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의 詩, 나의 삶
그리움으로 짓는 詩, 버리고 사는 삶
碧波 김철진(시인, 극작가)
나의 詩
하늘도
가장 아름답고 고울 때의
그 빛과
江도
가장 고요하고 맑을 때의
그 소리와
山도
가장 싱그럽고 푸를 때의
그 내음과
빛과 소리와 내음의
가장 잘 어우러진 交響詩
그 線律이고 싶다
나의 詩는
나는 의성김씨 삼백여 년 세거지인 청정 봉화, 거기서도 영남 유림(儒林)의 요람이라는 바래미[경북 봉화군 봉화읍 해저1리]에서 태어나 국민학교를 졸업하고 대구로 중학교에 갈 때까지 12년간을 고향에서 살았다. 삼대 독자 집안에서 부모님 결혼 후 십여 년을 기다려 태어난 손자라서 손끝 하나 까딱하지 않고 엄하셨던 조부님 밑에서 공부만 하며 어린 시절을 보냈다.
내가 처음으로 접한 현대시는 대구로 가서 중학교 1학년 때 옆방에서 고시 준비를 하던 최명호ㅡ후에 고시 패스했다는 소식만 들음ㅡ 씨가 가르쳐 준 김소월의 '진달래꽃'이었다. 그리고 중학교 2학년 때 대구중학교 교지에 '무궁화'가 실린 것이 내가 처음으로 책에 발표한 시인 셈이다. 그래서인지 나는 시를 좋아하게 되었고, 중학교 때 이미 시조 수백 여 수를 암송했었다. 물론 조부님 친구분들이 집에 모여 시회를 열며 한시를 지어 읊고 서로 평하는 자리를 수없이 목격한 것도 내게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러다가 특차로 경대사대부고에 입학하여 시인이던 이재철ㅡ단국대 교수로 정년퇴직, '아동문학평론' 주간ㅡ 국어 선생님을 만나면서부터 본격적으로 시를 짓기 시작해서 매년 교지 '군성'에 작품을 발표하고 백일장에 나가 상도 타고 했었다. 이때 지금의 소설가 정소성은 동기로, 변세화 시인은 한 해 선배로 만났었다. 그런데 고등학교 2학년 가을, 아버지 사업이 망하면서 빚청산하느라 아버지는 대구와 고향의 집이며 전답을 다 팔아야 했다. 내 목표 대학은 서울 상대였는데 공부하려고 책상 앞에 앉으면 할배는 "니 애비가 세전지재물 다 없애 버렸다.'며 화를 내셔서 이때부터 나는 그 말씀 듣기 싫어 밖으로 나돌기 시작했다.
그래서 고등학교 3학년 때인 1962년, 대구여고 교장으로 계시던 청마 유치환 선생님을 찾아뵙고 취지를 말씀 드린 후, 대구 시내 남녀 고등학교 문예반 학생들을 모아 '독도문학동인회'를 조직하고 회장을 맡아 YMCA 강당에서 문학의 밤을 개최하였는데, 기성 문인들 문학의 밤보다 더 성황을 이루었다.
그때의 '독도' 동인들을 기억나는 대로 적어 보면, 나와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소설로 등단한 이수남,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시조로 등단한 김종윤, 중앙일보 '계간 미술' 총괄 국장을 지낸 이준교, 교장으로 퇴임한 유종환과 이돈모, 사대부고 동기인 홍상준, 소식을 모르는 고 박두진 시인의 아들인 계성고 박영혁, 대구공고 박춘근과 신승부, 경북여고 이명자, 대구여고 백성희, 신명여고의 김영숙과 노초미와 김미희자, 그리고 당시 대건고 1학년이던 고 이재행 등이었다. 이러히 전체 고교생들로 구성된 문학동인회는 대구에서는 처음이 아니었던가 싶다.
