소속 의원과 친박연대의 지역구 의원 전원이 한나라당으로 복당하여 한나라당 내 친박의원 의석수는 60여명에 이르게 되었다. 친박연대의 전국구 의원 5명은 당명 개정, 독자 활동을 꾸준히 하고 있고 양정례, 서청원, 김노식은 당선무효형이 대법원에서 확정되어 의원직을 상실하였다.

미국산 쇠고기 반대 촛불 시위가 있었던 2008년 6월 박근혜는 "근본 대책이 나와야 한다"는 원론적인 얘기만 한 차례 한 뒤 줄곧 침묵을 지켰다. 하지만 촛불집회가 본격적인 거리 투쟁으로 비화된 5월에도 그는 당을 떠난 친박 측근들의 복당 문제 얘기를 주로 했다. 이후 계속되는 복당 요구에 네티즌들의 의해 '복당녀'라는 별명이 생기며 비판받기도 하였다.

남북관계 경색이 지속되자, 김대중 전 대통령과 함께 박근혜는 '대북 특사론'의 유력한 인물로 꼽혔다.

또한 박근혜는 이명박 대통령의 유럽 특사로 임명되어 계파갈등이 해빙될 조짐이 보이기도 하였다.[31]

[편집] 이명박과의 관계

2007년 대선 이전에 있었던 경선에서 박근혜는 이명박과 경쟁하며 갈등을 겪어왔다. 경선 당시 박근혜 진영은 이명박이 전과 14범이라는 주장을 하거나,[32] 위장전입 문제도 파헤쳐[33] 이명박은 이 때문에 국민들에게 사과를 해야 했다.[34] 이러한 갈등은 이명박이 대통령에 당선된 이후에도 지속되어 왔다. 친박계 의원들의 한나라당 공천 탈락에 대하여 박근혜는 "국민도 속았고 나도 속았다"라는 말을 하여 파장을 일으켰으며, 2008년 미국산 쇠고기 수입 협상과 관련한 촛불파동때는 재협상을 요구했고, 2009년 용산 참사 때는 경찰의 강경진압을 비판하였으며,[35] 한나라당에 의해 미디어법 개정 추진 당시에도 박근혜가 "개정안에 반대표를 던질 것"이라는 말을 던지는 등[36] 정책 문제에 대한 시각차이와 개인적인 갈등들이 복합적으로 남아있었다.

2009년 4월 7일 박근혜 전 대표는 기자들과 만나 이상득 의원의 정치 개입 논란에 대해 “이런 일이 어떻게 있을 수 있나”라며 “이번 사건은 정치의 수치”라고 정면 비판하였다.[37]

그러다가 2009년 이명박이 내놓은 세종시 수정안에 대한 박근혜의 반대론과 대하여 2010년 2월 9일 이명박은 "세계와의 전쟁에서 이기려면 힘을 모아야 한다"면서 "잘되는 집안은 강도가 오면 싸우다가도 멈추고 강도를 물리치고 다시 싸운다. 강도가 왔는데도 너 죽고 나 죽자 하면 둘 다 피해를 입을 수밖에 없다"며 '강도론'에 비유하였다. 그러자 박근혜는 다음 날 "집안에 있는 한 사람이 마음이 변해가지고 갑자기 강도로 돌변하면 그때는 또 어떻게 해야 하느냐"며 이명박과 친이계를 강도에 비유하며 정면으로 반박하였다.[38] 청와대는 "박근혜에게 한 말이 아니고 원론적인 부분을 말한 것인데 박근혜가 과민 반응했다"며 선후관계를 파악하지 않고 대통령을 폄하했다는 이유로 박근혜에게 정식으로 사과를 요구하였으나, 박근혜는 "(발언이) 문제가 있으면 있는대로 처리하면 될 것 아니냐"며 사과를 거부하였다.[39] 그러던 과정에서 청와대가 박근혜를 '한나라당 전 대표'가 아닌 '박근혜 의원'으로 호칭을 바꾼 데 대해 친박계 의원들은 "전면전에 돌입하자는 것"이라며 크게 반발하며 이동관의 사퇴까지 요구하였다.[40] 또한 친이계 정두언 의원은 "대통령한테 막말까지 하는 것을 보니까 자신이 마치 대통령이 다 된 것처럼 생각하는 것 같다"며 박근혜를 비난했다.[41] 이렇게 둘의 사그라들지 않는 갈등에 대해 중앙일보는 '경선과 대선을 거치며 둘 사이에 큰 불신이 생겼으며, 이명박도 박근혜와의 화해를 염두에 두고 있지 않고 있다'고 분석하였다.[42]

2010년 8월 22일 이명박과 박근혜의 회동이 11개월만에 성사되었다. 95분동안 진행된 회담은 보좌관도 없이 완전 비공개로 진행되었으며 회담 내용들은 거의 공개가 되지 않아 궁금증을 증폭시켰다. 동아일보는 "李-朴회동 ‘깜짝쇼 찔끔 공개’ 국민 무시다"라는 제목의 사설에서 "대통령이 여당의 실력자를 만나는 것은 중요한 국정 행위다. 그런데도 비밀 회동 방식을 택하고, 더구나 회동 결과를 청와대가 당당히 발표하지 않고 박 전 대표 측이 ‘찔끔 공개’한 것은 ‘그들만의 정치'"라며 비판했다.[43] 조선일보는 명지대 교수의 말을 인용하며 "김정일을 만나는 것도 아닌데 여권을 대표하는 두 지도자가 국민을 상대로 정치를 해야지 개인끼리 정치를 해서는 안 된다"라며 비공개 회담은 음모론을 만들 수 있다고 지적했다.[44]

국회에서 세종시 수정안이 폐기되고 원안이 통과되고 나서 한동안 박근혜와 친이계와의 갈등은 잠시 가라앉았다. 그러나 2010년 말부터 한나라당은 개헌 논의를 시작했는데 차기 대통령 후보 지지율 1위였던 박근혜는 개헌에 부정적인 입장을 보이면서 친이계와의 갈등이 다시금 드러나기 시작했다. 2011년 2월 현재까지 한나라당이 추진한 개헌 논의 대부분은 친이계가 주도하고 있으며 그 중심에는 이재오가 있다. 이재오는 박근혜가 비협조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는데 대해 "대통령이 다 된듯이 행동한다"며 비판하기도 하였다.[45]

[편집] 2010년 지방 선거와 대선 행보

박근혜 (2011년)

박근혜는 2010년에 있었던 지방 선거에서 대구광역시 달성군수로 출마했던 한나라당 후보를 적극적으로 지원하였지만 한나라당 후보는 무소속 후보에게 패배하였다. 박근혜는 "달성군민이 판단한 것도 존중한다"고만 입장을 밝혔다.[46] 차기 대선 후보로써의 지지율은 사상 최저치로 떨어져 25.1%를 기록하는 등 박근혜의 정치적 입지가 점점 좁아지자[47] 박근혜는 2010년 하반기부터 차기 대선 행보에 초점을 두고 움직이기 시작했다. 12월 20일 열린 공청회에서 복지가 화두로 토론을 하였다. 박근혜는 인사말을 통해 "서구 선진국들의 전통적 복지제도가 한계에 이르렀다"며 맞춤식 생활 보장형 복지 국가를 제안하였다.[48] 이후 12월 27일 박근혜의 대선 구상을 내놓을 '국가미래연구원'이 출범했다. 출범식에는 대한민국내 학자들과 이한구 한나라당 의원 등이 참석했다. [49] 그러나 심재철 한나라당 의원은 "복지를 늘리려면 세금을 더 거둬야 하는데 그 얘기는 감추고 무조건 복지만 잘해주겠다고 하는 것은 솔직하지 못한 태도"라고 비판했다.[50]

[편집] 당 비상대책위원장과 당명 개정

그리스 외무부장관 디미트리스 드루차스와 함께 한 박근혜

2011년 12월 9일 홍준표 한나라당 대표가 디도스 파문을 못 이기고 사퇴하자, 한나라당은 한나라당 전 대표인 박근혜를 당 비상대책위원장으로 선출하였다. 박근혜 비대위원장은 수락 연설에서 “집권 여당으로서 국민의 아픈 곳을 보지 못하고 삶을 제대로 챙겨드리지 못한 데 대해 진심으로 사죄한다”며 “이제 바꿔야 한다. 그동안 한나라당과 우리 정치권 모두 국민만 바라보지 않고, 정치를 위한 정치를 해왔다”며 “정치권 전체가 국민의 불신을 받는 이런 상황이 계속된다면, 앞으로 더 큰 국가적 위기를 맞게 될 것”이라고 말해 위기의 심각성을 강조하였다.

비상대책위원장 선출 1달 후인 2012년 1월 25일, 박근혜는 당명을 변경할 것이라고 선언하였고 2월 2일 박근혜는 새누리당으로 당명을 변경하겠다고 선언하였고 2012년 2월 13일 한나라당에서 새누리당으로 당명을 변경하였다. 이로써 한나라당은 14년 3개월만에 역사속으로 사라지게 되었다. 이후 박근혜는 제19대 총선 대비를 하였고 3월 20일 박근혜 비대위원장은 총선을 22일 앞두고 중앙선거대책위원장에 추대되었다.

불안한 당내외 상황에도 불구하고 2012년 4월 11일 제19대 총선에서 새누리당은 152석을 획득하여 과반 1당을 유지하였으며 그 후 공식적인 당지도부가 출범하였지만 당내 영향력을 유지하였다. 대통령 후보 선출 방식 문제로 김문수 경기도지사와 정몽준 전 대표, 이재오 의원과 대립하였고, 결국 정몽준 대표, 이재오 의원의 불출마 선언 속에 경선을 치렀다. 그렇게 치뤄진 경선에서 박근혜는 압도적 지지로 승리하였다.

[편집] 2012년 대선 후보

2012년 대선 후보기간 중

새누리당 유력 대선주자인 박근혜 전 비상대책위원장이 오는 7월 10일 대한민국 제18대 대통령 선거 출마를 공식 선언했다. 출마선언 시간은 오전 10시며 장소는 영등포 타임스퀘어 광장으로 정해졌다고 이상일 캠프 대변인이 7월 5일 브리핑을 통해 밝혔다. 이 대변인은 "각계각층 국민들이 다니는 열린 공간이라는 점이 고려됐다"고 설명했다. 캠프명은 '국민행복캠프'로 정했다고 이 대변인은 덧붙였다. [51]

박근혜는 2012년 8월 20일 새누리당 전당 대회에서 12월 19일 18대 대통령선거에 나설 새누리당 후보로 선출되었다. 대통령 후보 경선에서 박근혜의 득표율은 전체 유효투표의 84%인 8만 6천 589표로 지난 2002년 경선 당시 이회창 후보가 얻은 68%인 기존의 최고 기록을 갱신하였으나 경선 투표율이 41%로 역대 최저 투표율을 기록하였다. 한국 정당 역사상 유력 정당의 첫 여성 후보이자 전직 대통령의 자녀가 대선 후보가 되는 첫 사례이기도 하다.[52] 한편 박근혜는 2002년 한나라당 16대 대선후보 경선 출마선언 후 당내 대선후보로 선출되는데 성공했다.

[편집] 타임 아시아판 표지 모델 논란

2012년 12월 박근혜는 '독재자의 딸'이라는 뜻의 'The Strongman's daughter'라는 기사 제목과 함께 [53] 미국의 시사주간지 타임2012년 12월 17일자 아시아판 표지 모델로 선정되었다.[54] 이에 대해 박근혜가 소속된 정당인 새누리당2012년 12월 7일 'The Strongman's daughter'이란 기사 제목이 '강력한 지도자의 딸'이라고 보도자료를 발표하였다. 이후 타임은 'The Strongman's daughter'의 인터넷판 기사 제목을 '독재자의 딸'이라는 뜻의 'The Dictator's Daughter'으로 수정하였다.[55][56]

[편집] 2012년 제18대 대통령 선거 당선

대통령 선거에서 패배하면 정계를 은퇴하겠다고 선언하며 배수진을 친 박근혜는 2012년 12월 10일 국회의원직을 사퇴하였다. 유력한 무소속 후보였던 안철수문재인 민주통합당 후보 지지 유세로 고비를 겪었으나 박근혜는 2012년 12월 19일 제18대 대통령 선거에서 1577만 3128표를 득표하여 문재인을 누르고 당선되었다.[57] 박근혜의 임기는 2013년 2월 25일부터 2018년 2월 24일까지다.

[편집] 정치 행보

박근혜는 박정희를 무조건적으로 옹호하는 성향이 강했으나 2012년 총선과 대선을 거치면서 보수색을 탈색하고자 노력하였다. 2008년 18대 총선에서 박근혜 계열의 정치인들이 대거 한나라당을 탈당해 친박연대를 만들었다가 다수는 재입당하였으나 친이계의 견제로 완전한 복당이 이루지지 못하다 박근혜가 당권을 장악하면서 2012년 19대 총선 전에 한나라당과 합당하였다.

[편집] 정책적 측면

  • 2002년 박근혜는 한나라당을 탈당해 북한을 방문하여, 김정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방위원장을 만나기도 했다. 한나라당 내에서 김정일을 만났던 정치인은 박근혜가 유일하다. 이는 박근혜가 남북 관계에 대해 새누리당 주류의 인식과는 다른 '나름의 관점'을 갖고 있음은 분명하다는 주장이 있다.[58]
  • 이명박 정부의 '미국산 쇠고기 반대 촛불정국'때에는 "근본 대책이 나와야 한다"는 원론적인 입장을 밝혔다.
  • 미디어법에 대해서는 "직권상정하면 미디어법 반대표 던질 것"이라며 "여야합의처리를 할것을 요구한다"라며 반대입장을 나타냈다. [59] 또한 미디어법 중재안을 제시하였다. [60] 하지만 이후 한나라당이 박근혜의 지적을 받아들였다며 한나라당의 미디어법 직권상정에 찬성하였다. [61]
  • 세종시 법안에 대해서는 원안대로 또는 원안 플러스 알파로 추진해야 한다는 입장이다.[62]
  • 2007년 8월에는 영화 화려한 휴가를 관람하고 5.18은 "민주화 운동"이라며 "27년 전 광주시민이 겪은 아픔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며 "그 눈물과 아픔을 제 마음에 깊이 새기겠다. 진정한 민주주의와 선진국을 만들어 광주의 희생에 보답해야겠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63]
  • 박근혜는 뉴라이트 세력과 가까운 모습을 몇 차례 보여주며 역사 인식에 대해서는 보수적인 면을 드러냈다. "뉴라이트 전국연합과 한나라당의 길은 다르지 않다"며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원칙으로 하고 선진화를 위해 '공동체 자유주의'를 핵심 이념으로 한다는 것도 같다"고 하기도 했다.[65]또한 뉴라이트 교과서를 극찬하며, 뉴라이트의 교과서 포럼 등의 교과서 수정 움직임을 지지한 적도 있다.[66]
  • "일부에서는 자신을 보수라고 이야기하지만, 자신의 정치적 노선은 중도라고 생각한다"고 밝혔다.[67] 박근혜가 지나치게 보수적이라는 평가는 과장되었다는 시각이 있다. '친박계'와 달리 '친이계'는 과거 운동권 출신 인사가 포진해있고, 4대 개혁 입법 대해 비타협적 태도를 취한 사실과 2007년 한나라당 대선 후보 경선 이명박 후보가 실용주의를 내세웠기 때문이라는 이유다. [58]

[편집] 줄푸세

  • 줄푸세는 박근혜가 2007년 한나라당 대선 경선에 나와 내세운 정책이다. '세금은 이고, 각종 규제는 고, 법기강은 운다'는 뜻으로 그의 대통령후보 경선시 주요 정책구호였다. '줄푸세'는 이후 제17대 이명박정부의 정책에도 많이 반영되었다.[68]
  • 이 정책은 그의 보수적인 성향을 보여주는 대표적 정책이다. 자유주의(liberalism)적이라고도 할 수 있지만, 정확히는 신분제 등으로부터 억압받는 개인의 자유를 옹호하던 '고전적 자유주의자(liberalist)'라기보다는, 분배보다 성장을 중시하고 각종 규제로부터 억압받는 자본의 자유로운 이동을 옹호한다는 점에서 '신자유주의자(neo-liberalist)'에 더 가깝다고 평가할 만하다.[69]

[편집] 경제민주화

  • 2012년 박근혜는 자신의 대선 경선 캠프 선대위원장으로 대한민국 헌법 제119조 2항 '경제 민주화'의 입안자인 전 민주정의당 헌법개정위원 김종인을 임명하는 등 사회양극화 문제 해소에 적극적 의지를 보이고 있다. [70] 박근혜는 재벌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고 있으나 재벌의 지배구조 개선보다는 경제력 남용을 바로잡는 데 방점을 뒀다. 재벌이 우리 경제에서 차지하는 긍정적 역할은 인정하자는 쪽이다.[71] 사회양극화 해소가 목적인 경제민주화를 위해서는 세수확보가 중요한데 박근혜 의원은 2012년 7월 16일 한국신문방송편집인협회 초청 토론회에서 "법인세는 가능한 한 낮춰야 한다"고 주장해 논란을 야기했다. 우리나라 법인세 최고세율은 22%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인 25.6%(지방세 포함)보다 낮은 편이다. 일본과 미국의 법인세 최고세율은 각각 39.5%, 39.2%에 이른다.[72] 현재 법인세는 내국세 총액 가운데 부가가치세(33.0%) 다음으로 높은 비중(28.6%)을 차지한다.[73] 강병구 인하대 교수(경제학)는 “법인세를 낮추겠다면 소득세나 부가가치세 등에서 ‘박근혜식 복지’에 필요한 재원을 어떻게 마련하겠다는 것인지 대안을 내놔야 하는데 그게 안 보인다”고 지적했다. [74] '법인세 인하와 경제민주화 간의 모순성' 및 '법인세 감소분에 따른 대체 세수 확보' 등의 논란은 대통령 선거일까지 지속될 것으로 보인다.

