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딜리아니 (Amedeo Modigliani 1884∼1920) 이탈리아 화가·조각가. 토스카나지방의 항구도시 리보르노 출생. 어릴 때부터 건강이 좋지 않아 학업도 제대로 받지 못하고, 1898년경에 아틀리에에 다니며 데생을 배웠다. 다시 건강을 해친 그는 요양을 겸해서 어머니와 함께 이탈리아 각지를 여행하였다. 옛 거장들의 작품을 감상하던 중 나폴리와 피렌체에서 본 14세기 시에나파의 조각가 티노 디 카마이노의 작품에 감동하고 조각에 친근감을 가지게 되었다. 그리고 피렌체와 베네치아의 미술학교에서 공부하였다. 그러나 모딜리아니의 예술이 진정한 의미에서 자란 것은 1906년 이후의 파리생활에서였다. 그 후 그는 에콜 드 파리를 대표하는 화가의 한 사람이 되었다. 파리에서는 처음 몽마르트르에 살면서 근처에 있는 집합아틀리에 <세탁선>에서 P. 피카소·A. 살몽·M. 자코브 등 많은 예술가와 시인들을 만났다. 1909년 루마니아 조각가 C. 브랑쿠시와 알게 되어 많은 영향을 받았다. 그때부터 1913년까지 오로지 조각, 그것도 두부상(頭部像)에 열중하였다. 그러나 폐결핵을 앓는 몸에 조각 일은 고되었고 비용도 많이 들어 단념하였다. 이때의 조각 경험은 그의 그림에 간결한 수법에 의한 풍부한 양감(量感) 표출로 반영되었다. 모딜리아니가 보헤미안적 생활을 보내면서 파리에서 얻은 것은 P. 세잔의 엄격한 조형성과 불필요한 세부를 떼내버리고 대상을 기하학적으로 파악하는 입체주의의 미학이었으며, 아프리카 흑인조각의 다부진 표현력이었다. 그와 함께 토스카나의 조형적 전통으로 이어지는 그의 고전적 기질은 유별나게 유려한 선의 표현에 뚜렷이 나타났다. 그는 인물을 즐겨 그렸고, 풍경이나 정물은 거의 그리지 않았다. 초상화가 많고, 그 다음이 나부상(裸婦像)이다. 단순화되고 데포르메(歪形)된 형태와 정묘한 색조는 그의 시인적 자질과 어울려서 애조를 띤 독특한 화풍을 만들었다.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도 있어 여기 소개한다. 파리의 벨 라시즈 공동 묘지에 있는 모딜리아니의 묘석에는 이탈리아어로 다음과 같이 새겨져 있다. 「아메데오 모딜리아니 화가. 1884년 7월 12일 리보르노(이탈리아)생. 1920년 1월 24일 파리에서 죽다. 이제 바로 영광을 차지하려는 순간에 죽음이 그를 데려가다.」 그 밑에는 만삭의 몸으로 그를 뒤쫓아, 아파트 6층에서 투신 자살한 모딜리아니의 처, 쟌느의 묘비가 나란히 세워져 있다. 「쟌느 에퓨테른느. 1889년 4월 6일생. 1920년 1월 25일 파리에서 죽다. 모든 것을 모딜리아니에게 바친 헌신적인 반려.」 이 묘석의 기록에 의하면, 모딜리아니는 만 34년 6개월 동안 이 세상에 살았고, 그가 죽은 다음날 쟌느도 죽었음을 알 수 있다. 어쨌든 짧은 인생을 살다가 간 화가였다. 그에 관한 이야기는 여러 가지가 있다. 미술사에 나타난 화가 가운데서 가장 미남이었다든가, 최후의 방랑가적인 화가였다든가 하는 이야기들이 그것이다. 그는 가난했고 술을 좋아했으며, 때로는 마약에 중독되기도 했지만, 우수에 찬 파리 생활의 표정들을 그만이 표현할 수 있는, 독특한 필치로 그려낸 금세기의 빼어난 화가라는 전기도 있다. 