이러한 문학 활동 덕분에 남 일년 공부하면 반년만 공부해도 들어갈 수 있다고 자만했던 나는 서울상대에 떨어지고, 지금의 영남대학 전신인 청구대학 국문과 4년 전면장학생으로 들어갔으나 사흘 정도 나가다가 그만두고 말았다. 그해 조부께서 돌아가시고, 다음해에는 열차비만 간신히 마련하여 부모님과 우리 사형제 가족 모두는 무작정 서울로 올라갔다. 방 한 칸 얻을 돈이 없는 상황에서 공부를 한다는 것은 무리였지만 포기할 수 없어 계속 서울상대에 응시했으나 실패를 거듭했다. 그래서 그때까지 제대로 알지도 못 했던 동국대학이 단과대학 수석 합격자는 4년 전면장학생으로 뽑는다는 것을 알고 원서 살 돈도 없던 내게 원서를 사 보내 준 친구 덕에 동국대학교 문리대 연극영화학과에 원서를 내고 시험을 치렀다. 다행히 문리대 수석으로 합격하게 되어 대학 생활을 할 수 있게 되었으나, 연극영화학과는 내 예상과 달라 공부는 거의 국문과에 가서 하게 되었다. 그런데 내가 2년이나 늦게 입학했으니 동기들은 3학년에 다니고 있었다.
이때 동국대에는 국문과에 미당 서정주 선생님, 평론가 조연현 교수님, 두시 연구의 이병주 교수님, 고전문학의 김기동 교수님, 다시 동대로 오신 무애 양주동 박사님, 시인 장호 선생님(본명 김장호), 연영과에 극작가 동랑 유치진 선생님, 연출가 이해랑 교수님, 연극사 장한기 교수님, 영화 유현목 감독님 등등 쟁쟁한 분들이 많이 계셨었다. 아무튼 이 때 나는 지금 내가 알고 지내는 많은 유명한 시인, 소설가들을 만날 수 있었다. 60년대 초중반 동대에는 정광수, 문효치, 강희근, 고 유우희, 김남웅, 조정래, 하덕조, 박제천, 홍신선, 고 정의홍, 한용환, 김숙현, 고 송유하(본명 영섭), 김장동, 문인수, 마종하, 김규화, 홍희표, 이계홍, 문정희, 이상문 등이 선후배 동료로 재학했었다. 재학 중 1966년 서울신문 신춘문예에 '앤경', 1967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어항 밖의 금붕어'란 희곡을 출품하였으나 동랑 유치진 선생님 심사 최종심에서 두 번 다 탈락하였다. 그때 동랑 선생님께서 '현대문학' 추천으로 등단하라는 말씀을 하셨는데 나는 오기가 나서 경쟁을 통한 신춘문예를 하겠다고 말씀 드렸었다.
그러다가 3학년 때 총학생회장에 출마하면서 문학과 잠시 멀어졌는데, 이 때 절친하게 지내던 고 송유하 시인은 '글 쓰는 친구가 정치를 하려 한다.'며 '끝날 때까지 말을 하지 않겠다.' 했고, 고 정의홍 시인은 내 정견 발표문을 시적으로 써 줬었고, 하덕조 시인은 실질적으로 운동을 해 주었는데 낙선으로 끝나고, 비로소 '정치는 양심을 가지고는 할 것이 못 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학생 회장 출마로 성적이 떨어져 그후 4학년 한 학기를 남겨 두고 등록금이 없어 학교를 휴학하고 있다가 군 복무 3년을 마치고 돌아와 다시 복학을 하게 되었고, 그때 희곡 '어항 밖의 금붕어'로 동대신문사 학술상 본상을 수상하게 되었다.
그런데 돌아와 보니 함께 문학 공부를 하던 친구들은 이미 모두 등단을 하였고 나 혼자만 아무것도 가진 것 없는 빈 손이었다. 내 인생에서 제일 안타까운 것은 이때 부친과의 불화로 내 대학 시절의 시 작품을 모아 둔 창작 노트와 모든 서적들을 다 불살라 버린 일이었다. 다시는 글을 쓰지 않겠다고 다짐한 때문이었다. 그래서 대학 시절에 지은 시는 내가 암송하고 있던 '海心'이란 시 한 수밖에 없다. 처음 80여 행이었던 것이 퇴고 끝에 제목 포함 25자만 남았는데, 이 시는 바로 무엇이든 시종여일하게 내 길을 가겠다는 나의 삶을 노래한 시였다.