[편집] 의정 활동

[편집] 제18대 국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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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천안함 침몰 사건연평도 포격

대한민국 제18대 국회에서 2010년 6월 29일에 북한의 천안함에 대한 군사 도발 규탄 및 대응 조치 촉구 결의(의안번호 1808656)의 원안가결에 찬성하였다.[75]

대한민국 제18대 국회에서 2010년 11월 24일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대한민국의 대연평도를 향하여 170여 발을 포격하여 대한민국 해병 2명 및 대한민국 국민인 민간인 2명을 살해한 연평도 포격을 규탄하기 위한 북한의 무력도발행위 규탄 결의안(의안번호 1810030)을 찬성하였다.[76]

[편집] 탈북자

대한민국 제18대 국회에서 2010년 3월 2일에 탈북자들을 위한 지역적응센터, 상담사제도, 북한이탈주민지원재단 설립등을 위해 발의된 북한이탈주민의 보호 및 정착지원에 관한 법률 일부개정법률안(대안)(의안번호 1807771)에 찬성하였다.[77]

[편집] 복수 국적 문제 관련

대한민국 제18대 국회에서 2009년 12월 29일에 대한민국 정부가 혼인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결혼 이민자, 대한민국에 특별한 공로가 있거나, 우수 외국 인재로서 특별귀화한 자, 국적 회복 허가를 받은 자로서 특별한 공로가 있거나, 우수 외국 인재로 인정되는 자, 해외 입양 되었다가 우리 국적을 회복한 자, 그리고 외국에 장기 거주하다가 국내에 영주 귀국하여 대한민국 국적을 회복한 65세 이상의 자들을 대상으로 복수 국적을 제한적으로 허용하기 위하여 발의한 국적법 일부개정법률안(의안번호 1807200)의 수정가결에 찬성하였다.[78]

[편집] 재외국민 참정권 관련

대한민국 제18대 국회에서 2009년 2월 5일에 대한민국 헌법 제24조에도 불구하고 해외에 거주하는 약 240만명 대한민국 국민의 금지되었던 재외국민 참정권을 회복하기 위하여 발의된 공직선거법 일부개정법률안(대안) (의안번호 1803725) , 주민투표법 일부개정법률안 (의안번호1803724), 그리고 국민투표법 일부개정법률안(의안번호 1800737)에 모두 찬성하였다.[79][80]

[편집] 명예 박사 학위

[편집] 평가

[편집] 원칙과 신뢰의 이미지

박근혜는 원칙, 신뢰, 약속을 지킨다는 이미지가 장점으로 평가된다. 그녀는 세종시 문제, 2007년 대선후보 경선 등을 통해 한 번 약속한 것은 반드시 지킨다거나 원칙을 중시한다는 이미지를 얻었다. 2012년 대선에 출마한 후보로서, 이러한 이미지는 국정운영에서의 안정감에 대한 기대로 연결된다는 평가를 받는다. 하지만 비판적 입장에서는, 그러한 이미지는 지지층에서만 통할 뿐이며, 변화를 바라는 사람들에겐 소통도 안 되고 감동도 없는 사람으로 보인다고 평가하기도 한다.[81][82][83][84][85]

[편집] 소통 부재와 비밀주의

박근혜는 일반 국민들은 물론이고 당내 인사들과도 소통하는 능력이 부족하다는 평가를 받는다.[86][82][81] 새누리당 인사들은, 발신번호 표시제한 전화로 연락이 온다, 솔직하게 터놓고 소통하지 않는다, 만나거나 접근하기 어렵다는 경험 등을 예로 들며 박근혜가 소통능력이 부족하다고 지적한다.[85] 2004년 제17 대 국회에서 당시 한나라당 대표를 맡고 있던 박근혜와 함께 원내대표로 활동했던 김덕룡은 박근혜가 소통이 안 되는 것을 넘어 "먹통"이라고 평가하면서, 당시 박근혜에게 정수장학회 문제를 털고 넘어가야 한다고 조언을 했지만 자신의 조언을 거부한 것은 물론 이후 관계가 소원해졌다는 일화를 예로 들었다. 또한 박근혜에게 친구가 있다는 얘기를 들어 본 적이 없으며, 그녀의 참모들조차 그녀가 주요 현안에 대한 판단을 내릴 때 누구와 상의하는지 모른다고 한다고 주장했다.[87]

[편집] 독재자의 딸

김정란 상지대학교 교수는 박근혜 의원이 '독재자의 딸'인 것이 '본질적인 문제'라고 주장하였다. "박근혜를 인정하는 것은, 박정희를 완전히 복권시키는 일이며, 그것은 수십 년에 걸친 고통스러운 민주화의 역사적 의미를 완전히 무로 돌린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후광에 대해서는 "박근혜가 아버지의 유산을 단호하게 정리하지 않고, 계속 그 신화를 누리려고 하는 한, 박근혜는 박근혜가 아니라, 박정희와 육영수의 그림자에 불과하다"고 비판했다. 여자 정치인이라는 점에서 진보적 여성주의의 전망에 대해 "박근혜 지지는 순진한 여성주의적 시각에서 작동할 확률이 거의 없다"며 "합리적 정책 개발이 아니라 지역감정을 이용해 정치적 기반을 쌓았다"며 일축했다. 오히려 "우리 사회를 지역주의의 망령 속으로 되돌아가게 할 것이며, 박정희 시대에 대한 아직도 끝나지 않은 역사적 판단에 종지부를 찍는 결과를 가져올 것"이라고 염려했다.[88]

언론인 서화숙은 한국일보 칼럼에서 박근혜를 박정희의 유산을 세습하려는 대선 후보로 규정하였다. 그는 박근혜가 '5.16 군사 반란'과 유신 독재에 대한 상식적 판단을 거부한다고 주장하였고, 인혁당 사건을 두고 '두 개의 재판 결과가 있다'고 말한 것은, 일제 때 독립운동가를 처형한 재판도 인정한다는 말이 된다고 주장하면서, 그 자체로 공직에서 물러나야 마땅할 망언이라고 비판하였다. 그러면서도 박근혜의 옹호자들은 박정희의 잘못을 덧씌우지 말라고 한다면서, 박정희의 딸이라는 모습을 걷어내면 상식 없는 망언하는 정치가에 불과하다고 혹평했다.[89]

한편, 가족 집권 혹은 2세 집권이라는 관점에서 박근혜 후보에 대해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견해도 존재한다. 박명림 연세대학교 교수는, 미국의 조지 부시(조지 H. W. 부시-조지 W. 부시), 아르헨티나의 페론(후안 페론-에바 페론-이사벨 마르티네스 데 페론), 4대 가문이 27년을 통치한 일본(요시다 시게루-기시 노부스케-하토야마 이치로-후쿠다 다케오), 3대에 걸쳐 집권한 그리스(요르요스 파판드레우 (1888년)-안드레아스 파판드레우-요르요스 파판드레우 (1952년)) 등의 사례를 예로 들며, 현대사에서 가족 집권이나 2세 집권은 최악의 성적표를 보여왔다는 점을 지적했다. 그는 민주주의를 통한 정권 교체가 필수적인 이유는 앞선 통치의 오류에 대한 교정의 필요성 때문인데, 가족 집권은 앞 통치의 극복, 즉 선친 부정이라는 근대 공화주의의 근본정신을 부정한다면서, 오류를 인정하지도 교정하지도 못함으로써 계속적인 퇴보를 반복할 우려가 있다고 주장했다.[90]

2012년 12월, 미국의 언론 월스트리트저널(WSJ)은 대한민국의 대선 소식을 전하면서 박근혜를 '독재자의 딸'로 소개했다. WSJ은 "박 후보는 1960~1970년대 한국을 통치했던 군 출신 독재자 박정희의 딸"이라며 "이전 선거에선 적어도 한 명의 후보는 박 후보가 당선되면 나라가 다시 독재로 회귀할 거라 경고했었다"고 전했다.[91] 또한 뉴욕타임스와, AP통신도 박근혜의 당선 소식을 전하며 '독재자의 딸(dictator’s daughter)'이라고 표현했다.[92]

[편집] 기타

  • 박근혜의 재산은 2010년 4월 기준 건물 19억 7천 7백만원, 자동차 등 8천 1백 90만원, 예금 1억 2백 59만 6천원, 도합 21억 6천 1백 49만 6천원이다.[93]
  • 진보 진영에서는 "독재자의 딸이며, 이명박 대통령보다 더 보수적이며, 콘텐츠가 부족한 감성형 지도자"로 평가한다. [58]
  • 일부 야당 의원들은 미디어법 이후로 그를 기회주의자로 평가한다.[94]
  • 미디어법에 대해서 반대를 표명했고, 일부 수정된 미디어법을 찬성하여 다시 한번 박근혜의 영향력을 확인했다. 하지만 미디어법에 대한 이중적인 태도로 그의 원칙주의는 깨졌고 지지자들에게도 큰 비판을 받았다.[95]
  • 2007년 대선 이후로 박근혜는 차기 대선후보 지지율 1위를 내준적이 한 번도 없으나 2011년 9월 이후로 정치권을 강타한 '안철수 열풍'에 힘입어 차기 대선후보 여론조사에서 안철수 59.0%, 박근혜 32.6%로 안철수가 압도적인 지지율을 나타내면서 '박근혜 대세론'이 끝났다는 평가가 나오기도 했다.[96]
  • 2012년 대선을 앞두고 서울대생들이 대선 후보들에 대해 평가한 책을 냈다. 서울대생들은 박근혜 의원이 박정희 전 대통령의 밝은 점은 이용하고 어두운 면은 책임지려 하지 않는 것 같다며 아버지의 과오를 인정하고 책임의식을 가져야 아버지의 굴레를 벗어 날 수 있을 것이라고 충고했다. 그 밖에도 국가와 결혼한 애국자란 이미지가 있지만 서민의 삶은 잘 모르고 국민과 소통 및 공감하는 능력이 부족하다는 인상을 주며, 수첩공주라는 별명처럼 사전에 계획된 멘트만 하는 등 거부감을 준다고 평가했다. 또한 박근혜 의원의 자기 비전과 위기 대처 능력, 젊은 층과의 소통 능력 등에 의문이 든다는 평가도 있었다.[86]
  • 2012년 7월 1일, 프레시안과 원지코리아가 정치부 기자 222명을 대상으로 여론조사를 한 결과, 박근혜는 '차기 대통령으로 적합한 인물'에서 문재인과 김두관에 이어 약 18%의 지지율로 3위를 기록했으며 '대통령이 되어서는 안 될 후보'를 묻는 질문에서는 약 35%의 압도적인 비율로 1위를 차지했다. 이러한 결과에 대해서는, 과연 대통령이 되었을 때 민주적으로 국가를 운영할 수 있을지에 대한 우려가 반영된 것이라는 해석이 있다.[97] 윤여준 전 장관은 조사 결과에 대해, 정치부 기자들은 실상을 보는 위치에 있다면서 대통령이 돼선 안 될 후보 1위로 꼽혔다면 이는 심각하게 생각해야 한다고 말했다. 윤 전 장관은 또한 박 전 위원장은 당 운영 방식 등을 보면 공공성에 대한 의식과 능력이 많이 부족한 것 같다고 비판했다. 그러면서 그는 당을 사유화하고 1인 지배체제를 만든다는 경쟁자들의 비판에 대해 아니라고 하기 어렵다고 말했다.[98]

[편집] 의혹

[편집] 사생아 존재 여부 의혹

2007년 대선 직전 그에게 최태민과의 사이에서 숨겨둔 사생아 딸이 있다는 의혹이 여러 번 제기되었다. [99] [100] 공식적으로는 미혼으로, 이전에도 그의 사생아 의혹이 여러 번 제기되었으나 2007년 대선을 계기로 공개적으로 공론화되었다.

박근혜가 최태민과의 사이에서 부적절한 관계였고 그 사이에 숨겨둔 사생아 아들 또는 딸이 있다는 의혹은 시중의 소문을 넘어 정치권으로도 전달되었다. 2007년 인사 검증 때도 이 문제가 집중 도마에 오르기 시작했다. 이에 대해 그는 7월한나라당 인사 검증 때 한나라당 대통령 후보 검증 청문회에서 한 검증위원이 고(故) 최태민 목사와의 부적절한 관계를 묻자 ‘숨겨둔 아이’가 나오면 DNA 검사까지 받겠다고 했다.[101] 그는 "내게 애가 있다면 데리고 와도 좋다”며 “DNA 검사까지 해 주겠다[100]”며 자신에게 숨겨둔 자식이 있다는 일부 주장도 강력 부인했다. [99]

한편 인사검증회에 참여한 어느 참관인으로부터 "독신인데 저출산 문제에 어떻게 대응할 것이냐"는 질문을 받자 그는 "사실 저도 결혼을 하고 싶었지만 사람 운명이 생각하지 않은 다른 방향으로 갈 수도 있다"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102] 이때 패널로 참석한 승려 보광은 "최 목사와 자꾸 연결되는 것은 다 전생의 업"이라고 지적했다. 박근혜는 "최 목사와 자꾸 연결되는 것은 다 전생의 업"이라는 보광 스님의 말에 잠시 웃다가 입을 삐쭉하더니 싸늘한 표정을 짓기도 했다.[102] 숨겨둔 자녀가 아들이라는 설, 딸이라는 설 등의 소문은 무성하나 근거는 밝혀지지 않았다. 이후 제18대 대선에서 이슈화 될 것으로 예상했으나 근거없는 이야기로 여겨져 이슈화되지 않았다.

[편집] 전두환 정치 자금 6억 수수

박근혜는 2007년 10.26 사태 직후 전두환으로부터 6억 원을 받은 사실을 인정하였다.[103] 1980년 박근혜와 그의 형제들 앞으로 6억 원의 돈이 지급되었다. 박정희 전 대통령 서거 후 전 합수본부장에게서 9억원을 받은 뒤 김재규 사건 수사 격려금으로 3억 원을 되돌려 주었다는 것에 대한 의혹이 여러 번 제기되었다.[104] 이 돈은 박근혜와 그의 두 동생에게만 지불되었다. 그리고 액수도 6억 달러 설, 9억 달러 설 등이 제기되어 왔으나 진상은 밝혀지지 않았다.

전두환의 자금을 받았다는 주장은 2002년 무렵하고 그가 당 대표로 있을 때에도 누군가에 의해 유포되었다. 그러나 그때마다 박근혜는 언급을 회피해 왔다. 2007년의 인사 청문회에서 이 문제가 다시 언급되었다. 이에 대해 박근혜는 '9억 원이 아니라 처음부터 6억 원을 받았다. 유자녀 생계비 명목으로 받았고 돌려준 것은 없다. 전 합수본부장의 심부름으로 왔다는 사람이 만나자고 해서 청와대 비서실에 갔더니 '이것은 박정희 대통령이 쓰다 남은 돈이다. 생계비로 쓰라'고 전해 줘서 감사하게 받아 나왔다.[104]'며 생계유지비로 받았다고 말했다. 그가 전두환에게서 9억을 받았다, 6억을 받았다는 등의 의혹으로만 제기되어 오던 것이 2007년의 인사검증회에서 그가 시인함에 따라 사실로 확인되었다.[105]

박근혜가 청문회에서 자금을 받은 것과 액수를 밝힘으로써 의혹은 사실로 확인되었다. 그러나 열린우리당 국회의원 윤호중은 이를 비판하였다. 그에 의하면 “박 전 대표가 전두환으로부터 받은 돈이 9억 원이 아니라 6억 원이라는 것이 밝혀진 것을 빼고는 하나도 새롭게 검증된 것이 없는 청문회였다.[106]”는 것이다.

[편집] 성북동 주택 취득 의혹

그에게 제기되었던 의혹 중의 하나는 성북동 주택을 취득한 경위였다. 이는 그가 한나라당 대표로 재직할 때에도 제기되었다. 박정희의 신당동 사저와 같은 것으로 여겨졌으나, 2007년의 대통령 후보자 검증 청문회에 이르러 다시 언급되었다. 일각에서는 신당동 사저와 성북동 박근혜 자택을 오인하였으며 박정희 내외의 비극적인 죽음에 가려져서 묻혀졌으나 2007년 대선을 전후해 누군가에 의해 인터넷에 퍼지면서 다시 수면 위로 드러나게 되었다.