모딜리아니는 평생 가난과 술과 아편, 그리고 병(결핵)에 시달리는 그야말로 처절한 고독 속에서 살다가 쓰러진 불우한 화가였다. 1884년 이탈리아 리보르노(Livorno)에서 출생한 모딜리아니는 1906년(콕토가 17세의 나이에 조숙한 시인으로 데뷔한 해) 파리로 나와 몽마르트에서 살기 시작했다. 1908년 처음으로 앵데팡당전에 회화 6점을 출품함으로써 정식으로 화가로서의 이름을 세상에 알리게 된다. 그러나 매일매일의 빵을 걱정해야 하는 극도로 궁핍한 생활에 허덕이게 된다. 1909년 콘스탄틴 브랑쿠시를 만나 그의 격려에 힘입어 한 동안 조각을 시도하기도 하고, 세잔느의 대전람회를 보고 깊이 감명을 받아 <거지> <첼로 연주> 같은 작품을 그리기도 한다. 1913년부터는 몽파르나스에 거처를 정하고 키슬링·수틴·피카소 등과 친교를 맺는다. 이 무렵부터 모딜리아니 특유의 스타일을 개발하여 이색적인 작품을 선보이기 시작한다. 1918년에는 라피트 거리의 베르트 베이유(Berthe Weill) 화랑에서 최초의 개인전을 연 뒤, 방종한 생활과 음주·아편 등으로 악화된 결핵을 치료하기 위해 니스로 간다. 1919년 파리로 다시 돌아왔으나 중태여서 병원으로 옮겨져 치료받던 중, 이듬해 1월 25일 36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난다. 몽파르나스 전설을 기술한 전기 작가들 가운데의 한 사람인 프란시스 카르고는 모딜리아니와 쟌느의 비극적인 죽음을 애도하는 추도문 속에서 「결점과 미덕, 불행과 이상적인 것에의 경도, 우아함과 장난기……. 이들 모든 것의 보상으로 모딜리아니는 채워질 수 없는 어떤 공허를 우리들에게 남겨 주었다.」고 매우 함축성 있는 말을 하고 있다. 카르고가 말하는 「공허」란, 사람들의 마음 속에 잠재하는 여느 정감의 틈새 같은 우수를 가리키는 것인지도 모르며, 생명의 위안을 뜻하려는 것인지도 모른다. 모딜리아니의 생애는 이러한 인간적 향수로서의, 뭔지 채워질 수 없는 상징 같은 것이 있었던 것은 어떻든 부인할 수 없으며, 크레스펠의 적절한 지적처럼 모딜리아니에 대해서 관심을 갖는 사람들은,「그들 자신의 청춘을 추억하는데 필요한 구실로서」그의 생애를 유정적으로 재생해 보려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상 몽파르나스의 전설을 대부분 파리쟝들에 의한 금세기적인 미술가의 한 유형을 허구한 것으로도 생각해 볼 수 있겠는데, 모딜리아니처럼 한 이방인으로서 파리에 살았고, 그와 절친한 사이였던 이리아 에렌부르크는 그의 「예술가의 운명」에서 모딜리아니에 관한 전설을 일면의 진실과 대부분의 허위라고 증언하고 있다. 그는 예술만을위해 순교한 공허한 이상의 모형도 아니며, 매우 현세적이고 자신의 행복을 위해 어린애처럼 솔직하고, 때론 응석도 부렸던 젊은이였다고 에렌부르크는 증언한다. 달콤하고 경쾌한 이탈리아어를 애용했고, 고향인 토스카나의 향수를 파리에 있으면서 잊은 적이 없으며, 콰트로첸토의 거장들의 예술을 마음속으로부터 존경했던, 어쩌면 고집스럽도록 순진했던 게 모딜리아니였을는 지도 모른다. 1. 자화상 다른 화가들의 관례와는 달리 모딜리아니는 자화상을 거의 그리지 않았다. 