뭍이야
내
품에
잠길 때까지
내사야
한
사랑
너울을 치리라
한번 문학을 포기했다가 이 시 그대로 결국에는 글을 버리지 못하여 늦게서야 다시 신춘문예에 도전하게 되었고, 1975년에 중앙일보, 1979년에 서울신문 신춘문예를 통하여 희곡으로 문단에 나오게 되었다. 희곡 작품은 용산에 있던 민중극단과 명동의 설파다방, 장충동의 국립극장 소극장 등에서 공연이 되었으나, 내게는 자료 사진 한 장 없으니 지금도 안타까운 생각이 든다.
그런데 연극영화학과 졸업장으로는 취직이 되지 않았다. 그래서 시험을 친 곳이 민중서관과 태양출판사였다. 다행히 두 군데 다 톱이 되었는데, 대일학원과 경일학원 계열의 태양출판사로 가서 직장 생활을 하게 되었다. 거기서 서울신문 신춘문예에 당선되던 1979년 서른다섯 나이에 지금의 아내인 광산인 김모임을 만나 미당 서정주 선생님 주례로 결혼을 하였다. 그러다 1980년 출판사가 문을 닫아 고 송유하 시인의 소개로 시인인 강민 선배님이 중역으로 있던 금성출판사에 가서 고 류제하 시조시인과 조영훈 극작가, 성귀영 시인 등과 문학전집을 만들다가 한 반 년 근무한 후 퇴사했다. 1981년 동아출판사에서 국어사전 집필자를 모집한다기에 응시하였는데, 이때도 운 좋게 210여 명 응시자 중에서 3명 뽑는데 톱으로 입사하게 되었다. 생각해 보면 서울상대 떨어진 것을 제외하면 시험운은 좋았던 것 같다. 여기서 고 이재녕, 박민수, 이상국 시인과 오영빈, 김승규, 김남환 시조시인 등을 만나게 되었다.
동아출판사에서 근무하던 중 1985년 동아출판사가 두산그룹으로 넘어가고, 거기서 국어부장, 편집기획부장 등을 역임하면서 만년 부장으로 있다가 1998년 5월에 퇴직할 때까지의 기간 동안에는 '현대문학'(1981.7. 통권 319호)에 희곡 '사랑놀이'와 미당 서정주 선생님이 발행인이고 김윤성 시인이 주간으로 있던 '문학정신'(1988.7. 제22호)에 '아침나비'와 '얼굴'이라는 시 두 편 발표한 것을 제외하고는 대외적인 문학 활동을 거의 하지 않았다. 다만 '나래시조', '시조문예' '시세계', '문향' 등의 동인지에만 작품들을 발표했을 뿐인데, 그만큼 문학과 멀어져 생활인으로 살았다는 얘기가 되겠다. 이 기간 중 서정춘 시인이 펴낸 23인 시집인 '시인의 돌'(1989.9)에 참여하고, 등단 15년이 지나서야 서울대 권영민 교수의 해설을 받아 개인 첫 시집인 '아랑아 옷 벗어라'(1991)를 상재한 것이 수확이라면 가장 큰 수확이었다.
출판사를 그만두고 나와 그 해에 제2시집 '어메'(1998)를 상재하였고, 1999년에는 서울 시흥에 '예술촌'이란 토속 음식점을 자리 옮겨 열고 이창년, 엄한정, 송상욱, 변세화, 박후자 시인 등과 시낭송회도 열고, 직장에 매인 몸이라 못 했던 해외 여행도 하면서 문예지에 작품도 발표하는 등 본격적으로 다시 문학 활동을 시작하였다. 그러던 중 청탁받은 인터뷰 기사를 쓰기 위해 2000년 9월 1일 소설가 김기억 선생과 엄한정 시인과 함께 미당 서정주 선생님을 찾아뵙고 술을 마시며 문학과 인생에 대한 얘기를 나누고, 선생님께 청하여 사진 몇 장을 찍고 돌아왔는데 다음달에 사모님이 세상을 떠나시고 뒤따라 눈 펄펄 내리던 크리스마스 이브에 선생님마져 이승을 떠나시고 말아, 그때 선생님과 찍은 사진이 아마 선생님의 마지막 모습이 아닐까 싶다. 시방도 그 사진을 방에 걸어두고 바라보며 '자네 유명해지지 말게'라시던 선생님의 마음과 그 인연을 생각하곤 한다.