성북동 주택은 기업인 신기수가 그에게 공짜로 주었다. 그런데 박 후보는 경남기업 신기수 회장에게서 성북동 주택을 증여받은 것과 관련해 탈세 가능성이 제기되었다.[105] 2007년 인사검증회 당시 "성북동 주택 신기수씨가 무상으로 줬나" 하는 의혹에 대해 그는 "아버지 유품 보관할 장소로 쓰라며 대가없이 주었다"고 대답했다.[104] 또한 일부 언론으로부터 5공화국 때인 1982년 전 대통령의 지시에 따라 경남기업 신기수 회장이 성북동 주택을 무상으로 줬다는 의혹도 있었다.[104]

한편 그는 성북동 사저는 사사로운 청탁 목적은 아니라고 해명한 바 있다. 그는 "나는 부모님이 사시다가 남기신 유일한 재산인 신당동으로 이사를 왔다. 부모님 유품을 정리해야 하는데 집이 너무 좁았다. 이런 사정을 알고 아버지와 인연이 있던 신 회장이 성북동에 집을 마련해 '유품을 보관할 장소가 있으니 이사하면 어떻겠느냐'고 제안해서 받아들였다.[104]"고 반론하였다.

[편집] 최태민과의 관계 의혹

1970년대부터 최태민 목사는 그의 측근으로 활동해 왔다. 그 과정에서 최태민과 그 일가들의 비리 행위를 묵인했다는 의혹과 비판이 꾸준히 제기되고 있다. 박근혜가 영남재단, 정수장학회 등을 운영하면서 그를 보좌했던 최태민의 비리 문제는 오랫동안 도마에 올랐다. 7개의 이름과 6번 결혼한 전력에도 불구 구국선교단·구국봉사단 총재 등으로 박후보를 보좌하면서 박후보의 이름을 팔아 이권에 개입한 의혹을 받았다.[107] 이후 이 문제는 수시로 수면위로 떠오르기 시작한다.

2006년의 대통령 후보자 인사 검증 당시 박근혜 전 대표는 검증 청문회에서 고 최태민 목사 비리 의혹에 대해 실체가 없다고 밝혔다.[108] 그러나 최태민 관련 의혹은 2007년 다시 제기되었으며, 최태민과의 부적절한 관계 의혹도 다시 제기되었다. 2007년의 한나라당 인사검증회 당시 '중정 조사에 의하면 최 목사는 공사 수주, 장군 승진, 국회의원 공천 명목 등으로 돈을 받은 단서가 포착되는 등 비리 건수가 40여 건 된다고 한다. 알고 있었느냐[104]는 질문에 대해서도 "아버지가 나와 중정 부장, 최 목사, 관계되는 사람들을 불러 직접 조사를 하실 때 어떻게 횡령하고 사기를 쳤는지 답하라고 했다. (비리) 내용이 막연했다. 실체가 없는 얘기로 끝나서 아버지가 대검에서 조사해 보고 문제가 있으면 법적 조치를 취하라고 지시하셨다. 아버지는 친척을 감옥에 보낼 정도로 엄격하신 분이다. 그 쪽에 가서도 별다른 일이 없었던 것으로 알고 있다. 아버지 돌아가시고 정권들이 나를 봐주거나 돌볼 상황이 아니었다. 굉장한 매도의 기간이었다. 잘못이 있었다면 굉장히 시끄러웠을 거다.[104]'"라고 반박했다.

또한 '검증위가 조사한 바에 의하면 최초에 중정은 최 목사를 구속하자고 건의했고, 검찰이 조사해 보니 중정 조사보다 훨씬 많은 비리가 나왔다. 결국 최 목사가 봉사단 총재에서 물러나는 선에서 이 문제가 일단락됐다. 그런데도 최 목사의 비리 혐의가 불확실하다고 할 수 있'느냐[104]'는 질문에 대해서도 "대검에서 엄청난 비리가 나와서 문제가 있다면 당연히 처리해야지 왜 덮나. 또 정권이 바뀔 때마다 세무조사, 검찰 조사가 있었는데 왜 법적 조치를 안 했는지 의아하게 생각한다.[104]"고 반박을 제기했다.

최태민과 그 가족들의 비리행위나 비위 의혹에 대하여 박근혜는 최태민이 모함을 받는 것이라 생각한다고 말하였다. 그는 최태민은 모함을 당하는 것이며 억울하다고 보고 있다. 2007년의 청문회 당시 '최 목사가 지금도 결백하고 모함받고 있다고 생각하나.'[104]라는 질문에 대해 "내가 아는 한도에서는 의혹의 실체가 없지 않나 생각한다. 현실이 그러니까. 앞으로 실체가 나온다면 내가 모르던 일이니까 굉장히 유감스럽고 잘못된 일이다.[104]"라고 반박하였다. 그러나 그의 주장과는 달리 최태민과 관련되었던 사실은 김재규 중앙정보부장 등을 통해 박정희 대통령에게 보고되고 있었다.

2007년의 청문회 초반 고 최태민 목사에 대한 질문이 집중되면서 박 전 대표의 목소리 톤이 약간 높아졌다.[102] 다른 검증위원이 최태민과의 자녀 존재 여부를 묻자 박근혜는 면접장에서 불쾌감을 드러냈다. 이에 김명곤 한나라당 검증위원은 "최 목사와 관련된 질문만 나오면 왜 그렇게 민감하게 반응하냐"고 꼬집자 박 전 대표는 작심한 듯 "아기가 있다는 차마 입에 담지 못할 얘기까지 나온다. DNA 검사라도 해줄 테니 애를 데려오라"며 언성을 높였다.[102] 그러나 최태민 일가의 비리 의혹에 대한 것은 정확하게 밝혀진 바가 없어 의혹으로 남아 제18대 대선에서 이슈화 될 것으로 예상했으나 근거없는 이야기로 여겨져 이슈화되지 않았다.

[편집] 육영재단 운영 관련 의혹

2007년 7월의 한나라당 인사검증 청문회 당시 박근혜는 육영재단 관련 의혹과 관련, 형제 간에 갈등이 불거진 것이 아니냐는 추궁이 잇따르자 "실체가 없는 일인데 자꾸 말이 커진다"며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기도 했다.[102] 육영재단 재산 착복 의혹[104]이 제기되자 그는 '보수·판공비 일절 안받아… 전횡 소문도 사실무근.[104]'이라며 반박하였다. 박후보의 동생인 근령씨는 육영재단 운영을 놓고 대립한 문제가, 지만씨는 미국 유학과정에서 영남대 공금 전용 문제는 오래도록 도마에 올랐다.[107]

인사 청문회 당시 영남대, 육영재단 관련 의혹 중 "영남투자금융이 육영재단에 기부금을 출연한 것이 부적절하지 않은가"라는 질문에는 "얘기를 듣고 보니 일리가 있다고 생각한다"며 수긍하는 모습을 보였다.[102] 말 실수도 있었다. 박 전 대표는 영남대 의혹에 관한 질문에 "대구대와 청구대가 합치는 과정에서 학교를 맡은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의 책임"이라고 답했다. 그는 이어 잠시 당황하는 모습을 보이더니 "이병철 전 회장"으로 정정했다.[102] '82년 10월부터 90년 11월까지 육영재단 이사장으로 재직했는데 보수와 판공비를 받은 적이 없는가.[104]'라는 질문에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육영재단 사람들이 이사장직을 맡아 유지를 이어야 한다고 건의해 책임을 느끼고 이사장을 맡았다. 보수와 판공비를 받지 않았다. 일주일에 2, 3번 출근했다.[104]"라고 답했다.

(박근혜가) '이후 육영재단 이사장을 퇴임한 이유와 관련, 최 목사와 딸이 박 전 대표와의 친분을 과시하고 전횡을 일삼아 직원들이 반발한 것이 원인이라는 말이 있다.[104]'는 의혹에 대해 "어머니 기념사업을 육영재단에서 같이 했고, 당시 최 목사가 기념사업 일을 도왔다. 구조조정에 불만을 품은 직원들의 소요가 있었고, 오해가 있어서 '최태민 물러가라'는 식으로 데모가 있었지만 최 목사나 딸이 결코 육영재단 일에 관여한 적이 없다.[104]"고 반박하였다. 또한 육영재단의 운영 과정에서 최태민이 개입했다는 의혹 역시 제기되고 있다. 최 목사가 육영재단 고문의 직함을 갖고 이사장인 박 전 대표가 결재를 하기 전에 먼저 결재를 할 정도로 재단 운영에 깊이 관여했다.[104]는 의혹에 대해 "전혀 사실이 아니다. 최 목사가 고문직을 하지 않았고, 최 목사가 연로하여 고문으로 예우해 부른 것뿐이다.[104]"라고 반박하였다.

한편 "박근혜가 박근령육영재단 이사장 해임의 배후 역할을 했다"는 내용의 비방글이 동생 박근령의 남편이 적성한 것으로 드러났다. [109] 이 문제로 신동욱 교수가 징역 1년 6개월형에 확정되는 등[110] 논란의 여지가 존재하고 있다.

[편집] 영남대학교 관련 의혹

영남대학교 재단 이사장 시절의 전횡과 정관 1조에 '교주 박정희'라는 조항을 삽입한 것 역시 오래도록 문제시되어 왔다. 영남대 이사장 시절 전횡 의혹[104]과 영남대 재단이사가 된 지 1년 후에 학교법인 영남학원 정관 1조에 '교주(校主) 박정희'라는 표현이 삽입된 사건[104]에 대해 "67년 영남대 설립 시 이사 전원이 서명한 결의문에 '교주 박정희'라는 글귀가 들어 있었다. 당시 이사 한 사람이 그것을 정관에도 넣자고 제의해 이사회에서 받아들인 것이다. 나도 이사회에 참여했고 찬성했던 것으로 기억한다.[104]"며 아무 문제 없다고 답했다.

한편 영남대학교 재단 재산 착복에 대한 의혹도 제기되었다 86년 당시 영남대학교 대학병원장 모씨의 해외출장비 명목으로 280여만원이 동생 지만씨의 항공료 등으로 지급됐고 병원장은 주치의 자격으로 박지만 씨와 미국에 함께 갔다.[104]는 의혹이 제기된다. 그에 대해 "그때는 몰랐지만 검증위 소명자료를 준비하면서 발견해 동생에게 알아 봤더니 그런 일이 있었다고 한다.[104]"며 반박하였다. 그러나 당시의 영남대 병원장은 소환되지 않았다.

영남대 재단 비리에 육영재단을 끌어들이지 않았느냐는 의혹도 제기되어 왔다. '영남대 재단이 전액 출자한 영남투자금융회사는 육영재단이 발간하는 어린이 잡지 <보물섬> 등에 장기간 광고하고 광고비로 2,700여만 원, 기부금도 1억 3,000여만 원 지급했는데 알고 있었느냐.[104]'는 질문에 대해서도 "육영재단이 공익재단이기 때문에 영남투자금융뿐 아니라 다른 데서도 기부금을 받을 수 있다. 영남투자금융에 강요한 적은 없다. 경영진에서 판단해서 한 것으로 안다.[104]" 또, 영남대 재단 4인방으로 거론되는 김 모, 조 모, 손 모, 곽 모 씨 등을 직접 임명하지 않았느냐[104]는 인사 의혹에 대해서도 "(자신은) 결재선상에 있지 않았다. K 전 총장이 확인서를 써 줬다고 하는데 이 사람은 이명박 캠프에서 정책자문단으로 일하고 대구 지역에서 사조직을 만들어 운영하는 분이다. 확인서가 신빙성 있는 자료인가 하는 의구심을 갖는다.[104]"며 결백함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영남대 재단 운영 과정에서의 의혹은 수시로 야당 인사들에 의한 공격 표적의 하나가 되고 있다. 한편 박근혜가 영남대 재단 이사장 시절 운영에 개입한 확인서를 제출한 김기택영남대 총장은 박근혜로부터 이명박 당시 대통령 후보자 측 참모라는 역공을 받기도 했다.[107]

[편집] 정수장학회에 대한 의혹과 해명

그가 한나라당 대표로 있을 때부터 '정수장학회 이사장 겸임때 탈세했다는 의혹[104]'도 줄곧 제기되어 왔다. 이에 대해 2007년 인사검증회에서 그는 '납세의무 있는지 몰라… 후에 퇴직금 정산해 납부했다.[104]'고 해명했다. '95~2005년 정수장학회 이사를 지냈으므로 강제 헌납에서 자유롭지 않다. 설립 당시 이런 문제 알았나.[104]'는 질문에 대해 그는 "당시 상황은 정확히는 모른다. 그러나 강제 헌납 주장에 대해서는 동의하지 않는다. 사실이 아닌 것을 입증할 자료를 장학회가 가진 것으로 안다.[104]"고 해명했다.

또한 '적절한 시기에 재단 운영과 관련해 국가 헌납 등을 긍정적으로 검토할 용의가 있나.[104]'는 질의가 있었으나 그는 "공익재단에 대해 이래라 저래라 할 입장 안 된다. 이사회가 결정할 문제다.[104]"라며 이사회가 처리할 문제라는 말을 했다.

정수장학회 이사장 겸임 때의 섭외비 탈루 의혹도 제기되어왔다. '수억 원의 섭외비에 대한 세금을 탈세했다는 보도가 나오자[104] 그는 "매년 감독 관청에 보고했으나 세금 의무가 있는지 몰랐다. 법이 바뀌어 소득세를 내야 했으나 실무진이 제대로 처리하지 못해 누락됐다. 퇴직금을 중간 정산해 납부했다.[104]"고 해명했다. 98년 국회의원 당선 이후 그는 정수장학회의 이사장 및 비상근 이사를 역임하기도 했다.[104] 그러나 이때 급여를 받아 횡령이라는 주장이 나온다.[104] 그는 "출근을 안 한 게 아니라 일주일에 2, 3번 가서 결재했고, 행사가 있으면 가는 등 이사장 일을 다 했다. 횡령은 동의할 수 없다.[104]'고 해명했고, 법원에서 이에 대한 조사결과, 박근혜의 손을 들어주었다.

[편집] 5.16에 대한 관점 논란

5.16 군사 정변의 주역이던 박정희의 차녀였으므로 그가 5.16을 어떻게 보느냐 하는 것은 그가 정계 입문한 1988년 이후 줄곧 이슈가 되어 왔다.

90년 잡지 인터뷰에서 5ㆍ16과 4ㆍ19 정신을 계승하는 것이 박 전 대통령의 뜻을 계승하는 것이라고 했다. 역사 의식에 의문이[104] 제기되자 그는 5.16을 구국의 혁명이라고 본다는 자신의 생각을 밝혔다. 그에 의하면 "5ㆍ16은 구국(救國)의 혁명이었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때 상황이 너무나 혼란스러웠고 남북대치 상황에서 잘못하면 북한에 흡수될 수도 있는 그런 상황이었다. 혁명 공약에도 기아 선상에 헤매는 국민을 구제한다는 얘기가 나온다.[104]"는 것이다. 다만 10월 유신에 대해서는 판단유보를 내렸다. 5.16 뒤의 유신시대에 대해서는 어떻게 평가하나[104]는 질문에 "역사에 판단을 맡겨야 한다는 입장을 갖고 있다. 다만 유신시대에 민주화 운동을 하면서 헌신하고 고통받은 분들에 대해서는 진심으로 항상 죄송하게 생각한다.[104]"고 답했다.

2007년 7월의 한나라당 대선후보 검증 청문회에서 그는 '박 전 대통령 유지 계승' 역사의식에 대한 질문을 받았다.[104] 이때에도 그는 5·16은 구국의 혁명…유신은 역사가 판단할 일.[104]이라며 판단유보 자세를 취하였다. 이 때문에 야당 인사들로부터 비난을 받기도 했다.