그의 말처럼 '나는 나를 향해 마주보고 있는 살아 있는 인간을 봐야만 일을 할 수 있다.'던 이른바 '만남의 화가'여서 그랬는지도 모른다. 이러한 그가 이 작품처럼 매우 조심스러운 붓 놀림으로 자화상을 그렸다는 건 후대의 사람들을 위해 다행한 일이었다. 이것이 유일한 그의 자화상이며, 1919년 작이다. 화가는 자신의 운명을 예감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모델의 인상으로 보아 1920년 1월 24일(그가 죽은 날)은 멀지 않은 것 같다. '카라 이탈리아 (그리운 이태리)'를 남기고 보잘 것 없는 자선 병원의 침대 위에서 한 많은 이승을 등진다. 2. 유태인 여자 <젊은 여인의 얼굴>과 함께 앙데팡당전에 출품한 작품이지만, 전자와는 현저한 표현의 차이를 보여 주고 있다. 같은 작가의 작품으로 여겨지기 어렵다. 이것은 모딜리아니의 과도기를 말해 준다 하겠다. 처음 파리로 왔을 때 그는 조각가가 되는 게 꿈 이었지만, 단테와 니체, 그리고 다눈치오를 암송하고 15세기(콰트로첸토) 르테상스의 고전을 규범으로 했던 교양인이기도 했다. 여기서의 교양 즉 그의 문학성은, 조각과 회화 사이인 입체와 평면 사이의 미련(未練)의 가교 같은 구실을 한다. 이 작품이 풍겨 주는 표현주의적인 어두운 분위기는 이러한 그의 미련을 바로 반영해 주고 있다. 세기말 의식인 고뇌의 그림자가 역력하다. 고뇌는 젊은 예술가의 특권이었으며, 그 궁극에 멜랑콜리의 존중이 움트고 있다. 3. 젊은 여인의 얼굴 1906년 21세 때 파리로 진출한 모딜리니아가 23세 때 그린 작품이며, 그로서는 파리 정착 이후 첫 번째의 공식 작품이 되는 셈이다. 몽마르트르를 중심으로 굶주리고 외로운 유랑기를 2년 동안 보내면서 그는 자신 속에 잠재하는 영상을 기웃거리고 있었다. 피카소의 변모를 싫어했고 미래파의 권유를 뿌리치면서 그는 자신의 독자성만을 모색하고 있었다. 1907년 살롱 도똔느 에서 개최된 세잔의 대회고전은 그에게 큰 감명을 준다. 이 첫 번째 공식 작품은 그 다음해인 1908년에 앙데팡당전에 출품하게 된다. 아직 모딜리니아의 유연한 데포르마 숑인 생(生)의 곡선(曲線)은 보이지 않지만, 그의 경직된 지적(知的)인 성찰(省察)로서의 주제 파악이 역력하다. 세잔과 표현주의의 영향으로 짐작된다. 4. 頭像 <카리아티드>의 에스키스와 함께 이 조각 작품은 1912~14년 사이에 제작된 것이다. 당시 모딜리아니는 조각가가 되는게 꿈이었고, 오른쪽의 두상은 1912년 살롱 도똔느에 출품했던 일곱 점의 석상 가운데의 하나로 지목되고 있다. 그는 브랑쿠지와 립시즈로부터 조각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다. 그러나 육체적 피로와 정신적인 긴장은 극에 달했었다고 한다. 폐가 나쁜 그는 조각에 대한 열의를 저버리지 못했으며, 죽는 날까지 언제인가는 유명한 조각가가 되겠다고 마음 먹고 있었다. 눈을 감고 있는 모습이 인상적이며, 수직으로 길쭉한 코의 선맥과 원통형의 목줄기가 신선한 조형미를 유발시켜 주고 있다. 어딘지 먼 시대로의 환상이 맥박처럼 들려오는 이 두상은, 당시의 파리 미술가들이 심취하기 시작했던 아프리카의 원생 미술인 그 충실감과 데포르마숑을 연상시킨다. 5. 