그런데 그 다음 해인 2001년 4월에 15년간 중풍으로 누워 계시던 아배까지 돌아가셔서 그때 입은 내 마음의 상처는 매우 컸다. 그래서 '다음'에 인터넷 문학 카페 '예술촌'(http://cafe.daum.net/yesulchon)을 열었고 사이버 주부대학에서 시창작 강의를 하였다. 가을에는 고향인 경북 봉화에 내려와 시화전을 열었는데, 우연히 춘양목으로 지은 70여 년 된 고가가 매물로 나온 것을 알고 매입하여 수리한 다음, 서울에 집과 가족을 둔 채 모든 것을 다 버리고 그 해 12월 30일에 내려와 고향 '바래미' 가까운 읍내에서 지금까지 밥 지어 먹으며 토굴의 스님처럼 살고 있다.
그동안 서울 금천구에서 박일동, 소한진, 김기억, 서복희, 박연복, 심의표, 박후자, 박영수, 이길수, 박세희, 박서림, 이수원, 김시림, 이중삼, 한영미, 손영단 등 30여 명 문인들이 모여 2004년 5월 '금천문인협회'를 창립, 초대 회장을 지냈고, 봉화에서는 매년 축제 때 전시회를 열다가 봉화우체국 장창목 국장이 전국 우체국 최초로 봉화우체국에 '우체국 작은 갤러리'를 만들어 2005년 8월 1일 오픈 기념 '예술촌 회원전'을 시작한 이래, 지금까지 계속 작품을 전시하고 있다.
나는 늘 시를 짓겠다는 사람들이나 등단한 젊은 시인들을 만나면 하는 말이 있다. '글 짓기 전에 먼저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9년 동안 중앙 문예지를 통해 등단 시킨 시인이 다섯 손가락 안이고, 소개시킨 시인 수필가가 두세 명뿐이다. 시대가 시대라서 그런지 요즘은 진득하게 기다릴 줄 모르고, 복부인 부동산 사고 팔 듯 문예지와 야합하여 등단하고는 명함에 '시인' 글자 두 자 새기기 바쁜 세상이 되어 버려, 실력부터 기르라고 등단 시키지 않으면 그냥 떠나서 바로 등단하여 등단 문예지 들고 찾아와 보란 듯이 내미니, 시보다 시인이 많다는 소리가 나올 법도 하다. 뿐만 아니라, 문단에서도 정치하느라 바쁜 사람들 많고, 속소위 유명하신 분들도 문예지마다 여기저기 고문이니 편집위원이니 하며 이름 석 자 마구 올리고 있으니, 참다운 선비 정신을 지닌 문인들이 참으로 그립다.
이제 호당 김순아 시인이 자신의 눈으로 나를 보며 지은 시 한 수가 바로 현재의 내 삶을 아주 잘 표현한 것 같아 이 시로 이 글을 끝맺는다.
가슴 울리는 그리움의 시인詩人
ㅡ 벽파碧波 김철진 시인을 생각하며
세상에 외롭지 않은 삶 어디 있으랴
이 세상에서 나 혼자만 외롭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경북 봉화군 봉화읍 면솟골 예술촌으로 가 보라
굽이굽이 산모롱이 돌아 춘양목 빛바랜 고가에 가면
늘 그리움에 젖어 사는 수염 허연 시인의
외로운 기침소리 들려올 것이다
그리워 술을 마시고 그리워 거푸 담배에 불을 붙이며
그리워 시를 쓰다 그대로 한 편의 시가 되는 시인이
생애 절반을 온통 그리움으로 보내고 있을 것이다
가슴속을 철사처럼 파고드는 그리움 견디며
홀로 아침을 맞고
저녁이 오면 홀로 등불을 켜며
쓸쓸한 아침 달 저 혼자 산 넘어가듯 그렇게
그리움 마시며 살아가고 있을 것이다
이 세상에서 오직 혼자만 외롭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면솟골 예술촌 촌장 벽파碧波 시인을 찾아가 보라
날마다 책상다리를 하고 허리 꼿꼿이 펴고 앉아
행여 누구 오는가 기척 없는 빈 하늘만 바라보다가
처마 끝 외로운 풍경 되어 가슴 울리고 있을 것이다
그대 외로운 영혼이거든 벽파碧波 시인을 만나 보라
일생에 한번쯤은 저 풍경처럼 아름답게 울고 가리니
<해동문학>(2009.가을. 통권 6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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