한명숙 전 총리는 박근혜 전 대표가 한나라당 대선후보 검증 청문회에서 5.16쿠테타를 '구국의 혁명'이으로 규정한 데 대해 '망언'이라며 강하게 비판했다. 한명숙은 2007년 7월 19일 "그가 5.16 쿠데타를 '구국의 혁명'이라고 미화한 것은 정치적 중립을 지키며 국토방위에 전념하고 있는 69만 국군 장병들에 대한 모독이자 군사독재에 맞서 싸우다 희생당한 민주 영령들을 두 번 죽이는 일"이라고 주장했다.[111] 한명숙은 이어 "아직도 박정희 쿠데타 정권에 고문당하고 살해당한 분들의 유가족이 서러움과 한을 안고 살아가고 있다"며 "고(故) 장준하 선생의 부인을 만나 고개를 조아렸던 때가 언제라고 또다시 독재의 유전자를 드러내냐"고 비난하였다.[111] 한 전 총리는 자신은 총리 인사청문회에서 유신시절 자신을 고문하고 투옥했던 가해자들을 용서했다고 말했지만 "박 후보의 망언은 이처럼 유신독재의 피해자들이 내미는 용서와 화해의 손을 뿌리치고 피해자들의 가슴에 다시 한 번 못을 박는 잔인한 짓"이라고 언론에 그를 공개적으로 비난했다.[111]

한편 2012년 7월 새누리당 대선후보 경선 과정에서 박근혜의 5ㆍ16의 역사관에 대한 논란이 또다시 불거졌다. 한국신문방송편집인협회 초청 토론회에서 박근혜는 "5.16은 당시 상황에서 불가피한 최선의 선택이었다"고 말해 과거 '구국(救國)의 혁명' 발언 당시의 생각과 변함이 없음을 밝혔고 이후 새누리당 대선 후보 경선 합동 토론회에서 오마이뉴스의 여론조사를 인용[112]해 "제 발언에 찬성하는 분이 50%를 넘었다"고 말하면서 사회적으로도 5ㆍ16 찬반 논쟁을 일게 했다. 그러나 박근혜를 칠푼이라 비하했던 김영삼 전 대통령은 이 상황을 빗대 "박근혜, 대통령 되기엔 결격 사유 있다"며 혹평[113]하였으며, 박근혜가 언급한 것과 반대의 여론조사들이 나오기 시작했고 [114][115][116] 박근혜의 대선후보 지지율은 다소 하락하면서[117] 박근혜는 "5·16은 정상적인 게 아니다"며 다소 입장을 바꾸는 듯한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이후 새누리당 대선후보 경선 토론회에서 임태희 후보의 5·16 관련 질문에 "과거에 묻혀 사시네요"라며 반박하는 등[118] 아직도 입장표명에 아리송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박근혜의 5·16 역사관에 대한 논란은 대통령 선거일까지 그치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편집] 2002년 복귀 당시 2억 원 수수 의혹과 해명

2004년 2월 대선자금 수사에서 박 전 대표가 복당 과정에서 2억 원을 수수한 사실이 드러났고, 이 돈이 복당의 대가인지 의혹[104]이 제기되었다. 그는 이것을 선거 활동비 명목이라고 해명하였다. 그에 의하면 '당에 들어올 때 중앙선대위 의장을 맡았는데 당 사무총장으로부터 2002년 11월 26일과 12월 7일 1억 원씩을 선거 활동비 명목으로 받았다. 한나라당 입당 조건으로 받은 것 아니다. 미래연합을 운영하면서 빚진 것 있었지만 이 돈에는 전혀 손대지 않았다.[104]'라고 해명하였다.

[편집] 비판 및 논란

[편집] 독단주의

박근혜는 자신이 가진 독단적인 이미지 때문에 많은 비판을 받았다. 김영삼 전 대통령은 2012년 7월 11일 김문수 새누리당 대선 경선후보의 예방에 "박근혜는 아무 것도 아니다, 칠푼이다"라고 말했다. [119] 칠푼이는 지능이 조금 모자라는 사람을 놀림조로 이르는 말인데, 과거 이명박 대통령이나 전두환, 노태우 전 대통령의 독재, 독단적인 면에 대해서도 칠푼이라 표현한 적이 있어 박근혜 의원과 친박계의 독선적인 당 운영에 대한 비판적 표현[120]으로 보는 시각이 있다. 일각에서는 이를 '차남 김현철이 총선 때 새누리당의 공천을 못 받은 것에 대한 감정적 발언'[121]으로 보기도 한다.

2011년 9월 정치권을 강타한 '안철수 열풍'과 관련해 기자들이 박근혜에게 '안철수의 지지율이 자신을 넘어섰는데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반복된 질문에 대해 “병 걸리셨어요?”라는 반응을 보이면서 비판을 받기도 했다. 민주당은 사과를 요구했고 이후 박근혜는 “지나가는 식으로 농담을 했는데, 표현이 부적절 했던 것 같다”라며 유감을 표명했다.[122] 박근혜는 2004년 MBC 라디오 프로그램 '손석희의 시선집중'에서도 진행자가 경제 살리기에 대하여 질문하자 '지금 저하고 싸움하시는 거예요?'라고 언급한 것을 비롯해 올해 1월 복지 문제와 관련된 기자들의 질문에 '한국말 모르세요?'라고 대답한 것 등이다. 서울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조국 교수는 "박근혜 전 대표는 불편한 질문과 비판을 참지 못한다. 영애 박근혜님이 ‘평민’들과 겸허히 소통하는 법을 배우기 전까지 새로운 별호를 지어 올리고자 한다. '발끈해'"고 말했다.[123]

[편집] 이명박과 정책적인 유사성

박근혜는 이명박과 거리를 두고 있으나 완전히 돌아서지는 않았다. 대통령과 면담을 하면서 대통합의 의지를 담고 활동하였다. 과거 정책상 본질적으로는 이명박과 크게 다를바 없다는 의견도 있다. 근거로는 2007년 한나라당 대선후보 경선 때 박근혜가 내세웠던 '줄푸세'나 당시 경쟁 후보였던 이명박이 내세웠던 '747' 둘다 공통적으로 감세 기조를 내세운 정책이라는 점이다. 또한 박근혜가 2008년 12월 국회의 감세 법안, 2009년 3월 금산분리완화법안, 2009년 12월 예산안 ─ 4대강 예산이 포함되었고 이른바 날치기 통과로 논란이 되었음 ─ 에 찬성해 이명박 정부 정책에 협조한 것도 있다. [124] 이를 빗대어 정치권과 인터넷 상에서 '이명박근혜'로 표현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명박과 다르다고 볼 수 있는 것들도 있다. 대표적으로 이명박 대통령이 주도했던 '세종시 수정안'을 부결되게 만든 것이다. 또한 서울시의 무상 급식 정책 논란 때 바쁜 일정 속에 부재자 투표까지 참여해 오세훈 전 서울시장을 지원했던 이명박과는 달리 관련 사안에 입장을 밝히지 않았다. 2011년 말 비상대책위원장을 맡은 후 당명, 당 상징색, 강령 등을 변경하면서 MB정권과 기존 한나라당과의 차별화를 시도했다. 2012년 4월 총선을 앞두고 불거진 국무총리실의 민간인 사찰 사건 악재 속에서도 "어느 정권에서나 민간인 사찰은 일어나며 나도 피해자"라며 논란을 피하기도 했다.[125]

[편집] 핵심 쟁점 회피

2010년 12월, 새해 예산안이 국회의장의 직권상정으로 통과되어 여야간의 갈등이 극화된 상황에서 박근혜가 복지 정책을 강조하며 나타나자 민주당 박지원 원내대표는 "박 전 대표는 날치기로 그 많은 복지 예산이 완전히 삭감될 때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고 지적하며 "유리할때만 고개를 든다"며 박근혜의 행보에 비판을 제기했다.[126] 조선일보도 사설에서 "박 전 대표는 왜 내키는 주제에 대해 하고 싶은 말만 하고, 국민이 박 전 대표에 대해 궁금한 일을 물을 기회는 만들지 않느냐는 것이다. 그래서 거북한 주제를 피하려 한다는 느낌을 준다."고 지적했다.[127] 박근혜의 이러한 미지근한 행보에도 높은 지지율을 유지하고 있는데 대한 비판도 있다. 서울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조국 교수는 "박근혜 이 사람이 무슨 얘기를 하는지 사람들이 잘 모르는데도 지지하는 사람은 삼십몇 %나 된다"라며 "내용도 모르고 좋아하는 것은 감성의 정치일 것"이라고 비판하였다.[128] 그러나 박근혜의 지지자들은 박근혜의 말에 신뢰를 보낸다. "박근혜의 신중함은 미래의 불확실성으로 불안감에 젖어있는 국민에게 위로와 신뢰를 준다"는 평가가 있다.[129]

[편집] 권위주의

한나라당이명박계는 “박근혜는 권위주의적 리더십과 폐쇄적 조직 문화가 팽배해 있다”며 “두 차례 대선에서 실패한 이회창 전 총재의 전철을 되풀이 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한 친박계 의원은 “국민들은 박 전 대표를 더 이상 아버지의 그늘에 가려있는 정치인이 아니라 독립적인 지도자로 바라보고 있다”며 “박 전 대표를 흠집내기 위한 어떤 시도도 성공하기 힘들 것”이라고 말하였다.[130]또한 친이계는 "지역주의에 기댄 정치인"이라며 비판하였다.[131]한나라당 강명순 의원은 "자신은 유신 시절 빈민 운동을 하느라 고생했는데 박근혜는 청와대에서 잘 먹고 잘 지낸 만큼 빚을 갚아야 한다"며 비판했다.[132]

[편집] 한마디 정치

2008년 대선 이후 박근혜는 미국소 수입 협상에 대한 반발이 일던 가운데 이명박에 대한 비판을 제기하거나, 미디어법 상정시 "반대표를 던질것"이라고 말하거나, 이명박이 내놓은 세종시 수정안에 대해 반대 입장을 밝히거나, 동남권 신공항 백지화 당시 이명박의 결정을 받아들이지 않고 차기 정권에서 계속 추진 할 것을 약속하는 등 중요한 사안에서 짧은 말을 던지는 일명 '한마디 정치'를 해왔다. 2010년까지 차기 대선후보 지지율 1위를 지켜온 박근혜의 이런 의견들은 당정에 큰 영향력을 끼쳤으며 친이계는 정부에 협조하지도, 그렇다고 반대하지도 않는 박근혜의 모호한 행보에 대해 불만을 토로하기도 했다. 그동안 한나라당과 이명박 정부는 박근혜를 당대표나, 국무총리로 추대하는 방안을 고려해왔지만 박근혜는 이를 모두 거부하였으며 친박계 의원이 당대표를 맡는 것조차 반대하는 등 소극적인 행보를 보여왔다. 하지만 지지율 1위를 지키기 위해 너무 몸사리기만 하는것 아니냐는 비판이 제기되고 있으며 이명박과 화해를 하거나, 아예 다른 노선을 선택하여 결단을 내려야 한다는 지적이 제기되었다.[133] 이러한 비판들 속에서 이명박 정권 취임 초기에 실시했던 자기 대선 후보들 지지율 조사에서 50%에 육박하던 박근혜의 지지율은 2010년 이후로 30%까지 하락했다.[134]

[편집] 국가관 발언에 대한 비판

박근혜는 2012년 6월 1일 비례대표 부정 경선과 '종북' 논란에 휩싸인 통합진보당 이석기김재연 의원에 대해 "국가관을 의심받고 또 국민도 불안하게 느끼는 이런 사람들이 국회의원이 돼서는 안된다고 생각한다"고 말하였다. 이어 제명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대해 "사퇴가 안되면 그렇게 가야된다고 본다"고 답했다. [135]

하지만 이러한 입장은 언론과 지식인 사회는 물론 심지어 당 내부로부터도 비판을 받았다. 경향신문은 사설을 통해 두 사람의 종북 여부는 사법부가 판단할 문제이고 경선부정도 내부조사와 징계절차를 지켜보는 것이 순서이며 국가관이 의심스럽다는 이유만으로 ‘종북’으로 몰아 의원직 제명을 하는 것은 비이성적인 행태라고 비판했다.[136]

한겨레 신문 역시 국가관을 이유로 의원직을 박탈해야 한다는 것은 매카시즘 시대에나 나올 법한 마녀사냥식 발언이라 주장하고, 박 의원 발언은 무엇보다 그의 민주주의적 소양을 의심케 한다고 지적했다. 민주주의는 생각이 다르다고 기본권을 제약할 수 없으며, 생각이 무엇인지를 따져서 국회의원 자격이 있네 없네 할 수 없다는것이다. 사설은 종북으로 제명을 논하면 마녀사냥이라는 같은 당 하태경의 발언을 인용하고, 박근혜의 민주주의적 소양이 당의 평균적 인식에도 미치지 못한다면 걱정스러운 일이라고 비판했다.[137]

프레시안도 칼럼을 통해 박근혜가 "민주주의도 법치주의도 무시"한다고 비판했다. 국가관 운운하면서 국민의 기본권을 전면적으로 부정하고, 민주주의와 법치주의와 국민주권을 헌법전 속에 유폐시킨 박정희의 그림자를 박근혜에게서 발견하는 건 서글프고 두려운 일이라면서, 국가관을 의심하고 이를 국회의원직 제명의 근거로 삼는 것은 파시스트적 폭력이라고 비판했다.[138]

법학교수 출신인 새누리당의 이상돈 전 비상대책위원장도 박근혜의 발언이 잘못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6월 6일 라디오 인터뷰에서 박근혜 전 비상대책위원장의 발언은 국회법상의 해석에 맞지 않다며 "정확한 법적 해석을 할 것 같으면 잘못된 발언"이라고 말했다. 통합진보당 이석기·김재연 의원에 대해 국회법 138조에 따른 의원자격심사를 통해 제명하는 것은 법리상 적법하지 않은 절차라는 것이다.[139]

연합뉴스 사장 출신의 언론인 김종철미디어오늘 칼럼을 통해 박근혜의 매카시즘 성향을 비판했다. 박근혜의 국가관 발언에 대해 김종철은 칼럼에서 "그들이 어떤 ‘종북행위’를 했는지에 관한 명확한 증거도 없이 ‘주사파’라고 보면서 국회에서 제명하자고 주장하는 것은 전형적인 매카시즘"이라고 주장했다.[140]

[편집] 최저 임금 논란

박근혜는 2012년 8월 7일 뉴미디어 토론회에서 최저 시급을 묻는 사회자에게 "5000원 좀 넘는 것 아니냐"고 답했다. 4580원이라는 사회자의 정답 발표에 박근혜는 "아르바이트 시급이 5000원이 안 되느냐"고 대답했다. 참고로 박근혜는 지난 18대 대한민국 국회 환경노동위원회 위원이었다. 이에 야권에서는 박근혜는 "평생 돈을 벌어본 적이 없는 사람" "서민과 노동자의 생활에 관심이 없는 사람" 이라고 주장하며 여태까지의 서민 코스프레가 위선에 불과하다고 주장하며 강력히 비난하녔다.[141]

[편집] 5·16 군사 정변 발언

박근혜는 2012년 7월 16일 한국신문방송편집인협회 초청 토론회에서 5·16 군사 정변에 대하여 "돌아가신 아버지로서는 불가피하게 최선의 선택을 한 게 아닌가라고 생각한다"는 발언을 하였다.[142] 이후 일부 여론조사에서 응답자의 49.9%가 박근혜의 발언에 동의하지 않는다는 결과가 나오는 등 많은 논란을 낳았다.[143] 논란이 심해지자 8월 7일 한 토론회에서 '5.16이 정상적인 것은 아니다'라는 취지의 발언을 하였고,[144] 역시 이를 두고 정치권의 다양한 해석이 분분하였다.[145] 5·16 군사 정변에 대한 박근혜의 발언에 대하여 5.16을 두고 박근혜를 공격하는 것은 옳지 않다는 해석[146]도 있지만, 대체로 민주주의 국가에서 쿠데타를 옹호하는 듯한 발언은 부적절했다는 평이 지배적이다.[출처 필요]

[편집] 전태일재단 방문 시도에 대한 진정성 논란

2012년 8월 28일, 박근혜는 전태일재단을 방문하려고 했지만 유족과 노동자들의 거부와 반대로 무산되었다. 이를 두고 박근혜의 진정성에 대한 의심과 비판의 목소리들이 잇따랐다.

