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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y] [김윤덕의 사람人] 아름다운 역마살/ 조선일보

鶴山 徐 仁 2011. 10. 15. 16:24
사회
사람들

[Why] [김윤덕의 사람人] 아름다운 역마살

 

입력 : 2011.10.15 03:13 / 수정 : 2011.10.15 13:19

김윤덕 기획취재부 차장

바람의 딸, 이번엔 유엔으로 행군하다
한비야, 600만달러 '긴급기금' 다루는 유엔 자문위원으로… 그녀가 말하는 '뜨거운 도전'
"청춘들이여 이유없는 아픔은 없다 _ 지금 오르막을 오르니까 종아리가 당기는 거다"

한비야(53)가 11월, 유엔(UN)으로 가는 '기차'를 탄다. 월드비전 긴급구호팀장 9년을 마감하고 '환승역'에 머문 지 2년 만이다. 유엔 중앙긴급대응기금(CERF:Central Emergency Response Fund) 자문위원이 그가 할 일. 매년 600만달러에 달하는 유엔 긴급기금이 효율적으로 배분되고 쓰이는지 평가하고 보고하는 일이다. 유엔행이 결정되고 나서야 한비야를 만날 수 있었다. 월드비전을 그만둔 이후 언론의 인터뷰 요청을 거절해온 그였다. 흥미로운 건, 2년의 공백 중에도 한비야는 여전히 20대가 닮고 싶은 여성의 상위순위를 점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말의 속도가 더욱 빨라진 걸 보니, 유엔이 한비야를 다시 흥분시키고 있는 게 분명했다. "NGO 출신으로, 그것도 여성이 유엔 자문위원 18명 중 1명이 되는 일이 흔하지 않잖아요? 아, 내 앞에 또 어떤 일이 펼쳐질지 진짜 기대돼요." 유엔은 이른바 '한비야 키즈'들이 대거 진출해 있는 현장이기도 하다. 세계 곳곳의 구호현장 체험을 엮은 그의 '지도 밖으로 행군하라'를 읽고 자란 'G세대', 즉 글로벌 세대들이 그들의 '교주'이고 멘토였던 한비야를 맞이하는 셈이다.

한비야를 서울 불광동 집에서 만났다. 산을 좋아하는 그녀가 "북한산 밑에 있는 집"이라며 뻑적지근하게 자랑하던 작은 아파트였다. 오지여행가에서 긴급구호활동가로, 다시 유엔맨으로 변신하게 된 소감을 묻자, 동그란 눈을 더 크게 뜨며 말했다. "나도 내가 앞으로 커서 뭐가 될지 정말 궁금해요. 내 인생의 하이라이트는 지금부터 시작 아닐까요? 하하!" 한비야는 여전히 뜨겁고, 발랄하고, 수다스러웠다.

'안티 한비야'

―아무리 유엔이라도 '자문위원'이란 직함이 '열혈' 한비야에겐 좀 한가한 자리 아닌가 싶다.

"한국에서 자문, 어드바이저의 위상이 어떤 건지는 몰라도 나는 정말 중요한 자리라고 생각한다. 사무총장 직속으로, 우리가 평가하고 보고한 서류들이 곧장 사무총장에게 전달된다. 뭣보다 각국 외교부 관료들이 차지하던 자리에 나 같은 NGO 현장 경험자를 뽑은 게 이례적이다. 관료적인 데다 뭘 해도 대륙별 안배가 제일 중요한 유엔이 변화하고 있다는 징후다. 나는 형식적인 자리, 일 안 하는 자리엔 안 간다."

―NGO 출신이 유엔에 어떤 영향을 미칠 수 있나.

"구호현장에 있을 때 유엔에 불만이 많았다. 권위적이라고, 1시간 일하고 10시간 보고서 쓴다고. NGO 입장에서 보면 유엔 사람들 하는 일이 시간 낭비고 거들먹거리는 것처럼 보인다. 유엔이란 조직의 비효율적인 부분을 찾아내고 개혁해볼 생각이다."

―유엔이 한비야의 인생 계획에 들어 있었던 건가.