젊은 하녀 파리라는 도회지로 나온 시골 처녀.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은 하녀라는 직업이며, 이런한 유형은 동. 서가 같다. 하루 종일 허름한 옷차림으로 근면하게 일 해야만 되는게 이들의 인생이었다. 특히 유럽인들의 사람 씀씀이는 고약할 정도로 가차 없고 지독하다. 그러나, 그들은 이러한 일들, 어린애를 돌보고 주부의 잔심부름을 도맡고 하는 것을 묵묵히 감당해 낸다. 이들을 프랑스 말로 본느라고 부른다. 인생의 뒤안길에서 살고 있는 애환의 표정들 모딜리아니는 이러한 이웃을 사랑했고 그가 즐겨 그린 서민의 한 표정을 그녀는 대표하고 있다. 이 모델은 카뉴슐멜 출신이며, 마리훼레라는 이름의 처녀였다. 그녀의 아버지는 농부였으며, 이 젊은 처녀의 삶을 모딜리아니는 공감했고 그것을 표현하고 있다. 6. 첼리스트 한눈에 보아서 세잔의 영향이 두드러진다. 세잔의 <카드놀이를 하는 사람들>의 왼쪽 인물을 그대로 모사한 듯한 착각마저 일게 한다. 다만 그려진 첼로가 화면의 아래 부분을 차지하고 있어, 그것을 연주하는 인물의 내면의 깊이를 암유하는 듯도 싶다. 여기서 우리는 어떤 음조를 듣는다는 것인가. 역시 전기한 멜랑콜리의 읊음이며, 짙은 인간애의 색조라고 해야겠다. 이 작품의 뒷면엔 브랑쿠지의 초상이 그려져 있다. 모딜리아니는 브랑쿠지로부터 조각에 관한 새로운 시각을 일깨웠으며, 그를 매우 존경했다고 한다. 그리고 이 첼리스트의 면모가 뒷면에 그린 브랑쿠지(정면으로 된 크로키)의 옆 모습과 불가사의하게도 일치하고 있다. 미술은 문화적 유산이며, 세잔의 유산을 모딜리아니가 상속한다는 역사를 이 작품은 증명해 주고 있다. 7. 카리아티드 그리스의 건축 용어로 여상(女像)으로 된 석주를 뜻한다. 그리스어로는 '카리아티데스'라고도 한다. 에렉티 옹의 여상주가 역사적으로 남아 있는데 통상적으로 착의의 여상으로 되어 있으나, 모딜리아니는 나상을 다루고 있다. 이 작품은 캔버스 위에 유채로 된 에스키스를 보여 주고 있지만 석회암으로 된 조각품도 따로 있다. 카리아티데스는 '아틀란티데스(남상주,男像柱)'의 대응의 관계에 있다. 이러한 여상석주는 전설적인 유래가 있다. '카류아이'라는 그리스 마을이 페르샤와 전쟁했을 때 이적 행위를 범했다고 해서 그 마을의 남자는 모두 죽이고 여자들은 노예가 되어 이처럼 공공 건물의 엔태블러처를 떠받치는 중벌을 받게 되었다는 이야기다. 모딜리아니는 이러한 여체상을 각 분절의 특성을 살려서 이처럼 조형적으로 재구성해 보이고 있다. 8. 디에고 리베라의 초상 현재 상파울루 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는 이 작품은 본격적인 유화는 아니며 두꺼운 종이 위에 그려진 초벌 그림 형식의 작품이다. 아직 완성되지 못한 작품이지만 리베라의 인물이 매우 인상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누르퉁퉁한 살갗과 몽유병 환자인 리베라는 어렸을 때 멕시코의 열병 때문이었다고 한다. 그는 사회의 도그머를 극도로 혐오했던 맥시코의 화가였다. 그는 '파리의 예술도 빈사 상태에 있다. 자바타의 농민(멕시코의 혁명조)들은 기계를 본 적이 없지만 포앙카레(당시 프랑스 수상)보다 백배로 현대적이다. 