전태일의 동생인 전순옥 의원은, 진정으로 전태일 정신을 생각한다면 쌍용차나 용산참사 희생자 등 고통 당하는 사람들을 먼저 찾았어야 한다고 말하고, 이른바 국민대통합에 대해서도, 정책적으로 접근을 하거나 현안이 일어나는 현장을 먼저 찾아가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를 이야기하며 희망을 줘야 한다고 말했다. 전 의원은 또한, 현재의 진실은 미래에 대한 지향과 과거의 삶이 일치할 때 빛을 발하는 것이라며 5ㆍ16쿠데타와 유신, 군사독재에서 지금의 정수장학회까지 과거에 대한 철저한 반성이 없다면 지금의 말과 행동은 그 진실을 의심받을 수 밖에 없다고 지적했다.[147]

전태일의 동생 전태삼도 박근혜는 22명의 쌍용차 사망 노동자들의 분향소부터 방문했어야 한다면서 새누리당사 앞에서 20일 넘게 대책을 요구하는 쌍용차 해고 노조원들의 요구엔 묵묵부답이면서 전태일 재단을 방문하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는다고 비판하였다.[148]

진중권 교수 역시 박근혜의 방문 시도에 대하여 진정으로 소통과 화해를 하겠다면 지금 눈앞에서 고통 받고 있는 노동자들을 찾아가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쌍용차 노동자들의 고통은 외면한 채 전태일재단을 방문하려는 것은 쌍용차는 ‘현재’에 수행해야 할 책임을 의미하는 반면, 전태일 재단은 ‘과거’로 면피할 소재라 보기 때문이라면서, 이는 노동자의 고통까지 정치수단화 한다는 점에서 대단히 비윤리적이라고 비판했다.[149]

민주당 쌍용자동차대책 특별위원회 역시, 새누리당사 앞에서 박근혜 후보가 나설 것을 요구하며 노숙농성을 벌이고 있는 해고 노동자들을 먼저 만날 것을 촉구했다. 같은 당 은수미 의원도, 최저임금이 얼마인지도 모르는 박근혜 후보의 방문에 우려를 금할 수 없다면서, 정리해고와 용역폭력 등에 고통 받는 수많은 지금의 전태일이 겪고 있는 문제에 답하는 것이 먼저여야 한다고 말했다.[150]

한편, 새누리당이상일 대변인은 방문이 무산된 데 대해, "박 후보를 잘 이해하지 못하는 이들이 아무리 방해를 하고 장막을 친다 해도 국민을 통합하겠다는 박 후보의 행보를 막지 못할 것"이라며 "국민을 분열시켜 계층간, 세대간, 지역간 갈등을 조장하는 세력을 반드시 물리치고 국민대통합의 '100% 대한민국'을 건설할 것"이라고 말했다.[148]

[편집] 사형제 존치 논란

박근혜는 2012년 9월 4일 기자들과의 간담회에서 '아동 성폭행범 사형집행론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흉악한 일이 벌어졌을 때 그 일을 저지른 사람도 '죽을 수 있다'는 경고 차원에서도 (사형제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라고 답했다. 15년간 사형이 집행되지 않아 '실질적 사형제 폐지 국가'로 분류되는 우리나라에서 유력 대권주자가 사형제 존속 입장을 밝힌 것은 처음이다. [151]근래에 나주 어린이 성범죄 사건이 있었기 때문에 사형제 존폐와 관련해 일반 여론도 박근혜 주장처럼 사형제 찬성 및 존속이 압도적으로 우세하다.[152] 그러나 '인간의 존엄성을 보장한 헌법 정신에 어긋난다'[152] , '법원 판결이 잘못돼 억울하게 사형당한 사람도 있다'[153]는 비판도 있다. 후자의 경우 유신시절 육영수여사 사후 박근혜가 퍼스트레이디였을 때 발생한 인혁당 사건이 대표적인 근거이다.[154] 국제법학자협회는 선고 후 20시간도 안 되어 8명의 사형이 집행된 1975년 4월 9일을 '사법 사상 암흑의 날'로 지정하였다.[155] 2005년 12월 국정원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에서 인혁당 사건이 조작됐다는 결론을 내리자 박근혜는 "국정원 과거사 규명은 가치없는 모함"이라며 유감을 표시한 바 있다.[156]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인혁당 사건 사형수들은 2007년 1월 23일 이뤄진 재심에서 무죄선고를 받았다.[157]

[편집] 인혁당 사건에 관한 입장에 대한 논란

박근혜 대선 후보는 2012년 9월 10일 손석희의 시선집중과의 인터뷰에서 인민혁명당 사건에 대해 "대법원 판결이 두 가지로 나오지 않았느냐"면서 그 부분에 대해서도 또 어떤 앞으로의 역사적 판단에 맡겨야 된다는 입장을 밝혔다. [158]

이러한 입장에 대해서 언론과 정치권을 비롯한 각계로부터 많은 비판이 제기되었다. 우선, 대법원의 판결이 두 가지로 나왔다는 발언에 대해 비판이 제기되었다. 박 후보의 이 같은 발언은 헌정절차가 정지된 유신 때 이뤄진 유죄 판결과 민주화 이후 사법부가 무죄로 교정한 판결의 효력을 동일시한 것이며, 이미 역사적, 사법적 판단이 내려진 사안까지 수용하지 않는 것으로 해석되었기 때문이다.[159][160][161]

경향신문과 한겨레신문, 한국일보 등의 언론들은 사설을 통해, 재심으로 유신 당시의 대법원 판결은 취소되었으며 "지금 이 순간 인혁당 사건이 무죄라는 점은 그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법적인 사실"이라는 점을 지적했다.[162][163] 특히, 한국일보는 사설에서, "사실상의 헌법중단 상태인 유신 치하의 원판결과 민주화 이후의 재심 판결에 똑같이 '정치 상황'이란 잣대를 들이댄 결과라면 실로 심각하다"면서 그럴 경우 "대한민국의 사법절차, 나아가 헌정질서에 대한 근본적 도전"이라고 비판했다.[164]

광주 지역의 시민단체와 법조계는, 박근혜 후보의 발언이 사법부를 부정하는 것이라고 비판했다.[165] 또한 전국 11개 로스쿨의 인권법학회 학생들도 성명을 통해 박근혜의 발언은 역사인식의 심각한 결여와 법체계에 대한 무지를 드러낸 것이라고 비판했다.[166][167]

야당들도 박근혜 후보의 발언을 일제히 비판했다. 민주당 정성호 대변인은 2007년 재심을 통해 무죄와 국가배상이 선고되고 사법부가 사죄까지 한 점을 지적하며, 박근혜 후보의 발언은 사법부와 유족을 모독한 것이라고 주장하고 사과를 요구했으며, 같은 당의 이해찬 대표 역시, 판결은 하나라는 점을 지적하고, 박 후보의 발언이 대법원에 대한 모독이라고 주장했다. 그밖에 유인태, 박지원, 박영선 의원 등도 "사법부를 무시한 황제적 발언", "일본 극우파들보다 더한 것", "헌정질서를 무시하는 초사법적인 발언"이라고 비판했다.[168][169][170] 진보신당 역시 박근혜 후보의 태도에 대해 자신에게 불리한 문제는 에둘러 말하며 기존 입장을 고수하는 보수 정치인들의 구태라고 비판했다.[171]

이러한 비판이 제기되자, 박근혜 후보는 다음 날 대법원 판결은 존중한다는 입장을 밝혔지만 당시 조직에 몸담았던 사람들의 증언까지 감안해서 역사의 판단에 맡겨야 한다는 입장을 고수했다.[172][173]

하지만 이러한 발언에 대해서는 "사실관계마저 호도"한다거나 "현대사에 대한 무지를 드러냈다"는 비판이 제기되었다. 박근혜 후보가 말하는 증언들이란, 박범진과 안병직 등의 증언을 말하는 것으로 보이지만, 이들의 증언은 1964년의 1차 인혁당 사건에 대한 증언들로, 손석희 교수가 방송에서 질문한 유신 시절의 이른바 2차 인혁당 사건과는 무관하기 때문이다.[174][173][175][176]

2012년 9월 12일 인혁당 사건 유족들은 새누리당 앞에서 기자 회견을 열고 "이미 박 후보는 2005년에 국정원이 인혁당 사건이 조작되었다는 조사결과를 발표할때도 '한 마디로 가치가 없는 것이며, 모함'이라고 발언한 바 있다"며 "사람이 억울하게 8명이나 사형당한 사건을 가치가 없고 모함이라고 말하는 박 후보는 최소한 인간에 대한 예의조차 있는가. 입이 있으면 대답을 해라"고 비난했다.[177]

진실과 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 위원회 위원장이었던 안병욱 교수는, 박 후보는 사실관계 가운데 법원의 재심 판결이나 과거사위원회의 조사 결과처럼 공신력 있는 부분은 무시하고, 공신력이 없어 신뢰가 가지 않는 이야기에 무게를 싣는다면서, 이는 상대를 설득해서 믿도록 해주는 방식은 아니라고 말했다.[178]

당시 인혁당 사건 피고인들의 변호를 맡았다가 반공법 위반으로 구속되었던 한승헌 변호사는 경향신문과의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두 개의 판결’이라는 말은 당시 사건의 날조과정이나 재판의 허구성에 대해서 정확히 모르고 하는 말 같습니다. 재심 무죄 판결 이상의 역사적 판단이 있을 수 없다고 봐요. 막연한 도피처처럼 역사의 판단이라는 말을 사용해서는 안되는 겁니다.”[179]

한편, 보수언론인 조선일보 역시 사설을 통해, 박정희 시대에 대해서는 긍정적 평가와 부정적 평가가 엇갈리지만, 2차 인혁당 사건의 경우 어떤 논리로도 합리화될 수 없는 어둠의 역사에 속한다는 것이 일반 국민의 공감대라면서, 반면 박 후보의 유신관은 박정희식 유신관에 바탕을 두고 있는데, 대통령 후보의 유신에 대한 입장은 아버지와 딸이라는 개인사를 뛰어넘어야 한다고 비판했다.[180]

박근혜 후보의 인혁당 사건에 대한 발언에 대해 각계 각층으로부터 비판이 잇따르자, 2012년 9월 24일, 박근혜 후보는 5.16과 유신, 인혁당 사건 등의 과거사에 대해 사과의 입장을 밝혔다.[181] 이에 대해 인혁당을 "민혁당"이라고 잘못 말한 것, 사과 후 기자들의 질문을 일절 받지 않은 것 등을 지적하며 사과의 진성성을 의심하는 반응들이 있었다.[182][183][184][185][186] 유족들도 진정성이 없다는 반응을 보였다.[187] 민주당 정성호 대변인은 평가한다고 하면서도, 진정성을 확인할 수 있는 후속 조치를 요구했으며, 안철수 후보 등은 필요한 일이었다고 평가했다.[188]

[편집] 비리 전력자와 '철새 정치인' 영입에 대한 논란

2012년 대선에서 박근혜 후보는 이른바 국민대통합을 명분으로 다양한 인사들을 영입했다. 하지만 이들 영입 인사들의 전력에 관해, 그들이 비리 전력자이거나 철새 정치인이라는 논란이 제기되고 있다.

박근혜 캠프의 국민대통합위원장인 김종인1993년 동화은행에서 2억여 원을 뇌물로 받아서 의원직을 상실하고 2년 징역을 산 일이 있다는 점이 논란이 되었다.[189] 한광옥은 나라종금으로부터 퇴출 무마 청탁과 함께 금품을 수수한 혐의로 2005년 유죄 판결을 받았다. 이러한 비리인사 영입은 당 안팎으로부터 반발을 불러 일으켰다. 전여옥은 2011년 영입 당시 김종인의 비리 전력을 지적하며 비판했고, 안대희는 2012년 10월 8일 한광옥이 국민대통합위원장에 임명될 경우 자신이 맡고 있는 정치쇄신위원장직을 사퇴하겠다는 기자 회견을 했다.[190][191] 중앙일보의 김진 논설위원은 칼럼을 통하여 재벌과 은행의 투명경영을 유도해야 할 청와대 경제수석의 자리에 있으면서 오히려 그들로부터 뇌물을 받은 것은 중대한 일이라면서, 그런 김종인을 공동선대위원장에 임명한 것은 "국민을 무시하는 것"이라고 비판하고, "이게 박근혜의 원칙인가"라고 물었다.[192]

박근혜 후보의 벤처특보로 영입된 장흥순은 자신이 운영하는 회사의 적자를 감추기 위해 700억 원대의 분식회계를 했다가 구속, 기소되어 2005년 유죄 판결을 받았던 전력이 있어서 당 안팎에서 논란이 일었다.[193] 국민대통합위원회 위원으로 영입된 김규옥 광주시민단체총연합회 대표는 2001년 1월부터 2006년 말까지 총 149차례에 걸쳐 노인무료급식 보조금 1억 7000여만 원을 자신의 생활비 등으로 사용해 업무상 횡령으로 기소되어 유죄 판결을 받았다.[194]

한편 과거 동교동계와 상도동계에 속했던 일부 인사들이 2012년 10월 15일 새누리당사에서 기자 회견을 열고 자신들은 과거 유신 체제에 맞섰으나 국민대통합을 위해 박근혜 후보 지지를 결심했다고 설명하였다. 하지만 이들의 과거 전력을 보면, 사실은 당적을 매우 빈번하게 옮겼던 이른바 철새 정치인이거나 과거에 이미 한나라당에서 활동하였던 인사들이라는 점에서 정치적 쇼에 불과하다는 비판이 제기되었다.[195][196]

이날 회견에 참여한 안동선 전 의원은 2002년 새천년민주당을 탈당, 자유민주연합으로 당적을 옮겼다가 2004년 1월 새천년민주당으로 복당했지만, 2007년 제17대 대선을 앞두고 다시 탈당해 이회창 후보 지지 선언을 하고 자유선진당에 입당하였다. 이윤수 전 의원도 2002년 안동선과 함께 탈당했고, 2007년 제17대 대선을 앞두고 이회창 후보 지지에도 동참하였다. 송천영 전 의원은 1992년 민주당을 탈당, 국민신당 창당에 참여했다가 그해 11월에는 민자당에 입당했으며, 1997년에는 이회창 후보 불가론을 주장하며 신한국당을 탈당하였다. 그 뒤 2000년에는 민주당에 공천 신청을 했고, 2002년 12월엔 이인제를 따라 민주당을 다시 탈당해 자민련에 입당하였다. 송 전 의원은 2007년 대통령 후보 경선 때는 다시 한나라당 대전시당 고문직을 맡아 이명박 후보 지지를 선언하였다. 송 전 의원은 또한 2007년 강창희에게 불법 정치자금 3000만 원을 건넸다가 돌려받은 혐의로 기소돼 징역 1년과 추징금 3000만 원을 선고받고 구속됐던 전력도 있다. 이 밖에 이날 회견을 한 조한천, 이희규, 반형식 전 의원 등은 지난 2004년 혹은 2008년 총선에서 이미 한나라당 공천을 신청했던 인사들이었다.

이들 영입 인사들은 이날 기자 회견에서 "우리는 박정희 대통령과는 각을 세워 치열하게 싸웠지만, 그 딸인 박근혜 후보를 지지하는 고심 어린 결단을 꼭 알아달라"며 "이번 결심을 하는데 정말 고심이 많았다."라고 하였으며, 김무성은 이를 두고 "감동의 정치"라고 말했다.[195][197]

2012년 10월 25일에 있었던 이인제의 입당도 이른바 철새 영입 논란을 일으켰다.[198] 한국일보 사설은, 국민대통합이라는 명분에도 불구하고, 득표에 도움이 된다면 전력을 따지지 않고 영입하는 것은 새누리당의 이미지를 추락시키는 등의 역효과를 낼 수 있다고 비판했다.[199]

[편집] 역대 선거 결과

선거명 직책명 대수 정당 득표율 득표수 결과 당락
1998년 4월 재보궐선거 국회의원(대구광역시 달성군) 제15대 한나라당 61% 34,271표 1위 대한민국의 국회의원 당선
제16대 총선 제16대 61.4% 37,805표
제17대 총선 제17대 70% 45,298표
제18대 총선 제18대 88.57% 50,149표
제19대 총선 국회의원(비례대표) 제19대 새누리당 42.8% 9,129,226표 비례대표 11번 (25번까지 당선됨)
제18대 대선 대통령 제18대 새누리당 51.6% 15,773,128표 1위 대한민국의 제18대 대통령 당선