"물론이다. NGO는 밑바닥 현장에서부터 그림을 그려나가는 일이고, 유엔은 스카이라운지에서 큰 그림을 보며 내려오는 일이다. 자문위원이 아니라도, WFP(유엔세계식량계획) 동아프리카 현장본부장에 지원서를 내려고 했다. 3년간의 자문위원 임기가 끝나면 유엔기구나 다른 기구를 통해 현장으로 갈 계획이다. 이번 일로 우리나라의 위상이 무척 높아졌다는 걸 실감했다. 실제로 구호개발 분야에서 대한민국은 희망의 상징이다. 전쟁 난 나라에 가면 내가 엄청 환대받는다. 대한민국에서 왔기 때문이다. 전쟁을 겪은 나라가 원조국이 되어 도와주러 왔으니 그들에겐 우리가 희망인 거다."

반기문 사무총장의 입김이 작용했을까.

"유엔이 사람을 그런 식으로 뽑지 않는다. 반 총장님이 내 책의 왕팬인 건 맞다.(웃음) 외교부 장관 하실 때 인도네시아 쓰나미 현장에 함께 간 적이 있다. 장관의 비행기에 NGO 일꾼들을 다 태우고 가시더라. 의전상 그런 일은 없지 않나. 실용적이고 매우 합리적으로 일하시는 분이다."

―2009년 '월드비전'을 그만두고, 미국 터프츠대학 플레처스쿨로 유학을 떠났다.

"현장은 본부가 보내온 설계도대로 움직인다. 그런데 현장에서 실현하기 어려운 정책들이 곧잘 내려와 당황할 때가 많다. 징징대기만 할 게 아니라 내가 직접 구호이론을 공부해서 현장에 맞는 정책을 직접 설계해보고 싶었다. 마침 '인도적 지원에 관한 석사과정' 프로그램이 있어 지원했다."

―쉰한 살에 다시 학생이 된 셈이다.

"하늘이 노래지더라.(웃음) 밤새우는 게 다반사고, 매일같이 페이퍼 쓰고 토론 수업 준비하느라 진이 빠졌다. 공부는 정말 재미있었다. 공부에 때가 있다고들 하는데, 공부하고 싶을 때가 공부해야 할 때다."

―9년간 몸담은 월드비전을 그만두었을 때 이런저런 말들이 많았다.

"한비야가 월드비전을 찼다에서 시작해 한비야가 지구를 세 바퀴 반 돈 게 진짜냐, 그때 멘 배낭 무게가 진짜 40㎏이냐, 아프간에서 구호활동한 게 사실이냐까지 다양하더라.(웃음) 자기검열이랄까. 모두 나를 단단하게 해준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월드비전은 햇병아리였던 내게 독수리의 날개를 달아준 고마운 단체다. 아무것도 검증되지 않은 오지 여행가를 가능성 하나만 믿고 긴급구호의 세계로 이끌어준 월드비전을 지금도 사랑한다."

한비야가 다시 길을 떠난다. 이번엔 유엔이다. 쉰세 살의 그녀는“신이 내게 준 선물 중에 아직 풀어보지 않은 것이 많다. 그래서 흥분된다”고 말했다. / 이명원 기자 mwlee@chosun.com
튀어봐야 지구

'바람의 딸'이란 애칭처럼 한비야는 태생이 유목민이다. 서른다섯 살, 부장 승진을 코앞에 두고 회사에 사표를 던졌다. 7년간 세계 오지를 떠돈 뒤 2001년부터는 월드비전의 긴급구호팀장으로 전 세계 분쟁지역을 찾아다녔다. 사이사이 '환승역'에 있을 때에는 중국 유학, 미국 유학을 단행했다. 서울 들어와 있는 날에도 집에 붙어 있지 않는다. 백두대간을 종주하거나, 하다못해 북한산이라도 다녀온다. 삶이 역마살 그 자체다.

―역마살이 당신을 국제구호활동가로 만들었다.

"가슴 뜨거운 일이었다. 불 같은 내 성향과 잘 맞았다. 혼자 하는 일 아니고 여럿이 동참해서 하는 일이라 더욱 즐거웠다."

―뭐든지 뜨거운 걸 좋아하나 보다.

