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라하의 카를로바 거리 (속) 체코 프라하(Praha)의 명소를 찾아서 글 / 들 샘 정 해각 구시가 광장(Staromestske nameti)전경 구시가 광장 주변에 <구시청사>, <틴 성당>, <킨스키 궁전>, <성 미쿨라세 성당> 등 중세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다양하고 아름다운 건물들이 한자리에 마주하고 있다. 광장을 한 바퀴 돌면 로마네스크에서 아르누보 양식에 이르는 모든 건축양식을 한자리에서 감상할 수 있다고 하여 시인 <릴케>는 프라하를 ‘건축의 도시’라고 표현했다 한다. 구시가 광장의 황금 성모마리아 상을 모신 틴 성모성당 프라하의 구시가 광장을 상징하는 것은 광장 한가운데에 우뚝 서있는 얀 후스의 군상(Pomnik Jana Husa)이다. 체코의 영웅으로 추앙받는 얀 후스는 그 당시 종교지도자이며 철학자로 카를대학 총장으로 로마가톨릭의 부패와 타락을 신랄히 비난하다가 1411년 이단으로 몰려 로마 교황에게 파문당하고 1415년 독일의 콘스탄츠의회에서 유죄판결을 받아 이 광장에서 산체로 화형을 당한 종교개혁의 선구자였다. 후에 얀 후스는 순교자로 추앙받았다. 얀 후스 군상(Pomnik Jana Husa)동상 청동으로 된 후스의 기념 군상은 그의 서거 500주년을 기념하여 1915년에 조각가 <라디슬라프 살로운(Ladislav saloun)>에 의해 만들어진 것으로, 한쪽의 군상은 후스 추종자들인 후스 파(Hussites)의 전사들이 후스를 에워싸고 있는 모습이며, 다른 한 무리는 빌라호라(Bílá hora)의 전투 후에 국외로 추방당한 프로테스탄트들의 모습을 형상화 한 것이라고 한다. 1620년 11월 보헤미아왕국 수도 프라하 서쪽 교외의 빌라호라(백산)언덕에서 충돌한 가톨릭인 신성로마 황제군과 비가톨릭계인 프로테스탄트들 즉 보헤미아귀족,·용병군과의 싸움으로 30년 종교전쟁(1618∼48)의 발단이 됐다. 황제군에 패한 징벌로 과격 주모자인 20여 명의 귀족이 프라하 옛 시가지 광장에서 교수형을 당하고 반란참가자의 대부분은 나라 밖으로 추방되었다 한다. 특히 민중의 한가운데에 의연하게 서 있는 얀 후스의 상에는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는 강인하고 꿋꿋한 정신이 나타나 있었다. 동상대에 각인된 얀 후스의 명언 진리 드라마 프라하의 연인에서 보는 바와 같이 얀 후스의 군상의 주변은 많은 사람들의 만남의 장소로 유명하다. 진리를 사랑하고, 진리를 말하고, 진리를 지키라”는 얀 후스의 유명한 명언이 각인된 동상 밑에는 만남을 약속한 듯 젊은이들이 많이 앉아 있었으며 광장의 남쪽구역의 하얀 파라솔들이 옹기종기 펼쳐진 노천카페에서는 차를 마시며 한가로이 담소를 나누는 사람들로 분비고 있었다. 시계탑 전망대에서 본 구시가 광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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