[편집] 일화 및 언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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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79년 아버지인 박정희서거하였다는 소식을 접하였을 때, 슬퍼하기에 앞서 "휴전선은 이상 없습니까?"라고 말하였고, 지지자들은 이를 높이 평가한다.[200]
  • 자신이 대표로서 이끈 두번의 전국 선거에서 상향식 공천 약속을 지켰다.[58]
  • 2007년 1월 31일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가 긴급조치 위반 사건 분석 보고서를 공개한 것을 두고 박근혜는 “나에 대한 정치공세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인혁당 사건에 관해서는 “돌아가신 분에 대해서는 안타깝다”면서도 “지난번에도 법에 따라 한 것이고 이번에도 법에 따라 한 것인데, 그러면 법 중 하나가 잘못 된 것 아니겠느냐”고 말했다. 또한 인혁당 사건긴급조치 위반사건 등에 대한 역사적 평가에는 동의하느냐는 질문에 대해서 “앞으로 역사국민이 평가할 것”이라며 “그리고 정부가 지금 이렇게 하는 것에 대해서도 역사가 평가할 것”이라고 말했다.[201]
  • 2007년 8월에는 영화 화려한 휴가를 관람하고 5.18은 "민주화 운동"이라며 "27년 전 광주시민이 겪은 아픔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며 "그 눈물과 아픔을 제 마음에 깊이 새기겠다. 진정한 민주주의와 선진국을 만들어 광주의 희생에 보답해야겠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63]이에 대하여 이명박 선대위의 장광근 대변인은 "영화 관람 한 번으로 '호남의 한' '역사 의식 부재'를 한 번에 뛰어넘겠다는 박근혜 후보. 그의 화려한 광주 1박 2일 외출은 80년 광주정신의 모독일 뿐"이라며 비판했다. 또 "왜 광주에서는 지난 번처럼 '5.16은 구국의 혁명'이라고 당당하게 말하지 못하나"라며 "DJ를 들먹이며 지역감정을 부추기려는 그의 다급함이 안타깝기조차 하다"고 비난하기도 했다. 진수희 선대위 대변인은 "반역사, 반민주적 유신시대의 퍼스트 레이디 5년은 부끄러워할 일이지, 결코 자랑할 일은 아니다"라며 "유신시절 '퍼스트 레이디' 5년을 공으로 돌리고, 국정경험으로 포장하는 박 후보의 역사관과 정치철학은 무엇인가"라고 비난했다. 이에 박근혜 선대위의 김재원 대변인은 "'박근혜 대통령 정부'에서 이념, 지역, 세대 간의 갈등과 대립은 과거의 역사로 묻힐 것"이라며 "'박근혜 정부'는 고향과 출신을 가리지 않고 천하의 인재를 골고루 쓰는 '대탕평 인사'로 국민적 에너지를 하나로 뭉치는 '희망정부' '드림정권'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한가지 특별히 주목할 점은, 박 후보에 대한 연설회장의 뜨거운 열기와 성원"이라며 "특정 후보가 압도적으로 앞서간다는 말이 얼마나 허풍이었는지 드러났다. 박풍이 호남에서도 일고 있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황석근 선대위 공보특보도 "오직 박근혜만이 동서화합, 정권교체, 호남발전의 희망이라는 것이 만천하에 다시 한번 공포된 날"이라며 "박근혜는 언제나 빛을 몰고 다니는 후보, 어디서나 빛을 발하는 후보, 어둠과 부패를 몰아내는 후보라는 것이 유감없이 드러났다"고 강조했다.[202]
  • 김대중 前 대통령은 "박근혜가 '동서화합'의 적임자"라며 높이 평가하면서, 자서전에 "세월이 흘러 그의 맏딸 박근혜가 나를 찾아왔다. 그녀는 거대 야당인 한나라당의 대표였다. 박 대표는 뜻밖에 아버지 일에 대해 사과하였다. '아버지 시절에 여러가지로 피해를 입고 고생하신 데 딸로서 사과 말씀 드립니다.' 나는 그 말이 참으로 고마웠다. 박정희가 환생하여 내게 화해의 악수를 청하는 것 같아 기뻤다."라며 박근혜와의 일화를 공개하였다.
  • 2007년 경제공화당 허경영 총재가 자신이 발행한 일간지 《Lotto 복권뉴스》와 인터뷰에서 "박근혜와 약혼하였다" "박근혜와 결혼하려 한다"는 이야기를 퍼뜨리자 명예훼손 혐의로 고소하였다.[203] 2008년 대법원은 허 총재에 대해 유죄를 선고하였으며, 허 총재는 "내가 인기가 많아지니까 한나라당 언론대책위원회에서 허경영이 잡아라! 해서 고소가 시작되었고 나중에야 박근혜 의원이 그 사실을 알았다고 한다"고 주장하였다.[204]
  • 2005년 12월 8일 "국정원 과거사 규명은 가치없는 모함"("국정원 과거사 진실위에서 인혁당,민청학련 사건에 박정희 전 대통령이 개입했다고 한다"는 질문에)[205]
  • 2009년 10월 26일 "아버지의 궁극적인 꿈은 '복지국가' 건설이셨습니다"(현충원에서 있었던 박정희 대통령 30주기 추도식에서 추도문)[206]
  • 2011년 1월 23일 "“한국말 못 알아들으세요?”(국회 헌정기념관 바자회에서 "복지를 돈으로만 보지 말고, 사회적 관심이 중요하다고 했는데 무슨 의미냐"는 기자의 질문에)[207]
  • 2012년 1월 19일 "외국기업의 국내 기업에 대한 역(逆)차별을 막고자 출자총액제를 폐지했지만 대기업들에 의해 남용되는 부분이 있다. 남용되는 부분에 대해선 조치가 필요하다"(기자간담회서)[206]
  • 2012년 3월 13일 "산업화 과정에서 본의 아니게 피해를 입은 분들에 대해 항상 죄송한 마음을 가져왔다. 그분들께 제가 사과를 드린다"(부산 민방초청 공동토론회)[206]
  • 2012년 6월 1일 "국회라는 것이 국가의 안위를 다루는 곳인데 기본적인 국가관을 의심받고 있고 국민들도 불안하게 느끼는 이런 사람들이 국회의원이 돼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의원총회를 마친뒤 기자들 질문에)[206]
  • 2012년 7월 16일 "5·16은 아버지로서는 불가피한 최선의 선택을 한 게 아닌가 생각한다. 다른 생각, 반대 의견을 가진 분도 있기 때문에 옳으니 그르니 하기보다는 국민과 역사의 판단에 맡겨야 한다."(신문방송편집인협회 토론회)[209]
  • 2012년 8월 7일 "5·16이 정상적인 것은 아니지 않으냐. 아버지 자신도 다시는 나같이 불행한 군인이 없기를 바란다는 말씀을 하셨다."(새누리당 대통령 경선 후보 토론회)[209]
  • 2012년 8월 8일 "과거에 묻혀 사시네요"(경선 토론회에서 임태희 후보가 5.16에 대한 견해를 묻자)[118]
  • 2012년 8월 17일 "개헌은 국민 사이에 공감대가 형성됐을 때 추진해야 한다는 게 전제 조건이다. 부패 문제나 정책 연속성 등 여러 가지를 생각할 때 4년 중임제가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TV 토론회)[209]
  • 2012년 8월 22일 "재원 마련이 있어야 복지정책에 믿음이 가는데 재정 건전성을 무시하면서 복지하는 것은 반대한다"(기자 오찬 간담회) [211]
  • 2012년 8월 29일 "역사적인 사건의 인물들과 화해를 해야 하지 않느냐. 계속 역사적으로 갈등이 됐던 문제를 해결하려 할 것"(전태일 열사의 유가족과 친구를 만나려 했으나 거절당한 후) [212]
  • 2012년 9월 11일 "같은 대법원에서 상반된 판결이 나온 것도 있지만, 한편으론 그 조직에 몸담았던 분들이 최근 여러 증언을 하고 있기 때문에 그런 것까지 감안해 역사 판단에 맡겨야 되지 않겠느냐는 생각을 한 것"(박범진 전 한성디지털대 총장이 명지대 국제한국학연구소가 출간한 학술총서 `박정희 시대를 회고한다'에서 "인혁당 사건은 조작이 아니다"라고 증언한 것에 빗대서)[214]
  • 2012년 9월 4일 "인간 포기한 흉악범 경고위해 사형제 필요"("아동 성폭행범 사형집행론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151]
  • 2012년 9월 10일 "몇 십년 전 역사라 지금도 논란이 있고 다양한 생각이 있다. 그런 부분에 대해서는 역사가 객관적인 판단을 해 나가지 않겠는가. 역사의 몫이고 국민의 몫이라고 생각한다. 유신에 대해 당시 아버지가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 그렇게까지 하면서 나라를 위해 노심초사했다. 그 말 속에 모든 것이 다 함축돼 있다고 생각한다"(MBC 라디오 < 손석희의 시선집중 > 에서 유신에 대한 입장을 묻는 질문에) [213]
  • 2012년 9월 6일 "(정준길 새누리당 대선기획단 공보위원은) 협박을 하거나 압력을 넣을 만한 위치에 있는 사람도 아닌데, 도대체 이해가 안될 뿐"("새누리당 정준길 공보위원이 대선 불출마를 종용했다"는 안철수 서울대 융합과학기술대학원장 측 금태섭 변호사의 주장에 대하여)[215]
  • 2012년 1월 2일 "바쁜 '벌꿀'은 슬퍼할 겨를도 없다" (2012년 1월 2일 힐링캠프에 출연해 고 육영수 여사 서거당시 심정을 윌리엄 블레이크(William Blake)의 '바쁜 꿀벌(busy bee)은 슬퍼할 겨를도 없다(The busy bee has no time for sorrow)'를 잘못 빗대며) [218]
  • 2012년 9월 24일 "5·16, 유신, '민혁당 사건'은 헌법 가치를 훼손되고 정치 발전을 지연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그로 인해 상처와 피해 입은 분들에게 다시 한번 진심으로 사과한다" (과거사 사과 기자 회견 중 '인혁당'을 '민혁당'으로 잘못 말하며) [219]
  • 2012년 10월 10일 "'전화위기'의 계기로 삼아…" (경기도당 선거대책위원회 출범식에서 '전화위복'을 전화위기'로 잘못 말하며)[220]
  • 2007년 '이산화가스', '산소가스'를 배출하는데, 그 이런 심각한 문제라고 생각을 합니다."(2007년 한나라당 대선 후보 TV 토론회에서- 이명박이 교토의정서와 관련 이산화탄소 배출 해결책에 대해 묻자)[221]
  • 2012년 10월 8일 "제가 이공계 출신이니 뭔가 DNA가 다르지 않겠느냐 ...... 제가 과학인들의 열정이 솟아나도록 모든 것을 걸고 한번 해보겠다"[222]

[편집] 가계도

박성빈
박동희
박재홍
박재선
백남의
박무희
박재석
박재호
박귀희
박상희
박준홍
박영옥
김종필
박계옥
김용태
박금자
반기언
박설자
김희용
박한생
박재희
김호남
박재옥
한병기
박정희
박근혜
육영수
박근령
신동욱
박지만
서향희


[편집] 저작물

  • 《절망은 나를 단련시키고 희망은 나를 움직인다》 (위즈덤하우스, 2007, ISBN 978-89-6086-033-9)
  • 《나의 어머니 육영수》 (사람과사람, 2000, ISBN 978-89-85541-54-1)
  • 《고난을 벗삼아 진실을 등대삼아》 (부산일보출판국, 1998, ISBN 978-89-87236-24-7)
  • 《결국 한 줌 결국 한 점》 (부산일보출판국, 1998, ISBN 978-89-87236-25-4)
  • 《평범한 가정에 태어났더라면》 (남송, 1993, ISBN 13-2001044000207)

[편집] 어록

위키인용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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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함께 보기