"미지근한 일엔 매력을 못 느낀다. 100℃로 끓어오르며 하는 일, 내 능력의 최대치를 쏟아붓는 일이 좋다."

―한비야의 등장으로 나눔, 기부, 자선이 시대의 트렌드가 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시대와 궁합이 잘 맞았다. 세계 경제 10위권에 오른 한국이 원조받던 나라에서 원조하는 나라가 된 시기였다. 내가 들어선 시기에는 이미 우리 국민이 도와줄 준비가 돼 있었다. 그 안에 있는 숯불에 나는 바람만 살살 지펴주었을 뿐이다."

―자선이 패션(fashion)이 되어가는 느낌도 없지 않다. 돈 잘 버는 연예인들이 자선하지 않으면 지탄받는 분위기다.

"자선은 강요해선 안 된다. 사람마다 타이밍이 있는 거다. 한 달에 5000원이든, 만원이든 마음에서 우러나와서 해야지. 한 번에 10만원 내는 것보다 매달 5000원씩 내는 게 현장에는 훨씬 도움이 된다."

― 연예인이 구호현장에 뜨거운 물이 안 나와 샤워할 수 없다고 불평한 사실이 보도돼 물의를 빚었다.

"구호현장에 처음 왔거나, 평소에 그런 현장을 갈구하지 않았던 사람이라면 충분히 그럴 수 있다. 비난할 일은 아니다."

―구호활동은 매우 거칠고 위험한 일이다.

"위험천만한 일들이 많지만, 난 이상하게도 구호현장에 있을 때 가슴이 뛰고 에너지가 넘친다. 나는 현장에 있을 때 가장 예쁘다. 하하!"

―끔찍한 일들을 많이 목격하지 않나.

"밥이 없어 마지막 숨을 헐떡이고 있던 아기들 모습은 지금도 선연하다. 쓰나미 현장에서는 하루에도 수백 구의 시체와 만났다. 하루아침에 8만명이 목숨을 잃은 파키스탄 대지진 현장에 다녀와서는 얼굴 왼쪽에 마비현상이 와서 두 달간 병가를 냈다. 악몽도 꾼다. 무너진 건물 밑에 내가 들어가 있다. 밖에 사람 기척이 있어 소리를 지르는데 누가 내 다리를 잡고 놓아주지 않는다. 구호팀원들은 사후 반드시 심리치료를 하게 돼 있지만, 돌아와 보고서 쓰고 모금활동 해야 하니 한가하게 병원 갈 시간이 없다."

―언제나 씩씩할 것만 같은 한비야도 악몽을 꾸는가.

"나도 왕창 얻어맞고 링 위에 쓰러져 있는 권투선수가 된 기분일 때가 있다.(웃음) 그래도 '긴급구호' 하면, 우리의 손길이 닿아서 살아 웃게 된 아이들, 맨 처음 간 아프간에서 내 손으로 영양죽을 먹여 살려낸 아기의 얼굴이 떠오른다. 구호활동을 하다 보면 '우리'의 범위가 대한민국, 아시아를 넘어 전 세계로 확장된다. 튀어봐야 지구더라."

나도 루저(loser)였다

'따지고 보면 늦깎이라는 말은 없다. 우리가 다른 사람들에 비해 뒤졌다고 생각되는 것은 우리의 속도와 시간표가 다른 사람들과 다르기 때문이고, 내공의 결과가 나타나지 않는 것은 아직 우리 차례가 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제철에 피는 꽃을 보라. 개나리는 봄에 피고 국화는 가을에 피지 않는가.'〈'중국견문록' 중에서〉

중국엔 두 번이나 가서 공부했다.

"세계일주 마지막 여행국이 중국이었다. 중국을 좀 더 알고 싶더라. 오십이 되기 전에 마스터하려고 했던 5개 국어 중 마지막 언어가 중국어이기도 했다. 마흔 살에 중국어 배워 어디에 쓸 거냐는 사람도 있었지만 여든까지 앞으로 40년 동안은 쓸 수 있으니 남는 장사라고 생각했다.(웃음)"

―1999년 중국서 공부하고 돌아와 펴낸 '중국견문록'은 유학생들 필독서라더라.