나는 믿고 있지만 우리들의 그림을 보여 주면 멕시코의 농민들은 반드시 이해해 줄 것이다. 고딕 교회나 아즈테카 신전은 누가 건설했는가. 만인이다. 백성들이다. 농민들이 건설한 거지 뭔가.' 9. 파블로 피카소의 초상 이 작품도 리베라의 초상처럼 두꺼운 종이 위에 그려진 습작풍의 작품이다. 이것은 리베라를 그린 다음해의 작품이며 모딜리 아니의 독자적인 양식이 극도로 제약된 형식을 보여 주고 있다. 우수에 찬 조용한 서민들의 표정과는 달리 피카소의 눈은 짙은 눈동자가 끼워져 있다. 모딜리아니는 앙드레 살몽과 피카소를 도움의 카페에서 자주 만났으며, '피카소는 우리들보다 언제나 2년을 앞서 있었다.'고 그 재기를 찬양하기도 했다. 모딜리아니의 피카소는 여기서처럼 그시스 신화의 목신처럼 그려져 있으며, 그처럼 급진적인 변모를 싫어했던 그의 중용적이고 고전적인 입장이 이처럼 피카소를 어떤 어두운 환영처럼 느끼게 했던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10. 퐁파두르 부인의 초상 이 퐁파두르 부인은 본인을 모델로 해서 그린 게 아니라 모딜리아니와 동거했던 (1914~16) 비아트리스를 대용해서 그린 것이다. 영국 여성인 비아트리스가 몽파르나스에 나타난 건 제1차 대전이 발발하던 해 였으며, 사람들은 그녀를 런던의 시인이라고 불렀다. 결코 미인은 아니었지만 모딜리아니의 진가를 발견하고 그의 천재성을 개화시킨 숨은 공로자이다. 모딜리아니보다 5살이나 연상인 그녀는 그의 사기를 잘 참아 주었다고 한다. 그가 광분하면 '모딜리아니, 명심해요, 당신은 신사라는 걸. 당신의 어머니는 상류 사회의 부인이라는 것을 .'하며 타일렀다는 것이며, 이 말은 주문처럼 모딜리아니의 광기를 가라앉혔다고 한다. 그럴 듯하게 모자를 쓰고 마치 귀족처럼 차린 이 그림을 퐁파두르 부인이라고 명명한 것은 이들의 사랑이 무르익을 무렵의 정경을 암시하는 것도 같다. 11. 부부 모딜리아니의 전(全)작품은 언제나 한 인물의 초상화이고 한 화면에 두 인물이 등장하는 건 <립시즈 부처>의 작품말고는 이것이 나머지 예이다. 또한 그의 모티브는 항상 서민적인 애환이 조용하게 표정짓는 삶의 모습들인데, 여기서처럼 정장한 한 쌍의 부르조아가 등장하는 경우도 이것이 마지막 예이다. 앞에 적은 조각상인 길쭉한 수직선과 견주어 보면 매우 흥미롭다. 당시의 그는 조각을 위한 에스키스를 무수히 제작하고 있었으며 거기서 두드러지던 징후는 입체파적인 조형 감각이었다. 화면을 좌우 대칭으로 구성한 다음 각기의 인물의 중앙선을 관통한 선상에서, 가령 남자의 오른쪽 뺨 위의 원형의 선과 여자의 그것이 대응한다는 게 여기서의 예이다. 따라서 이러한 선묘는 불필요한 색채의 텐션(tension)을 효과적으로 제약하고 있으며, 동시에 선맥의 제어를 자율적으로 살리고 있다. 12. 모이스 키슬링의 肖像 1910년대의 파리는 '에콜 드 파리'의 전성기였다. 에콜 드 파리는 프랑스인이 아닌 미술가들이 파리로 모여들어서 각자의 자율성을 유감없이 발휘하던 화가들의 모임을 이름한다. 고향을 떠나 온 미술가들이 객지인 파리에서 오직 자신들의 예술적 잠재만을 밑천삼아 그 내용을 신장하던 그룹을 뜻한다. 따라서 에콜 드 파리는 하나의 유파로서의 미술 표지를 가르키는 것은 아니다. 