[편집] 주석

  1. 박근혜 트위터 개설..소통정치 본격화하나(연합뉴스, 2010년 7월 1일)
  2. http://news.naver.com/main/president2012/index.nhn
  3. 1919년 수립된 대한민국 임시 정부에도 여성 국가 수반은 없었다.
  4. 박근혜 대통령 당선인의 신기록들 아시아투데이 (2012년 12월 20일)
  5. 초등 동창 박근혜-정몽준, 대선 앞둔 지금은?
  6. 정몽준-박근혜 ‘외나무다리’ 만날까 - 위클리경향 814호
  7. 올인코리아
  8. 박지만씨 징역 2년6월 구형”, 《연합뉴스 사회》, 2002년 7월 25일 작성.
  9. <박근혜 검증청문회 중계>-1-2”, 《연합뉴스 정치》, 2007년 7월 19일 작성.
  10. 박근혜 X파일 & 히든카드 3쪽”, 《신동아》, 2007년 6월 1일 작성.
  11. 박근혜 X파일 & 히든카드 4쪽”, 《신동아》, 2007년 6월 1일 작성.
  12. 박근혜 X파일 & 히든카드 2쪽”, 《신동아》, 2007년 6월 1일 작성.
  13. 박근혜 X파일 & 히든카드 5쪽”, 《신동아》, 2007년 6월 1일 작성.
  14. '반격의 세월'에 최태민이 있었다.”, 《오마이뉴스》, 2007년 7월 5일 작성.
  15. [단독 입수 박근령 육영재단 이사장이 1990년 노태우 대통령에게 보낸 '탄원서']”, 《오마이뉴스》, 2007년 8월 6일 작성.
  16. "최태민 목사, 저에게 고마운 분 네거티브하려면 뭘 못지어 내나"”, 《오마이뉴스》, 2007년 6월 14일 작성.
  17. 한국미래연합 창당…대표 박근혜의원 - 2002-05-17 중앙일보
  18. 대한민국에서 여성 정당 대표 중 박순천에 이어 두 번째다.
  19. 2004 정치권 뜬별진별
  20. 백승렬. “김대중 전 대통령, 박근혜 대표와 악수”, 《연합뉴스》, 2005년 6월 13일 작성. 2009년 7월 10일 확인.
  21. MB·박근혜 ‘세종시’ 문제 왜 타협 못할까
  22. 이준한. “李-朴 청문회 관전평”, 《동아일보》, 2007년 7월 20일 작성. 2013년 1월 24일 확인.
  23. 최승철. “범여권 “면죄부 청문회” 비난”, 《파이낸셜뉴스》, 2007년 7월 20일 작성. 2013년 1월 24일 확인.
  24. 이명박,박근혜에 2452표차 승리…경선결과 집계”, 《조선닷컴》, 2007년 8월 20일 작성. 2009년 7월 7일 확인.
  25. 세상을 보는 다른 눈 "뷰스앤뉴스" - 이동복 "이명박, 박근혜에게 후보 양보하라"
  26. ‘월박’ 바람, 수도권까지 흔든다 시사저널
  27. 박근혜 "이방호 50% 물갈이 합의설 밝혀야"
  28. 親朴 일부의원들 박근혜에 반기?
  29. (http://www.mt.co.kr/view/mtview.php?type=1&no=2009103120144229109&outlink=1 박근혜 "세종시 국민과의 약속" 정운찬 비판)
  30. (http://www.daejonilbo.com/news/newsitem.asp?pk_no=854434 박근혜 “세종시 원안+α 변함없다”)
  31. (http://imnews.imbc.com/replay/nwdesk/article/2410278_2687.html 박근혜 前대표 유럽 특사‥계파 갈등 해빙?)
  32. 손봉석 기자. “朴캠프 “이명박 후보는 전과 14범” 주장 논란”, 《경향신문》, 2007년 2월 28일 작성. 2010년 2월 11일 확인.
  33. 김도훈 기자. “박근혜+범여권,이명박 위장전입에 파상공세”, 《쿠키뉴스》, 2007년 6월 17일 작성. 2010년 2월 11일 확인.
  34. 김인식 기자. “"자녀교육 때문에 위장전입" … 사과”, 《한국경제》, 2007년 6월 17일 작성. 2010년 2월 11일 확인.
  35. 김윤수 기자. “MB-박근혜, 누적된 '불신과 앙금'…화해 될까?”, 《SBS》, 2010년 2월 11일 작성. 2010년 2월 11일 확인.
  36. 황외진. “박근혜, 미디어법 '반대 투표' 발언”, 《MBC》, 2009년 7월 20일 작성. 2010년 2월 11일 확인.
  37.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001&oid=003&aid=0002610689 이상득 의원 재보선 개입설 '형님정치' 논란 재연)
  38. 박근혜, '강도론' 전면 반박…청와대 '황당'”, 《mbn》, 2010년 2월 11일 작성. 2010년 2월 11일 확인.
  39. 박진원 기자. “"사과하라" vs "잘못없다"…계파갈등 폭발 직전”, 《SBS》, 2010년 2월 11일 작성. 2010년 2월 11일 확인.
  40. 김인아 기자. “칼 뽑은 청와대에 친박계 "분노 폭발"...李-朴 전면전”, 《폴리뉴스》, 2010년 2월 11일 작성. 2010년 2월 11일 확인.
  41. 정두언 "박근혜, 대통령 다 된 것처럼 생각"”, 《연합뉴스》, 2010년 2월 11일 작성. 2010년 2월 11일 확인.
  42. 고정애 기자. “MB - 박근혜 ‘비선 라인’이 없다”, 《중앙일보》, 2010년 2월 11일 작성. 2010년 2월 11일 확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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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4.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0/08/24/2010082400087.html '그들만의 소통') 조선일보 2010년 8월 24일
  45.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102111625381&code=910100 이재오 “대통령 다 된 듯…” 朴 때리기 본격화) 경향신문 2011년 1월 11일
  46. 상처입은`선거의 여왕 박근혜, 침묵 끝 한마디 매일경제 2010년 6월 3일
  47. (http://www.ccdailynews.com/section/?knum=152755 박근혜 지지율 2.3% 하락) 충청일보 2010년 6월 3일
  48. 박근혜 대권 행보 시작‥공청회 '대선출정식' 방불 mbc 2010년 12월 20일
  49. 박근혜, 빨라진 대권 행보‥'싱크탱크' 출범 mbc 2010년 12월 27일
  50.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214&aid=0000164333 한나라당 심재철 "박근혜 복지, 솔직하지 못해") mbc 2010년 12월 25일
  51. http://www.yonhapnews.co.kr/bulletin/2012/07/05/0200000000AKR20120705160300001.HTML?sns 박근혜 10일 영등포 타임스퀘어서 대선출마 선언] 연합뉴스 2012년 7월 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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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3. (영어) The Strongman's Daughter (HTML). 타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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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5. 박근혜, '타임' 표지 제목 해석 논란…'강력한 지도자? 독재자?'”.
  56. (영어) The Dictator's Daughter (HTML). 타임.
  57. 제18대 대통령 선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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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9. 박근혜, "직권상정하면 미디어법 반대표 던질 것"
  60. 박근혜 전 대표 미디어법 중재안 발언 후폭풍
  61. 박근혜의 '득과 실'
  62. 박근혜 前 대표 "세종시 원안대로"‥술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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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8. 李 “김정일은 만만치않은 터프가이” 朴 “줄푸세 운동해야” <<동아일보>> 2007-03-28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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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5. "제 291회국회-제8차 (임시회) 국회본회의회의록"
  76. "제 294회국회-제8차 (정기회) 국회본회의회의록"
  77. "제 287회국회-제12차 (임시회) 국회본회의회의록"
  78. "제 289회국회-제8차 (임시회) 국회본회의회의록"
  79. 재외국민 투표 허용 법안 국회 통과 <<동아일보>> 2009-05-25 작성
  80. "제 281회국회-제4차 (임시회) 국회본회의회의록"
  81. <매경이 만난 사람> 공천 탈락후 정계은퇴 선언한 강봉균 3선의원매일경제, 2012년 3월 30일
  82. 원칙·소신 두각 vs 불통·신비주의 한계매일경제, 2012년 7월 11일
  83. 박근혜·문재인·안철수 SWOT분석매일경제, 2012년 9월 28일
  84. SWOT 분석으로 본 대선 주자들…장단점은?서울방송 8시뉴스, 2012년 9월 20일
  85. [새누리 후보 박근혜 뒤집어보기(1) 원칙인가, 독선인가]경향신문, 2012년 8월 27일
  86. 서울대 재학생들 `폭탄발언` "안철수 사실은…"안철수·박근혜·문재인 나름 평가 책으로 출간매일경제, 2012년 6월 10일
  87. “정수장학회 해결 제안하자 날 멀리하더라”한겨레신문, 2012년 12월 14일
  88. "박근혜는 여성주류화의 현실적 대안" "박정희와 지역주의 그림자에 불과"
  89. <서화숙 칼럼/9월 14일> 세습을 반기는 사회한국일보, 2012년 9월 1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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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1. 월스트리트저널, “박근혜는 독재자의 딸” 미디어오늘 2012년 12월
  92. 외신들도 하나 같이 ‘독재자의 딸’로 표현 미디어오늘 2012년 12월
  93. http://book.naver.com/bookdb/book_detail.nhn?bid=6791621
  94. 말바꾼 박근혜에 박주선 "기회주의자" ..지지자 일부 "실망"
  95. 입증에는 성공…힘의 원천 '원칙'엔 흠집미디어법 모호처신에 박근혜 이미지 폭삭
  96. MBC 여론조사, 안철수 59%, 박근혜 33% 미디어오늘 2011년 9월
  97. 정치부 기자들이 꼽은 '차기 대통령감' 1위는?프레시안, 2012년 7월 1일
  98. 윤여준 "박근혜, 정치부 기자들 '불가론' 심각히 생각해야"프레시안, 2012년 7월 3일
  99. [한나라당 검증청문회] 朴 “숨겨둔 자식? DNA검사 해 주겠다”… 관련의혹 부인 쿠키뉴스 2007-07-19
  100. '부동산'·'최태민' 집중 추궁 YTN 2007-07-19
  101. 박근혜 불가론 박근혜가 만든다?
  102. 박근혜, 차분하게 각종 의혹 적극 해명 한국일보 2007년 07월 19일자
  103. mbn 24시 주요뉴스 MBN 2006년 06월 27일자
  104. 박근혜 "아이 있다는 말 천벌받을 일" 한국일보 2007년 07월 19일자
  105. (사설) '절반의 성공 그친 '李·朴 검증청문회' 세계일보
  106. [한나라 대선 예비후보 검증 청문회] 범여권 반응
  107. 의혹의 중심엔 ‘부적절한 인연?’ 경향신문 2007년 02월 20일자
  108. mbn 24시 주요뉴스 MBN 2006년 06월 27일자
  109. '박근혜 비방글'은 근령씨 남편이 작성
  110. http://joongang.joinsmsn.com/article/aid/2012/02/17/7030554.html?cloc=olink%7Carticle%7Cdefault
  111. http://www.nocutnews.co.kr/show.asp?idx=569422
  112. [5] 장윤선 기자, "박근혜 5·16 발언에 공감" 52.5%, 오마이뉴스, 2012.7.19.
  113. [6]김현 기자, YS "박근혜, 대통령 되기엔 결격사유 있다", 데일리안, 2012.7.17.
  114.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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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7. [10] 박정엽 기자, 안철수 48.4%, 박근혜 46.4%, 뷰스앤뷰스, 2012.7.29.
  118. [11]디지털뉴스팀, 박근혜, 5·16 질문 받자 “과거에 묻혀 사시네…”, 경향신문, 2012.8.8.
  119. [12], 황철환 기자, 김영삼 "박근혜 별것 아니다..칠푼이다" 혹평, 연합뉴스, 2012.7.11.
  120. [13] 정세운 기자, ‘칠푼이=독재자’를 왜곡하는 언론, 시사오늘, 2012.7.11.
  121. [14], 오윤환, 박근혜가 유신 2인자? YS 부자의 '멘붕', 데일리안, 2012.7.17
  122. (http://news.nate.com/view/20110909n01075 朴 "병 걸리셨어요 농담 부적절했다") 연합뉴스 2011년 9월
  123.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109091122131&code=910100 조국 “박근혜님의 새로운 별명…‘발끈해’”) 경향신문 2011년 9월
  124. [15]기사 내 박용진 민주통합당 대변인 발언 인용 ─ 최이락 기자, 민주 "불법사찰 가해자는 새누리ㆍ박근혜", 연합뉴스, 2012.4.4.
  125. [16]임진수 기자, 역공 들어간 새누리 "어느 정권이나 불법사찰, 노컷뉴스, 2012.4.1.
  126.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012161130111&code=910402 박지원 “박근혜 유리할 때만 고개 쳐들고…” 직격) 경향신문 2010년 12월 16일
  127.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10&oid=023&aid=0002233462 박근혜, 이젠 내키지 않는 질문에도 답할 때) 조선일보 2011년 2월 13일
  128. (http://news.nate.com/view/20110312n01193 조국 교수 “박근혜 인기, 환장할 노릇”) 동아일보 2011년 3월 12일
  129.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03&aid=0003693084 박근혜는 왜 말하지 않을까) 뉴시스 2011년 2월 16일
  130. (http://www.naeil.com/News/politics/ViewNews.asp?nnum=522573&sid=E&tid=1 친이, 세종시 공방속 박정희 공격)
  131. (http://www.frontiertimes.co.kr/news/news/2009/11/09/43642.html 김용태 "박근혜, 지역주의에 기댄 사익 추구")
  132. (http://news.hankooki.com/lpage/politics/201102/h2011021002332421000.htm 강명순 의원 '박근혜 호의호식' 논란)
  133. (http://www.munhwa.com/news/view.html?no=20100628010330371750020 박근혜, ‘친박계 해체’ 결단해야) 문화일보 2010년 6월 28일
  134. (http://www.vop.co.kr/A00000301840.html 한나라당 지지율 '급하락'..지방선거 '여파' 여전) 민중의 소리 2010년 6월 15일
  135. 박근혜 "이석기ㆍ김재연 사퇴하는게 옳다"(종합2보)연합뉴스, 2012년 6월 1일
  136. (사설) 박근혜의 민주주의관을 묻는다경향신문, 2012년 6월 3일
  137. (사설) 민주주의 소양 의심케하는 박근혜 의원 발언한겨레, 2012년 6월 3일
  138. "나는 박근혜가 무섭다"(이태경의 고공비행) 민주주의도, 법치주의도 무시하는 박근혜프레시안, 2012년 6월 5일
  139. 與, '색깔론' 공세 속 신중론 목소리도 커져뉴시스, 2012년 6월 6일
  140. http://www.mediatoday.co.kr/news/articleView.html?idxno=103015
  141. http://www.kookje.co.kr/news2011/asp/newsbody.asp?code=0100&key=20120809.22004212735
  142. 박근혜 “5·16 아버지의 불가피한 최선의 선택 《동아닷컴》, 2012년 7월 16일 작성
  143. 5·16 옹호 박근혜 발언 국민 절반이 “동의 못한다”《한겨레》, 2012년 7월 29일 작성
  144. 한 발 뺀 박근혜 "5·16이 정상적인 것은 아니다" 《한국경제》, 2012년 8월 7일 작성
  145. 박근혜, "5·16 정상적인건 아니지않나" 해석분분 《아시아경제》, 2012년 8월 7일 작성
  146. 연좌제 피해자들이 연좌제를 써먹는대서야 《뉴데일리》, 2012년 8월 19일 작성
  147. 전순옥 "朴 고통당하는 사람 먼저 찾아야"(종합) 연합뉴스, 2012년 8월 28일
  148. '아수라장' 된 박근혜의 '국민대통합'…문제는 진정성 노컷뉴스, 2012년 8월 29일
  149. 진중권 "박근혜, 정치적 성추행 중단해야"이데일리, 2012년 8월 28일
  150. 민주 "박근혜, 최저임금도 모르면서 전태일재단 방문?"노컷뉴스, 2012년 8월 28일
  151. [17]이경태기자, 박근혜 "인간 포기한 흉악범 경고위해 사형제 필요", 오마이뉴스, 2012.9.4.
  152. [18]리얼미터 조사에서 85.5% 사형제 찬성 - 신광영, 장선희, 최우열 기자, 박근혜 “사형제 있어야”… 집행 찬반논쟁 정치권 달군다, 동아일보, 2012.9.5.
  153. [19]한경닷컴 산업경제팀, 이해찬 "인혁당 사건 잊었냐"…사형제 폐지 주장, 한국경제, 2012.9.4
  154. [20]이용욱・조현철기자, 사형제폐지 논의 물꼬 반대여론 돌파가 관건, 경향신문,2005.2.18.
  155. [21]송은석 기자 헌화하는 인혁당 사건 추모제 참석자들, 노컷뉴스, 2012.4.8.
  156. [22] 남도영 안의근 기자, 박근혜 “국정원 과거사 규명은 가치없는 모함” 강력 비난, 국민일보, 2005.12.8.
  157. [23] 김현길 기자, 인혁당 무죄선고…재심 줄 이을 듯, 국민일보, 2007.1.23
  158. 박근혜 "유신ㆍ인혁당 역사판단에 맡겨야"(종합)연합뉴스, 2012년 9월 10일
  159. 박근혜 “인혁당 대법 판결은 2개” 헌정무시경향신문, 2012년 9월 11일
  160. 박근혜 "인혁당 판결 두개" 논란···'통합' 걸림돌될까머니투데이, 2012년 9월 10일
  161. 박근혜 "인혁당에 대한 대법원 판결은 두가지" 발언 논란매일경제, 2012년 9월 11일
  162. <사설>‘인혁당 판결이 두 개’라는 박근혜 후보의 법치 인식경향신문, 2012년 9월 11일
  163. <사설> 박근혜, 인혁당 사건에 대한 분명한 입장 밝혀야한겨레, 2012년 9월 11일
  164. <사설/9월 12일> 박근혜 후보 언제까지 "역사 판단" 타령인가한국일보, 2012년 9월 12일
  165. "박근혜 인혁당 발언, 사법부 부정하는 것"연합뉴스, 2012년 9월 11일
  166. 전국 로스쿨 학생들, 박근혜 인혁당 발언 비판성명오마이뉴스, 2012년 9월 23일
  167. 로스쿨 학생들 “박근혜 ‘인혁당’ 역사인식 깊은 우려”로이슈, 2012년 9월 24일
  168. 민주 "박근혜, 역사부정 이어 사법부정 하나?"이데일리, 2012년 9월 10일
  169. 이해찬 "朴 인혁당 발언, 대법원 모독"뉴시스, 2012년 9월 10일
  170. 민주당, 인혁당 관련 박근혜 후보 비판 잇따라KBS, 2012년 9월 11일
  171. 박근혜 "인혁당 판결 두개" 논란···'통합' 걸림돌될까머니투데이, 2012년 9월 10일
  172. 박근혜 "인혁당 평가, 최근 여러증언 감안해야"(종합)연합뉴스, 2012년 9월 11일
  173. ‘인혁당’ 사실관계마저 호도…자기신념에 갇힌 박근혜한겨레, 2012년 9월 11일
  174. 박근혜가 주장하는 인혁당 ‘다른 증언’은 1차 사건과 혼동한 듯경향신문, 2012년 9월 11일
  175. 박근혜, 인혁당 반론 펴다 현대사 무지 드러내오마이뉴스, 2012년 9월 11일
  176. 박근혜, 1차 · 2차 인혁당 사건 구분 못 했나노컷뉴스, 2012년 9월 11일
  177. [24]이도형 기자, 인혁당 유족 “박근혜, 칠푼이·정신나간 여자·발달장애인” 맹비난, 이데일리, 2012.9.12.
  178. ‘인혁당’ 사실관계마저 호도…자기신념에 갇힌 박근혜한겨레, 2012년 9월 11일
  179. “박근혜 인혁당 발언, 사건 날조·재판 허구성 모르고 하는 소리”경향신문, 2012년 9월 14일
  180. <사설> '박근혜 시대' 열려면 '아버지와 딸' 個人史 넘어서야조선일보, 2012년 9월 14일
  181. 박근혜 "5.16ㆍ유신ㆍ인혁당 피해자가족에 사과"(종합)연합뉴스, 2012년 9월 24일
  182. 野, 박근혜 후보 사과 진정성에 의문 "질문 왜 안 받나?"머니투데이, 2012년 9월 24일
  183. 민주 "박근혜 인혁당을 민혁당이라 읽어…진정성 의문"서울방송, 2012년 9월 24일
  184. 박근혜, 인혁당을 민혁당으로...조국 "그에게 같은 사건일 것"머니투데이, 2012년 9월 24일
  185. 박근혜 '민혁당'이라 발음한 까닭이…한국일보, 2012년 9월 25일
  186. [http://www.mediatoday.co.kr/news/articleView.html?idxno=105432 박근혜와 언론의 ‘역사 조롱’ <손석춘 칼럼>]미디어오늘, 2012년 10월 10일
  187. 인혁당 유족 "박근혜, 마지못해 사과하나"(종합)연합뉴스, 2012년 9월 24일
  188. 박근혜 과거사 사과에 문재인-안철수 반응 온도차프레시안, 2012년 9월 24일
  189. 돌아온 전여옥의 '독설'아시아경제, 2012년 1월 6일
  190. "김종인은 수뢰·철새… 이준석은 김종인 들러리"한국일보, 2011년 12월 29일
  191. 안대희 "한광옥 국민대통합위원장 임명땐 사퇴"(종합)연합뉴스, 2012년 10월 8일
  192. <김진의 시시각각> 뇌물 망각증중앙일보, 2012년 7월 9일
  193. ‘700억 분식회계’ 처벌 장흥순, 박 캠프 벤처특보로 임명 논란중앙일보, 2012년 10월 13일
  194. 박근혜, 국민대통합 때문에 정치쇄신 뒷전?아시아투데이, 2012년 10월 14일
  195. '대표 철새' 집합시켜 '동교동계도 박근혜 지지'?오마이뉴스, 2012년 10월 15일
  196. 박근혜 지지 동교동-상도동계? “정치철새 인가”미디어오늘, 2012년 10월 15일
  197. 김무성, "동교동계 입당, 감동의 정치"머니투데이, 2012년 10월 16일
  198. 이인제 “지구 한 바퀴 돌았다”중앙일보, 2012년 10월 26일
  199. <사설/10월 26일> 이인제와 손잡은 박근혜, 득이기만 할까한국일보, 2012년 10월 2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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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7. [31]김주언 언론인, 박근혜, '언론 사태' 대선까지 가길 바라나?, 프레시안, 2012.6.29.
  208. [32]기사에서 mbc 파업이라 써 있는 것을 관련 문서로 연결하기 위해 2012년 mbc 노조 총 파업으로 수정함 - 김화영 기자, 박근혜 "MBC파업, 노사 슬기롭게 풀어야", 연합뉴스, 2012.6.22.
  209. [33]김효섭 기자, 박근혜 후보의 말말말, 서울신문, 2012.8.21.
  210. [34]김주성 기자, 박근혜 "네가티브에 시달려 멘붕 올 지경", 연합뉴스, 2012.8.6.
  211. [35] 김성곤 기자, 박근혜 "재정건전성 무시한 복지 반대..증세 무책임, 이데일리, 2012.8.22.
  212. [36]허진 기자, "전태일재단 방문 쇼 아니다 … 계속 할 것", 중앙일보, 2012.8.30.
  213. [37] 이지선·임지선 기자, 박근혜 “인혁당 대법 판결은 2개” 헌정무시, 경향신문, 2012.9.10.
  214. [38]박종화, 김연정 기자, 박근혜 "인혁당 평가, 관련자 증언도 감안해야", 연합뉴스, 2012.9.11.
  215. [39]조선닷컴, 박근혜 "정준길, '협박' 할 위치 아니야…이해 안 돼", 조선일보, 2012.9.6.
  216. [40]육성연 기자, 박근혜 “보도보고 알았다. 어떻게 친구사이에…”, 헤럴드경제, 2012.9.7.
  217. [41]나원식 기자, 박근혜, 문재인에 직격탄 "NLL 대화록, 관련자가 밝혀야", 이데일리, 2012.10.13.
  218. [42]최지은 기자, 제 10장│바쁜 벌꿀, 텐아시아, 2012.8.14.
  219. [43] 이혜미기자, 박근혜 ‘인혁당’을 ‘민혁당’으로…트위터 ‘술렁, 헤럴드경제, 2012.9.24.
  220. [44]허란 도병욱이현진 기자, 박근혜, 이따금 말 실수로 곤혹…문재인, 발음 새고…安, 영어 과용, 한국경제, 2012.10.14.
  221. [45]2007년 한나라당 대선 후보 토론회 편집 영상
  222. [46]이준서 김연정 기자, 박근혜 카이스트 방문.."나는 이공계 출신", 연합뉴스, 2012.10.8.(카이스트 본관에서 대전 지역 과학기술연구원들과 간담회를 가지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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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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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나라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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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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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mblem of the National Assembly of Korea.svg 전 임
박근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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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 5월 30일 ~ 2004년 5월 29일
한나라당한국미래연합한나라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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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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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권한대행)김영선
강재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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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7대 국회의원(달성군)
2004년 5월 30일 ~ 2008년 5월 29일
한나라당
후 임
박근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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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mblem of the National Assembly of Korea.svg 전 임
박근혜
제18대 국회의원(달성군)
2008년 5월 30일 ~ 2012년 5월 29일
한나라당새누리당
후 임
이종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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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임
홍준표
새누리당 비상대책위원장
2011년 12월 19일 ~ 2012년 5월 15일
후 임
황우여

 

 

 

 

 

 

 

 

  하버드대 특강 연설문

< 대한민국과 미국, 함께 나눌 미래 >
Harvard Kennedy School / Arco (John F. Kennedy Junior Forum
  
존경하는 빌 화이트 정치학연구소 소장님, 데이비드 맥칸 한국학연구소 소장님, 앤토니 사이치 아시아센터 소장님, 그리고 신사 숙녀 여러분,

미국의 산 역사이며 세계의 명문대학인 Harvard 대학의 교수님과 학생 여러분과 소중한 대화의 시간을 갖게 되어 큰 영광입니다.