"중국이란 나라에 대해 정보가 별로 없을 때다. 거기에 뛰어든 한비야가 어떻게 공부했고, 어떻게 낯선 문화를 즐기며 삽질하고 살았는지 솔직하게 썼더니 위안받고 용기를 얻더라."

―10년 뒤 다시 갔다.

"중국어를 우리말처럼 잘하고 싶었다. 중국은 구호개발 분야의 떠오르는 후원국이라 매우 중요한 나라다. 중국과 서방세계의 완충역할을 한국이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중국에서도 한비야를 아는 사람들이 많다더라.

"작년에 '지도 밖으로 행군하라'가 중국어판으로 나왔다. 나를 '뻬이예제(비야언니)'라고 부르며, 네댓 시간을 기다려 사인을 받고 간다. 나한테 돈 주는 사람도 있다. 구호현장에 갖다주라면서.(웃음)"

―자전에세이 '그건, 사랑이었네'를 보니 대학입시에 떨어져 6년간 백수생활한 대목이 인상적이더라. 한비야 인생에 실패는 없는 줄 알았다.

"20대 초반, 내게만 모든 문이 닫혀 있는 것 같은 시절이 있었다. 학원비·생활비를 스스로 벌어야 해서 네 개의 아르바이트를 했고, 하루에 세 시간 이상 자는 건 사치였다. 밤을 꼬박 새워 공부하고 일하러 나가면 쏟아지는 졸음을 쫓느라 눈 밑에 물파스를 수없이 발랐다."

―'비틀거리지 않는 젊음은 젊음도 아니다'라는 말이 가슴에 와닿더라. '방향이 정해졌다면 가는 길은 아무리 흔들려도 상관없다'고도 했더라. 그런데 자신이 가야 할 길은 어떻게 찾나.

"내 경우, 책이었다. 책을 통해 온갖 인생을 겪어보면서 내가 가야 할 길을 찾았던 것 같다. 용기란, 자신이 원하는 게 무엇인지 분명히 알 때 샘솟는다. 산에 '그냥' 가고 싶은 사람은 그날 비가 오면 산에 가지 않는다. 하지만 산을 정말로 좋아하는 사람은 비가 와도 간다. 진심으로 그 일이 하고 싶은가를 아는 것이 중요하다."

―10대에 책에 재미 붙이는 게 어디 쉬운가.

"고등학교 때 친구와 '1년에 100권 읽기' 내기를 한 적이 있다. 순전히 100권을 채우려고 닥치는 대로 읽다 보니 저절로 재미가 붙더라. 인류의 보고(寶庫)라는 거대한 호수에 빨대를 꽂고 세상의 지혜와 지식, 이야기를 빨아올리는 즐거움이 너무나 컸다. 그래서 10대들 만나면 살살 꼬드긴다. 그들이 좋아할 만한 책을 안겨주고 읽게 한다. '책 권하는 본부'가 생기면 자원해서 본부장 하고 싶다.(웃음)"

이기는 경기보다 멋진 경기

―갈 길을 찾았어도 목적지에 도달하기는 어렵다.

"노력해야지. 단, 조급해할 이유는 없다. 서울부산 가는 방법은 수십 가지다. 언제까지 공부하고 취직해서 결혼해야지 하는 정형화된 인생 시간표에 주눅들 필요 없다. 나야말로 완전 늦깎이 아닌가. 대학은 물론 직장은 남들보다 10년 늦게 갔고, 마흔 살에 구호활동 초보자로 들어갔다."

―절망하는 20대가 많다.

"지금 오르막을 오르니까 침이 마르고 종아리가 당기는 것은 당연하다. 마침내 오르고 나면 시야가 탁 트인다. 인생의 어떤 순간도 쓸데없는 순간은 없다. 씁쓸함, 당혹감, 열등감들이 나중에 다 에너지가 된다. 나는 우리 젊은이들이 숫자로 매겨지는 등수에 자신을 평가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인생은 상대평가에 의한 선발고사가 아니라 절대평가에 의한 자격고사다."

―'지도밖으로 행군하라'가 곧 100만부를 돌파한다.