서로 미술에 대한 견해라든가 주장은 다른 것이었지만 고향을 등졌다는 이방 인이라는 데서 이들은 하나의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었다. 이를테면 노스텔지어의 이들은 숙명으로 했었다는 이야기이다. 키슬링은 폴란드에서 온 유태인이며, 모딜리아니는 이탈리아에서 온 유태인이었다. 이들은 그래서 모태의 혈연처럼 가까운 사이였다. 13. 막스 쟈콥의 초상 막스 쟈콥은 브르타뉴 출신의 시인이자 미술 비평가로 당시의 파리 화단을 형성했던 주요 인물의 하나이다. 그도 모딜리아니의 예술을 사랑햇으며 폴 기욤이라는 화상을 그에게 소개하기도 했다. 그러나 즈보르스키처럼 관대한 이해자는 아니었으며, 얼마 간 이재(理財)에 바른 시인이었다고도 전해지고 있다. 모딜리아니가 비아트리스와 동거하고 있을 때 자주 찾아 왔던 쟈콥은 모딜리아니의 무절제한 생활을 염려했고 그래서 제법한 화상을 그에게 소개하여 건실한 작가 생활을 영위하도록 권고한 것도 쟈콥이었다고 한다. 모딜리아니는 이럴 때마다, '농담 말게' 하면서 이 연상의 이해자를 어렵게 만드는 게 예사였다고 한다. 쟈콥은 비아트리스를 모딜리아니로부터 떼어 놓으려 했었기 때문이었다. 이 작품에서 쟈콥은 40이 넘은 대머리지만 모델의 지성과 감수성이 부드러운 표현으로 묘사되어 있다. 14. 빌호르스키의 초상 이 작품의 모델이 취하고 있는 포즈는 사람이 마음을 가다듬고 앉을 때 보이는 그러한 유형을 보여주고 있다. 따라서 이러한 자세를 회화로 표현할 때 자칫 굳어진 포즈로 재현될 우려가 있다. 가령 표현되지 않는 리얼리티는 리얼리티가 아니라는 말이 있는 것처럼, 사상은 그 자체로서 드러나는 게 아니라는 것을 이 작품은 회화적으로 증명해 주고 있는 좋은 예가 되고 있다는 뜻이다. 미술은 그것을 창조하는 미술가의 마음의 굴절을 통해서 나타나며 그래서 성격적인 것이 된다. 미술이 먼저 있고 다음으로 사람이 그것을 본뜨는 게 아니라 사람이 먼저 있고 다음으로 미술이 그 사람을 본뜬다는 이야기이다. 이 작품은 이러한 퍼스낼리티로서의 모딜리아니의 표지가 빌호르스키에 의해서 여과된 변형이라고 해야겠다. 15. 모자를 쓴 여자 미남자였던 모딜리아니는 몽마르트르와 몽파르나스의 처녀들의 가슴을 설레 이게 했었다는 것은 그의 전기의 어디서나 발견된다. 몽마르트르의 라팽 아질의 카페에서 그리고 망파르나스의 로톤드나 도움의 카페 같은 데 앉아 있는 모딜리아니의 모습을 처녀들은 빠져들 듯이 바라보는 것이었다 한다. 이 작품의 모델인 로롯트라고 불렸던 파리잔느는 얼마간 바람기들은 용모를 띠고 있으며, 양가집의 처녀 같지는 않다. 필경 술집 같은 데서 활달하지만 내던지듯 인생을 살아가는 여성이었는지도 모른다. 모딜리아니의 여성상인 깊고 우수에 찬 여느 침정으로서의 표정은 이 모델의 경우 어디에도 없다. 다만 로롯트의 왼쪽에 그려진 꽃은 모딜리아니가 마음먹고 정물화를 그렸다면 훌륭한 작품을 그렸으리라는 아쉬움을 남겨 주게 한다. |
출처 : 표주박의 오늘이 마지막이듯
글쓴이 : 표주박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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