Harvard 대학은 한국과도 깊은 인연이 있는 학교입니다.
한국의 초대 대통령인 故 이승만 대통령께서 바로 이 곳 Harvard에서 역사를 공부하셨습니다.
한국인 최초의 UN 사무총장인 반기문 총장도 여러분의 자랑스러운 동문입니다.

우리 한나라당에도 Harvard 졸업생들이 눈부신 활약을 하고 있습니다.
특히 이 곳 Kennedy School of Government에서 공부한 국회의원만 한나라당에 세 분이나 있는데, 모두 한나라당의 소중한 보배들입니다. (박진 MPP, 권영세 MPA, 박재완 h.D)
그 중 두 사람이 저와 같은 Park氏입니다.

제 아버지는 1961년 백악관에서 Kennedy 대통령과 회담을 가졌습니다.
세계 최강대국 미국의 대통령과 1인당 국민소득 100달러도 안되는 아시아 최빈국 지도자의 만남이었지만, 두 분은 자유진영이 공산주의에 맞서 반드시 승리할 것이라는 확신을 가졌습니다.
그리고 오늘 대한민국이 새로운 안보 질서의 도전에 직면한 상황에서, 그 딸이 Kennedy School을 찾아왔습니다.

한국인들은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고 여깁니다.
그만큼 한국인들은 만남과 인연을 소중하게 생각합니다.
오늘 저도 Harvard와 Kennedy School과 좋은 인연을 맺게 되었으니 앞으로 여러분께서 저를 한 식구처럼 생각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존경하는 신사 숙녀 여러분,
저는 오늘 여러분과 함께, 대한민국과 미국이 함께 나눌 미래에 대한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저는 한국의 딸로서 대한민국의 60년 역사를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한국은 식민지배에서 해방 후, 분단의 고통과 전쟁의 참화까지 겪었습니다.
온 나라가 폐허가 되고 수백만이 죽거나 다쳤던 참혹한 시간이었습니다.
그러나 대한민국은 그 큰 상처를 딛고 일어섰습니다.

1961년에 1인당 국민소득 82달러에 불과했던 한국이 올해는 국민 소득 2만 달러를 눈앞에 두고 있습니다.
1964년 1억달러였던 한국의 수출액은 작년에 3천억달러를 돌파했습니다.
겨우 40여년 만에 국민소득은 250배, 수출액은 3천배가 된 것입니다.

1968년 처음으로 미국의 자동차를 가져다가 조립했던 한국이 지금은 세계 5위의 자동차 생산국이 되었고, 미국에서도 한국산 자동차를 보는 일이 이제는 흔한 일이 되어 있습니다.

한국의 핸드폰은 세계적인 명품이 되어있고, 컴퓨터와 반도체 부문에서 세계 시장을 지배하고 있습니다.

일본, 중국과 아시아 각국에서 한국의 드라마와 영화가 헐리우드 영화와 같은 대접을 받고 있고, 한국의 음반들이 아시아 시장에서 상종가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가난한 나라, 희망이 없던 나라가 기적을 이룬 것입니다.

제가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대한민국의 역사는 또 있습니다.

산업화를 압축적으로 진행해서 어느 정도 먹고 사는 문제가 해결된 1980년대 후반부터는 민주화가 놀라운 속도로 발전했습니다.

민주주의의 가치를 실현하기 위해 노력하신 수많은 분들의 용기와 희생에 저는 깊은 경의를 표합니다. 이 분들의 희생 덕분에 오늘날 한국의 민주주의가 꽃을 피우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대한민국은 20세기 후반 산업화와 민주화를 함께 달성한 유일한 나라가 되었습니다.

세계인들은 이런 대한민국의 역사를 ‘한강의 기적’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그러나 대한민국 국민들은 이것을 ‘기적’이라고만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런 성취의 역사를 만들기 위해 한국인들은 세계 어느 나라의 국민들보다 많은 땀을 흘려야 했고, 많은 눈물을 쏟아야 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단지 우리만의 노력으로 이런 기적을 일군 것은 아니라는 사실도 한국인들은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가 여기까지 올 수 있도록 도운 좋은 친구들이 있었습니다.
바로 미국은 그 친구들 가운데에서도 가장 가깝고 좋은 친구였습니다.
친구를 넘어 피를 나눈 형제와 같은 존재였습니다.

저는 오늘 Harvard 대학에 와서 교내 추모교회를 둘러보았습니다.
그 곳에서 이 대학 출신의 젊은이들이 한국전쟁에 나가 전사한 명단이 새겨진 것을 보았습니다.
오늘날 한국이 누리는 자유와 번영은 바로 여러분의 선배들께서 흘린 피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이 자리를 빌어서, 우리의 성장을 함께 해 온 미국민 여러분께 깊이 감사드립니다.


그러나 산업화와 민주화를 넘어 일류 선진국을 건설하겠다는 한국인들의 꿈은 아직 채워지지 않았습니다. 더 풍요롭고, 더 정의롭고, 더 안전한 나라 그리고 국제평화와 번영을 위해 기여하는 나라를 건설하는 것이야말로 저를 포함한 모든 한국인들이 간절히 소망하는 대한민국의 미래입니다.
그리고 그 길을 가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것 가운데 하나가 바로 한미동맹의 든든한 확립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최근 미국을 바라보는 한국인들의 시각이 과거와 달라진 것에 대해 실망하고 섭섭해하는 미국민들이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여러분께서 이러한 상황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지금 한국사회가 겪고 있는 심각한 진통을 이해해야 한다는 것을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어느 사회를 막론하고 발전과정의 진통은 피할 수 없는 일이지만, 지금 한국이 겪고 있는 진통은 한국의 역사에 기인한 한국적 특수성을 갖고 있습니다.

그 진통 속에는 몇 가지 중요한 對比가 있습니다.
자유냐 평등이냐, 성장이냐 복지냐, 시장이냐 국가냐,
작은 정부냐 큰 정부냐 같은 대립이 있습니다.
그리고, 과거냐 미래냐, 민족공조냐 한미공조냐, 반미냐 친미냐,
자주냐 외세냐 같은 대립도 있습니다.
이런 대립으로 한국 사회는 지금 혼란과 정체에 빠져 있습니다.

물론 이러한 문제는 어느 나라에서나 발견되는 이념적 대립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같은 민족끼리 남과 북으로 갈라져 아직도 휴전 상태에 있는 특수한 상황에서 북한이라는 현실의 존재가 한국사회의 이러한 갈등을 더 심각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북한 정권의 핵실험과 인권탄압은 분명 제거되어야 할 대상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 역시 지구상에 존재하는 유일한 핏줄이라는 사실에 한국인들의 고민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이런 갈등의 현장에서 대한민국 건국의 아버지들이 선택한 우리 헌법의 가치를 상기해야 한다고 믿습니다.
그것은 민주주의와 시장경제에 대한 확고한 신념입니다.
이 신념은 오늘의 대한민국이 다시 선택해야 할 길이기도 합니다.

한국이 가야 할 길은 분명합니다.
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더욱 발전시켜야 합니다.
법치주의를 확립하고, 노사관계에 원칙을 바로 세워야 합니다.
결과의 평등이 아니라 기회의 평등을 목표로 자유를 확대해야 합니다.
성장의 토대 위에 복지가 이루어지는 구조를 만들어 커가면서 나누는 따뜻한 공동체를 만들어야 합니다.

한국이 걸어가야 할 외교적 입장도 명확합니다.
자주냐 외세냐의 이분법이 아니라 국가이익을 생각하는 실리외교를 펴야 합니다.
한미동맹도 21세기에 맞게 더욱 성숙시키고 발전시켜 나가야 할 것입니다.

양국이 함께 성장하고 발전하는 경제적 파트너로, 자유민주주의를 함께 지켜가고, 동북아시아와 더 나아가 세계 평화에 함께 기여하는 안보의 동반자로 자리 잡아 나가야 합니다.

저에게 주어진 역사적 사명이 이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길에 저의 최선을 다할 것입니다.


존경하는 Harvard 대학의 교수님과 학생 여러분,
저는 이제 여러분께, 우리 한국과 미국 앞에 던져진 시급한 두 가지 과제에 대한 저의 생각을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먼저 그 동안 한국과 미국을 굳게 묶어온 안보동맹의 미래에 대한 과제입니다.

지금 한국은 북한이 던지고 있는 심각한 안보적 도전에 직면해 있습니다.
1950년 한국전쟁이 첫 번째 위기라면, 지금은 두 번째 안보적인 위기라고 생각합니다.

한국전쟁 이래 북한은 여러 형태의 무력적 도발을 지속해 왔습니다.
청와대를 습격했고, 해외에서 우리 대통령에 대한 폭탄 테러를 자행했으며, KAL기 폭파, 서해 교전 등 북한이 자행한 대남 폭력도발 행위의 리스트는 실로 깁니다.

저의 어머니께서도 북한의 사주를 받은 사람의 총탄에 돌아가셨습니다.
그 때 제 나이 겨우 22살에 퍼스트레이디를 대행해야 했습니다.

하지만 지금처럼 북한이 핵무장을 하지는 않았습니다.
2006년 10월 9일 단행한 북한의 핵 실험으로 한반도 안보는 이제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었습니다.

이제 한국의 미래는 핵무기로 무장한 북한의 안보 위협을 어떻게 성공적으로 억지하고 대처해서 한국의 지속적 발전에 기초가 되는 평화와 안정을 확보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현재 북한 핵문제 해결을 위해 기본적으로 4가지 Key가 동원되고 있습니다.
즉 6자회담, 유엔 안보리 제제와 PSI, 미북 접촉, 그리고 남북 대화입니다.

현재 각 Key들이 각 Key별로 나름대로 역할을 하고 있고 일부 진전도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북한 핵이라는 단단히 잠긴 문을 열려면 이 요소들을 모두 통합하여 실질적 진전이 이루어지도록 접근해야 한다고 믿습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어떤 경우에도 북한 핵은 용납될 수 없다는 국제 사회의 강력한 의지가 ??지되어야 하고 이 점이 차질 없이 북한에 일관되게 전달되 어야 할 것입니다.

북한 핵실험은 결코 ‘Business as usual’로 대처할 수 있는 사안이 아닙니다.
6자회담이 재개되고 있고 미북간 접촉도 성과가 있다고 보도되고 있지만 앞으로 더욱 힘들고 어려운 협상 과정을 각오해야 할 것입니다.
북한에게 국제 사회의 강한 의지를 한 목소리로 전달해야 하고 한국 정부도 유엔 안보리 제제 조치와 PSI 조치에 적극 동참해야 합니다.

그리고 저는 4가지 Key 외에 북핵 해결을 위해 결정적 중요성을 갖는 또 하나의 Key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바로 한미동맹이라는 Key입니다.
한미 군사 동맹은 지난 1953년 한미 상호 방위 조약이 체결된 이래 한반도의 평화와 안정을 성공적으로 유지해온 한국 안보의 근간이었습니다.
한국인들은 이를 바탕으로 “오늘의 한국”이라는 기적을 일구어 냈습니다.
그렇게 한미 동맹은 가장 성공적인 그 효용성이 오랜 세월을 통해 입증된 군사 동맹 Formula인 것입니다.

최근 들어 안타깝게도 한미 동맹이 약화되고 있는 징후가 보이고, 상호신뢰에 손상을 끼치는 사례도 일부 증가되고 있습니다.
심지어 한미 관계를 이혼 직전의 부부관계라는 비유마저 등장하고 있습니다.
이는 한미 양국 국가 이익을 위해서도 매우 불행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저는 앞으로 한미 동맹의 미래를 결코 비관하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한미 동맹이 그간 한미 양국의 국가 이익에 훌륭히 봉사해 왔고, 동북아의 평화 증진에도 기여하고 있음을 기억하는 양국민이 훨씬 더 많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측면에서 대한민국 국민도 미국 국민도 더 이상의 동맹 파괴 행위를 용납하지 않을 것이라고 저는 확신하고 있습니다.

둘째로 우리 앞에는 한미 FTA라는 과제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저는 현재 진행중인 한미 FTA 협상이 성공적으로 매듭지어지면, 이것이 한미관계의 미래를 획기적으로 진전시키는 큰 걸음이 될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습니다.
한미 FTA는 한미 양국이 성장과 발전을 공유하고, 한국민과 미국민 모두에게 더 큰 이익을 주는 방향으로 나가야만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100%에게 만족과 이익을 줄 수는 없다고 해도, 최소한 양국 어느 쪽이라도 돌이킬 수 없는 피해를 입는 국민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 저의 생각입니다.
만약 그런 일이 벌어진다면 실제로 양국의 이익에 부합하지 않을 뿐 아니라, 심할 경우 한미관계의 후퇴를 가져올 수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말씀드리자면, 한국의 농업은 미국의 농업과 상당히 다른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미국에서 생각하는 산업적인 측면만을 가지고 한국 농업, 특히 쌀시장의 개방을 요구한다면, 한국민들의 동의를 얻어내기가 상당히 어려울 수밖에 없습니다.

저는 한미 FTA 협상이 차분하게 진행을 해서, 이것이 진정으로 한미 양국 관계 진전에 큰 역할을 하기를 기대합니다.


신사 숙녀 여러분,

저는 일생을 시련 속에 살아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어머니께서 총탄에 돌아가셨을 때, 저는 지구 반대편 프랑스에서 유학중이었습니다.
어머니의 마지막 순간조차 함께 하지 못했습니다.
슬퍼할 겨를도 없이 그 자리를 메우기 위해 퍼스트레이디의 역할을 해야만 했습니다.

그런데 몇 년 되지 않아서 다시 아버지까지 또 그렇게 보내드려야 했습니다.
정말 숨쉬는 것조차 고통스럽게 느껴졌던 시간이었습니다.
누구나 살면서 서로 다른 종류의 시련을 겪습니다.
그리고 누구나 자기가 겪는 시련이 가장 가혹하다고 생각합니다.
저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래서 ‘평범한 가족에서 태어났더라면’이라는 제목의 수필집까지 냈습니다.
그런데 그 책도 많이 팔리지 않았습니다.
그것도 저에게는 시련이었습니다.

이렇게 시련 속에 살아온 저를 정치로 불러들인 것은, 다름아닌 조국이 겪는 시련이었습니다.

청와대를 나와 18년간 소시민으로 살았던 저는 10년 전 IMF 사태로 조국 대한민국이 무너져 가는 모습을 보면서 나 혼자 편하게 살아갈 수 없다는 생각으로 정치를 시작했습니다.

금년 12월에 있을 한국의 대통령선거를 저는 ‘역사적 선거’라고 말합니다.

이 선거는 대한민국이 이대로 주저앉느냐 아니면 다시 일어서느냐를 결정하는 선거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이번 선거는 한미동맹의 운명이 걸린 선거이기도 합니다.

저는 아무리 시간이 흐르고 세상이 변해도 한국과 한국인들은 한국전쟁에서 소중한 목숨을 희생한 미국의 젊은이들을 결코 잊어선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한국 정부의 부총리를 지내셨던 이한빈씨는 한국전쟁 당시 Harvard Business School의 유학생이었습니다.
그 분은 고국에서 전쟁이 발발하자 공부를 중단하고 맥아더 사령관에게 귀국하는 비행기편을 부탁해서 통역관으로 전쟁에 참여했습니다.
한국과 미국 사이에는 이와 같은 아름다운 인연이 수없이 많습니다.

한국과 미국 사이에는 ‘자유’와 ‘진리’와 ‘정의’라는 공통의 가치관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 공통의 가치관을 피와 땀과 눈물로 함께 지켜온 50년의 역사가 있습니다.

저에게 기회가 주어진다면 저는 미국과 진솔한 대화를 통해 한미동맹의 미래를 설계해 나갈 것입니다.

이를 통해 한미동맹이 앞으로 또 다른 50년 아니 100년을 지속할 수 있는 확고한 기반을 마련할 것입니다.
동맹의 미래에 대한 비전을 제시하고 국민을 설득하고 리더십을 발휘할 것입니다.

저의 목표는 단지 하나입니다.
위기의 조국을 구하는 것입니다.
(I'm in to save my country.)

경청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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