"구호현장에서의 경험은 하느님이 나만 좋으라고 그런 기회를 준 게 아니라고 생각했다. 내가 긴급구호현장에 들어간 2001년부터 매해 엄청난 재난이 일어났고, 그곳에서 벌어진 감동의 드라마들을 타인과 나누고 싶었다. 책을 내고 나면 하느님께 기도한다. '잘 팔리게 해달라'가 아니라 '세상에 선한 영향을 미치게 해달라'고."

―베스트셀러가 여러 권이라 인세가 엄청나겠다.

"미국 유학은 독자들이 보내준 거나 마찬가지다.(웃음) 책을 낼 때마다 목표를 세운다. '바람의 딸' 인세로는 장학금을 만들었고, '그건, 사랑이었네'의 인세는 '세계시민학교'를 세우는 종자돈으로 썼다."

―성공한 삶이다.

"이기는 경기가 아니라 멋진 경기를 하는 게 내 목표다. 내가 성공한 사람으로 꼽힌다면, 그 이유는 이제까지 사람들이 성공의 잣대로 삼았던 기준이 다양해졌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바람처럼 자유롭게 사는 삶, 자기도 즐겁고 남에게도 도움이 되는 삶이 새로운 기준으로 떠오른 거지. 나는 잘난 여자가 아니다. 한발한발의 힘, 낙숫물이 바위를 뚫는다는 말을 믿고 노력하는 사람이다. 말이 빠르니까 뭐든 덜렁대며 빨리빨리 사는 줄 아는데, 글도 천천히 쓰고, 일도 천천히 밤을 새워서 한다. 다행히도 내겐 몰입의 유전자가 있다."

―몰입이 성공의 비결이란 뜻인가.

"나는 한 가지 일에 몰두하면 잠은 안 자도 되고, 라면만 먹고 살아도 된다. 한정된 시간과 에너지를 한 곳으로 몰아주는 거다. 인생에 아궁이가 다섯 개라고 치자. 장작을 다섯 아궁이에 골고루 나누어 때면 죽도 밥도 안 된다. 한 아궁이에 모두 몰아줘야 가마솥에 물이 끓지 않겠나."

―여자는 결혼하면 한 아궁이에 몰입해서 장작을 땔 수 없다.

"하하! 결혼도 못한 주제에 이런 일도 못하면 안 되니까 몰입하는 거다. 맞다. 남편이란 아궁이, 자식이란 아궁이가 없으니 세계일주도 하고 긴급구호도 했다. 그렇다고 내가 결혼을 포기한 건 아니다. 다정한 남자, 산에 가는 남자, 내가 할 줄 아는 언어 중에 하나만 할 줄 아는 남자면 된다. 나이 불문, 국적불문이다."

월드비전 긴급구호팀장 시절, 아프리카 남동부 나라 말라위에서 구호 활동을 하는 한비야. 그는 구호 현장에서 만난 아이 중 4명을‘엄마’로서 후원하고 있다.“ 에티오피아의 맏딸에게선 6개월에 한 번씩 편지가 와요. 새로 얻은 네팔의 막내아들은 정말 사랑스럽죠.”/ 푸른숲 제공

꾸준히, 그리고 마침내

'사십대 중반의 케냐인 안과의사에게 물었다. 당신은 아주 유명한 의사이면서 왜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이런 험한 곳에서 일하고 있어요? 그러자 이 친구, 어금니가 모두 보일 정도로 활짝 웃으며 말했다. 내가 가지고 있는 기술과 재능을 돈 버는 데만 쓰는 건 너무 아깝잖아요. 무엇보다 이 일이 내 가슴을 몹시 뛰게 하지요.'〈'지도 밖으로 행군하라' 중에서〉

―주말마다 백두대간을 종주한다고 들었다.

"지난해 추석에 시작해 지금 오대산까지 갔다. 하루 12시간씩 걷는다. 내 인생을 키운 건 8할이 산이다. 산은 내게 어떻게 인생을 살아야 하는지 가르쳐준다. 산은 한발한발 올라가는 것이다. 매일 꾸준히 하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지 산은 가르쳐준다. 힘들다힘들다 하면서 오르막을 오르지만 그때 폐활량이 커지고 마침내 시야가 넓어진다."

