鶴山의 草幕舍廊房

유럽 아프리카

체코 프라하(Praha)의 명소를 찾아서

鶴山 徐 仁 2011. 12. 19. 15:58





프라하의 카를로바 거리


(속) 체코 프라하(Praha)의 명소를 찾아서

글 / 들 샘 정 해각

체코 프라하(Praha) 구시가 광장((Staromestske namesti)의 얀 후스 군상(Pomnik Jana Husa)

카를 교를 건너서 카를로바 거리의 구 시청사(Staromestska radnice)의 천문시계를 본 후 조금 지나가니 광장이 나타난다. 이것이 구시가 광장(Staromestske nameti)이다. 구시가 광장(Staromestske nameti)은 11세기 이전부터 상인들이 모여들어 상업 활동을 하던 시장터였으나 13세기 이후 주변에 많은 주택과 건물이 들어서면서 광장의 모습이 갖추어지게 되었고, 14세기에 이르러 시청이 들어서면서 행정과 상업의 중심지로 변모하였다고 한다.



구시가 광장(Staromestske nameti)전경


구시가 광장 주변에 <구시청사>, <틴 성당>, <킨스키 궁전>, <성 미쿨라세 성당> 등 중세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다양하고 아름다운 건물들이 한자리에 마주하고 있다. 광장을 한 바퀴 돌면 로마네스크에서 아르누보 양식에 이르는 모든 건축양식을 한자리에서 감상할 수 있다고 하여 시인 <릴케>는 프라하를 ‘건축의 도시’라고 표현했다 한다.



구시가 광장의 황금 성모마리아 상을 모신 틴 성모성당


프라하의 구시가 광장을 상징하는 것은 광장 한가운데에 우뚝 서있는 얀 후스의 군상(Pomnik Jana Husa)이다. 체코의 영웅으로 추앙받는 얀 후스는 그 당시 종교지도자이며 철학자로 카를대학 총장으로 로마가톨릭의 부패와 타락을 신랄히 비난하다가 1411년 이단으로 몰려 로마 교황에게 파문당하고 1415년 독일의 콘스탄츠의회에서 유죄판결을 받아 이 광장에서 산체로 화형을 당한 종교개혁의 선구자였다. 후에 얀 후스는 순교자로 추앙받았다.



얀 후스 군상(Pomnik Jana Husa)동상


청동으로 된 후스의 기념 군상은 그의 서거 500주년을 기념하여 1915년에 조각가 <라디슬라프 살로운(Ladislav saloun)>에 의해 만들어진 것으로, 한쪽의 군상은 후스 추종자들인 후스 파(Hussites)의 전사들이 후스를 에워싸고 있는 모습이며, 다른 한 무리는 빌라호라(Bílá hora)의 전투 후에 국외로 추방당한 프로테스탄트들의 모습을 형상화 한 것이라고 한다.
1620년 11월 보헤미아왕국 수도 프라하 서쪽 교외의 빌라호라(백산)언덕에서 충돌한 가톨릭인 신성로마 황제군과 비가톨릭계인 프로테스탄트들 즉 보헤미아귀족,·용병군과의 싸움으로 30년 종교전쟁(1618∼48)의 발단이 됐다. 황제군에 패한 징벌로 과격 주모자인 20여 명의 귀족이 프라하 옛 시가지 광장에서 교수형을 당하고 반란참가자의 대부분은 나라 밖으로 추방되었다 한다. 특히 민중의 한가운데에 의연하게 서 있는 얀 후스의 상에는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는 강인하고 꿋꿋한 정신이 나타나 있었다.



동상대에 각인된 얀 후스의 명언 진리


드라마 프라하의 연인에서 보는 바와 같이 얀 후스의 군상의 주변은 많은 사람들의 만남의 장소로 유명하다. 진리를 사랑하고, 진리를 말하고, 진리를 지키라”는 얀 후스의 유명한 명언이 각인된 동상 밑에는 만남을 약속한 듯 젊은이들이 많이 앉아 있었으며 광장의 남쪽구역의 하얀 파라솔들이 옹기종기 펼쳐진 노천카페에서는 차를 마시며 한가로이 담소를 나누는 사람들로 분비고 있었다.



시계탑 전망대에서 본 구시가 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