―산악회 같은 팀을 따라가는 건가.

"대개는 혼자서 간다. 야영을 해야 할 때만 서너 명 그룹을 이뤄서 가고."

―혼자 가면 무섭지 않나.

"만의 하나 사고가 나는 거다. 나머지 9999는 안전한 거지.(웃음) 길눈이 어두워 길을 잃을까 봐 걱정할 뿐이다. 어제도 늦게까지 산행하면서 뱀을 여러 마리 봤는데 머리가 쭈뼛 서긴 하더라."

―산을 가르쳐준 분이 아버지라고 썼다.

"내게 아버지와 산은 동급이다. 중학교 때 돌아가셨으니 아버지와 산 기간이 15년이지만 그 시간만으로도 충분히 아버지의 사랑을 받았고 그 생각과 가치, 재능을 물려받았다. 세계지도를 사주시며 세계를 무대로 살아보라고 한 분도 아버지였다. 아버지 서가에 일본책이 많았는데 다른 나라 말을 할 줄 아는 아버지가 참 멋져보였다. 언어에 대한 관심이 그때 생겼다."

―'바람의 딸'이 되고 싶어하는 여성들이 많다. 여행하고 책을 쓰지만, 한비야만큼 성공한 사람은 아직 못 봤다.

"자기가 오래전부터 하고 싶은 일을 결행한 것 자체로 성공 아닌가. 중요한 건 그 일을 목숨 걸고 하느냐는 것이다. 단지 패션을 따라가거나 흉내내는데 그치면 안 된다. 그리고 나를 운이 엄청 좋은 사람이거나 뭘 해도 잘되는 사람이라고 여기지 않았으면 좋겠다. 남들 다 하는 연애가 나는 안된다. 우리 집? 완전 난장판이다. 마루에 등산장비가 널려 있다. 1번을 잘하면, 못하는 2번이 있는 거다. 무수히 안 됐던 일들이 내게도 많았다."

―유엔에 가면 '비야쌤', '비야언니'라고 부르며 따르던 '한비야 키즈'들을 만나겠다.

"10대부터 내 책을 읽고, 무언가를 결심한 뒤 숱하게 이메일을 보내던 친구들이다. 워싱턴·뉴욕·베이징에서도 그들을 만났다. 내 경험을 딛고 더 높은 곳에 올라가 시야를 바라보겠지. 나와 사회적 유전자를 나눈 동지들이다. 내년 1월부터는 월드비전 있을 때 세운 '세계시민학교'의 교장으로도 활동할 거다. 머릿속에 세계지도를 갖고 사는 아이들, 세상 사람들을 공동운명체이자 친구라고 여기며 세계 문제를 함께 고민하고 해결하려 노력하는 세계시민들을 키워보고 싶다."

―유명세에 비하면 광고는 거의 안 찍더라.

"세계시민학교 세우려고 대기업 광고에 딱 한 번 출연했다. 지금도 라면 광고에서 자동차 광고까지 섭외가 들어오는데 모두 거절한다. 뭔가를 결정할 때 나를 지켜보고 있을 아이들을 언제나 생각한다."

안철수 돌풍도 불던데, '국민언니' 한비야 돌풍을 일으켜볼 생각은 없나.

"농담이지? 내가 제일 못하는 게 조직을 만드는 거다. 제일 잘하는 것만 하고 살기에도 시간이 없다."

―유엔까지 진출했으니 이 길로 죽 가면 '노벨평화상' 후보에도 오르겠다.

"설마! 나는 아이들보다 딱 반발짝 앞서가는 언니, 누나로 충분하다."

―벌써 쉰세 살이다.

"산을 올라갈 때 보이지 않던 꽃이 내려오는 길에 보이는 것처럼 50대에도 분명 하느님이 내게 주신 선물이 있다고 믿는다. 내 인생의 정점은 죽는 순간이 될 거다. 묘비명에 '몽땅 쓰고 가다'로 적고 싶다. 신이 내게 준 재능과 체력과 에너지를 몽땅 쓰고 가고 싶다."

 

[키워드] 월드비전G세대(글로벌 세대)NGO긴급구호세계시민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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